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성국이……. 좋소, 우리도 받아들이겠소.”
“어쩔 수 없군.”
성국이 마나 영지 제도를 도입한다는 선언을 한 지 벌써 2주의 시간이 지났다.
“자, 그럼. 하야크 남작령까지 끝났군. 미하일, 이제 다 끝난 것 맞지?”
“먼 북쪽까지 오느라고 죽어난다, 아주. 얼른 돌아가자고.”
지난 2주간 네마냐와 미하일은 이제 해체되어 있는 구 왕국령 곳곳을 돌아다녔다. 성국 남쪽의 버즈니 변경백, 마탑 동쪽의 아야크 자작령, 하야크 남작령 등이다.
“고생은 많았지만 그래도 암피에르 조약 당사자 중에서 중소 영지들은 모두 승낙했지. 이제 마나 징수제 도입엔 탄력을 받을 거야.”
각처의 민회에선 이미 바가반드의 위기나 다르빌 습격 사건이 알려지며 경각심이 치솟은 상태였다. 지주나 현지 귀족들조차 선뜻 반대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도 뜻을 다 밝히기도 전에 불호령을 받기 일쑤였다.
“저 지주 놈이 지금, 자기 돈벌이 때문에 영지 전체에 엿을 먹이려고 들어!”
“저놈 누구야? 잡아!”
아우성과 칼침이 난무할 기세가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이미 늦어 버렸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모든 과정을 합리화했다.
‘모양새는 영락없이 내가 폭동을 선동한 것처럼 보인다는 걸까.’
그러나 이내 걱정은 떨쳐 냈다. 아무려면 어떨까. 고블린의 상대로는 이미 몇 걸음 뒤쳐져 있는 건 확실하다. 지금 어떤 식으로든 대처를 시작해야 간신히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정도다.
마지막 목표였던 하야크 남작령을 떠나, 네마냐 일행은 아니로 향했다. 모든 제후가 영지 마나를 도입한 이상, 마지막 남은 바난드 왕국의 문제를 해결할 차례다.
“마지막이라지만 바난드 왕령이 가장 크니 그만큼 저항도 격렬하겠지. 더군다나…….”
“더군다나 뭐?”
미하일의 물음에 차마 대답을 할 순 없었다. 마나 징수제는 바난드 국왕파도 역시 지지하는 사안이다. 왕권 강화와도 연계되니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쯤 2왕자 아쇼트를 중심으로 분권파 귀족들이 뭉칠 때가 되었지. 엘레나가 앞장선 것에도 눈을 부라릴 테고.’
일단은 부딪쳐 보는 수밖엔 없다. 그들이 엘레나를 기사단으로 내친 거로 만족한다면,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쉴 틈이 없겠어. 아침에 아니에 도착할 수 있도록 그냥 달리자.”
산길을 따라 왕국으로 들어서는 경계를 막 넘어서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확실하게 바난드로 접어들자 미하일이 말을 걸어왔다.
“휴! 일단 큰 고비 없이 쉽게 처리한 것 같은데. 이제 문제는 바난드겠지.”
“그렇지. 바난드로 말하자면 전통적인 귀족 세력이 강하니까. 정보대 얘기론 추밀원과 귀족 회의가 대결하는 상태라던데.”
네마냐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좁다란 길을 조심하며 말 머리를 돌렸다. 마주 지나가는 수레를 피했다. 미하일은 지나가는 일행에겐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야크 왕국을 무너뜨린 자들이라 그런가.”
“아무래도 분권과 세금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는 자들이니까. 정보대 얘기론 이미 독자 세력을 구축하는 중이라더군.”
“내부 파벌? 잘못 걸리면 역모 죄인데?”
“가능하지. 인간은 필요하다면 뒤통수에 칼을 찌를 수도 있으니까.”
“그 말대로라면 심각해지겠지.”
미하일은 반쯤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 다 알지만 네마냐는 꺼림칙한 기억을 떨칠 수 없었다. 하얀 입김이 치솟는다. 겨울의 그날처럼.
‘아, 또 시작이다. 그만.’
두통을 애써 무시한 채, 미하일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펄럭이는 하늘빛 망토가 단연 돋보였다. 말이 몰아쉬는 숨소리 속에서 대화는 잠깐 끊겼다. 기왕에 이리된 거, 막간을 이용해 눈을 감았다. 남아 있는 설득의 행동력을 보려는 참이었다.
[행동력 2/5]
설득에 심화 기술까지 사용했을 때 행동력은 최대 2를 소모한다. 바난드에서 위기를 맞아도 헤쳐 나갈 순 있다. 하지만 어째선지 불안감이 가시지는 않았다.
“왕자. 아쇼트 왕자 말이야.”
네마냐가 문득 꺼낸 이름에 미하일 녀석도 슬쩍 이쪽으로 시선을 주더니 선선히 대답했다.
“응, 아쇼트 왕자. 우리가 하례회 때 만났지. 그런데 그분은 왜?”
“달리 알고 있는 얘긴 없었어? 동향이라든지.”
잠깐 생각하더니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딱히……. 그럴 만한 위치도 아니잖아? 이제 겨우 14살 채운 소년 왕자가 권력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권력 앞에서 불가능은 없지. 더군다나, 현 국왕의 계승 구도도 그렇고.”
계승. 드물게 존재하는 봉건제 국가에선 언제나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주제다. 특히 바난드처럼 왕은 나이가 많고, 첫째는 여자, 둘째는 남자인데 여자의 작위 계승을 싫어라 하는 풍토가 있는 나라라면.
‘아주 내전 나기 좋은 환경은 다 갖췄어.’
물론 미하일은 그 정도까지 큰일이 날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다.
“너무 걱정이 많으시다니까, 울 영주님. 귀족들이 미쳤기로서니 막가파로 죽자고 달려들까?”
‘그 설마가 진짜가 되면 돌아갈 수도 없는데.’
아니. 어쩌면 아닐 수도. 자기도 모르게 말의 고삐를 멈추는 네마냐.
‘정말 미하일의 이야기대로 달라졌다면? 내가 조급하게 생각해서 잘못 그르친다면?’
다르빌이 멸망하면서 조급해진 개혁파의 강경한 움직임. 그와 맞물린 귀족들의 반발은 바난드의 내전을 불러왔다. 고블린의 침략이 눈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선 최악의 전개였다. 만약 다르빌 방어로 미래가 틀어졌다면, 다행일 것이다.
“후…….”
“괜찮아?”
한숨을 쉬는 네마냐가 걱정스러운 듯 미하일도 속도를 늦추며 다가왔다.
“미안.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다르빌도 지켰고 마나 징수제 합의도 이루어 냈지. 내가 너무 조급했나 보다.”
미하일은 잠시 말도 없이 말을 몰더니 무어라 툭 던지듯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생각할 게 많아서 그런 거야. 충분히 할 일을 잘하고 있으니까 조급해하지는 마.”
“그래야겠지.”
다시 몇 초간 고민한 녀석이 내놓은 결론은,
“다만 며칠이라도 푹 쉬면 낫지 않을까. 온 신경을 계속 집중하고 있으면 효율도 떨어진다고.”
“에라. 그걸 대책이라고.”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지금도 눈앞에 날리는 진눈깨비를 보면 안심할 수 없었다. 이러다 눈은 함박눈으로 바뀌겠지. 그 폭설이 몇 차례 이어져 쌓인다면,
‘전쟁은 비로소 시작되겠지.’
주변 환경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많이 달라졌다. 이제 바난드의 영토 안으로 들어선 것으로 보였다.
“깊은 겨울까지는 이제 두 달도 안 남았는데 어떻게 쉴 수가 있겠어. 바난드 문제 처리하고 피난민 정착으로도 시간이 모자랄걸.”
“동맹군도 그때까진 집결할 거야. 어느 정도는 맡겨 두고 믿어 보라고. 좀 쉬고.”
어쩐지 따뜻한 한마디에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들썩이는 말 안장은 아직도 힘겹긴 마찬가지지만, 조금 긴장이 풀려 식욕도 돋아났다.
“싱싱한 야채를 좀 먹어야겠어. 올리브유 생채 무침만 먹어도 좋겠지.”
“어, 좋지. 와인도 좀 마셨으면.”
풍족과 거리가 먼 시대를 살면서 부족하게 느끼게 되는 건 의외로 신선한 채소였다. 화장실? 비누? 스마트폰? 이서준의 기억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의 적응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걸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놀라울 정도의 적응력.
‘먹는 것만큼은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지.’
먹고 싶은 요리를 이야기하느라 배가 고파진 두 사람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몰았다. 계곡엔 서서히 여명이 비추고 있었다. 바난드의 국경 도시인 마브리쿠폴리스의 낮은 성벽이 어느덧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바난드의 왕성, 아니(Ani).
말을 탄 채로 궁성까지 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귀빈에게나 허용되는 예우였다. 덕분에 두 사람은 5분 만에 궁전에 닿았다. 입구에 도착하자 미리 통지를 받은 듯 근위병이 문을 열어 주었다.
“파드 경에게 감사해야겠어. 바로 연락을 취해서 그런진 몰라도 일 처리는 빠른데.”
“확실히. 일반 행정이 아니라 군에서 직접 올라간 거니까 그렇겠군.”
안장을 의지해 말에서 내린 두 사람은 아니의 시내는 물론, 궁정조차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던 반년 전의 떠들썩한 분위기는 얼어붙은 모양새였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도 얼어붙었어.”
“그건 겨울이라 그렇고.”
첫 대사는 가볍게 농담으로 받긴 했지만 네마냐 자신 역시 곳곳을 눈여겨보는 중이었다.
“아마 그동안 방문한 곳 중에 가장 전시 상태가 철저한 것 같지?”
“아, 그러게. 역시 상황을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수뇌부가 있어서 그런지.”
궁정의 곳곳엔 군용 막사가 즐비하고 전령이 부리나케 뛰어다녔다. 그전부터 비어 있던 전각 몇 개는 아예 지휘 본부나 군용 창고로 바뀐 모양이었다. 작은 전쟁이면 북쪽의 기사단 성채로도 충분하지만, 이미 대규모 전쟁이 코앞에 있었다.
“송구합니다. 일주일 전부터 왕명에 따라 전수 검문 중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십니까?”
관청 거리에서 궁성으로 들어가는 쪽문에도 어김없이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주 경례하며 바짝 긴장한 병사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수고 많아요. 오늘 열리는 회의에 초대를 받아서 왔는데.”
“귀빈이시군요. 죄송하지만 초대장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상부의 명령인지라.”
“그럼, 그럼. 여기, 초대장.”
소국의 국왕이 사용할 수 있는 황금 인장은 최대 1파운드였다. 네마냐에게 온 초대장의 황금 인장은 2파운드. 사실상 제국의 황제에게 보내는 봉서와 거의 동급의 것이다. 잠시 멍하니 인장을 보고 있던 병사는 전기에 닿기라도 한 듯 부르르 떨었다.
“바, 바가반드 경이시군요! 어서 안으로 드시죠. 환영합니다!”
이럴 땐 씩 웃으며 답례해 주자.
“마나가 흐르듯 모든 일이 그대로 될 것입니다.”
안쪽으로 몇 걸음 옮기자 미하일 녀석이 어처구니없다며 웃었다.
“풋, 아니, 너 어느새 마나교 사제라도 돼 버린 거야? 방금 진짜 깨더라.”
“하도 신관이랑 만나다 보니 거의 사제로 입문하기 직전의 말버릇이 됐나.”
대리석을 조각한 사자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대리석 천장 아래로 들어섰다. 오밤중에 몰래 들어설 때와는 다르게 웅장한 운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밀려오는 안개구름의 틈새로 허여멀건 조각만이 고고했다.
“옛 영광의 잔해로군.”
“600년 전 마도 전쟁 때의 삽화니까. 사실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훨씬 어려웠는데.”
전차의 수레에 올라탄 병사, 날아가는 화살과 쓰러지는 적병들. 위대한 군주와 가신들의 행렬까지. 회랑 안쪽은 여전히 위대하고 고결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아무래도 다들 알현실에 모여 있나 본데.”
“음, 얼른 가야겠다.”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니 곧 복도 끝 정면에 있는 거대한 청동문이 보였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요란스러운 금속 마찰 소리가 실내로 울려 퍼졌다. 한창 북적이던 실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됐다.
“아, 왔군. 형님! 저쪽에…….”
“나도 아직 눈은 보인다. 녀석, 알았으니 얼른 다녀와.”
국왕의 옆에 서 있던 조합장은 긴 망토를 움켜잡고 계단을 날듯이 뛰어내렸다. 그러곤 곳곳에 의자를 두고 앉은 대의원들을 밀치며 가로질렀다.
“에헤이, 참.”
“저 양반이…….”
불만을 뱉으면서도 차마 뭐라고 할 수 없는 지주나 대표들은 구겨진 옷을 다듬었다.
“하하하! 어서 오게나! 지금 바로 건너왔나?”
반가운 바누라트의 인사에 맞추어 두 사람도 인사를 올렸다.
“예, 하야크 남작령에서 해뜨기 전에 출발해 마브리쿠폴리스로 넘어왔습니다.”
“초행길인데 이것저것 하느라 여간 고생이 아니겠어. 그래, 식사는?”
“간단히 들었습니다. 지금, 상황은 좀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어깨너머로 분위기를 보니 아직은 무척 혼란스러워 보였다. 귀족들끼리 삼삼오오 모인 가운데 특정한 곳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아, 자네가 보기에도 그리 좋지 않은가? 자기주장이 센 사람이 많으니만치 어렵지.”
아무렇지 않게 뱉어 낸 바누라트는 기침하는 척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귀족 중에 동쪽 내륙에 농장이 있는 지주들이 특히 반발이 심하네.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이지.”
“언제고 예상은 되는 일입니다. 다만, 징수제 자체를 하야크 시절의 일과 연결하는 주장이 나와 버리면…….”
이제는 거의 금기가 되어 있는 하야크 왕국 이야기. 바누라트의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어, 그래. 저쪽에 있는 펜자르크 가문 문주께서 그렇게 반대하고 있네…… 만.”
담담하게 속닥이던 영감이 비열한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어쩔 수 없지. 물러설 수 없네. 이건 아직 공표하지 않은 극비 사항이지만, 자네에겐 먼저 알려주지.”
극비 첩보. 네마냐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정봅니까?”
“제국이 공유한 첩보에 따르면 고블린 병력이 국경 지대 외부에 속속 집결하고 있네.”
“……얼마나 됩니까?”
“지금 시점까지 확인된 병력만 족히 8천은 된다더군.”
“곧 본격적인 공격이 오겠군요.”
“그래.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동원령까지 발동할 생각이야.”
바누라트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제 그가 네마냐 자신에게 원하는 일을 알 것 같았다.
“직접 증인이자 사절로 입을 다물게 도와 드리는 게 제 일이군요.”
“후후, 자네는 똑똑해서 맘에 든다니까. 일이라기보단 영웅을 그렇게 이용하는 방법이라고 하자고, 응? 허허.”
그러곤 곧바로 뒤돌아서서 두 손가락을 포갠 채 멀리 선 자신의 형을 향해 흔들었다. 국왕 하코브가 시끄러운 좌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쿵.
쿵.
쿵.
쿵.
하코브 왕의 신호. 곳곳에 배치된 근위병들이 모두 똑같은 박자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고함이나 허튼 움직임이 필요 없는 간결한 동작이었다.
“헉.”
“엎드려, 모두!”
바닥을 울리며 듣는 사람에게 위압을 안겨 주는 리듬이었다.
“우리의 형제인 바가반드에서 소영주가 왔소. 우리들의 울타리인 지케른이 마나 징수제에 관해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 들어 봅시다. 짐이 있는 곳으로 올라오게.”
“난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게. 편하게 다녀와.”
고갯짓을 교환하고는 미하일을 남겨 둔 채 바누라트의 안내를 받으며 인파를 헤쳐 나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두려움과 경계로부터 기대와 호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그지없었다.
“표정이 참 다양하네요.”
“다양하지. 다들 각자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 온갖 생각이 드는 건 매한가지니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조차 잘하고 있는진 모르겠네.”
꽤 긴 시간이 걸렸다. 1층의 계단을 밟아 오르자 중앙에는 국왕의 자리가 있었다. 잠깐 깊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연단은 그 조금 아래, 반 층 정도의 높이에 있었다.
‘어디 볼까. 전체 60명 중 찬성이 여덟이라. 상황이 더 좋지 않군.’
딱히 민회 구성을 바꾼 것도 아니고, 하야크 왕국이 멸망한 이후 유지된 일종의 하야크 귀족원 그대로였다. 당연히 그동안 보았던 어느 영지보다도 상황은 더 불리했다.
‘느긋할 때가 아니지.’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연달아 스킬을 강화했다. 두루마리를 꺼내 들면서 은색 봉인을 붙들고 모든 힘을 개방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행동력 2가 모두 동원되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피곤함이 부쩍 늘었다. 거기에 마지막 비장의 수도 꺼냈다.
[은인봉서, 스킬 강화]
[설득]
“반갑습니다. 바가반드 백작, 네마냐입니다.”
잠잠한 청중. 씩 웃음을 지은 네마냐는 성국의 전언을 펼쳐 들었다. 대리석 궁전에 울려 퍼지는 낭랑한 목소리.
“살아남기 위해서. 성국과 이하의 영지들, 곧 바가반드, 아야크, 하야크에선 제국의 지지 아래,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곧 마나 징수제를 도입하여 영지를 효율적으로 방위하며, 그 사용은 민회를 통해 투명하게 함으로써 주민을 안정시킨다.”
그리고 네마냐의 주장으로 추가된 조항도 같이 낭독되었다.
“아울러 다르빌을 합심하여 재건하고 전쟁에 대비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강력한 힘이 실려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처음부터 스킬을 작정하고 쏟아 냈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호소할 정도였다.
“아, 왜 어지럽지.”
“찬성하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인걸……. 우욱.”
민회의 의결권을 좀 더 강화하겠다는 당근이 있었다. 반대파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논리였다.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순식간에 찬반의 형국은 뒤바뀌었다. 바가반드에서보다 훨씬 좋은 흐름이었다.
“43인이 동의하였습니다, 폐하. 개전 제안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이제는 동원령에 대해서 공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공손하게 결정 사항을 알리는 네마냐. 하코브는 이전의 무거운 표정과 달리, 이제는 은은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맙군. 우리의 열정은 여전하네. 오늘을 잊지 않겠네. 함께 싸울 날을 기대하겠어.”
하코브 4세는 마침내 몸을 일으키고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활화산 같은 기세로 외쳤다.
“지금부터 우리나라는 전시 체제로 들어간다! 동원령을 발효하니 40일 이내로 전국의 병사가 아니에 집결할 수 있도록 하라!”
여전히 청중은 웅성거렸지만 적어도 더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진즉부터 전쟁을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드디어 체한 속이 뚫렸다며 기뻐할 장면이었다. 그러나 네마냐는 이 순간, 이미 다음 장면을 생각하며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끝내 마나 징수와 전시 동원을 막지 못했군. 펜자르크 가문도 이젠 끗발이 다한 건가.”
차가운 평가.
“허, 그건 좀 너무하신 말씀이외다, 왕자님. 오늘은 규격 외의 변수가 나타났단 걸 고려하셔야지, 후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대각선으로 겹치게 앉은 두 사람. 특히 연단을 두고 등을 진 사람은, 정확하게 보이진 않아도 아쇼트 왕자가 분명했다. 이 나라에서 작게나마 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후훗, 전쟁으로 계승 구도를 뒤집어 보려는 아버님이나 숙부님에게는 좋은 일이군. 뭐, 어차피 고블린 따위와 뭘 저렇게 정성 들여 싸운다고.”
그러면서 아쇼트는 흘깃하며 연단 쪽을 살짝 돌아보더니 다시 고쳐 앉았다. 네마냐는 혹시나 했지만 거리가 워낙 멀어 자신을 보진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펜자르크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어찌합니까, 앞으로는.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민심은 현 정부를 따라갈 수밖엔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국이나 성녀까지 나서는 정책을 반대할 수도 없지 않나. 당장은 협조하는 척 지켜보며 기회를 노리는 것이지. 기다려 보자고. 아, 거기 포도주 좀 주게.”
목마른 손님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나르는 시종은 곳곳에 있었다. 포도주를 한 잔 받아 든 왕자는 투명한 유리잔을 흔들었다. 얇게 핏빛으로 빛나는 내용물이 찰랑거렸다.
“고블린 군단과의 전면전은 쉽지 않을 테니 확실히 기다려서 허점을 파고드는 건 좋은 생각입니다.”
“문제는, 너무 적절하게 요소요소를 파고드는 저 녀석이랄까. 어딘가 자꾸 위화감이 드는군.”
펜자르크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좀 더 왕자의 곁으로 밀착했다. 목소리도 한층 더 낮아졌다.
“바가반드 경 말입니까.”
“아무래도 사람을 붙이든지 해서 좀 조사를 해 보는 게 좋겠군. 내 경비견, 펜자르크를 기꺼이 의지해 봄세.”
왕자는 펜자르크의 의자 등받이를 두드렸다. 잔을 든 채 돌아선 왕자는 기쁜 목소리로 선창을 외치며 건배를 제안했다.
“우리는 하나 되어 승리할 것입니다! 바난드 만세! 국왕 폐하 만세! 하야스단의 모든 이들에게 기쁨을!”
“건배!”
모두의 희열과 기쁨, 걱정과 계산 속에서 바난드 왕국은 전시 체제로 돌입했다.
- 7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