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세 번째 공성탑, 파괴됐습니다! 놈들의 다른 공성탑 두 개가 해자를 넘어옵니다!”
“멈추면 안 돼! 내가 얘기해 둔 건 준비됐어?”
탄내와 지독한 냄새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망루 위의 병사와 이야기하던 장교가 재빨리 보고했다.
“완료됐습니다. 발사하면 되겠습니까?”
엘레나는 힘찬 손짓으로 발사를 명령했다. 조금이라도 늦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발사!”
고함과 함께, 장교는 성루의 도르래에 깃발 하나를 게양하기 시작했다.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검은 깃발이 올라갔다.
“불화살 준비!”
장교는 재빠른 손길로 붉은 깃발도 올리며 다시 한번 외쳤다. 겁먹은 나머지 뭐가 뭔지도 모를 민병대를 위해 준비한 신호였다.
“불화살 준비!”
메아리치는 명령에 따라, 병사들은 기름 먹인 천을 두른 화살촉을 시위에 걸었고, 끄트머리에 불을 붙여 상대를 겨냥했다.
―슈웅!
동문에 열두 대나 배치된 투석기는 수많은 기름 항아리들을 쏘아댔다. 대개는 시체와 나무토막들이 멋대로 뒤섞인 진창에 떨어졌다. 그러나 단지 몇 동이라도 공성탑에 닿으면 충분했다.
“모르겠다. 지금 쏜다! 쏴!”
“조금만 참으라니까, 참.”
“저기서 쏘는데? 우리도 쏠까?”
“명령을 내렸나 보네. 쏴! 쏴 버려!”
평범한 남자들로 구성된 민병대는 우왕좌왕하다가 아무렇게나 화살을 쏘아 댔다. 위안을 삼을 만한 부분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엉성하게 쏘았지만 적지 않은 화살이 기름을 덮어쓴 공성탑에 도달했다.
―화르르르륵!
“크르륵!”
“인간 놈들 따위!”
삽시간에 성벽 가까이 접근한 공성탑이 불에 그슬리기 시작했다. 칼과 도끼를 맞아도 끄떡없는 고블린들도 화염 고통에는 내성이 없었다. 인간을 향한 증오와 비명을 내뱉었다. 평범한 가장들로 구성된 고블린 병사들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이번 건도 어떻게 막아 냈군.”
엘레나는 한숨을 몰아쉬며, 어설픈 열기가 지배하는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공성탑이 하나 남긴 했으나 해자를 억지로 메우느라 진창이 되어 버린 바닥에 바퀴가 빠진 상태였다. 진창을 빠져나오기도 힘들 것이다.
“놈들이 널빤지를 깔고 보병을 투입합니다! 공성탑을 보호하려는 모양입니다.”
“적당하게 화살로 견제하면 될 거야. 그렇게 길을 내도 겨우 한두 갈래뿐이니까.”
신호 장교와 엘레나가 다음 상황을 이야기하는 와중에 새로운 인물이 계단을 올라 성루로 들어섰다. 먼저 그 모습을 본 장교가 눈짓으로 엘레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아, 주교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돌아서서 확인한 인물은 다르빌 교구의 신관이었다. 목에 건 걸개의 푸른색은 그가 신관회 3품의 지위를 가졌음을 보여 주었다. 1품인 데다가, 의전 서열로 11위인 엘레나에 비하면 아랫사람일 뿐이지만.
“페트루스 주교님. 전장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큰일 났습니다, 부단장. 마주석이 힘을 잃고 있습니다.”
주교는 풍성한 은회색 머리칼이 떨리는 게 보일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눈의 초점도 맞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결계를 맡은 마주석이 힘을 잃고 있어요.”
투구를 벗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엘레나는 무슨 말인지 먼저 들어 보기로 했다.
“힘을 잃다뇨?”
“결계를 유지하려면 마나의 원천에서 솟는 마력을 이용해야 하지만 그 원천이…… 말라붙었습니다.”
“말라붙었다고요? 하지만, 분명 결계는 형성됐…….”
그때, 어떤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마주석을 시내의 신전에 배치한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신전은 지하로 흐르는 마나맥 위에 건설되어 마력 활용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메테오론 폭격이 쏟아지던 순간엔 곧바로 결계가 활성화되지 않았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엘레나는 주교를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
“주교님. 분명히 폭격이 쏟아질 당시엔 결계 형성이 늦었어요. 그때 현장에 계셨죠?”
“예.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마나 우물에 마나가 흐르고 있었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지하 깊숙이 내려가서 점검해야 합니다만, 2주에 한 번씩 당직 신관이 하는 거라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결계를 구축할 때 분명 이상 현상이 있었고, 결계 생성이 지연됐습니다. 정말 뭔가 없었습니까?”
몰아치는 부단장의 압박 속에 주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무엇인가를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더니 손뼉을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신관들이 결계를 일으키려 했지만 처음 몇 번은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금방 마나가 일어나면서 괜찮아졌었는데…….”
“그거잖아!”
엘레나가 힘차게 발로 땅을 굴렀다. 주변의 사람들 모두 얼어붙은 채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마나가 펑펑 솟는 원천에서 왜 마나가 안 나왔겠습니까! 주교님이 사용한 건 마정석 자체의 에너지였던 겁니다. 젠…….”
엘레나에게서 거친 말이 나오려 했지만, 신관이 있는 걸 보고 분을 가라앉혔다. 어떻게 되었느냐는 나중에 살아남은 자들이나 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수습이 우선이다.
“알파급이 여의치 않을 땐 힘을 뽑아서 쓸 수 있다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부단장.”
엘레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마나의 근원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고, 문제가 생길 만한 곳이라면 마나가 땅 위로 잠깐 솟아나는 산 위뿐.
“마시스 정상.”
키메라의 성소에 관한 정보가 합쳐졌다. 비로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작 천 명이 겨우 넘는 고블린이 무슨 배짱으로 덤볐는지 이해되었다.
‘기사단을 끌고 성소를 수복할까.’
자신과 기사단이 전부 빠지면 도시가 버틸 수 있을까. 기어오르는 고블린의 악다구니에 일반 민병대원들이 혼란에 빠지면, 기사 하나가 다가가 겨우 막아 내는 형세였다. 엘레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의식을 유지하며 고개를 돌렸다.
“주교님, 결계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사실상 해제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기껏해야 한 차례 정도 포격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아직 밝히지 마세요. 지금부터 주교님은 다른 일을 제쳐 두고, 다른 신관들을 동원해서 주민 모두가 지하실이나 관청 담벼락 안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면목이 없습니다. 어서 피할 수 있도록 하습니다.”
페트루스 주교가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공중을 쳐다보았다. 주변을 흐릿하게 가려 주던 결계가 이제는 눈에도 보일 정도로 옅어져 있었다. 그만큼 허공에서 작렬하는 폭격의 진동도 체감하는 강도가 점차 커졌다. 약해진 결계 사이로 고블린의 흉악한 화살이 쏟아지며 부상자도 늘어났다.
“끄악!”
“내 팔! 내 팔! 끊어질 것 같아!”
“이 사람 좀 도와줘! 들것도!”
후방에서 기름을 끓이고 돌을 나르던 여자들과 노인들이 급히 달려와 부상자들을 들고 왔다. 그러나 비어 버린 전열을 메울 만한 예비 전력이 없었다.
“우리들도 나갑시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급히, 맞지 않는 사슬갑을 걸친 여성들도 성벽 앞에 섰다. 그런 모습을 보며 창을 다잡은 클로루스가 말했다.
“병사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수비대가 자리를 비우면 고블린을 막을 수 없다. 포격이 쏟아지든 어쨌든 성벽 위는 지켜야 해. 마지막까지.”
“여기서 각오를 해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부단장님.”
“너는 살려 보낼 거다. 어린 녀석이 그런 소리를 해선 안 된다.”
엘레나가 클로루스의 금발을 툭툭 치며 장난조로 말을 걸었지만, 분위기가 엄중한 건 어쩌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산 위쪽으로부터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먼지 바람이 일었다.
“주교가 예고했던 최후의 폭격이군.”
저 여러 발의 포탄 중 단 하나라도 맞는 순간, 다르빌도 끝장이다. 몇 시간을 버텼고, 이제 막 여명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한 지원군이 달려오기는 여전히 너무 일렀다.
“메테오론이 한 발이라도 떨어지면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끝이겠지. 젠장.”
“부단장님…….”
클로루스가 반쯤 쉬어 버린 목소리로 엘레나를 불렀다.
“마탑의 반대나 신관회의 우유부단함만 없었어도, 인간들이 덜 나태했어도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끝나진 않았을 것입니다.”
숨을 고르기 위해 눈을 감고 앞쪽의 성벽을 붙들었다. 이번에 폭격이 제대로 들어오면 처음 못지않은 충격이 올 것이다.
“모두, 무엇이든 붙잡고 버텨라!”
엘레나의 호통. 병사 몇몇도 하늘을 보았는지, 곳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하지만 클로루스는 탄성을 터뜨렸다. 탄성? 예상과 다른 반응인데.
“메테오론이 아닙니다! 무언가 강력한 힘이 키메라 성소를 때린 모양입니다!”
“성소를?”
거의 흐릿해진 결계 너머로 보이는 마시스 산 정상. 아주 작게나마 보이는 그곳에, 무너진 담벼락과 어디론가 사라진 천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키메라가 돌아왔나?”
“아, 아니! 저길 봐! 키메라가 돌아왔어!”
반쯤 날아가 버린 성소. 허공에서 굽어다 보는 거대한 날갯짓. 모두가 ‘사라진 통일 왕국의 상징’이라 떠들어대던 영물, 키메라. 신화 속에나 나오는 존재. 그것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쿠아아아아아아악!”
자신의 자리를 잠시 굽어보던 키메라가 공기를 진동시키는 괴성을 질렀다. 공기를 뚫고 돌파하는 소리에는 모두가 귀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야 할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이 있었다.
“크윽…… 대체 무슨…….”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먼 곳이었는데 이렇게 큰 소리가 들릴 정도라니.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감이었다. 공포를 견디지 못한 클로루스는 나뒹굴려는 몸을 움직여 가까스로 담벼락에 기댔다.
“우욱.”
엘레나가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오랜 훈련을 통해 습득한 정신력은 가까스로 서 있을 수 있는 용기를 보태 주었다.
“지금 저곳을 공격할 사람이라면…….”
제국? 어림도 없다. 이제야 군대를 동원해서 부랴부랴 콜라케르트의 폐허로 달려갔겠지. 제국 주둔군보다 더 멀리 있는 바난드나 기타 동맹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다르빌도 아닌 마시스로 곧바로 나가서 저런 대규모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지.’
엘레나는 씨익 웃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또 한 번 도움을 받았구나, 네마냐. 이상할 정도로 필요한 곳마다 나서 준다니까.”
“설마, 바가반드 백작인 겁니까?”
엘레나는 다시 일어서는 클로루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폭발할 듯 치닫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결계는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그렇다는 건, 마주석이 완전히 고갈되는 것도 막았다는 뜻이겠지. 완전히 고갈되어 충전도 못 하는 고물이 되는 사태도 피한 것이다. 마음이 놓였다.
“자, 그럼 눈앞의 저 버러지들만 치우면 된다.”
“공성탑도 저것 하나뿐입니다. 해치우면 놈들도 더는 덤비지 못할 겁니다.”
엘레나는 다시 검을 빼 들고 적을 가리켰다.
“기사들은 지금 당장 출발한다. 공성탑 주위 인원을 쫓아 버리고 전부 태운다. 모두 나를 따라 동문으로 집결시켜라!”
“알겠습니다!”
클로루스가 뛰어가는 것을 보며, 엘레나 자신도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도 채 떼기 전에 창백한 얼굴로 다시 나선 시장을 만난 건 의외였다.
“시장.”
“출발하십니까. 그동안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처음엔 전장에 설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지만, 지금은 완벽히 적응한 상태였다.
‘의심했던 게 부끄러울 정도군.’
고개를 끄덕인 뒤, 스치듯 계단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바난드의 검. 시장은 비로소 통증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엘레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쩌면……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군.”
흐려지는 혼잣말 사이, 하늘 너머로 들려오는 키메라의 힘찬 음성. 다르빌의 공성전은 서서히 막바지를 향해 달음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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