74화
11월 첫째 주는 번갯불에 콩이라도 볶아 먹듯 빠르게 지나갔다. 바람이 더 차가워지고 서리 내리는 날이 많아질수록 초조함은 더했다.
‘그렇다고 할 일을 건너뛸 순 없지. 시급한 건 주민들이 얼른 정착하는 일이지.’
자기 암시를 삼키며 네마냐는 오늘의 마지막 서류를 책상 위에 살포시 올려 두고 그대로 침상 위에 누웠다.
“자, 그럼……. 적어도 식량은 충분하군.”
지금부턴 주변의 피난민을 불러 모아 다르빌의 체급을 키우는 일이 남아 있었다.
“실례할게~”
열린 문 사이로 장난하듯 흘러드는 능청스러운 인사말. 언제나 그렇듯 하라드였다.
“뭐야, 왜? 여기 있는 동안엔 마법학 공부는 안 한다고 했는데. 들어와.”
네마냐가 손짓하자 하라드는 실실거리는 웃음과 함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공부 말고. 다르빌 이야기나 좀 하자고. 내가 누구랑 같이 왔는지도 좀 보고.”
“누구랑?”
반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바깥쪽을 보니 다른 누군가의 실루엣이 있었다.
“아, 이런. 손님이 있었으면 그것부터 얘기해야지. 들어오시죠!”
급하게 자세를 고치고 짐을 모조리 책상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소리가 시끄럽지만, 사각지대로 떨어뜨려 보기엔 한결 깨끗했다. 머뭇거리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런, 미리 알려 드리고 방문을 할 걸 그랬습니다, 껄껄. 시장 구르간입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어차피 저 녀석 온종일 치우지도 않아서 내가 치우고 말 텐데.”
구르간 시장과 미하일까지 아침 안개를 뚫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이 왔으니 마냥 앉아 있을 순 없지.
“어떻게, 식사는 하셨는지.”
“간단하게 귀리죽으로 때웠답니다.”
“저런, 식량 공급도 이젠 충분하니 빵으로 대신하셔도 될 텐데.”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구르간은 포도주병을 든 채 담요를 깔아 놓은 한쪽에 올라섰다. 미하일은 재빨리 화롯가에 올려놓은 주전자를 들고 와 잔을 채웠다.
“그 짧은 시간에 방이 많이 달라졌군요? 담요에 좌식 탁상이라. 오, 근데 이거…….”
담요에 앉아 바닥을 이리저리 만져 보던 구르간은 기분이 괜찮은 모양이었다.
“바닥이 따뜻하군요.”
“네. 화로만으론 숨이 답답해서 차라리 바닥을 덥혔죠. 마침 영지에서 온갖 마정석이 다 나오니까 이 녀석한테 간단한 마법진을 하나 받아 내서.”
“아주 공짜로 부려 먹는 데는 이골이 났죠. 이거 반드시 내가 청구하고 만다.”
두 손을 들어 보이는 하라드의 푸념에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바닥 난방에 익숙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차원 전이를 했다고 해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피곤이 극에 달하자 억지로 하라드를 쥐어짜서 기어코 만들어 냈다.
“음, 바닥 난방이라. 괜찮은 생각이군요. 안 그래도 요즘 외풍이 심해서 걱정이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백작의 처소라고 보기엔 허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일하러 나온 거니까요. 시종도 있어 봐야 자원만 축나고. 이 정도면 됩니다. 그리고 정 안되면 이 친구, 재무관 자작님을 시키면 되죠.”
“영지의 재무관이 허드렛일이나 하고, 참.”
미하일과 하라드는 질색을 하면서도 익숙한 손길로 탁상을 치우고 담요를 가져와 시장에게 주었다. 이제 다들 이야길 나눌 수 있을 만큼 정돈됐다. 책상에서 일어나 세 사람이 모여 앉은 앞으로 다가갔다.
“자, 그럼 오신 용건을 좀 들어 보죠. 볼 것도 없이 아마 도시와 관련된 얘기겠죠. 이제는 거의 끝났던가요?”
도시의 방어를 빠르게 정비하는 건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이었다. 벌써 소식을 들은 피난민 일부가 식량과 집을 받아 정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근처 위험한 곳에서 고블린의 위협을 받는 사람은 더 많았다.
“얼른 도시와 주변 마을, 읍성에 주민을 정착시켜야겠습니다. 우리로선 재건과 함께 성장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전쟁이 당장 내일이라도 시작될 마당이니까요.”
도시가 최소한 생존하려면 얼른 결계를 완성하고 도시 방어에 사용할 인적, 물적 자원을 도시의 성장 분야로 돌려야 한다. 주민을 모아 민회를 구축하면 마나 징수제는 바로 시행될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저절로 하라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계획에 따라 마법사인 녀석이 도시의 결계 설치를 맡았기 때문이다.
“광역 결계 마법을 펼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임시 수정구를 배치했어. 작동시키면 끝이야. 피난민 수용은 그와 동시에 시작해야지.”
“아, 그 집채만 한 수정구 말이지. 수고했다.”
“뭐야, 그걸 내보냈다고? 나는 빼놓고!”
미하일이 발끈한 문제의 수정구는 바로 첫 단추가 된 아드라타 광산에서 채굴되었다. 막대한 마나를 받아들여 저장하고, 사용자가 원하는 마법을 펼쳐 낼 수 있으려면 수정의 용량도 크면서, 내부 성질도 순수해야 했다. 아드라타는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마정석 산지였다.
“필요한 곳부터 얼른 보내야지. 재무국에서 심사받아서 배치하느니 차라리 고블린한테 뺏어서 설치하는 게 나을걸.”
“고블린도 수정구를 쓰나?”
“그래서 하는 말 아냐. 차라리 못 하는 것보다도 나쁘다고.”
하라드의 질문을 한층 더 능청스레 받는 대답에 미하일은 크게 약이 오른 모양이다.
“자자, 그래도 덕분에 빠르게 일이 처리되지 않았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결계를 활성화하려고 가던 참에 들른 것이거든요.”
“아, 결계를 지금요? 민회에서 결의하셨나요?”
미하일이 대신 대답했다.
“아까 낮에 간단하게 치렀어.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니까. 주민들도 만장일치로 동의했고.”
영역의 결의. 일전, 자루아나에서 자신이 장로들과 함께 치렀던 의식이다. 백성과 대표들이 충성의 뜻을 밝히면 각 개인의 마나는 영주가 착용한 계약 매개체를 통해 거주 ‘영역’에 구속된다.
“미하일 재무경께서 이렇게 인장 반지도 선물로 주셨답니다.”
구르간 시장은 자부심에 찬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넷째 손가락에 끼워진 가락지. 영롱하게 반짝이는 광석은 영롱한 비취색이었다. 뭐랄까, 전생도 하기 이전인 한국에선 익숙한 색이었다. 옥색이라고 하지? 익숙한 색상에 반가운 따뜻함이 느껴졌다.
“녹정석이라. 좋군요. 무리하게 힘을 끌어내지도 않으면서, 사람의 심리와 마나를 정화하고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죠. 제국에서도 인장 반지로 쓰는 주원료죠.”
물론 자신의 눈앞에 뜬 설명창을 참고해서 덧붙인 이야기였다. 단순히 색깔에 따라 마력의 용량과 세기가 다를 뿐 아니라 특성마저 다르다니, 그건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다.
‘아마도 기술자나 분석력이 강한 고위 마법사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정보겠지. 회귀 전 기억에도 없는 걸 보면.’
구르간은 네마냐의 설명에 반색하며 기뻐했다. 반면 그런 것까진 몰랐을 미하일은 떨떠름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그렇습니까? 다들 마나의 오용이나 오염을 두려워하다 보니, 이걸 알려 주면 기뻐하겠군요.”
“뭐, 하야크 왕국이 마나 강제 징수 때문에 무너진 게 10년 전이니깐요. 마나가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죠.”
하라드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법사들은 이 지식에 대해서 함구하는 계약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마법사가 아닌 자신은 얽매인 데도 없으니 자유롭다.
“아, 그럼 주홍석 같은 경우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거군? 계약석으로 사용해 버리면.”
미하일은 잔에 데운 물을 따르면서 뭔가 깨달은 듯 의표를 찔렀다.
“……아무래도 그렇지. 녹정석은 계약 대상자들의 전반적인 건강이나 안정을 추구하지만, 주홍석은 계약 당사자, 즉, 징수제의 경우엔 영주의 뜻에 강하게 반응하거든.”
“아 그래서, 하야크 왕국…….”
“쉿. 책임 못 질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이야기가 너무 흘러가자 하라드가 조용히, 그렇지만 단호하게 대화를 중지시켰다. 그 정도 이야긴 해도 상관없는 사람들인데도 영 꺼림칙한 모양이다. 네마냐는 상황을 정리했다.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미하일이 생각보다도 잘 처리해 준 것 같네요. 그럼 몸이나 좀 따뜻하게 덥히고 바로 수정구로 가 보시죠.”
“받아.”
미하일이 따라 놓은 잔을 받았다. 뜨거울 정도로 덥힌 물 반 잔에 와인을 탔다. 이곳에선 거의 물처럼 마셔 대는 음료다.
‘그래도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야 없지.’
빠르게 잔을 원샷한 일행은 찌르르 온기가 피어오르는 속을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수정구는 도심 깊숙이 위치한 중앙 광장, 기둥 탑에 배치할 계획이었다. 도시 정중앙이라 시야 확보도 되고, 주민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시각적인 효과도 뛰어났다.
―휘이!
높은 곳에 올라서니 찬 바람이 가히 살을 베는 듯 매서웠다.
“이 위는 정말 춥네. 얼른 끝내자고.”
“좀 기다려, 이것도 일종의 계약이라서 마나가 흔들리지 않게 침착해야 해.”
하라드는 미하일이 들고 있는 횃불도 치우게 한 다음, 손에서 아주 약한 광량 마법을 사용해 수정구를 비췄다. 옅은 하늘색 빛이지만 투명한 수정구는 텅 비어 보였다.
“텅 비었어.”
이런 고급 물건은 처음 보는지 구르간은 이리저리 멀찍이서 둘러보며 질문을 꺼냈다.
“마나는 들어 있지 않은 모양이군요, 마법사님.”
“예. 공조 장치로 호환시키긴 했지만 인체와 자연 마나가 직접 혼합되면 사고가 일어날 수 있거든요. 수정구의 수명도 짧아지고.”
그래서 아예 가공 공정 단계에서 자체 마나는 빼 버린 거였군. 어차피 마정석 안의 마나량이면 얼마든 채울 수 있을 테니.
“대략 그렇게 됩니다.”
간단하게 설명을 마치더니 하라드는 마정석을 한 번 더 쓸어 보며 마저 상태를 확인했다. 이미 영지에서 가공 후 검사까지 해서 출고했지만 손상됐을 수도 있으니까.
“……됐습니다. 시장님은 여기로 오셔서 계약 반지를 여기다 대 주세요. 제가 계약을 중재 집행할 테니.”
“다행이군요. 마법엔 문외한이라.”
구르간이 쭈뼛대면서도 반지를 낀 손가락을 거대 수정구 앞에 가져다 댔다. 두 마법 도구 사이의 접점에서 스파크 같은 반짝임이 일었다.
“오.”
다들 감탄사를 냈다. 이것이 지난 수백 년 동안 제국만이 향유한 비밀이었다. 녹색의 거대한 빛이 구르간을 삽시간에 휩싸고, 곧 수정구로 들어갔다. 공 모양의 수정 내부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쌓이는 마나.
“저걸 도입하려고 그렇게 고생을 했어. 첫 도입이 바가반드도 아닌 다르빌이 된 것은 조금 의외긴 했지만.”
미하일이 지난 반년의 고생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촉촉한 목소리로 감상을 내놓았다. 네마냐는 자신이 이렇게 빨리 앞으로 나설 줄은 몰랐다. 덕분에 생각보다도 마음이 조급했다. 결과가 나름 잘 나왔으니 이렇게 느긋하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거겠지만.
―푸슛.
압력 밥솥에서 증기가 솟는 것처럼, 아니 비유가 왜 이런담. 하지만 딱 그런 모양으로 마나가 수정구 위쪽으로 치솟았다.
“이제 손을 떼셔도 됩니다. 이제부터 도시 안에서 그 반지를 끼는 한, 수정구에 마나가 자동으로 충전되고, 그 힘으로 결계를 유지할 겁니다.”
설명을 마친 하라드는 앞으로 나가 두 손을 모으고 시동어를 읊었다. 결계를 구축하는 매우 복잡한 마법이었다.
[에르마 엑테키스마, 시디레아, 아비소스(Erma Ektekhisma, Sidirea, Abussos)]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마법학 기초를 배운 덕에 네마냐도 어떤 원리로 구축된 주문인지 알 것 같았다.
‘처음에 원하는 마법의 틀을 짜고, 성질을 부여하며, 범주를 설정하는 거군. 생각보단 합리적이려고 애를 썼어.’
그나마 몇 번 본 적 있는 자신과 다르게 미하일과 시장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놀라워했다. 하늘로 치솟은 마나의 덩어리들은 얇게 퍼져 나가며 자리를 굳혔다.
“……끝. 다 됐네요. 앞으로 신관회에서 마법사 경력이 있는 관리인을 배치할 계획이라더군요. 중앙 신관회에 요청하시면 될 겁니다.”
“페르투스 주교가 있으니 논의해 보겠습니다.”
“앞으로 이 수정구에 생기는 변화로 영내 문제가 있는지도 알 수 있어요. 자세한 건 나중에 문서로 보내 드릴게요.”
‘무슨 에어컨 설치 기사가 집주인에게 주의 사항 얘기하는 것 같군.’
어쨌든 중요한 건 이제 다르빌도 어엿한 거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칫하면 고블린들의 중간 거점으로 전락할 뻔했던 주요 거점.
‘이제는 고블린에 맞선 최고의 방어 기지로 거듭나게 되겠지.’
아직 누구도 저항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와중이다. 오히려 ‘반격’의 거점이 시작된 것이다. 탑 주위 주민들도 멋진 광경에 감탄했는지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손뼉을 두 번 치며 일행을 집중시켰다.
“여러분, 이제 다르빌의 방어는 문제없습니다. 여러분이 안심하면 우린 다음 단계로 움직일 겁니다. 날이 밝으면 민병대는 바로 피난민을 모으러 나갈 겁니다.”
사람들은 역시 동의의 뜻으로 박수를 보냈다. 아주 좋은 기세였다. 사람들이 다시 흔들리기 전에 최대한 성과를 많이 낼 기회다.
“피난민을 불러오면 되는 거지? 육탄전이 아니라면 나도 나가 볼래. 하지만 식량이 충분할까 모르겠네.”
하라드도 손을 들며 자원했다. 식량 문제도 미하일의 이야기대로면 아무 문제없었다.
“우리 영지에서 특제 수레로 보내는 식량이면 당장은 충분해. 그리고 조만간 항만 시설이 완공되면 곡물 공급은 정상화될 거야.”
물론 네마냐 영주가 원하는 다르빌의 성장치는 꽤 부담스러운 정도였다.
“최소한 다르빌이 자립할 규모가 필요해. 5만 명의 주민과 5천 명의 민병대를 유지할 때까진 해 봐야지. 모두 함께하면 금방 할 수 있어요.”
처음 보는 광경에 매료되어 있던 시장은 곧 정신을 다잡고 허리를 굽혀 가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에는 그저 포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걸 여기까지 끌어 주시다니. 모두를 대신해 감사…… 드립니다.”
시장은 조금 울먹해진 모양이다. 굳이 그 감정을 만류할 생각은 없었다. 감사한 마음은 고맙게 받으면 그만이다.
‘자, 그럼 당분간 다르빌은 괜찮겠고. 이제는 뭘 한담.’
고블린 적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폭풍의 조짐이 하나둘 시작된 것이다. 그 첫 번째는 하야스단 전 지역에 폭설이 내린 사흘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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