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갑작스러운 선언문 낭독. 이미 귀띔을 받은 귀빈 외에는 대부분 당황한 표정이었다.
“쿨럭! 아니, 영지 마나라니요. 이게 갑자기 저희를 불러 모으신 이유란 겁니까?”
“우리를 모두 부르셨기에 최근 작황과 관련된 무슨 대책 이야긴 줄 알았는데.”
폭탄과도 같은 영지 마나 선언에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지주들의 반응이 뒤따랐다. 미리 귀띔을 받은 친영주파 귀족 몇 명은 잠자코 흘러가는 상황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거 좀 재밌는 말씀이군, 젊은 영주. 좀 더 들어 봅시다. 무슨 이야긴지 들어 봐야 알지 않을까.”
지금으로선 가장 우려스러운 잠재적 반대파가 입을 열었다. 바룬다 가문. 가스파리얀 가문과는 대대로 혼인을 맺었던 지체 높은 집안이다. 지금으로선 영지 내부에서 네마냐를 반대하는 연합의 구심점이 될 것이다.
“알리야 바룬다 경이군. 들어준다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바로 말씀을 드리죠. 물론,”
바룬다 가문의 노인에게 꽂았던 시선을 스윽 돌렸다. 노인의 뒤편으로는 세 사람의 귀빈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오늘 이와 관련해 세 분의 외빈까지 오셨으니 이분들께서도 들으실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이 회의는 하야스단 고원의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란 점을 알려 드립니다.”
선제적으로 회의의 성격을 엄중한 것으로 규정했다. 시작과 동시에 토호들이 마나 징수를 반대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 지역의 운명에 가장 큰 몫이 있는 신관회와 왕국, 제국의 3대 세력이다.
‘기껏해야 지주들인데, 어느 누가 거대 세력을 건드릴 수 있겠어.’
그와 동시에 네마냐의 스킬, [설득]이 효과를 차차 발휘했다.
[옭아매는 말빨]
[10 이상의 판단과 이해의 능력이 스킬 발동에 관여한다. 설득 기술에 의해 발동. 2시간이 지난 뒤 쿨타임 하루 및 화술 약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설득 포섭률이 높아진다.]
시선의 한편에선 알림과 함께 스킬의 효과가 새로 등장했다. 음, 설득 스킬의 힘을 강화해 주면서 동시에 일정한 부작용이 적용되는 칭호였다. 연달아 설득할 게 아니라면 지금으로선 오히려 좋은 기회다.
“자, 그래서 바가반드 경께선 어떻게 영지 마나의 징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단 것인지.”
대화의 물꼬를 처음 튼 것은 두어 번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반전시킨 바누라트였다.
“시간이 없으니 속행하죠.”
하얀 옷의 신관도 곁들였다. 이 여성 신관이 바로 성국에서 온 신전 도서관장인 히파타 사제다. 제국에서 왔다는 어느 황족도 잠자코 끄덕였다. 사제가 입을 열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최근의 사건으로 미루어 보면 고블린들이 작정하고 우리 세계를 침공할 것이란 건 분명하지요. 영주님의 이야길 들어 봅시다.”
“감사합니다. 히파타 님.”
분위기를 적당하게 위기감으로 끌어온 모두발언이었다. 인사의 뜻으로 목을 가볍게 끄덕이곤 표정을 가라앉혔다.
“제가 최근에 마정석 광산을 대거 찾아내고 본격적으로 채굴 및 가공에 들어간 것을 아실 분은 아실 겁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운 좋게도 여섯 종류의 마정석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이어 두 손에 계속 받치고 있었던 금속판을 들어 보였다. 마나의 흔들림을 막아 주고 연결을 보정해 주는 마정 합금의 원판. 시큰둥하던 카나보스 참사관이 눈빛을 빛내며 혼잣말을 삼켰다.
“저게, 그 공조 장치라는 건가, 호.”
여섯 가지 합성 공정 처리된 마나 수정. 각 수정은 서로를 붙들며 서로 다른 마나를 이어 주었다. 무지갯빛이 아른거리며 물이라도 고인 것처럼 넘실거렸다.
“이렇게 오늘, 여러분께 마나 공조 장치를 선보입니다. 이제 우리 영지도 주민의 마나를 한데 모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곧 영지 마나의 시스템이죠.”
결국, 자연스럽게 마나 세금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마나 징수라…….
―제국도 아니고 우리 영지가 그게 가능한가?
좌중의 곳곳에선 탄식 소리와 함께 여러 가지 찬반 주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걸 반영하듯 알림도 재깍재깍 튀어나왔다.
[설득된 사람의 수가 증가.]
[당신의 증거와 설득이 상대의 판단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 가십시오. 하지만 당신의 반대자에 대해선 좀 더 정교한 설득, 때로는 강한 압박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
심호흡하며 뱃심을 불어넣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때 히파타 신관이 손을 들었다. 의사권 신청이었다.
“예, 히파타 님.”
“그래요……. 임박한 전쟁에서 전쟁을 대비한다는 간절한 목적은 대단한 호소력이 있습니다.”
히파타는 조금 염려스럽다는 표정으로 단상 아래 자리 잡은 열다섯 귀족을 훑어보았다.
“다만, 현지 귀족들이나 주민들이 전에 없던 세금을 스스로 낼 수 있을까, 염려스럽군요.”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의적절했다. 이 문제를 논의하면 반드시 나오게 되는 이슈다. 그게 돈의 형태건 아니건, 세금을 거두어들인단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쪽 세상에선 역시나 큰돈이 될 수 있는 마나일 테니까.’
체내 마나를 너무 많이 빼면 건강의 균형이 무너진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비밀리에 체내 마나를 빼내서 판매하는 일이 잦았다. 마나가 마법과 마법 도구에 필요하니 불법적으로도 구하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끝없는 족쇄가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도 마나 공급량은 수요량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니, 마나 세금을 거두는 것 자체는 반대에 부딪히기 쉽다. 히파타도 그 점을 지적했다.
“만약 마나 징수 제도를 시행한다면, 반발은 물론이고 반란까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가 듭니다.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불쑥 끼어든 것은 바룬다의 가주인 알리야였다. 15명의 지주와 토호 중 대략 6명 정도는 그의 목소리를 깊이 듣는 모양이었다.
‘9대 6의 대치인가. 아직 좀 더 설득을 해야 할 텐데, 과연 어떻게 나올까.’
약간은 초조하지만 네마냐는 태연하게 알리야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다.
“기탄없이 말씀하세요, 바룬다 경.”
별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인 알리야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발언을 시작했다.
“제가 지금 가만히 듣고 생각할 때 드는 걱정은 이겁니다. 비상시에 필요하다면 마나를 징수해서 영지 방위에 쓸 수 있습니다. 영지의 발전에도 쓸 수 있습니다.”
그러곤 크게 팔을 벌려 외쳤다.
“이, 얼마나 보기 좋은 일이겠습니까.”
자신의 말을 좀 더 정리하려는지 웅얼거리며 콧수염을 만지작대는 바룬다. 이내, 지팡이를 앞으로 옮겨 양손으로 잡으며 시선을 들어 이쪽을 마주 본다.
“그러나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사유 재산인 마나에 대하여 영지의 권한을 상정하는 건, 법률을 위반합니다. 우리와 소유권 개념과 징세 문화가 다른 서방, 그러니까 제국,”
잠시 말을 끊은 노인은 제국의 사절이 있는 것을 의식하며 ‘고원 산천, 절반의 보호자이신 성상 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라는 미사여구를 덧붙였다. 물론, 지켜보는 참사관 카나보스는 침묵을 지켰다.
“큼큼, 그러니까 제국에서야 마나를 세금으로 거두어서 쓰는 관습이 정착했습니다. 영주께서 상정하신 징수제를 600년 만에 이룬 겁니다.”
네마냐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흔한 역사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그게 문제란 겁니다. 우리 지역은 대대로 지주와 주민의 재산권과 자유 보존을 중시합니다. 600년 정도의 논의가 있지 않는다면 그걸 강제하는 건 독재입니다.”
“비상시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자신의 답변에 어림도 없다는 듯 웃음과 함께 알리야가 받아쳤다.
“통일 왕조였던 하야크만 해도 마나를 강제로 징수해 가며 내전을 벌였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건…….”
바누라트가 바로 끼어들려 했으나 알리야는 큰 목소리로 물리쳤다. 자칫하면 불경으로 몰릴 수 있는 행위였다.
“무리한! 마나 징발로 건강을 헤친 주민들은 농사를 망쳤습니다. 헛되이! 쓰인 마법으로 마법사가 숱하게 죽었습니다.”
―말이야 옳은 말이지.
―내 정신, 참. 잠깐 혹하긴 했네. 그래도 어떻게 마나 자율권을 내놓을 수가 있겠어.
―당장 지금 우리 농장도 마법 도구로 인력을 대체하는데, 지주의 이익과 권한을 침해하는 것 아닌가.
[반대자의 설득]
[수사학 스킬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는 반대자가 나타났습니다. 상대의 설득에 따라 당신에게 동의한 토호 일부가 편을 바꿀 수 있습니다. 논리에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상단에 뜬 숫자는 9:6에서 6:9까지 역전됐다. 15표 중 2/3인 12표를 얻어야 하니 목표치의 반으로 떨어진 셈.
‘긴장할 필요 없어, 네마냐. 차근차근 큰 그림을 그려 가면 된다.’
바룬다가 주변의 사람으로부터 맞장구를 들으며 침묵을 지켰다. 사실상 바룬다 홀로 우두머리이니 알리야만 꺾으면 이 판은 끝난다.
“지금 뭔가 착오하는군요.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일은 내전이 아닙니다. 고블린과의 대전쟁이죠.”
네마냐는 한 걸음 걸어 나오며 귀족들을 압박하듯이 내려다보았다. 힘찬 동작과 함께 고블린의 압도적인 힘을 묘사했다.
“고블린의 장기는 압도적인 물량, 신속한 기동력, 동방 마법학 영향을 받는 불안정 유파의 마도술입니다. 잠시 하나 묻겠습니다, 카나보스 경.”
위로 갈수록 커지는 특이한 비단 모자를 쓴 서기관은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게 조금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어떻습니까. 제국군은 고블린과 오래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정말 위험한 존재입니까?”
의외의 질문이란 듯 눈썹을 띄우는 카나보스. 네마냐의 질문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알리야는 제국과 바가반드의 경험을 구분하려 들지만 영주는 공통적인 고블린으로 결국 두 곳이 같다는 걸 주장한 셈이군. 영지 마나가 없이는 안 된다, 그런 주장인가.’
카나보스는 최대한 중립적 목소리로 사실 부분만을 진술했다. 물론, 군사적 비밀 사항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으니 그건 제외하고.
“주로 지금까지 고블린이 취한 행동은 단기간에 방어의 틈을 비집고, 노략질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러니까 나샤와 학살 이후론 바뀌고 있습니다.”
“니샤와 이후라……. 계획적으로 부대를 조직해 인간을 제거한 후, 지역을 장악하죠.”
“……그런 셈이오. 제국 중앙에서도 이번엔 사태가 조금 심각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지.”
제국 참사관의 발언에 6:9까지 떨어졌던 숫자는 다시 8:7까지 올랐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표 쏠림 효과도 겸해서 설득의 효과가 더 강해질 텐데.
‘그래도, 좋았다.’
할 말을 마친 서기관은 입을 다물었다. 자리만 지켜 줘도 위압감으로 자기 몫은 다 하는 역할이다. 이렇게 얘기까지 해 준 것으로 보면, 제국의 입장은 확실하다.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 건 확실해졌군.’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감사를 대신했다. 남은 것은 설득. 스킬의 효과에 마나를 집중했다.
[설득 기운 강화]
[당신의 마나가 집중되어, 설득력은 더욱 배가됩니다. 오래 사용하지는 마십시오. 마나가 고갈되면 정신적으로 공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속사포처럼 치고 들어간다. 알리야가 능구렁이같이 담을 넘을 시간조차 주면 안 된다.
“자, 이렇듯이 고블린의 군세는 예상할 수 없는 시기, 압도적인 병력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옵니다. 특수한 방법이 필요하고, 그것이 바로 마나 징수인 겁니다.”
“그, 하지만 우리도 농민을 징집해서 병력을 늘리고 방어를 잘 구축하면 되지 않습니까? 마나 징수는 하야스단에선 너무 위험합니다.”
“농민으로 방어를?”
아직도 이 사람들이 상황을 얼마나 가볍게 보는지, 그 천진난만함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대사였다. 더는 감출 필요 없는 적개심을, 네마냐는 드러냈다.
“농민을 얼마나 징집해서 무장해야 8만은 넘을 고블린 군단을 상대할 수 있겠소? 이상적인 교훈이 아니라 지금 순간에 어울리는 조언을 좀 주시죠.”
하지만 이따금 말을 덧붙이는 몇 사람은 분위기를 모른 채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공세를 시작했던 알리야조차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공세를 이어 간다고 생각하는 별 볼 일 없는 지주들은 말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말이 길어질수록 네마냐는 우세해졌다.
“사람의 뜻이 모이고 정성을 다하면 수는 적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정말 필요하다면 물자 징발과 전쟁세에 동의하겠습니다.”
“하하하하…….”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나 징발에도 거듭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마나보다도 더 부족한 돈과 물자 징발을 받아들인다고?
“……왜 웃으십니까? 이해하기 어렵군요.”
“거, 다 아는 분들이 장난치지 맙시다. 우리 영지의 농업 작황이나 물자 생산 능력이 얼마나 된다고.”
웃음기를 싹 거두고 바룬다 주변의 지주들을 차갑게 응시했다. 존대 역시 거두었다. 압박이 시작될 타임이 왔지.
“마나 징수는 고블린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해야 한다. 이기지 못하더라도 살아남으려면 말이지.”
마나를 징발해 영지 단위로 활용한다. 이는 농장의 지주와 귀족들이 스스로 마나를 활용할 권리를 박탈하지만, 그만큼 마법 도구의 활용을 가능케 하여 소작권, 경작권까지 빼앗긴 농민의 소득을 높일 수 있다.
점차 어조가 강경해지자 알리야 바룬다 역시, 몸을 일으키면서 항변했다.
“우리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농장의 경작이 무너지면 영지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합니다. 그게 정말 영지를 위하는 일이란 말이오?”
―가난한 군중에게 지지를 얻으시더니, 이제는 혁명이라도 할 생각인가?
―뜻은 그럴듯하나 현실이 아닌 이상론에 매몰되면 안 되네, 영주 양반.
이따금 용기를 낸 사람 몇 명이 함께 일어나 바룬다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 자체가 고블린과의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는 대의에 비하면 약한 건 사실이다.
“험, 험.”
거기다 연신 헛기침하는 소란스러운 바누라트 조합장과 신관의 눈총까지. 상단의 숫자는 서서히 균형이 무너지고 10:6까지 격차가 벌어졌다. 2표만 더. 이제 결정타를 날릴 차례다.
“질서가 바쁜 발목을 잡는 거라면 기꺼이 내버릴 각오도 되어 있소, 알리야 경.”
기회를 주려고 했지만 쉽게 무릎 꿇을 기세가 아니었다. 이제 강제로라도 귀족들이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공청회가 아니라 ‘민회’를 소집했네. 귀족 회의가 아닌 민회를 말이지.”
―민회?
지주의 대표들은 다시 웅성거렸다. 흥미롭다는 듯 턱수염을 매만지며 지켜보던 바누라트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옳거니……. 그래서 더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로군.”
“무슨 소리십니까, 조합장?”
히파타 사제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는 조합장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흐흐, 별것 아닙니다. 영웅이란 실체 없는 힘과 명성이 사람을 움직이고 있지요.”
“힘과 명성……. 군중의 마음인가요.”
두 사람이 소곤대며 평가를 하는 사이, 네마냐는 손뼉을 치며 스프란체를 불렀다.
“집사.”
커튼이 다시 걷히며 응접실 바깥,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하지만 거기엔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응, 저 사람은 저쪽 강 건너 밭 떼다 부쳐 먹는 알라반 아닌가? 저 사람은 또 왜…….”
“……농민, 영민을 모은 것이오? 우릴 압박하려고? 그런다고 해도…….”
지팡이를 짚고 나선 알리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손을 들어 그런 바룬다의 목소리를 끊었다.
“그럴 리가. 소농, 중농 등 영민은 당연히 민회원 자격이 있는 주민이지. 거기에 타티온과 자루아나에서 기존에 제외되었던 사람들까지.”
그 말을 하며 한편을 가리켰다. 주변의 농민이나 장인들과 달리 옷을 제법 잘 차려입은 일행이 고개를 수그렸다.
“영주님을 뵈옵니다.”
타티온과 자루아나의 일행. 맨 앞에 선 두 사람이 함께 입을 맞추어 이야기했다. 전 영주와 결탁한 귀족들이 몰아냈던 민회 정회원들이었다.
“저희 두 마을은 정책에 동의합니다. 저희는 첫째로 계약하여 마나를 제공하겠습니다.”
“고맙소. 그간 두 지역은 실제 자신의 의견을 내지 못했어. 나는 두 지역의 공헌을 잊지 않으며, 정식 발언과 표결의 권한을 돌려주네.”
고개를 들지는 않았어도 기뻐하는 게 확실했다. 전대 영주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 소수 귀족과의 타협에 희생되었던 민회가 회복된 순간이다.
“저희 기술자들은, 오직 이 영지 마나의 기술만이 성읍의 결계와 적의 마도술 방어에 유효한 대응이 될 것을 압니다.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기술자들도 조금 벅찬 표정과 눈길로 이쪽을 바라봤다.
‘아일라 씨가 얘기해 준 그대로군. 이게 기술자 관련 임무를 해결한 덕인가.’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상단의 숫자는 거의 승리에 가까워졌다. 기술자 집단의 지지가 끝나자 멈춘 숫자는 11:7. 남은 표는 단 하나뿐. 네마냐는 소작농 집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소작농들도 이미 한 번 겨울 추위의 그림자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구를 따릅니까? 기쁘게 계약하겠습니다.”
농민들은 작정하고 지주를 암시하는 발언을 던졌다. 지주들은 당황하고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건방진 놈들이!
―우리가 그간 그렇게 살펴 줬거늘!
물론, 예상치 못한 기후 변화와 작황 악화가 지주의 탓은 아니다. 나름 그들도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깎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주의 입장에서 취한 ‘너그러움’은 농민에게 ‘기만’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네마냐 자신은 그저 이들의 관계에 생긴 틈새로 자신을 보였다.
“…….”
긴 침묵이 이어졌다. 대화에 끼지 않은 채로 상황을 줄곧 지켜보던 미하일이 드디어 어색함을 풀고 나왔다.
“자, 그럼. 의견을 모두 나누었으니 표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이런 세계에 비밀 선거나 평등 선거의 원칙은 없었다. 바가반드의 지주 대표 15인은 원칙대로 3표씩, 총 45표를 행사했다. 이게 가스파리얀 시절 민회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런 작은 영지의 규정이란 허술한 것이다. 영주가 원하면 바꿀 수 있는 관습법이지.
‘정말 필요할 때 우회해서 풀어낼 수 있단 게 어찌 보면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맨손으로 지주들 10명과 싸울 뻔했으니.’
표결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분노에 찬 작은 목소리가 속았다, 당했다를 연발하며 으르렁댔다. 그러나 감히 자신조차 바라보지 못하면서 내는 불만은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자, 결과가 나왔습니다. 바가반드 민회의 귀족 대표 25인, 찬성 열다섯, 반대 열 표. 가산 제도에 따라 찬성 45인, 반대 30인입니다.”
장인층 대표 10명, 농민층 대표 10명, 바가반드 파견 신관 5명의 표까지. 하나씩 표를 헤아리던 끝에, 웃음이 절로 피어 나왔다.
“장인 대표 10명, 농민 대표 10명. 신관 5명도 손을 들어 주세요……. 모두 확인했습니다. 에, 25명 중 찬성 만장일치 스물다섯 표입니다. 그러면, 에, 어떻게 되더라.”
“찬성 일흔, 반대 삼십이군. 삼분지 이는 가뿐히 넘지 않나, 재무관?”
그 말을 할 기회를 넘겨주고 싶었던 듯 녀석이 바로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끝났습니다. 민의는 영지 마나의 운용을 원하는군요.”
사람 좋은 표정으로 인기몰이 하는 녀석답지 않게 오늘은 차가운 썩소가 진했다. 같은 지주 계층으로서도 봐 줄 수가 없는 추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봤으니까.
‘소위 세상 잘난 귀공자가 혁명 운동가가 되는 과정 같군.’
알리야는 뭐라 더 덧붙이려 나섰지만, 그마저 아가야니안 가문의 찬성 발언으로 깨끗이 무너져 내렸다.
“영지의 가장 오래된 가문으로서, 우린 기꺼이 영지와 주민의 안전을 위한 마나 징수를 환영합니다. 기꺼이 계약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그 대의에 동의할 겁니다.”
네마냐는 감사 인사와 함께 눈인사로 아가야니안의 당주와 감사를 나누었다. 아가야니안 가문의 쐐기로 지주들은 불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민회에서 동의해 준 대로 영지 마나 제도는 도입하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계약을 진행할 겁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다려 준 귀빈들께도 선물을 하나씩 안겨 줄 차례가 왔다.
“제 직권 결정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모든 동맹에, 마나 영지의 기술과 장비를 지원합니다. 우리는 하야스단의 모든 동맹과 함께 나아가고, 함께 물러날 겁니다.”
그러면서 허리춤에 그때까지 달아 두었던 무거운 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영지 마나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놀랐다. 저 훌륭한 공조 장치를 적극적으로 동맹 구축에 쓰겠다는 뜻이니까.
‘역시나 히파타 사제나 바누라트 경은 눈빛이 초롱초롱하군. 어라, 저 사람은…… 왜?’
네마냐를 당혹스럽게 한 건 전혀 다른 제삼자였다. 조용히 구석에서 자리를 지키던 카나보스, 제국 참사관이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국 기술보다 업그레이드된 걸 너무 무턱대고 가져왔나? 나쁜 관심은 아니겠지, 그래도?’
이 정도로 제국에서까지 주목을 받을 줄은 몰랐다. 네마냐는 이제 그 관심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돌려 고블린 전쟁에서 모두 쏟아 낼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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