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11월 1일.
[고블린과의 전쟁이 임박했다. 장부에 병사로 기록을 올린 모든 장정은 40일 안에 수도 아니의 기사단에 신고하라.]
왕국은 동원령을 선포하고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산골 농촌에서도 농민들이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식량이나 물자가 모두 부족한 건 큰 걸림돌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좀 다를 겁니다.”
동원령을 걱정하는 국왕과 길드 마스터에게 네마냐가 건넨 한마디였다.
―쏴아!
“어서 배를 강안에 붙여! 얼른 짐을 내려라!”
에살하톤 상단은 파괴된 콜라케르트를 떠나, 새로운 물류항으로 아니 시를 선택했다. 왕의 도시가 절벽 위로 올려다보이는 항구는 오늘도 시끄러웠다.
“어서 오시죠, 백작 각하!”
“와, 엄청나게 환대해 주는군. 내가 그만큼 빚을 많이 지고 있는 덕인가?”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보두앵 지부장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며 멋쩍게 웃었다. 격의 없는 만남이었는데, 평소에는 허물없이 지내기로 텄기 때문이다. 돈이 쌓은 우정도 역시 꽤 볼만했다.
“바난드와의 거래를 터 준 일 하나만으로도 환영하는 건 당연하지. 왕국의 소속 제후와도 거래를 틀 수 있게 됐으니.”
하야스단의 최약체였던 에살하톤 상단. 이 한 번의 움직임으로 그간의 적자를 극복할 엄청난 계약을 얻어 냈다.
“아, 물론 그건 네 상단이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회사라는 신용을 쌓은 결과니까. 얻을 만한 걸 얻었다고 생각하라고.”
“아, 물론 그건 동의! 우리도 신용에 문제가 될 일을 하느니 차라리 거래를 안 하니까.”
“그런 점을 아니까, 내가 더욱 에살하톤을 추천했던 거지.”
미소를 교환하고 나서, 보두앵은 네마냐의 손을 잡은 채 무릎을 반쯤 굽혀 예를 표했다.
“그럼, 잠깐 안으로 드실까요.”
“좋죠.”
두 사람은 새로운 상단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2층 난간으로 올라서자 계곡풍을 따라 오르내리는 선단이 엄청난 장관이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허, 불과 몇 주밖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엄청나게 붐비잖아.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붐비는 항구와 넘치는 사람과 물자. 네마냐의 찬탄을 들은 보두앵은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상인이 단지 흥정꾼에 불과하다는 사람은 인정할 수 없을 장면이겠지?
“하하하. 영주님, 우리 상단은 수로를 중심으로 물자를 운반하잖아? 주요 거점마다 물자 집적소를 두고 만일을 대비해 물류를 분산해 두지. 아니는 창고가 가장 큰 편이라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거야.”
“음, 과연. 어느 곳이든 거점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물길을 이용한 기동성을 잡는 거군. 운용의 묘를 여기서 배우네.”
그래. 너는 언제고 지리를 고려해서 항상 나아가고, 물러남을 계산해 두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까지 일어난 사건과 인물 관계에선 대개 계산을 끝낸 뒤 움직였다.
‘애초에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녀석이니 믿은 것이지만. 그런데 예상 이상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어.’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왼손에 말아서 쥐고 있던 양피지 조각을 지부장의 손에 넘겨주었다. 한 장도 아니고 세 장이나 되었다. 보두앵은 줄 안경을 고쳐 쓰며 문서를 확인했다.
“이건 무슨…….”
“첫 번째는 지케른의 땅에서 교역권을 준다는 특허장. 나머지 두 장은 성국과 왕국의 군대가 제공한 주문서. 식량과 물자는 물론이고 마정석의 대규모 구매도 원하더군.”
역시 상인 신분 때문인지 보두앵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표정이 활짝 폈네? 밝은 모습 보려면 앞으로 종종 거래 터 주어야겠는데.”
“안 좋을 수가 없지. 우린 상단 중 삼인자 신세라 주요 영지와는 거래를 트기 어려웠으니까. 바난드 성국이면 그간의 한은 싹 풀리지.”
“오늘부로 억울한 건 풀렸겠네? 이제 누가 뭐래도 이곳 고원에선 에살하톤이 일인자가 되어야 할 테니까.”
난간에 기댄 채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아직까진 눈을 감고 있으면 햇볕 덕분에 한겨울이 코앞까지 다가왔단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전쟁의 계절이라.
“자, 그럼 이제는 어디로 가는 거지? 자연스럽게 다르빌로 가는 건가?”
기지개를 한껏 켜며 상태를 확인했다. 설득 행동력 제한은 2/5까지 회복됐다. 식사도 들고 목욕도 해서 회복되긴 했는데 잠이 아직 부족한 게 문제였다.
“그렇지. 잠만 좀 자고 나선 곧바로 다르빌로 갈 거야. 미하일 녀석은 다른 일 때문에 먼저 보내 놨어.”
“다른 일이라니? 다르빌보다 급한 일이 있는 건가? 필요하면 우리 연락망 써도 되는데.”
“안 그래도 이용했어. 아까 상단 통신소에서 정보대 쪽에서 보내온 기밀 보고를 전달해 줬거든.”
정보대. 정보가 중요하단 건 상인도 잘 알기 때문에 보두앵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정보대, 라. 나샤와 난민 중에서 모았다고 했지? 자세한 건 아직 말하기 그러려나?”
난처한 지점이 있음을 미리 헤아린 배려였다.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서 이야기하기가 좀 그래. 하지만 잘만 하면 다르빌을 도울 방법 하나가 더 생길 수도 있어.”
“호오.”
짤막하게 휘파람을 불더니 보두앵은 다시 안경을 고쳐 썼다. 말투를 다듬은 녀석은 화제를 돌려 바가반드 영지 문제로 돌아갔다.
“바가반드가 영지 마나를 가장 먼저 구축하게 되겠지. 준비는 잘하고 있어?”
“가장 중요한 마나 공조 장치는 준비해 놔서 괜찮아. 남은 건 가정마다 마나 집중석을 나눠 주고, 지역별로 마나 우물을 만드는 거지. 2주 안으로 끝내 볼 거야.”
“순조롭군. 영지에서 마정석이 쏟아져 나올 테니 필요한 재료는 걱정할 필요 없고.”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가장 먼저 시스템을 구동시켜야 할 다르빌에 돌릴 만한 자원이 적어. 콜라케르트가 함락되면서 자원 공급이 막혔거든.”
그 이야기엔 보두앵도 약간 표정이 어두워지며 순순하게 한계를 인정했다.
“우리가 다르빌까지 운송은 할 수 있어. 문제는 접안 시설이지. 콜라케르트 항구에서 내려 육상으로 수송해 왔는데, 지금은 항만 시설 자체가 파괴된 거지, 쯧.”
“접안 시설이 파괴됐다면 대규모 물자 이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지?”
지부장은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을 싣고 이동한다고 목적지에 물건이 도착하는 게 아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대규모 물자를 제때 내려 육로로 운송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한 번 구멍 난 운송 체계를 복원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잠깐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총독부에 우선 항구 시설 복원을 하자고 얘기해 볼게. 육로 수송은 농한기니까 다르빌 쪽 피난민이나 농민을 동원해 보고.”
“현재로선 그 방법밖에는 없겠네. 좋아, 우리도 총독부랑 협의해서 항구 시설 재건용 자원들을 보내지. 그전까지는 식량, 연료 자원을 편성해서 따로 보내 둘게.”
현실적으로 보두앵의 제안이 최선이었다. 꼭 필요한 자원만 맨땅에 내려놓고 우마차로 수송을 하면 항구가 마비되지는 않을 거다.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역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선단이 와 봤자 오히려 상황만 나빠지겠지. 그쪽 일은 전문가인 네게 맡길게. 전권을 줄 테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두 사람은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이야기가 대강 마무리되고 임무창을 확인해 보니 [물류의 회복]과 [다르빌의 재건] 등 몇 가지 임무 목록이 갱신되어 있었다.
‘또 죽어라고 뛰어다니게 생겼군.’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자리를 떠서 하염없이 계단을 올랐다. 남쪽으로 내려가는 선단들은 바난드 강을 따라 바난드 내륙 깊숙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나마, 왕국 중심으로 큰 강이 흘러서 정말 다행이야.”
즉, 아니의 보급창만 유지할 수 있다면 적어도 이 왕국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한시름은 더는 부분이다.
‘드디어 다르빌에 모든 힘을 쏟을 수 있겠어. 벌써 겨울이 시작되긴 했어도, 어찌어찌 강행군하면 시간은 맞출 수 있겠지.’
뻐근한 다리를 두드려 가면서 네마냐는 아니 시내로 들어가는 쪽문으로 다가갔다.
* * *
“흥미로운 얘기군. 계속하시오, 카나보스.”
통신석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긴 흥미로운 내용의 연속이었다. 과즙을 거의 흘리지도 않고 과일을 물어뜯은 니콜라스는, 버릇처럼 손수건으로 메마른 턱을 훔쳐 냈다.
―쩝쩝.
물어 내고 남은 과육을 접시 위에 올려 두자, 묵묵히 기다리던 카나보스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예, 특사 각하. 제가 말씀드린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바가반드의 영주는 의문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 제국의 석학들도 겨우 단서를 찾아낸 수준인 고급 광맥을 제집처럼 드나든다든가, 금속 관련한 마나 가공에 천재적인 자질이 있다든가 하는 그런 내용이겠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무덤덤한 표정. 황제의 특사로 온 니콜라스는 옆의 수프 접시에 담가 놓았던 딱딱한 비스킷을 손으로 뜯었다.
“물론 그런 부분이 많습니다.”
한 조각을 먹곤 곧바로 손수건에 손을 박박 문지른 니콜라스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통신석 너머를 향해 한심한 표정을 보였다.
“그런 이야기를 굳이 나한테 할 필욘 없네. 비싼 통신석까지 쓸 필요 있나? 현지 총독이 이미 보고해서 폐하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간 내용이거늘.”
약간 당황한 기색이던 카나보스는 적극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 하지만 그 얘기가 다는 아닙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고 질문까지 던졌던 건, 우리의 전략 무기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호. 전략 무기라. 그건 좀 새롭군.”
무언가 자신이 새로 듣는 정보란 것을 알아차린 니콜라스. 나이는 많아도 그 오랜 기간을 모략과 꾀가 난무하는 궁정에서 살아남았다.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모신 역대 상관들의 평가였다.
“어이, 식사 다했네. 이것 좀 치워 주게.”
바깥에 대령한 하인에게 접시를 치우란 부탁을 하곤,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니콜라스 특사의 표정은 다시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계속하지. 전략 무기라고?”
“예, 합하. 이곳의 영주는 「마나 징수제」를 도입하여 고블린을 막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인체 마나를 자연 마나처럼 사용할 수 있게 바꿔 주는 장치를 만들었다고 발표하더군요.”
“……마나 징수? 설마, 「영토 마나」를 그 애송이 영주가 만들기라도 했단 건가? 그건 600년 전에 마법 아카데미아 학자들이 숱하게 죽어 가면서 완성한 건데. 더군다나 마나 호환 장치라니?”
잠시 단어를 고민하던 카나보스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측근으로 마법사가 있지만 그가 주도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주가 구축한 체계는 마법사들의 마법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정석은 많이 소요되지만, 복잡한 조율 과정이 생략된 겁니다.”
아직 제국에선 마나 자동 공조 장치가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다. 매번 고위 마법사들의 마법진으로 마나 변환식을 만들어야 했다.
“대체, 믿을 수가 없군. 대체 어디서 그런 기술력을 얻었단 말인가?”
카나보스가 아직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제국 마법성에서 아주 비밀리에 추진 중인 프로젝트. 곧, 복잡하고 안정성이 떨어지는 현 영지 마나 시스템을 개량하는 것이다.
‘설마 제국 마법성에 스파이가? 그럴 리는 없을 터이건만.’
각기 성격이 다른 마나를, 안정적인 금속과 광석을 통해 호환시키면 어떨까? 필요할 때 언제고 도시와 지역에 결계와 각종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기존 방식은 재충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마법사들이 60년 넘게 연구해서, 정교한 장치만 교환하는 새 방식을 개발 중인데, 어째서?’
니콜라스는 머릿속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60대 중반인 그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부정당하는 듯한 배신감을 느꼈다. 제국이 들인 연구 기간은 이미 150년에 달한다. 출신도 불분명한 소영지의 신출내기 영주가 완벽하게 그 기술을 구현한다고?
“믿을 수가 없군, 도대체.”
“저도 그렇습니다. 어디선가 무슨 음모가 개재된 것은 아닐는지요?”
카나보스도 말은 비슷했다. 그러나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완전히 달랐다. 니콜라스는 떨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고 식탁 위에 간신히 올렸다. 수염이 미세하게 떨렸다. 통신석의 화질이 좋지는 않은 편이라 못 보는 게 다행이었다.
‘수상하군.’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 심산이었다. 어디까지나 제국이 아르만 지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로운 방어 체계가 완성되면, 구형 체계를 고원 영주들에게 넘겨주며 제국의 품 안으로 더 끌어들인다.
[그렇게 호의를 베푸는 척, 저들을 제국 안으로 끌어들일 셈이네.]
이것이 황제가 지난 10년간 추진한 계획이다. 그런데 제국의 역할을 대체하는 존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니. 아무래도 계산속도 달라질 수밖엔 없었다.
“곧, 그곳 총독부의 아라무이라로 가겠네. 총독과 호위 병력만 거느리고 만나세. 내, 직접 그 바가반드 백작을 평가해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다만, 암피에르에는 미리 언질을 넣어 두겠습니다.”
니콜라스는 무던하게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융단을 펼쳐 통신석을 덮을 때는 신경질적인 손동작이 드러났다. 계속 쌓여 있던 신경질이 치밀었다. 곁에 두고 있던 침 그릇 뚜껑을 열고 감정을 뱉어 냈다.
―퉷.
뚜껑을 닫은 채 냉정을 되찾은 늙은 특사. 그의 머릿속에선 제국의 이익과 외교를 둘러싼 시뮬레이션이 빠르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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