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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64화 (63/200)

64화

10월 24일, 켈리도니온.

네마냐는 휘하 보병 300명과 기사 28명을 영지로 돌려보냈다. 하루라도 동원 기간을 줄여 경비 지출을 줄이려는 생각이었다.

‘미하일 녀석이 고생하니까 이런 데서 생색이라도 내 주면 좋아하겠지. 이러다 진짜 필요할 땐 왕창 뽑아 쓰겠지만.’

그래서 성도에 들어온 네마냐는 헤누크와 알리테스만을 곁에 두었다. 세 사람 모두 사복 차림이었다. 그러니 네마냐는 거리의 사람이 보기에 수행원을 데려온 귀족 자제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알리는 성도에는 처음이지? 신기하겠어.”

“네, 그렇습니다! 영주님을 모시고 처음 오니 너무 신기한데요.”

“그렇다고 너무 날뛰진 말고.”

곧바로 끼어드는 헤누크. 네마냐는 언젠가 그에게 신참 기사들의 공포 어린 시선을 요약해서 ‘예절 주입기’라는 별명을 붙여 준 적이 있었다.

[바가반드엔 공포의 예절 주입기가 있다더라.]

별명은 바가반드의 신입 기사들 사이에서 은어가 되었다. 먼저 앞서 걸어가면서 ‘예절 주입기’란 말을 되뇌는 네마냐. 이름을 잘 지었다고 스스로 자평하는 업적 중 하나다.

“헤누크, 괜찮을 거야. 호위라지만 기본적으론 내 수행원이니까. 오늘은 좀 여유롭게 지내자고. 자, 하나씩 받아들.”

네마냐는 외투 주머니에서 작은 호주머니 2개를 꺼냈다. 털실로 짜고 바가반드의 상징인 날개를 수놓은 돈주머니다. 헤누크와 알리테스에게 하나씩 던져 주자 그들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오늘은 놀고 푹 쉬다 숙소로 오도록 해. 은화 열 닢씩 들었으니까 원하는 대로 쓰고, 남는 건 가지든지.”

“와, 정말입니까?”

잠시 만류하듯 신나서 튀어나오려는 알리테스의 어깨를 짚은 헤누크가 의아한 듯 목소리를 꺼냈다. 오, 쉽게 듣기 힘든 말투인데.

“아니…… 이것도 예산으로 나온 공금 아닙니까? 이렇게 막 써서야.”

“어휴, 내가 미하일한테 머리채 잡힐 일을 하겠어? 그거 내 몫으로 가지고 있던 사비야.”

사비 이야기가 나오자 두 사람의 눈은 더 휘둥그레졌다. 별것 아니라며 손사래를 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럼 더더욱 받을 수 없습니다.”

고지식한 헤누크가 또 청렴함을 발휘하려 들었다. 펼쳐 놓은 그 주먹을 고이 접어 주면서 힘껏 밀어붙였다.

“에헤이, 기사들 몫으로 배정한 거야. 오늘 여비까지 합쳐서 주는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도 없어. 자, 가 봐!”

기쁘게도 가스파리얀에게 계약금으로 건넸던 돈이 환수됐다. 그 돈은 친위 병력인 기사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기로 했다. 이제 스스로 노선을 밝히고 적과 아군을 가르는 수순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자신과 함께 설 사람을 찾아야 한다.

‘뭐, 돈으로 그 과정을 전부 때울 순 없지만, 꽤 중요한 도구는 맞으니까.’

물론 이 둘에게 조금 더 많은 돈을 준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 그리고 하나 해야 할 일이 있지. 현재 고블린 문제를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 알아봐. 드러내 놓고 하지는 말고.”

그제야 헤누크는 돈에 대해선 잊어버린 채 눈을 빛냈다.

“……심중에 헤아리는 바가 달리 있었군요. 돈을 준 게 무슨 생각이신가 했습니다.”

헤누크가 좀체 볼 수 없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손을 흔들면서 돌아섰다.

“부탁 좀 하자. 알리, 넌 상인들한테 호구나 잡히지 말고.”

“영주님도 걱정이 많으시다니까. 제가 견문이 짧아서 그렇지 호구를 잡힐 정돈 아니잖아요, 그죠?”

“……그냥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

신참의 갈색 머리에 손을 턱 하고 올린 헤누크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이켰다. 당황한 젊은 기사가 연방 되물으며 마찬가지로 따라 움직였다.

“아니, 저는 호구가 아니라니까요?”

“그래. 나중에 울지 말고.”

“아, 참.”

도란도란한 두 그림자가 떠나는 걸 보고 네마냐도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 * *

“아니, 그 문제를 상임 의회에 언질도 없이 제국에 통보하셨다고요? 대체 무슨 일을 그렇게 하신 겁니까?”

늙수그레한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마도 지위가 정반대였으면 호랑이 울음소리라도 낼 기세였다.

“내가 결정했습니다. 최고신관인 내가 결정하면 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 순간, 의자에 앉아 있는 성녀는 모든 신분과 계급, 성별조차 뛰어넘는 우두머리 그 자체다. 이마에 손을 짚은 성녀가 골치 아프다는 시늉과 함께 해명을 이어 갔다.

“고블린 문제가 급하니 총독부에 먼저 의사를 타진한 겁니다. 확정이 아니에요. 오늘 신관 회의는 그 얘길 하자고 모인 겁니다.”

그러나 제국이라면 십 년 전 내전을 떠올리고 진저리를 앓는 신관들이 많았다. 신관만이 아니라 하야스단 사람들의 공통된 증세였지만.

“제국이 영향력 확대를 위해 내전을 부추겼던 것 잊으셨습니까? 하야크 왕이 무너지고 고블린이 몰려온 것도 제국의 몫이 상당수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옛날 얘기나 하자고 모인 건 아니지 않나요?”

그러나 핀잔을 주어도 늙은 신관은 물러설 기미가 아니었다.

“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도 그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제국을 끌어들이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답답해 돌아가시겠다는 듯 트라야브나는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으아, 답답해! 꼬장꼬장한 영감 같으니라구.’

가기크. 부종정 직함에 법관 계급을 가진 신관이다. 고블린은 말할 것도 없고 마탑은 물론, 제국에까지 적대심을 가졌다.

‘하필 제2인자가 제일 강경한 노인이라니, 제일 쓸모가 없잖아.’

물론 지금 그의 주장이 쓸데없이 꼬장꼬장한 것만은 아니다. 분명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서 더 짜증이 나는 것뿐.

“무슨 말씀인진 알겠어요, 백부.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움직여야 할 때예요.”

“아쉬울 때만 혈연을 이용하시는군요.”

그래도 날선 기세로 달려들던 처음에 비하면 가기크도 많이 누그러졌다. 한숨 돌린 트라야브나는 모른 척 이야길 돌렸다.

“원리 원칙만 따지기에는 지금 상황이 급하게 돌아간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다르빌을 어떻게든 성국의 방어선으로 삼을 수 있다면 난 제국이 아니라 마탑이라도 기꺼이 협력할 겁니다.”

이 정도가 되자 다른 신관들을 대표해 다르빌 주교 페르투스가 중재에 나섰다.

“가기크 신관 역시 다르빌의 방어를 내버려 두자는 건 아닙니다, 크흠.”

헛기침과 함께 가기크의 눈치를 본 페르투스가 다시 이야길 이었다.

“다만 제국과 긴밀하게 엮이는 건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습니다. 당장 영지 주민들이나 귀족들도 완강히 반대할 테죠.”

“하아.”

부르기로는 성녀지만 공식 직함은 어디까지나 대종정인 트라야브나가 한숨을 뱉었다. 이마를 짚으며 성녀는 고민에 빠졌다.

‘백부가 이해가 가는 이유를 대고 있어서 더 답답하다고 해야 하나. 제국이 맘에 안 드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지만, 이건 너무 심한데.’

트라야브나가 조금 잠잠해지자 가기크는 다시 탁상을 짚어 가며 말을 꺼냈다.

“먼저 몇 가지 점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다르빌의 재건안이라고 신관회에 접수된 그 내용을 그대로 실행해야만 하는 것인지. 정말 그렇다면 재원은 달리 조달할 방법이 없는지.”

“그건, 확인해 볼 필요는 있을 겁니다.”

“저도…….”

침묵을 지키던 다른 신관들도 동의를 표했다. 의견 내놓으랄 때는 말도 안 꺼내더니. 트라야브나가 살짝 쳐다보자 그들은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뭣보다 제국의 반응을 확인해야 합니다. 정말 필요하다면 제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란 확신이라도 얻어야 합니다.”

“지금 황제는 10년 전과는 다르잖아요? 적어도 공식 칙령으로 보호를 약속할 정도면 불신할 이윤 없을 텐데.”

트라야브나가 손짓하자 뒤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기관이 두루마리 문서 하나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황금 문서]

오직 제국의 황제만 사용하는 문장과 그것이 찍힌 황금 인장이 황금으로 짜낸 끈으로 문서와 이어져 있었다. 황제의 전유물인 특허장이다. 가기크는 그것을 보며 한숨을 토했다.

“제국은 황제 혼자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원로원이 나라의 이익을 규정하고 현지 총독들이 군사를 부리니까요.”

“하지만……!”

“이것만 생각해 봅시다. 황제가 상속 전쟁에서 하야크 요새 몇 개를 주기로 한 미스라다트 왕자와의 약속을 지켰습니까?”

물론 답은 ‘아니다’였다.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미스라다트는 고블린에게 땅을 주겠다며 자신들의 전쟁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고블린의 침공에 철위 기사단은 물론, 미스라다트 본인도 철저하게 배신당했지만.’

이런 상황이었다. 이러니 고원의 사람들이 미스라다트는 물론, 제국에 대해서도 무조건 의심을 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건 인정한다면서도 트라야브나 역시 제국에 원조를 요청하자는 제안에선 물러서지 않았다.

“알면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다르빌조차 우리가 포기해 버리면 남은 동맹국들이 우리를 도우러 오기나 하겠어요?”

“정 안 된다면, 주민들을…… 후방으로 빼내서 수용할 수는 없겠습니까?”

페르투스 주교가 조심스럽게 꺼낸 물음이었지만 시 행정을 관리하는 관리들은 모두 일치단결이라도 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식욕을 잃은 표정으로 성녀가 대신 답했다.

“지금까지의 피난민으로도 후방 도시와 농촌은 감당 불가능해요. 지금도 신관회에 들어오는 기부금 대부분이 피난민 식량 구입으로 소모되고 있죠. 피난민을 더 받는 건…….”

이러나저러나 황제와의 교섭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식량 판매를 요청하건, 원조 자금을 요청하건 간에.

“뜻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하시려거든 하십시다. 다만, 먼저 바가반드 백작의 의견부터 들어 봅시다.”

가기크가 다시 한번 다짐을 받듯 을렀다. 아예 회의 안건에서 빠지는 건 간신히 면했다. 거의 번화한 남작령이나 마찬가지 수준이지만 그래도 백작령 영주의 배경 덕분이랄까.

“네, 알았어요. 기다려 보죠. 엘레나 부단장이 바가반드 경을 함께 모셔 온다고 했으니까.”

“앞서 얘기한 엘레나 경 문제는 결정하신 대로 하십시오. 그 뒤에 다르빌 문제를 논의하면 될 겁니다.”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여자 관원 중 한 사람이 뒤쪽 문을 열고 다가와 무어라 속닥였다. 마냥 정색을 지키던 낯빛에 한 줄기 서광이 드리웠다.

“지금 막 회의장 입구로 오고 있다고? 마침 딱 잘됐군.”

네마냐라고 했던가. 가기크는 흥이 난 조카를 보곤 갑자기 궁금함이 일었다.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무기력하게 고블린의 진공을 보고만 있던 자신들까지 논쟁의 장에 휘말리게 만든 것인지. 하지만 곧 밀려오는 피로감.

“휴.”

의자에 기댄 채 가기크는 눈을 감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피곤함이 조금 가라앉은 찰나, 두런거리는 대화가 들려왔다. 또박또박한 두 쌍의 발걸음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성 지케르니아 기사단의 부단장 엘레나, 공석인 단장을 대신해 신관회에 인사를 청합니다.”

“초대 성자 지케른의 영광이 함께하길. 신관회를 뵙게 되어 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눈을 떴다. 조금 말끔해진 시선을 옮겨 측면의 아래쪽을 보았다. 젊은 두 남녀가 있었다. 엘레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저쪽의 사내가 바가반드 경 네마냐겠군.’

처음 보는 검은 옷의 신사는 성녀를 향해 묵묵히 목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성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하게 미소를 지어냈다. 정확하게는 그러려고 애썼다. 그녀는 두 사람이 편하게 앉도록 권하며 인사말을 꺼냈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다르빌의 함락을 막아 낸 것만으로도 놀라운 업적입니다. 바가반드 경의 도움이 매우 요긴했어요.”

“다들 최선을 다한 덕분입니다. 또, 여러 운이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네마냐의 답은 평범한 사례이면서 동시에 승전보 이면에 있는 한계를 보여 주는 표현이었다. 생각보다 고블린이 작은 전력으로 공격해 온 것. 이번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그 문맥을 놓칠 리가 없었다. 트라야브나 역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의미심장하군요. 엘레나 경이 올려 준 보고로 대강 어떤 부분을 염려하는지에 대해 우리도 들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번 침공에 대해서는 똑같은 판단을 내렸습니까?”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가 싶더니 엘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고블린의 이번 공격은 규모 자체로 보면 여전히 작습니다. 하지만 소규모 약탈대가 중심이던 습격전은 아닙니다. 오히려 대규모 침공에 앞선 무력 정찰에 가깝습니다.”

탄식이 이야기를 듣던 청중 가운데서 일었다.

“성녀님도 아시겠지만 중요한 건 언제 놈들이 쳐들어오겠느냐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가반드 경께선 혹시 알고 계시는 게 있는지요?”

가기크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네마냐가 문득 시선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때서야 가기크는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 부종정이자 법관 계급인 가기크입니다.”

“사적으론 제 백부, 큰아버지 되시죠.”

트라야브나가 설명까지 곁들이자 네마냐가 고갯짓과 함께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이르면 이번 겨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큰 눈이 내려 소통이 어려워지는 때.”

“뭐라고?!”

“벌써 10월 말인데 그럼 대체…….”

다르빌에서 일어났던 소동이 조금 더 점잖게 재현됐다. 허리띠에 매어 둔 신발주머니 크기의 주머니를 열었다. 요긴하게 써먹는 가스파리얀의 두루마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지금은 작고한 전 영주, 가스파리얀이 고블린 군단의 대장과 나눈 연락입니다. 돌릴 테니 한 분씩 읽어 보시죠.”

네마냐로부터 번역본을 받아 돌려 본 신관들. 그중에는 창백하게 낯을 잃은 자도 더러 있었고 끙끙대는 이도 있었다. 대강 사정이 어찌 되는지를 미리 보고로 아는 트라야브나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더 답답해진 모양이었다.

“내 참. 마나의 흐름대로, 밖에 시종 있으면 물 좀 들여보내!”

머리말이나 꼬리말처럼 마나를 신봉하는 성직자들이 욕 대신 써먹는 표현, 마나의 흐름대로. 물을 연달아 두 컵이나 벌컥대며 비운 성녀는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다.

“고블린 군단의 수장이 직접 겨울을 천명하고 나섰으니 이걸 모른 척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사실 두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도 다르빌 계획을 두고 갑론을박 중이었습니다. 찬성만큼이나 반대도 숫자나 논리가 만만찮습니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탓입니까? 아니면 일을 크게 벌이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겁니까?”

자신의 계획이 어떤 점에서 고원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생리적으로 잘 아는 네마냐다. 왜냐고? 자기 자신이 그 고원의 한가운데서 살아 봤으니까.

‘직접 휘말리지 않는 이상, 사람은 손해와 막대한 지출을 망설이기 마련이지.’

아는 것과 비슷한 경험을 만들어 보는 건 엄연히 다르다. 네마냐가 눈앞에서 들은 것처럼 반론이 힘을 얻을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확실히 쉽게 설득하려면 [설득]을 쓰면 되겠지. 일주일에 1회 정도는 쓸 수 있는 기술이니까. 하지만, 자발적으로 오랫동안 움직이도록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해.’

경험에 의하면, [설득]은 현장에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불과 몇 시간만 지나도 개인의 마음에 대한 지배력은 사라졌다.

‘마법이든 권력이든 똑같아. 스스로 마음이 움직이도록 하는 게 아니라면 결국 어긋나게 되어 있어.’

어찌 보면 치트 플레이의 심심함을 방지하는 차원이랄 수 있겠다 싶었다.

“후후…….”

상념을 깨는 얕은 웃음소리. 네마냐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원인을 정확하게 짚으니 성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우습게도 그 둘 다랍니다. 나자리안. 그러나 전후 사정까지 살펴본 이상 결정을 해야 합니다. 내가 잘못 판단한 걸까요? 확신할 수가 없는 게 너무 괴롭군요.”

결정하는 건 결국 그 뒤에 따를 막대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당연히 어찌 될지 모를 엄청난 일에 발을 들이미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래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의견을 들으며 결정하는 건 훌륭한 전통입니다. 옛날의 작은 도시 국가들은 표결로 크고 작은 일을 결정했다고도 들었습니다. 참 고결한 체제입니다. 다만…….”

네마냐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의견을 모으는 수단에 만족해 버리면 안 됩니다. 의견을 모으는 건 해답을 내기 위해섭니다. 고블린의 침략이 빠르면 두 달 뒤인데 이대로 논쟁만 피워 두는 건 무의미합니다.”

조금 발끈한 성녀는 곧바로 나름의 반격을 개시했다. 공격!

“그 생각대로면 본인 영지에서도 갈등이 일어날 텐데. 애로 사항이 크지 않겠어요?”

“글쎄, 어떨까요.”

네마냐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껏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각오는 다르빌에서 적과 싸웠을 때, 키마이라의 성소에서 싸웠을 때 이미 끝났습니다. 어떤 일이건 책임은 최고 결정자에게 돌아갑니다. 저는 제가 사는 이 땅, 제게 의존하는 영민을 지킬 수 있다면 제가 가진 권한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성녀는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는 목소리를 잠자코 들었다. 오늘날 하야크 산지에서 이제 도덕적으로나마 최고 결정자인 자신에게 보내는 호소일까. 잠시 두 손에 얼굴을 포갠 성녀로부터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말이 이어져 나왔다.

“가기크.”

잠자코 지켜보던 가기크가 빠르게 반응했다.

“결정하셨습니까?”

“제국에 공식적으로 구원 요청을 넣겠어요. 타당성 검토는 거치겠지만 3일 안에 마쳐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모든 동맹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 동원령을 발동하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반발은 있을 겁니다.”

“알고 있어요.”

얼굴을 묻었던 손을 내리는 성녀의 표정에는 망설임의 빛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네마냐는 그 표정을 보고 싱긋 웃었다. 아무리 조언과 답을 던져 주어도 나올 수 없는 답이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 결정했을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내가 책임을 지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이상, 나는 내 할 일을 할 겁니다. 모두를 지킬 수 있다면 그 짐을 지겠습니다.”

가기크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앞에서와는 다른 성격의 한숨이었다.

“성단을 내리셨군요. 책임지는 결단을 피하지 않은 건 말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 마나마저 맑아진 기분이군요.”

“이제 시작이랍니다. 우선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죠? 엘레나 경, 내 앞으로 오도록.”

엘레나가 급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가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트라야브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반쯤 몸을 굽히곤 엘레나의 손을 잡았다.

“의식을 모두 생략해서 미안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성 지케르니아 기사단의 부단장인 엘레나를 단장에 지명하겠습니다.”

엘레나는 잠시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다듬었다. 이 막중한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 달라는 뜻이었으므로 거절하는 건 옳지 않았다.

“……막중한 시기에 맡겨 주신 임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성녀는 다시 가기크를 보았다.

“오늘 공개회의는 여기까지. 그 외의 사항은 일이 진행되는 대로 보고를 받아 처리합시다.”

“말씀대로, 회의는 종료되었습니다.”

종료 선포를 확인한 가기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의 다른 신관들도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회의 결정 사항을 번복할 수 없도록 못 박는 절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그 유명한…….”

네마냐도 궁금한 듯 팔짱을 끼고 바라보았다. 가기크의 선창을 따라, 신관들과 주변 기사들까지 같은 문장을 우렁차게 세 번 반복했다..

“이루어지게 하라!”

“이루어지게 하라, 이루어지게 하라! 이루어지게 하라!”

성녀의 그만하라는 손짓과 함께 회의는 빠르게 끝났다. 고개를 하나 건넜다는 생각에 네마냐는 한결 안도했다.

‘어떻게 고비 하나는 넘겼어.’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의미하는 엄숙한 신관회 결의가 내려졌다. 이제는 다시 발로 뛰어 각지에 펼쳐질 갈등의 소용돌이에 뛰어들 때가 온 것이다.

- 6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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