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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65화 (64/200)

65화

“하아.”

날이 차면 으레 입김을 부는 게 습관이 되었다. 매일 같이 입김의 양이 늘어났다. 미하일은 한 번 더 입김을 불었다.

“어, 다들 기다리고 있었네, 아 씨…….”

새벽부터 공방으로 나가는 아일라는 매일 같이 가벼운 욕설 한마디로 아침을 열었다.

“에라, 이놈의 날씨는 적응이 안 되네. 27년을 살아도 익숙해지질 않아.”

“27년이라뇨. 이제 생일도 지났으니 28년이라고 쳐야, 윽!”

“이 누님이 입을 어떻게 하라고 했지?”

세게 찬 것도 아닌데 미하일은 난데없이 정강이를 얼싸안으며 낑낑댔다. 치는 사람이나 아픈 척하는 사람이나 수준급 연기다. 아일라가 미하일에게 다시 얼굴을 들이대자 겁에 질린 (척하는) 녀석이 급하게 읊어 댔다.

“새, 생각하고 말하라고……. 맞죠?”

“잘 기억하는군. 예절은 잊으면 안 되지, 암.”

힘이 빠진 듯 주저앉은 미하일이 땅을 짚고 일어났다. 손에서 물기 하나 없는 흙 부스러기가 한 줌 우수수 흘러내렸다.

“심각하네, 토양도.”

“흙이 아주 사막 수준이네. 원래 이랬어?”

아일라가 마치 사막처럼 부스스 흩어지는 흙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어릴 적에도 건조 현상 때문에 어르신들이 난리였던 건 기억나요. 하지만 아직 겨울이 시작도 안 됐는데 이렇게 메마를 줄은…….”

말을 마쳐도 입은 다물지 못한 미하일이다. 영지의 제2인자인 재무관으로서 눈앞이 캄캄했다. 재작년에는 소영지 수준인 금화 600개를 벌어들이던 바가반드다. 하지만 작년엔 겨울이 길어지면서 수입이 400개까지 줄었다. 농업 하나만 죽자고 파는 동네에 기후가 메마르고 추워지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나마 우리 영지는 재빨리 산업으로 전환해서 다행이야. 지금도 세수입은 늘고 있으니.”

금속 기술 마스터께선 태평하게도 농사가 망해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긴, 마정석 원재료만으로 수입이 뻥튀기되었으니까, 그럴 만하다.

“베타(B) 등급의 마석을 기초 가공해서 상단 측에 넘긴 덕이죠. 후, 누님 덕이네요.”

“알면 좀 더 공손하게 대하란 말이야.”

미하일의 평가가 싫지는 않은지 잔기침을 하며 아일라가 시선을 돌렸다. 미하일은 스윽 웃음을 떠올리며 일어났다.

“다행히 이번 달을 기해서 올해 세입은 금화 600개가 넘어갈 예정이에요. 지출이 더 빠르게 늘어나는 건 걱정이지만.”

“전쟁이 벌써 터질 판이니까 흑자가 나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잠시 멈추어 있던 두 사람의 발길은 다시 하염없이 앞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 말도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는 미하일의 눈 밑에는 그늘이 도드라졌다. 미하일은 하나씩 손가락을 꼽으며 자신의 두통거리를 헤아렸다.

“영지 마나 체계를 구축할 돈, 민병대 무장을 마정석과 철갑으로 강화할 돈, 각처 요새를 증축할 돈…….”

한순간 헤아리던 동작이 딱 멈췄다. 왜냐면 훨씬 머리 아픈 지출 항목이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르빌에 지원해야 할 돈까지! 으아아, 진짜 머리 터져 버리겠네. 왜 마법으로 금화 만드는 기술은 없는 걸까요? 아, 연금술 마렵다!”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이다. 필요하다고 금화를 만들어 내 봤자, 그만큼 물가가 팽창해 버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재무관 출신인 아버지에게 공부를 배웠던 미하일답게 그런 건 잘 알았다.

“농담으로라도 손목 달아나는 얘긴 하지 말고. 마정석 2단계 가공을 곧 시작할 거니까 좀만 더 참아 봐.”

아일라가 위안 삼으라고 던져 준 한마디. 오랜만에 듣는 희망찬 이야기에 미하일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요?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한 달 보름은 빠른데요?”

“입이 귀에 걸리네? 밤낮없이 장인들 갈궈 대랴, 보조하랴, 삭신이 쑤신다.”

미하일은 즉시 아일라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아부성 멘트들을 쏟아 냈다.

“역시 하스페다의 손이란 별명이 말뿐인 게 아니었다니까. 덕분에 한숨 틉니다, 누님?”

“흥.”

마정석은 마법이 시대의 첨단인 이 세계에선 제조업의 핵심이었다. 마정석을 자유자재로 마법에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가공은 복잡했다.

“1단계 마석은 숙련된 마법사나 쓰지만 2단계부턴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쓸 수 있으니까요. 요즘 시국이 안 좋으니 수요가 폭발한다죠.”

미하일의 설명에 아일라도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서 요즘 1단계보다 2단계 가공 물품이 유독 비싸진 거였어. 가공 난이도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니.”

“정답!”

한쪽 눈을 껌뻑이며 미하일은 사무실 문을 밀었다. 영지 재무관의 근무지인 이곳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책이나 서류라면 질색을 하는 아일라로선 끔찍한 풍경이었다. 숨을 참은 채 장인이 곳곳의 창문을 열었다.

“아, 냄새가 심해요? 청소 좀 해 둘걸. 네마냐 녀석이 도착할 때까지 지출 계획을 정리해 달라고 해서요. 덕분에 시간이 없, 콜록!”

“야, 계속 이러고 있으면 폐병 걸려!”

이리저리 쌓인 먼지를 털어 낸 두 사람. 수십 년 묵은 적폐에 섣불리 걸었던 싸움은 곧 포기했다. 환기를 위해 문을 열어 둔 채 미하일은 입구의 돌층계에 앉았다. 아일라는 계단을 내려와 서서 시선을 마주했다.

“또 일거리 밀리게 생겼네. 괜찮겠어?”

“어쩌겠어요. 음, 시간으로 보면 네마냐도 곧 도착하니까. 그때 환기 상태 보고 다시 준비하죠, 뭐…….”

그때 아일라의 시야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말이 씨앗이 된다고, 그 영주님 오셨다.”

“여! 다들 기다리고 있었네?”

바난드에서 하례회 참석 선물로 받았던 검은 예복을 걸친 네마냐였다. 옷은 좀 사서 가라고 미하일이 얘길 해도 듣지 않던 녀석이 그나마 챙긴 예복이었다.

계단에 웅크리고 있던 미하일은 건물 앞쪽에서 다가오는 네마냐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라고, 영주님. 못 본 새에 더 골치 아픈 일들을 벌이셨더라? 이젠 전쟁 국면이야.”

크게 웃어 대며 네마냐는 빠르게 거리를 좁혀 왔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아일라도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하라드 마법사는 안 보이네?”

“아, 하라드는 마법을 좀 쓰느라고 고생했으니 먼저 자게 들여보냈어요.”

“잘했어. 쉴 수 있는 사람은 쉬어야 돼. 안 그러면 얘처럼 사람이 어느 순간 돌아 버리거든.”

그 말에 미하일이 툴툴대는 모습을 보고 네마냐도 농담을 걸었다.

“우리 재무관님 심심하시면 안 되지. 요즘 돈이 들어오니까 일이 너무 쉽지?”

불안을 직감한 미하일은 곧바로 아부 모드로 돌입! 하지만 네마냐는 완강히 고개를 젓는다.

“제발 좀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오늘부턴 더 정신없을 거야. 당장 다르빌에 보낼 차관부터 논의하고, 호족도 만나 봐야지.”

호족과의 만남. 영지 마나 도입을 위한 선언을 하려는 것임은 세 사람 모두 잘 알았다.

“세상에, 이젠 영지 귀족들과도 한판인가. 안 그래도 세금 때문에 죽일 듯 보던데.”

산을 몇 개 넘은 뒤, 하늘을 찌르는 절벽을 맞닥뜨린다면 지금과 비슷할까? 아일라는 두 사람에 비하면 조금 느긋한 표정으로 머리 뒤에 깍지를 꼈다.

“두 사람에 비하면 그나마 나는 2단계 공정만 시작하면 되네. 수고하라고. 그만 공방에 출근해야지. 안 그래도 저 뒤에서 또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거든.”

아일라의 말에 뒤를 돌아본 네마냐의 시야로 경비대장이 보낸 전령이 들어왔다.

“영주님, 사절이 찾아왔습니다.”

“사절? 이제 겨우 해가 떴는데?”

밀려오는 피곤함을 호소하기라도 하듯 하품을 해 보지만 전령은 할 일을 해야 했다.

“암피에르에서 온 사절단인데, 다소 격앙된 분위기였습니다. 어떡할까요?”

“암피에르?”

네 음절에 복잡한 감정이 사무쳤다. 암피에르.

“어이구? 아라가트 마탑이시네? 너 거기까지 적으로 돌린 거야?”

“말로 하면 짜증 나니까 그쯤 해 두자, 미하일.”

암피에르. 일반인에겐 접근조차 불허된 땅. 덕분에 온갖 오버 테크놀로지가 있다는 망상의 대상이었다. 무엇보다 마탑의 본거지라니 그런 망상이 생길 만하다. 아일라를 보내고 두 사람은 다시 영주관을 향해 걸었다.

“암피에르가 왜 지금 사절단을 보냈지?”

미하일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의아했지만 네마냐는 너무나 이해가 잘 됐다. 너무 잘 돼서 공연한 짜증이 일었다. 보나 마나,

“키메라 때문이겠지, 쳇.”

“키메라? 너 또 키메라 만났어?”

“이번에 간 게 마시스 성소를 확인하러 간 거니까. 집을 주인에게 돌려주려면 만나야지 않냐. 예상대로 고블린들이 득실대더군.”

일부러 거기서 일어난 일에 대해선 침묵을 지킨 네마냐였다. 미하일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흠. 마탑이 댈 만한 명분은 암피에르 조약인가? 듣자마자 바로 찾아온 걸 보면.”

“그러겠지.”

차가운 두 손을 문지르던 네마냐의 의식이 암피에르 조약에 다다랐다. 입김이 하얗게 나오자 생각은 차분해졌다. 뼈가 시릴 정도로 시퍼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조약이라. 이건 좀 골치가 아프겠어.”

내전에 제국이 개입하고, 하야크 왕위가 파괴됐다. 이런 상황에서 아라가트 마탑은 일종의 평화 조약을 중재했다.

[정당한 왕만이 소유할 수 있는 마시스 성산, 키메라 성소, 마나의 원천. 이 세 가지 자산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도록 동결한다.]

이에 따라, 어떤 이유로든 조약을 침해하는 사람은 ‘고원인’들이 공동 토벌한다는 내용이다. 말이 좋아서 세 가지 자산이지, 모두 마시스 산, 키메라 성소에 있다.

“조약을 핑계 대고 들어오면 피곤해지긴 하지. 우리 가스파리얀 씨도 거기 조인했던가?”

전 백작 가스파리얀이 끝내 조약을 무시했다면 그나마 도움이 됐겠지. 하지만 그 희망도 미하일의 설명에 깨져 버렸다.

“연락도 안 하고 버티다가 조인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위협을 받았거든. 결국 우리가 바난드에 있을 때 체결됐어.”

“아, 젠장.”

기억난다. 회귀하기 이전에도 바가반드는 똑같은 이유로 전쟁에 휩쓸릴 뻔했다. 가스파리얀은 그걸 어떻게든 막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가스파리얀은 무릎을 꿇었어.’

마을을 몇 군데나 마법으로 파괴하는 마탑의 공세에, 바가반드 같은 소영지가 버틸 수는 없었다. 암울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네마냐는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걱정할 건 아니야. 이제 우리는 좀 더 믿을 만한 뒷배가 생겼으니까.”

“성국…… 말인가? 하지만 오늘날의 지케른만으로는 역부족일 텐데.”

“두고 보면 깜짝 놀랄 거야, 후후.”

의미심장한 웃음을 나름의 암시라고 흘렸다. 미하일 녀석이 못 알아들은 건 마찬가지지만.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오래 기다려 준 전령에게 양해를 구했다.

“가서 사절단을 정중하게 모셔 둬. 이곳 영주관에서 만나도록 할게.”

“넵!”

전령이 부리나케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미하일은 나지막하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래도 폭풍이 조금 덜했으면 좋겠는데, 라고. 하지만 무어라 중얼거려도 올 것은 오고야 만다.

* * *

“거, 한참 꼬장꼬장한 양반들과 싸우다 왔더니 이젠 극한까지 가게 됐군.”

“쉿, 그 영감들 들으신다.”

미하일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 잔뜩 굳은 얼굴을 한 검은 로브의 영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깥에서 문을 열어 준 근위병이 목소리를 높여 알려 왔다.

“마탑 사절단의 행차입니다!”

불편한 자리에 앉았다. 옆에 기립한 미하일은 영지의 권위를 상징하는 막대기를 짚었다. 자작나무를 은도금한 이 지팡이를 마르케르라고 부른다. 영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마탑의 사절이 바가반드 영주를 뵙습니다. 취임을 축하드리며…… 평화가 영지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겁이라도 주려는 심산인지 잔뜩 표정을 찌푸린 채였다. 비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저쪽의 의도를 먼저 캐 볼 심산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암피에르의 현자 어르신들. 바가반드의 영주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친절한 마중에 감사합니다.”

어딘지 성의 없는 목소리였다. 인원은 대략 7명. 그들을 빠르게 훑어보는데 시야에 제법 익숙한 얼굴도 스쳤다.

“에브디코 말카시안 박사도 있군요. 저번엔 어두침침한 곳에서 만나느라 얘기도 못 했는데.”

말카시안은 조소를 띄우던 그때와 다르게 오늘은 말 한마디 없이 인사했다. 사절의 대표가 말카시안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홀로 대답했다.

“말카시안을…… 그래, 먼저 만나 보셨군요. 좋습니다. 음,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사절단 대표는 흰 수염 노인이었다. 그가 국서를 건넸다. 아라가트 산의 곰을 묘사한 은색 봉인이 달려 있었다. 네마냐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영주가 되고 두 달 만에 무려 암피에르의 봉인을 받아 보는 저 같은 사람도 드물 겁니다.”

그렇게 펼쳐 본 신임장. 7명의 이름과 권한 위임을 알리는 서명이 실려 있었다. 대표자의 이름은 테트라 추흐빈.

‘추흐빈이라……. 역시 마법계의 명문가네.’

신임장을 돌려주며 추흐빈과 마주 보았다. 팔걸이에 손을 올리며, 네마냐는 느긋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잘 봤습니다. 그래. 마탑주께서는 어쩐 일로 저에게 연락을 취하셨답니까.”

“아마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암피에르 조약을 상당히 위반하셨기에 저희가 확인차 방문한 겁니다.”

“위반이라.”

얼음장과도 같은 차가운 웃음. 네마냐는 그저 흥미롭다는 듯 오른쪽 손으로 턱을 괴면서 대답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평화로운 대화는 물 건너간 셈이다. 게다가…….

[경고.]

[적대적인 마나의 흐름이 감지됨.]

뭐가 이렇게 당당한가 싶어서 슬쩍 [탐지] 스킬을 써 보니 나온 결과.

‘이것 봐라? 영주 앞에서 실력을 보이겠다고?’

너무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 실소가 나오려 했다. 그래, 어디까지 하나 일단 보자고. 네마냐는 다리마저 꼬며 더 느물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흐음, 위반을 확인하러 왔다니. 사절단은 아니고 최후통첩을 전하러 온 분위기군요.”

추흐빈은 무시한 채 자기 이야길 계속했다.

“왕권의 상징인 키메라에 접촉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하야스단의 평화를 위해 모두가 동의한 안건인데, 드러내 놓고 위반을 합니까? 당장 접촉을 중지하고 책임을 지십시오.”

역시, 키메라와 접촉했다는 정보를 그새 손에 넣은 모양이다.

‘다르빌에 첩자라도 심었나. 하긴, 켈리도니온에서도 대놓고 첩자질을 했었으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네마냐는 추흐빈을 응시했다. 미하일은 걱정스러운 듯 눈치를 보다가, 거절하는 네마냐의 손짓을 보고 침묵을 지켰다. 미안하지만 이미 고원 방위라는 의미에서 휴지 조각이 된 조약을 존중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요? 고블린을 막으려면 소굴로 들어가야 하니 들어간 것뿐인데.”

“……영주, 못 들으셨습니까? 키메라와 접촉하며 심지어 신전에까지 드나든 겁니다. 명백한 조약 위반이지요!”

이 정도면 무릎을 꿇던가, 싸우던가를 택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재미있는 줄타기를 해 보았다. 적어도 내가 평화를 끊어서는 명분이 서지 않거든.

“고블린이 쳐들어와서 하야스단을 점령하건 말건, 방해하지 마라? 이야, 명문 추흐빈 출신이 언제 이렇게 친고블린파가 되셨나요.”

“고블린 대책은 동맹군과 제국군이 알아서 잘 합니다. 경험이 부족한 영주와 천방지축인 성국에 맡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선언이라도 하듯 쐐기를 박는 테트라.

“균형의 수호자인 우리 마탑은 키메라 접촉 문제가 훨씬 크다고 판단을 내렸고, 이렇게 최종 권고를 드리는 겁니다.”

아쭈. 이젠 대놓고 윽박이네. 최종 권고. 말을 듣지 않으면 전쟁을 불사한다는 뜻이다. 네마냐는 그 뜻을 받아들여, 손짓을 건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하일은 마르케르의 끝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계속해서 압박할 기세던 사절단이 움찔했다. 그와 동시에 마법사 테트라의 품속에서 흘러넘치던 수상쩍은 마나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금 그런 협박이 내게 통한다고 생각하나? 고블린이 턱밑까지 진격하기 시작하는 데도, 끝내 나를 희생양으로 삼아 권력을 지키겠다?”

늙은 테트라의 눈썹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말씀 조심하시오, 영주! 규칙과 원칙은 지켜야 하는 법이오!”

“풉, 암피에르 조약의 본뜻인 하야스단 방어는 내팽개치고, 문구나 수호하겠다니.”

잠시 눈을 감고, 숨을 쉰 뒤 천천히 눈을 치켜떴다. 비웃음을 한껏 떠올린 바가반드 백작은 집게손가락으로 테트라를 가리켰다.

“그 품속에 숨겨 둔 마정석만큼이나 음흉하지 않은가.”

마르케르에 몸을 의지하던 미하일이 흠칫 놀랐다.

“접견실에 마정석을 가지고 왔다고?”

“아, 아니 무슨 흉측한 망상을……!”

기겁한 테트라가 황급히 품속에 손을 넣어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이미 그의 마정석은 늙은 마법사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금속 마나의 지배자]

[당신의 시선과 탐지 영역 안에서 모든 마정금속의 마나는 당신을 주인으로 따를 것이다.]

[효과: 마나 지배력 +30]

아껴 두었던 칭호를 선택한 네마냐는 먹이를 바라보듯 흐뭇하게 적대적인 일행을 바라보았다. 여차하면 영주를 위협하려던 마도구까지 무력화됐다. 이제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영지의 대표에게 거침없이 무례를 저지르고 위해를 시도한 마탑의 사절단, 우리 영지에서 추방한다.”

이 말을 신호로 미하일이 손짓하자 기둥 뒤에서 대기 중이던 근위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테트라는 체내 마나라도 끌어 올리려 했으나 부질없었다. 체내 마나는 엄호를 받으며 미리 준비해 두지 않는 이상, 육박전에서 너무 불리했다.

“나자리안 공, 정말 마탑과 싸울 생각이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봤어야지. 우리는 마탑 따위가 아니라 산악의 보호자인 제국과 직접 소통할 거야.”

당황으로 얼룩진 노마법사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대답도 못 하는 상황.

“그럼, 안녕히 돌아가길. 적어도 이번 일에 대해 사죄하지 않는다면 공식 사절은 받지 않을 겁니다.”

영주의 고갯짓 한 번에 기세등등하던 마탑의 사절단은 모두 붙들려 쫓겨 나갔다. 그 등 뒤에 대고 들리건 말건, 네마냐는 선언을 남겼다.

“싸움을 걸어와도 마다하지 않겠다. 지금 중요한 건, 짓쳐들어오는 고블린, 그 파도 속에서 살아남는 것뿐이니까.”

자, 이렇게 주사위는 던져졌다. 접견 장소에서 근위병들에게 양팔을 잡혀 쫓겨난 테트라가 분통을 터뜨렸다.

“세력 균형을 무너뜨리고 이제는 음험한 제국까지 끌어들인다고? 하야스단을 망하게 할 자가 저놈이었구나!”

“진정하시지요, 어르신. 마탑 차원에서 공식 대응하는 게 좋겠습니다.”

말 한마디 섞지 않던 말카시안이 차분히 정리하니, 테트라도 곧 분을 삭였다. 음울한 회색빛 눈동자를 굴린 말카시안 박사는 잠시 영주관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는군.”

- 66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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