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하야스단에서 각 세력 사이에 불꽃이 튀는 동안, 어김없이 온 세상에 밤이 내렸다. 환관이 물러가자, 향을 피운 향로에선 재스민 향이 흘러나왔다.
“으하하, 이것 좀 봐. 국경에선 또 말썽이야.”
“알만(Alman) 지방 말씀입니까?”
방에는 월계관 모양의 황금 머리 장식을 쓴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되묻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번엔 화해하나 싶었더니 결국 또 터졌어. 매사 우리 탓을 하더니만 자기네들도 화합을 못 하는데.”
외국인이 쓴 것치곤 문장이 나쁘지 않다는 평과 함께, 사내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알만……. 그쪽 방언으론 하야스단이라던가.”
남의 집 불난 소식에 신난 듯 떠들어 대는 젊은이. 그러나 백합꽃 모양이 옷에 가득한 늙은 대신은 시큰둥했다. 쓴웃음과 함께 젊은 상관은 편지를 고이 접어 두었다.
“……재미없나 보군. 알았어. 고블린 이야기야. 고블린이 겨울에 침공한다는군.”
눈처럼 하얀 비단옷을 느슨하게 차려 입은 청년이 한참 닳은 파피루스를 내려놨다. 금빛이 살짝 배긴 듯한 은회색 머리칼이 촛불을 받아 반짝인다.
“고블린들 말썽이야 언제나 있는 일 아닙니까. 아니면 뭔가 다른 말썽이라도 있습니까.”
건조한 음성에 젊은이는 수상한 미소로 건너편 어둠을 바라본다.
“관심 없다더니, 거짓말이군. 왜, 그 몇 달 전에 바난드에서 보고했던 일 있잖아.”
“아, 그 산골 영지 말입니까. 전 족장이 고블린과 음모를 꾸미다 퇴출당했지요.”
“흥, 천상의 왕좌건 산기슭 초막이건 권력과 음모엔 한도 끝도 없는 법이지.”
약한 콧방귀를 흘리며 청년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비단옷이 소맷귀에 주름지게 쌓였다가 미끄러져 내렸다.
“그놈의 권력이 다 뭔지. 이런 거라도 끼워 보고 싶은 건가.”
오른손에 끼고 있는 두 개의 인장 반지를 본다. 하나같이 정교하게 세공된 제품이다. 하나는 군의 통솔을 명령하는 명령권자의 것, 다른 하나는 전국의 마법 조직에 명령할 수 있는 인증 도구였다.
“부질없는 일이지.”
젊은이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이런 막대한 권력을 고작 두 개의 손가락에 꽂아 둘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얀 비단에 일렁이는 등잔 그림자 사이로 두 반지가 반짝였다.
“안 그래도 피곤해서 집어치우고 싶은데, 이젠 야만족과도 싸워야 하나. 돈만 아깝게.”
남의 일처럼 바라만 보던 늙은 대신도 다가와 비밀 서한을 들춰 보았다.
“……폭설이 내릴 때라. 그쪽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곳이니 지금쯤이면 이미 늦가을이겠군요. 조만간입니다.”
“하.”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로 젊은이는 한숨을 토했다.
“귀찮다고만 마시고 우리 군도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난 8년간 고블린들이 잠잠했던 건 이 원정을 위해서였을 겁니다.”
“차라리, 이 반지를 줄 테니 자네가 싸워 보는 건 어떤가. 원로원 영감들도 좋아할걸.”
손뼉을 치며 반색하는 젊은 황제의 어처구니없는 제안. 만사에 ‘귀찮다’가 나오는 황제를 달래기 위해선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노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원로원에선 당장 황제 자리 내놓으라고 난리를 칠 겁니다. 일을 안 한다고.”
“그 지역은 10년 전에 끼어들었다가 대판 깨진 뒤론 신경 쓰기도 싫다니까 그러네. 아, 그래도 최근에 재밌는 일이 있는 모양이야.”
“뭡니까, 그게?”
황제는 신하가 들고 있는 편지 한구석을 손가락으로 튕겨 냈다. 근래 본 것 중에 가장 흥분한 모습이었다.
“흥미로운 지점이야. 이번에 새 영주가 되었다는 젊은이가 17살이라네. 갓 성인이 된 거지. 수습 기사 신분에 말이야.”
“전 영주의 음모를 밝혀내고 고블린 군대도 격퇴했다는 그 사람이군요. 폐하의 새로운 취향입니까?”
“크하학!”
예상치 못한 공격에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고 곧 사레까지 걸렸다.
“쿨럭, 영웅이라! 황제 입장에선 혐오스럽지만, 호사가로서는 좋아하는 타입이지. 그래, 그 영웅에게 관심이 가는 거야.”
잠시 어딘가 생각에 빠진 대신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조심스레 말을 끌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 일전에 지리학회에서 마정석 광산을 찾다가 매입에 실패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응, 한 1년 전쯤에 그랬던 기억이 나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지리학회는 왜?”
“그 지리학회의 기밀 보고에 따르면 마법을 배우지도, 마법학회 명단에 이름이 오르지도 않은 젊은이 명의로 광산이 단체로 넘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때 황제의 표정은, 묘사하자면 딱 ‘이것 봐라?’였다. 마치 불륜한 배우자의 단서라도 잡은 듯한 회심의 표정.
“……아무 연고도 없는 무명의 젊은이라. 찾아내기 힘든 마법의 근간 자원을, 그것도 학자들도 간신히 알아 가는 광맥을 찾아내 접수했다?”
시종일관 무슨 짓을 해도 살아날 것 같지 않던 황제의 썩은 동태눈에 살짝 생기가 돌아왔다.
“재미있으시군요.”
“재미있어, 재미있어. 재밌고말고, 하하.”
아무래도 상관없는, 불구경만으로도 재밌을 상황이다. 신기한 장막에 휩싸인 새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나. 스무고개라도 하듯 추리하는 맛을 좋아하는 황제. 그의 반응을 끌어내기엔 이 방법이 제일 효과적이다.
“……내가 맞춰 보지, 니콜라스. 그 수상쩍은 광산주가 바가반드의 제후라는 건가? 그렇다면 잘 쓰인 소설쯤은 되겠지만.”
제법 비꼬는 평가였다. 그러나 이 정도에 오랜 경험을 쌓은 관료를 흔들 수는 없었다.
“현지에 파견된 정보 요원의 다른 보고에선 그 영주가 아주 독특한 재주가 있답니다. 뭔가, 마법사 같긴 한데 마법사는 아니랄까요.”
“정령사나 소환사라도 되는 건가? 그 둘이 드물기는 하지만, 별건 아닌데.”
“글쎄, 고작 그런 정도면 우리 요원이 비싼 특수 도료 처리한 편지를 보내며 알렸겠습니까.”
니콜라스란 이름이 드디어 밝혀진 노인은 등불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이에 비해선 덜 벗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반쯤은 모발이 사라졌다. 니콜라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강조했다.
“모르시겠습니까? 이 의문의 인물이 앞으로 알만은 물론, 제국의 변방 안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겁니다.”
황제는 시큰둥한 평소의 얼굴로 돌아갔다.
“반항하는 마법성이나 불순한 게람나인들, 북쪽 혼돈 숲의 괴수들만 하겠어?”
더군다나 하야스단엔 그 시건방진 마탑과 정신 상태가 이해 가지 않는 성국도 있었다.
“우리는 욕을 먹어 가면서까지 알만 지방을 점령했습니다. 고블린의 야망을 점검해 보려던 겁니다. 물론 지금 위험한 상태지만.”
“…….”
“그런데, 거기에 상황을 바꿀 새로운 요소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흠.”
황제는 대답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 비밀스러운 골방에 창문이라곤 오직 북쪽 황야를 향한 쪽창 하나뿐이다. 황제가 창밖을 보자 니콜라스는 다시 그 뒤로 다가갔다.
“변수…… 변수라.”
무언가를 중얼대는 이 철없는 젊은이에게, 니콜라스는 다시 간언했다.
“우선 특사는 파견하는 게 좋습니다. 서둘러서 말입니다. 물론 우리 군도 방어 태세를 갖춰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의문의 인물이 우리에게 어떤 상대가 될지 말이지. 그렇지 않나?”
다시 니콜라스에게로 돌아선 청년의 얼굴에서는 아까처럼 호기심 어린 장난기나 무관심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찬 기운에 창백해진 얼굴빛이 훤한 외모와 합쳐져 낯선 느낌을 자아냈다.
“…….”
그저 묵묵히 선 니콜라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황제는 스스로 결론을 내릴 준비가 되었다.
“알맞은 후보를 택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맞은 후보라니, 그건 내 앞에 계신 양반밖에 없는데.”
“저를…… 말씀입니까. 그러나 고원의 문제는 군대와도 직결되는데, 원로원이 황제의 총신에게 군 지휘권을 주려 하겠습니까.”
원로원 석 자를 말하자마자,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황제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곧장 비서국에 가서 내 뜻을 밝히고 절차를 밟아. 내가 단독 임명할 수 있는 최고 품급이 리가토스였지, 아마?”
황제는 나지막하게 해야 할 일을 천천히 일러 주었다. 대체로 그런 일들이란 변경의 시찰, 외교 활동 정도에 국한되는 일이다. 물론 이번의 재밌는 변수 역시 그 대상이 될 것이다.
“혹시나 하는 이야기지만 우선은 고블린을 막을 수 있도록 현지의 갈등을 조정해 주는 게 필요할 걸세. 기본적으론 제국의 이익에 맞게 만들어야겠지만.”
“현지에 우리 군도 있지 않습니까.”
“아직은 군대가 나설 단곈 아니네. 하야스단에서 더 적을 만들진 말아야지.”
황제가 거절하면 니콜라스도 더 주장하지는 않았다. 서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아는 사이다. 군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
“뭐, 켈리도니온의 성녀란 양반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건 없어. 마나에 신격을 부여하는 촌것들이 매일 하던 걱정이겠지.”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황제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닐 거야. 고블린이 힘을 모았으니 우리도 조심스레 대응해야지.”
니콜라스는 수염 한 터럭 나지 않은 주름진 얼굴을 깊이 수그리며 예를 갖췄다.
―화륵.
촛불에 불을 켠 황제가 어깨를 숙였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키에 맞추어 허리를 숙인 황제가 늙은 환관의 손을 어루만졌다.
“마법성에서 연락용 반지를 받아 가게. 언제든 연락하고, 전권 대사. 한동안은 경이나 짐이나 고생깨나 해야겠어.”
* * *
겨울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바가반드의 작은 땅뙈기에서 밀과 순무의 수확이 끝난 것도 이즈음. 덕분에 농부들은 농번기를 마치고 휴식에 들어갔다. 물론, 이제는 겨울에 바빠지는 사람들이 영지에 더 많았지만.
“영지에 오고 나선 첫 시찰이시군. 영주님 너무 게으르신 것 아닌가?”
“그러는 우리 재무관님은 자주 오시나?”
나란히 서서 시장을 나서는 두 젊은이. 네마냐와 재무관 미하일이었다. 미하일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쪽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나는 여기 접수한 순간부터 매일같이 시장을 살펴봤지. 물가가 어떻게 변동하는지도 조사해 와서 이젠 눈 감고도 흐름이 보인다니까.”
“매일 잠 안 자고 피곤하다 허풍을 치나 싶었더니, 일을 하고 있었구나?”
네마냐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받아치자 미하일도 콧방귀를 마주 뀌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데 기본적인 방법이야. 알아 두라고.”
미하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귓가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네마냐는 잠시 멈추어 눈을 감았다.
[시장 조사 1]
[영지 운영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은 경제입니다. 정기적인 시장 조사로 현재 영지가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하세요. 해결할 때마다 보상과 효과가 랜덤으로 적용됩니다.]
‘시장 조사라…….’
가끔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만 개입하고 필요할 때 칭호나 능력을 부여해 주던 시스템. 마치 아직 자기가 죽지 않았다고 확인시켜 주는 것처럼, 오랜만에 뜬 게 마침 시장 조사였다.
‘1이라는 건 반복 임무란 소린가? 보상이야 뭐 별것 있겠냐만 일상적으로 하긴 좋겠군.’
이제는 저 배후가 무엇인지는 아무렇지 않아졌다. 큰 도움은 아니어도 큰 틀을 보고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니, 꽤 요긴했다.
‘속셈이 어떻든 내게 좋은 건 다 써먹어 주도록 하지.’
그런 생각을 하는 중, 미하일이 과일 장수에게 다가가 시끄럽게 나누는 말이 들렸다. 단순하게는 일상 신변부터 물가에 대한 것까지 폭도 넓었다.
‘정말 보고 그린 듯한 재무관 그 자체라니까.’
현대였으면 시장 유세도 가능했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연기력이다. 네마냐는 미하일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둘러보는 저잣거리엔 그래도 생기가 흘러넘쳤다.
“자, 자! 바난드에서 갓 들여온 싱싱한 채소요, 채소! 동화 닷 푼에 바구니째로 들여가시오.”
“아니, 이 계절에 그런 싱싱한 상추는 어디서 들여왔대?”
“9월 말에 겨우 수확해서 보관해 둔 걸 막바지에 긁어 왔지! 좀 있으면 순무밖엔 없어. 지금 챙겨 가서 드시우!”
“그러게. 그런데 가격이 좀…….”
저잣거리의 흔한 풍경은 네마냐에게도 좀 익숙한 장면이었다. 이따금은 이렇게 지켜보기만 해도 옛 생각이 나는 것 같아 좋았다.
“어허, 이 양반. 요즘 이 정도 상급 상추가 동화 닷 냥이면 헐하지. 그나마 새 영주님이 대량으로 물건을 들여오셔서 값이 절반이 된 거라니까.”
물론 이제는 뿌듯함도 느껴졌다. 언어도 다르고 인상도 다르지만, 어쨌든 내가 무언가 하나 도움이 되었다는 감상이었다.
“이상하군. 내가 겨울을 타기라도 하나. 가격 흥정을 듣다가 코가 시큰거릴 줄은.”
“처음에 왔을 때보다는 많이 안정됐지. 물가가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미하일은 금세 따라왔다. 한쪽 팔에 서류철을 펼쳐 두곤 필기용 작은 펜을 들고 있었다. 슬쩍 들여다보니 빼곡하게 갖가지 숫자가 쓰여 있었다. -라틴 숫자로.
‘아무리 그래도 저건 익숙해지질 않는다니까.’
조만간 인도 숫자라도 가르칠까 생각을 하면서 네마냐는 다시 원래 나누던 대화로 돌아왔다.
“생필품 물가는 가장 우선적인 문제였으니 당연한 얘기지. 군용 물자 창고까지 개방한 게 잘 먹혔어.”
“그것도 마정석 광산이 거의 담보 역할을 했으니까. 광산도 벌써 돌아가기 시작한 게 엄청나게 빠른 편이야.”
지금까지 상당수의 결제분은 거의 미래의 마정석 제품을 담보로 잡았다. 바난드 길드와 왕의 이름까지 빌린 건 참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형 상단과의 제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생필품은 이제 됐고, 이제부터 중요한 건 공산품 아니겠어? 긁어모은 장인들도 이제 마정석 가공을 시작하겠지만, 사실…….”
“응?”
미하일은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인지 종이에 슥삭 무어라 쓰더니 이쪽으로 보여 주었다.
‘네 마나 공조석 기술. 어떻게 알았는지 용병단이랑 마법 조합에서 접촉하더라.’
아마 최근에 들었던 소식 중엔 가장 네마냐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릴 긁으며 화를 냈다.
“하? 그건 아직 공표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려진 거야?”
마나 공조석. 사용자가 사용하는 마나를 자동적으로 변형시켜 자연상의 마나와 일치시키는 도구다. 스스로 그 과정을 대체하는 마법사에겐 필요가 없는.
“2차 가공이 없이도 마정석을 일반인이 쓸 수 있도록 하려면 그 장치가 필수니까.”
복잡한 마정석 가공이 없어도 이 장치만 있다면 일반인도 마법사처럼 능수능란하게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그러니 부르는 게 값일 정도의 강력한 상품이기도 하다.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 영지에서도 극비 사항인 게 어떻게 유출된 거야?”
“어쩌겠어. 마법 연구소에서 워낙에 고급 마정석 원석을 싹쓸이하니, 시장에 소문이 쫙 퍼졌다는 거야.”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시세가 폭발하니, 자연스레 다들 누가 손을 대는지 알았겠지.
“재료만 검토해 보면 뭘 만드는지도 알 테고. 거참, 기운 빠지네. 시장 안 봐도 되겠어.”
마침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잡화점만 해도 광물 제품 매대가 텅 비어 있었다. 일단 민간 시장에 돌아다닐 자원은 없는 게 확실하다. 네마냐는 자연스레 눈을 감고 화면을 주시했다.
[시장 조사 1- 마나 공조석]
[마나 공조석은 이 세계에서 마법을 펼칠 수 있는 편리한 도구다. 인간 체내의 마나는 자연과 호환되지 않아 별도의 처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제작자의 마나 취급 실력에 따라 그 수준이 달라진다. 중요한 전략 자원이다.]
[목표: 일정량 자원을 확보하고 수익을 확보하십시오. 목표량: 50/500골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단 건가.”
구체적인 목표가 제시되는 걸 흥미롭게 평가하는 네마냐. 작게 혼잣말을 하자 미하일이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응, 뭐가?”
“별것 아냐. 마나 공조석 소문이 벌써 퍼지지는 않았으면 했는데, 아쉽단 소리였지. 아직 보유량이 목표량의 10% 수준인데.”
걱정도 많다는 이야기와 함께 미하일이 노트를 덮었다.
“조급할 것 없어. 이제 다들 네 움직임을 기다리면 기다렸지, 재촉할 사람도 없을 거야.”
“성국 대신관의 신망을 받고 왕국의 보호를 받는 영주를 건드릴 사람은 물론 없겠지.”
자뻑이라도 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은 편해졌다. 원하는 속도는 아니었지만, 이제 움직여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그러면, 좀 아깝긴 해도 마나 공조석 카드를 지금 꺼내 들어도 되겠지.”
“이제 공개적으로 알리려고? 밝히고 나면 이제 뒤로 다시 물러서긴 어려울 거야.”
길가를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넘기며 네마냐는 잠시 할 말을 생각했다.
“……그래야지. 이제부턴 우리와 아군, 적군이 분명하게 갈리기 시작할 테니까. 우리가 주인공의 역할을 가져야지 않겠어?”
“바난드 길드 때 이후로 또 재밌는 연극 하나 보겠는데. 기대해 보겠어.”
“후…….”
미하일의 말에 뭐 그런 걸 기억하냐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얼굴은 웃었다. 옅은 입김을 뿜으며 두 사람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왁자지껄한 시장통 가운데로 걸음을 바삐 옮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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