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당신 주위에 전쟁하고픈 멍청이가 있나?]
[정신 차릴 때까지 패라.]
하야크 왕국의 내전으로 전쟁이라면 이를 가는 바가반드에선 이런 속담이 있었다. 아무리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어도 누구나 저렇게 강경하게 대답하곤 했다.
‘애초에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부터가 있을 수가 없다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피할 수 없는 전쟁은 없었다. 그렇기에 전쟁을 싫어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행히 다르빌은 전쟁을 피할 수 없어도 피해는 크지 않았다.
‘적어도 공식 문서에선 그렇게 기록되겠지.’
운 좋게도 결계석의 용량이 초대형급이라 마력이 소진되지 않았다. 결계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어지간한 피해는 다 막아 냈다.
“피해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더 좋았을걸.”
“멸망하지 않아서 다행인 거지, 전투 자체는 일어났으니까.”
태연하게 대답하는 엘레나였지만, 사실은 짐짓 괜찮은 척할 뿐이었다. 후방으로 옮겨진 부상병들의 비명이 귀를 막아도 들렸다.
“폭격은 막아 냈지만 엄청난 진동 자체는 막을 수 없었어. 당연한 물리 현상인데 무심했던 거지.”
물리적으로 인간에게 작용하는 힘은 결계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네마냐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했다.
‘마법(물리)란 건가, 쿡.’
말로 꺼내 봤자 안 먹히는 드립을 혼자 생각하며 속으로 웃어 버리고 마는 건 어느새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온 사방이 아수라장이었다. 웃는 낌새라도 보이기가 민망한 상태였던 것. 표정을 관리한 네마냐는 고개를 들고 푸념조로 이야기를 열었다.
“휴, 역시 아무리 마법이라도 작용하는 힘 자체는 막을 수 없나 봐.”
“마법사님 같은 분들도 말입니까?”
아까 전 활약으로 선임들의 질문 공세를 받던 알리테스는 자리를 피해 하라드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연한 일이라며 하라드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마법 자체는 작용하고 파훼하고 방어할 수 있죠. 다만, 마법을 통해 움직이는 힘 자체는 마법의 영역 밖이니까요.”
“이른바 물체의 이치, 물리라는 영역인 거지. 이렇게 보니 마법사도 별것 없네. 너도 체력 단련해서 창병이나 할래?”
네마냐가 은근히 놀려도 하라드는 어쩔 수 없다며 고삐를 잡은 손을 내렸다.
“쳇,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아직 마법학 수준이 그 정도로 치밀하진 못해.”
“혹시나 비밀을 꽁꽁 싸매 둔 마탑이라면 있지 않을까요?”
알리테스의 한마디에 무어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엘레나가 먼저 끼어들었다.
“쉿. 젊은 기사, 마탑 얘기는 될 수 있는 한 지케른 땅에선 하지 않는 게 좋아.”
“어째서 말입니까?”
순진한 기사가 눈망울을 빛내며 물었다.
“마탑과 성국의 관계가 매우 험악해서, 누가 듣는 건 좋지 않거든. 얘기 자체도 꺼내지 말도록 해.”
“말씀대로, 지케른 성국과 마탑은 강력한 라이벌이에요. 나도 마법사지만, 마탑이 왜 그러는지 잘 이해되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요.”
마탑. 아마도 정오쯤 되면 제국군은 물론이고 마탑에서도 사태 파악을 위해 움직일 거다. 기회가 된다면 신관회를 압박하고 스스로 운신의 폭을 넓히려 들겠지.
“맞아. 헤누크? 헤누크 있나?”
우울한 표정을 한 중년 기사가 앞으로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숙여서, 네마냐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오늘 내가 그…… 친구를 만난 건 비밀이다.”
“친구 말씀입니까?”
“어, 음. 그러니까 키메라 말이지. 쓸데없는 소리가 나올까 싶어서 말이야.”
헤누크가 말없이 알아들었다는 수긍의 고갯짓을 보였다. 키메라. 고원 통합의 상징. 왕권의 상징과도 같은 신수와 특별한 사이라는 건 딱 가십거리로 쓰이기 좋았다. 더군다나 네마냐와 엘레나의 사이에 엮이면 ‘바난드의 앞잡이’라는 이상한 소문도 가능하겠지.
‘편파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 안 돼.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음모에 이용당하기 쉬워질 테니.’
키메라와의 관계와 그걸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다른 문제였다. 고블린을 최적으로 상대할 수 있을 완벽할 타이밍, 바로 그때 하늘이 돕는다는 확실한 증거로 그 관계를 활용할 것이다.
“……언젠가는.”
완벽한 상념 와중에 <선구자의 정신> 효과가 만료됐다는 알림이 도착했어도 집중을 흐트러뜨리진 못했다. 문득 의식 가운데로 치고 들어온 목소리를 듣고서야 상념은 깨졌다.
“네마냐?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어.”
“음? 아…….”
엘레나의 목소리가 나긋하긴 했지만, 듣는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 왔어, 관청. 시장이 초청한 자리니까 다음 전략을 좀 생각해 보자고.”
“그래. 필요한 건 해야지. 기껏 몰아넣은 고블린 놈들이 달아나면 곤란하잖아. 음, 헤누크?”
“……아까 말씀하신 대로 척후대를 보내서 놈들의 이동을 살피게 했습니다. 지금 놈들은 근처의 아즈디샤트에서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네마냐는 헤누크의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해 주었다.
“훌륭해. 그럼 나머지 일행은 쉬도록 해 줘. 나랑 하라드, 그리고 헤누크는 같이 들어가자고.”
기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곤 후방으로 달려갔다. 네마냐는 그 믿음직한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고블린을…… 추격할 생각이구나. 거의 1천 명은 되어 보이던데 가능할까?”
“너야말로 추격할 생각이 한가득인 것 같은데.”
네마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엘레나의 ‘바난드의 검’이라는 별명이 처음으로 예리한 날을 선보인 게 바로 이 추격전이었다.
‘그 유명한 싸움까지 길어야 하루쯤 남았군.’
네마냐가 농담처럼 건넨 이야기에 엘레나는 굳이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들어가서 그 얘길 하려고 했지. 일단 들어가자.”
“그래, 좋아.”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함께 건물로 들어갔다. 하라드와 헤누크 역시 뒤따라 말에서 내렸다. 알리테스는 좋은 조언을 해 준 보답이라며 네마냐에게 동행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헤누크를 따랐다. 어린 기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한 듯 선임에게 질문을 건넸다.
“헤누크 경,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기사는 과묵함이 미덕이라고 누누이 얘기했던 것 같다만…….”
음울한 선임의 한마디에, 헤헤거리던 알리테스는 금세 합죽이가 되어 버렸다. 잠깐 침묵을 지키던 헤누크가 무안했는지 한 가지 단서를 더 던져 주었다.
“뭐, 기사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건 자유로워야겠지. 나보단 마법사님께 물어보거라.”
알리테스는 삽시간에 헤실거리는 미소를 되찾았다. 갑자기 지목당한 하라드 마법사님은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유지했다.
“네. 그래서 알리테스 경, 궁금하신 게 무엇입니까?”
“네! 지케른 기사단의 부단장님 말입니다. 혹시, 여성이십니까? 생김새로 판별하는 게 무례한 일인 줄은 알지만 제가 보기엔 그래 보여서요.”
“…….”
“…….”
폭풍전야와도 같은 침묵이 뒤따랐다. 왜 제1 왕녀가 기사단에 있어야 하냐는 문제부터 바난드의 왕위계승 문제까지, 설명이 복잡하기 때문이었다.
“뭐, 그렇죠.”
외지인으로서 특히 조심스러운 하라드는 어정쩡한 미소로 간단하게만 답했다.
“오, 대단한데요. 기사단 내부에서만 아니라 신관회에서도 인정받았다는 증거잖아요? 저도 열심히 수련해야겠네요.”
“그렇답니다. 아마 직접 활약상을 보면 알리테스 경도 실감할 겁니다. 저도 영주님한테 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이야기를 들어 봐서.”
“휴…….”
행여 이상한 이야기가 나올까 맘을 졸이고 있었는지 헤누크도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조금이라도 이어질까 싶어, 두 사람의 대화를 얼른 가로막았다.
“자, 이제 그 정도면 되었으니 얼른 들어가죠. 회의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습니다.”
세 사람은 입구에 서 있는 문지기의 안내를 받으며 회랑 안으로 들어섰다. 육중한 문이 닫히면서 작은 소란은 그렇게 끝났다.
* * *
“자, 모두 모이셨으니 회의를 시작합시다.”
시장의 박수 유도 아래, 연회인지 회의인지 모를 묘한 행사가 시작됐다.
“회의의 주제는 도주하는 고블린 잔당의 처우에 대한 건입니다.”
거창하게 회의라고 밝혔지만, 굉장히 간단한 즉석 토의에 가까웠다.
“저는 다르빌의 시장인 구르간입니다.”
시장은 평소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되찾아 네마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구르간이라. 지나가는 길에 몇 번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역시나 처음이었다. 네마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군조차 우릴 버린 줄 알고 당황했습니다. 그런 걸 설마하니 타지에서 와주실 줄은…….”
울먹이려 드는 구르간을 애써 다독이는 투로 네마냐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성국이 바가반드의 담벼락이 되어 주듯이, 바가반드 역시 다르빌의 담벼락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보다, 부상도 큰 것 같은데 그만 앉으시는 게…….”
“아, 하하……. 전장에서 생긴 부상이란 곧 살아남은 자의 수훈장이죠. 배려에 감사합니다.”
시장은 자리로 돌아가 앉은 뒤 진지하게 오늘의 주제로 돌아갔다.
“오늘, 다행스럽게도 고블린을 몰아냈습니다. 기사단과 바가반드에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오늘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피해는 어떻나요? 필요하다면 바로 켈리도니온에 보고해서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아……. 안 그래도 그 문제가 있습니다.”
엘레나의 재촉에 구르간은 조금 뜸을 들인 뒤 조금 더 긴밀한 이야기를 꺼냈다.
“먼저, 다르빌을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오늘의 일로 보건대 결국 도시를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면서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시장의 발언. 그에 반해.
“그렇게 비관할 것까지야 있습니까? 이번엔 예상치 못한 기습이란 게 주효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동맹들 역시 경각심을 느끼고 움직일 겁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길드장. 고원과 저지대 상업계의 일인자를 자랑하는 므카바 상단 출신이었다. 시장의 강력한 발언에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꼬이지도 않는 다리를 꼬며 반대했다.
‘업계의 일인자라……. 우리의 잠재적 경쟁자라고 할 만하지.’
상단 중 1, 2위를 다투는 므카바와 동방 제국 회사는 최근 급격하게 변하는 정세가 불쾌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들의 안정적인 독점 구조가 무너질 수도 있는 변화가 온다는 뜻이었으니까.
“으흠.”
중간중간 헛기침과 함께 이쪽을 쳐다보는 게, 네마냐와 에카톤 상단의 관계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요. 원래대로라면 불안할 것은 없을 겁니다. 수도 켈리도니온도 가깝고, 제국군도 왔어야 할 테니까요.”
시장은 얼핏 들으면 반대론에 동의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진행했다. 하지만 숨을 한 번 뱉고 나더니 정반대로 들어섰다.
“이번 사태는 기존에 예상한 정도를 넘어섰습니다. 기존의 작전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시장?”
거침없이 반박을 당한 게 못내 불쾌한지, 길드장의 멋진 카이저수염이 꿈틀거렸다. 부단장 엘레나가 바로 설명하고 나섰다.
“놈들이 우리 방어의 결기를 시험하고자 보낸 병력은 무려 1천이 넘었죠. 우레이미야족은 한발 더 나아가, 마시스 산을 이용해 우리 측을 완전히 교란했습니다.”
“이번 침략에서의 숫자가 좀 커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놈들이 밀고 들어올 거란 증거가 됩니까? 조금 골치가 아파진 것뿐입니다. 겨울이 되어 동맹군이 오면 그마저도…….”
혐오스러운 표정과 함께 길드장은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잠잠하게 끝장날 겁니다.”
길드장은 ‘잠잠’에 강조를 주며 수염을 정성스레 매만졌다.
“정황만 있는 건 아니죠. 이를테면 고원 영주들 내부에 판치고 있는 배신자와 왕성하게 연락한다든가, 뭐 그런 것 말입니다.”
묵묵히 듣다가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한 네마냐의 표정이 어딘가 의미심장했다. 검지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내자 하라드가 아공간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일어섰다.
―술렁술렁.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반대편으로 건너간 마법사는 시장에게 서한을 전했다.
“이건…… 무엇입니까?”
“혹시나 고블린의 진정성을 몰라주실 분들이 있을까 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작고한 전 영주가 우레이미야 족장으로부터 받은 편지죠.”
네마냐는 손을 내밀어 시장에게 읽을 것을 권했다.
“한번 읽어 보시죠. 고블린이 어떤 식으로 준비하고 있는지, 이제는 공개할 때입니다.”
묘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받아든 구르간 시장은 엘레나와 네마냐를 번갈아 보았다. 확신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인 시장은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하야크의 황량한 동굴과 엘라니아의 초지 어느 곳에서든 우리의 동지를 만날 수 있다.”
“……저게 고블린의 편지라고?”
“저 정도로 이성이 있단 말인가?”
청중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시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을 이어 나갔다.
“곧, 겨울이 깊어 자취를 찾기 어려울 때를 기다려라. 군단이 움직이리라. 돌아올 때, 바가반드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겠다.”
“허…….”
배석한 몇몇 사람은 내용에 눈살을 찌푸리며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구르간은 사람 좋은 미소를 거두고, 이채를 발하는 눈빛으로 오랜 침묵을 끝냈다.
“그렇다는 건……. 내부의 배신자를 상대하면서 동시에 겨울에 닥칠 고블린과도 싸워야 한단 거군요.”
시장의 한탄에 강한 충격파가 회의장을 강타했다. 그러나 믿으려 들 생각이 없는 반대파도 오히려 더 강경해졌다.
“그 해석은 믿을 수 있는 겁니까? 해석자가 누굽니까?”
길드장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나섰다.
‘그래, 마지막으로 태클을 걸 수 있는 건 그거뿐이겠지.’
오차를 벗어나지 않는 행동에 씁쓸할 뿐이었다. 뭐라고 할 것도 없이, 해석을 직접 의뢰했던 하라드가 쏘아붙였다.
“말씀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길드 마스터. 시르반 마법 대학의 마르딘 대마법사님을 아시는지요? 제자인 제가 진행하고, 그분께서 감수해 주신 해석입니다.”
마르딘, 모두가 이름을 들어 본 적 있었다. 사막의 현자로 불리는 사람. 하라드가 설마 그 제자이리라곤 네마냐도 상상치 못했다.
‘녀석에게 너무 무관심했나.’
네마냐가 의외의 지점에 놀라는 사이, 다른 사람들도 다른 의미에서 충격에 휩싸였다.
“오, 사막의 대현인께서 직접……!”
“어지간한 마법사도 아니고 그런 분이라면야, 의심하는 게 이상하지.”
“길드 마스터, 의심은 물론 할 수 있으나 이번엔 과하셨습니다.”
사막과 산지, 평야와 분지를 가리지 않고 존경을 받는다는 대현인. 위력은 뛰어났다. 뚱한 표정은 여전했으나 조합장은 모깃소리만 한 목소리로 ‘미안하다’라고 밝힌 뒤 조용해졌다.
“……어쨌든 네마냐 영주께서 공개하신 문건으로 보면, 겨울까지 우리가 대비할 시간은 두 달 남짓이지 않습니까?”
“……맞서기 어렵다면 도시를 포기하는 것도 한 방법이죠.”
버리느냐 마느냐의 이분법적 진행. 당연히 할 얘기겠지만, 네마냐로선 지겨운 얘기였다. 설사 버린다고 해도 놈들을 상대하기엔 버거웠다. 근본적으로 버리느냐 마느냐보단, 성국의 구조를 총력전에 맞추어 개조해야만 했다.
‘어제 같은 메테오론이 한 번이라도 더 쏟아지면 막을 수 없지. 이제 키메라 성소는 우리가 어떻게든 지켜낸다고 쳐도…….’
자신이 무력하게 겪었던 한 번의 경험. 거기서 다르빌은 처음의 공성전에서 붕괴했다. 몇 차례 재건 시도도 있었지만 실패했다.
‘수만 마리의 고블린이 몰려오자 아무도 막을 수 없었지. 그게 전쟁의 첫 단계였어.’
이미 다르빌을 무사히 살려냈다는 것 자체가 그래서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변수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강력한 상인이나 동맹국이 도우러 온대도 그 순간뿐이야.’
다르빌 스스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 유일한 길은…….
네마냐는 깍지를 꼈던 손을 풀었다.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네마냐가 천천히 일어서자 논의가 막혀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잠시, 제안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탁상을 밀며 자리에서 일어난 바가반드 영주. 산간 고원의 흙먼지 속에서 작은 기적을 일군 그의 입에서 어떤 비전이 나올 수 있을까.
“부탁드립니다.”
대표로 구르간 시장이 정중하게 요청했다. 감사의 고갯짓을 하는 젊은 영주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간단했다.
“이제 답은 하나입니다. 피난민들을 모으고, 다르빌을 독자적인 자유국으로 자립시키는 겁니다.”
자신이 지킬 무언가가 있는 한, 사람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 간단한 명제를 한번 써먹어 보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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