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아즈디샤트.
다르빌로부터 불과 16스타디온(약 2.8km)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강가에 접한 가운데 담벼락이라곤 작은 울타리 정도로, 거짓으로라도 도시라 말하기엔 민망한 곳이었다.
“아주 조용하군, 좋아.”
그 점을 너무나 잘 아는 주민들은 이미 첫 침입이 시작된 이틀 전, 마을을 버리고 내륙으로 피난을 떠났다. 텅 비어 버린 마을에선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준비가 끝나 있었다.
“대장, 도시가 포위됐다. 병사들 모두 제자리에 섰다.”
거칠고 괴상한 목소리. 조잡하게 엮은 도끼를 들고 있는 잡병이 보고하는 내용이었다. 언어가 아주 초보적인 단계인 고블린으로선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문장이었다.
“공성탑은 어떻게 됐나.”
그리엘크에 못지않은 거대한 몸집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흉터가 몸통을 가로질렀다.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숙련의 냄새가 진하다고 할지.
“공성탑…… 배치는 완료되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산 위에 있는 마도사 부대가 다르빌 공격을 개시할 거다.”
대답한 것은 붉은색 수정 지팡이를 잡은 붉은 로브의 인물이었다. 뒤를 돌아본 대장이 콧바람을 세게 내쉬었다.
“네페치, 그렇군. 다르빌을 구원하러 오는 다른 세력은 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확인된 건 없다.”
‘네페치’라고 불린 녀석이 지팡이를 짚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로브 깊숙이 작은 몸을 감추고 있었다. 고블린 대형종이라고 보긴 어려운 덩치였지만 용케 자기 키의 두 배나 되는 지팡이를 움직이고 있었다.
“족장으로부터 다른 지시는 없었나, 그림보쉬. 다른 소식이라던가.”
그림보쉬라는 대장은 그 말에 다시 반쯤 상반신을 돌리며 네페치를 바라보았다.
“왜, 걱정되는 거라도 있나?”
“우습군. 걱정은 인간들이나 쓰는 단어다. 나는 확실한 것을 좋아한다. 너에게 묻는 이유는…….”
“대마도사가 당했던 일을 신경 쓰는 건 알고 있다.”
지팡이 끝이 잠시 흔들렸다. 핏빛같이 선명한 붉은 색의 궤적이 잠깐 허공을 갈랐다. 그르렁대는 숨소리가 작은 로브의 그림자로부터 새어 나왔다.
“착각하지 마라, 그림보쉬. 작은 사고는 흥미로운 사건일 뿐이다. 그리엘크 선생이 너무 서둘러서 탈이 생겼을 뿐이다.”
“그리엘크는 어디에 있지?”
“한동안 치료도 받아야 하니 근신이다. 나중에 족장이 직접, 지휘할 본대와 함께 움직이겠지.”
갈색의 일렁이는 눈빛은 네페치의 답에도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전쟁을 가져오는 자. 네페치 자신이 보기에 어울리진 않지만, 그에게 호되게 당한 기사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상관없다. 어차피 공격을 위한 작전은 준비되었으니까. 기사단 녀석들이 결계석까지 가져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 기사단과 마주석을 없앨 기회지.”
네페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놓칠 리 없는 그림보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네페치의 작전은, 마시스의 마나를 쓰는 필승책을 벌써 노출하는 건가. 아깝지만 천여 명의 병력으로 놈들을 치려면 이게 최선이겠지.”
메마른 쇠가 부딪히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소리의 출처는 로브에 둘러싸인 네페치. 그림보쉬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인정하지. 마시스를 선점하자는 네 제안은 좋았다. 그러나, 네게 그걸 알려 준 그 인간 마법사를 믿을 수 있나? 언젠간 적이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도움 되는 녀석이다. 어차피 나중에 적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때가 되면 우리를 막을 순 없을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며 그림보쉬의 말은 잠시 끊겼다. 네페치가 적절하게 말을 받았다.
“개인의 자질은 군단의 존재를 넘어설 수 없다는 거로군. 네가 족장의 어록까지 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저, 부족과 종족의 생존을 위해 족장의 지배에 충실할 뿐이다.”
안 들어도 알겠다는 듯, 마도사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말썽이 될 바가반드도 아직 우리의 움직임은 모르는 모양이다. 안심하고 움직여도 되겠지. 전투가 시작되면 너도 준비하거라.”
그림보쉬는 그 말을 마치곤 천막을 헤치고 밖으로 나갔다. 네페치는 말없이 지휘관이 떠난 자리로 다가갔다. 살짝 눈 앞을 가리는 천을 들어 올렸다. 녹색 빛의 안광이 타오르듯 번뜩였다.
“바가반드라……. 분명히 의식하고 있군.”
그 시선의 끝에 닿은 건 지도였다. 인간이나 난쟁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쐐기 형태의 글자가 어지러이 적혀 있는 지도. 그중 익숙한 한 지점으로 시선이 내리꽂혔다.
“솔직히, 놈들에게 자기들이 무너지는 꼴을 보여 주면 재밌겠다만.”
키 작은 마도사가 고개를 들자 시선에 들어온 것은 서남쪽, 불길이 막 붙기 시작한 요새였다.
* * *
처음에 들렸던 뇌성과 이어진 폭발음로부터 삼십여 분가량 흘렀을까. 고블린 군단에서 선별된 천여 명의 병력이 온갖 무장과 함께 도시로 접근하던 그때.
“지금 당장 영역 결계를 가동해야 합니다. 어딘지는 몰라도 다른 도시가 공습을 받았다면 우리도 곧 타격받을 겁니다.”
“부단장님 말씀대로 시내의 신관들이 마주석 설치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곧 가동될 겁니다.”
성문 앞에서 엘레나와 시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래되긴 했어도 관리는 나름 잘했는지, 시장은 윤이 나는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전쟁에 대해선 문외한일 줄 알았더니, 의외군.’
몇 년 전 기준으로 보면 이곳 다르빌은 후방 지역에 가까웠다. 그때는 고블린의 군대가 꼬박 닷새는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저렇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인다는 건 그 몇 년 만에, 저 유순한 사람도 피의 그림자에 물들었단 뜻이겠지.’
복잡한 생각이 한참인 와중에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도시 민병대의 옷차림을 한 병사는 시장에게 무어라 귀띔했다.
“아아, 척후로 나갔던 정찰대가 돌아왔답니다.”
“바로 보고를 받고 싶군요, 시장.”
“예, 바로 올라올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두운 로브를 뒤집어쓴 병사 둘이 다가왔다. 위장용 의상인지 나뭇가지와 이파리로 위장한 상태였다. 이들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경례했다.
“서남쪽으로 가서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시장은 흘깃 이쪽을 보곤 엘레나에게 대화를 양보했다. 무표정을 지키면서 가볍게 목을 끄덕인 부단장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마시스 산에서 빛이 떨어진 곳은 확인했나?”
“예. 케네폴리스 총독령의 도시인 콜라케르트에 떨어졌습니다.”
“콜라케르트라고……. 도시는 어떤 상태지? 그 정도 공격을 받는다면 멀쩡하기 어려울 텐데.”
잠깐 뜸을 들이던 척후병은 엘레나가 재촉하자 입을 열어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완파됐습니다. 방어는 사실상 무너졌고, 살아남은 생존자는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이 한밤중, 추위 속에서 몸만 빠져나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곳곳에 고블린 약탈자들도 성행하는 마당이었다. 불쾌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엘레나는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근데, 콜라케르트에도 결계석이 있지 않았나? 제국 본토에서 공급한 게 있었을 텐데.”
“그건 제가 설명하지요.”
대신 나선 건 시장이었다.
“콜라케르트 방어선을 새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마나가 바닥났다는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총독부에서 막 교체 작업을 진행하던 참이었습니다.”
“잠깐 해제된 상태였단 거군요.”
굳이 표현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기존 방어 계획에 따르면, 유사시 다르빌이 위기에 처하면 콜라케르트의 군대가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적 대장이 누군진 몰라도 무방비 상태인 콜라케르트를 마비시킨 건 적절한 판단이었다.
“우리가 지금부터 버텨야 한다는 소리군.”
“오, 온다!”
망루에 서 있던 병사가 머리를 싸매고 엎드리며 외치는 소리. 시내의 높은 종루에서도 다급한 종소리가 몇 차례 울려왔다. 당황한 병사들과 주민들이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처마 밑으로 도망쳤다. 엘레나는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이제 다 됐다. 제발 어서 결계 가동만…….’
지지 않으려는 의지로 입술을 강하게 깨문 채 쏟아지는 불길을 쳐다보았다. 언덕 즈음에서 출발한 죽음의 기운은 천천히, 주마등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열기를 받은 공기가 이글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오기 시작한 그때.
―쏴아아!
흐르는 물과 같은 기운이 허공을 반투명하게 덮었다. 그 순간 귀청이 찢어지는 소리와 충격. 자리에 눕듯, 엘레나는 뒤로 넘어졌다. 정신없는 사이에 건물 외벽이 부스러지고, 입안으로 먼지가 쉴 새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불타오르는 공기의 실감과 막대한 압력, 들리지 않는 소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허억, 허억!”
그나마 허덕이는 숨을 몰아쉬며 포복으로 이동했다. ‘삐이’ 하는 이명이 서서히 가라앉고,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어왔다. 검집에 의지해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무릎을 편 엘레나.
“다들 무사한가!”
다른 이들은 여전히 바닥을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모래와 피가 반쯤 섞인 침을 뱉어냈다. 쇠의 비린내가 입에서 진하게 느껴졌다.
“모두 정신 차려! 결계석이 있는 한 우리는 지지 않는다. 전원, 위치로!”
‘전원 위치로’라는 말을 몇 차례고 목청이 터지라 질러댔다. 훈련을 바탕으로 정신력이 우수한 기사들이 먼저 일어났고, 민병대들도 곧 정신 차렸다.
“폭발에도…… 죽지 않았어?”
“결계석이다! 마주석이 가동한 거야!”
“얼빠져 있지 말고 이동해, 모두 위치로!”
폭발하는 압력에 밀려 주택의 벽에 부딪힌 시장은 쓰러질 듯 간신히 버티면서도 명령을 내렸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피 칠갑을 한 시장을 보며 병사들이 망설였으나.
“뭐 해, 새끼들아! 빨리 안 뛰냐!”
그 모습에도 악마와 같은 호령에, 병사들은 서둘러 계단을 뛰어 성벽으로 올라갔다. 엘레나가 급히 다가가서 시장을 부축했다.
“몸 상태가…….”
세게 부딪혔는지 출혈이 심각하게 이어졌다. 위기를 직감한 엘레나는 품에서 백색 수정을 꺼내 들었다. 이미 초점이 반쯤 흐려진 시장은 흠칫하며 수정을 움켜쥔 손을 밀어냈다.
“뭘 하는 겁니까? 넣으십시오.”
“어서 치료하지 않으면…….”
“결계석이 작동을 막 시작했지만 아슬하게 작동해서 타격이 클 겁니다. 지금부터 전투가 시작된다면 나보단 귀관을 위해 아껴 두시오.”
정론이다. 그런 목적으로 하나에 금화 30개나 되는 치료 수정을 기사단이 공급하는 것이다. 이제 전쟁이 시작되는 와중에 기사단용 수정을 함부로 소모할 수는 없었다.
“내 상처는 조금 쉬면 회복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무력감 속에 이를 깨무는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야가 흐릿해진 시장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가자……. 기사들은 문을 중심대로 무너지는 방어선을 지원한다.”
의자에 시장을 기대어 앉힌 뒤, 침착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렀다.
“부디 아무 일도 없으시길…….”
엘레나 뒤의 기사들은 묵묵하게 경례를 표하고 따를 뿐이었다. 필요한 의식이 끝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완전무장한 일행은 검집을 버렸다. 저벅대는 걸음 뒤로 작은 흙먼지가 사방을 덮었다.
* * *
“제길…… 이게 무슨 일이야!”
요란한 소리와 마구잡이로 들끓어 오르는 마나의 진동. 산기슭에 천막을 치고 막 수프를 들려던 네마냐는 위협을 직감했다. 뒤이어 하라드가 땀을 뻘뻘 흘리며 천막 안으로 뛰어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선 두 사람.
“윽, 연기 냄새. 뭔가 잔뜩 그슬린 냄새 같은데.”
“……저쪽은 콜라케르트가 있던 곳이잖아?”
“맙소사. 파괴된 건가? 주변에 고블린 흔적도 안 보이는데 무슨…….”
“엎드려!”
―슈우웅!
등 뒤로부터 쏟아지는 압력. 기겁한 네마냐가 하라드의 머리를 감싼 채로 앞으로 엎드렸다. 눈이 부시는 빛이 사방에 넘쳐나며 요란한 흔들림이 몸으로 전해졌다.
“이건, 마도사들의 공격 마법! 지금 어디로 공격이 가고 있어? 콜라케르트인가?”
“아니, 이미 다르빌로 바뀌었어. 놈들은 인간들이 어떻게 작전을 짜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군.”
학습된 공포와 부끄러움의 기억. 복잡한 감정이 폐허와 폐허가 되어가는 광경을 보며 북받쳤다.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파괴된 거리와 죽음을 피해 다른 죽음으로 줄달음질하는 발길들. 익숙한 죽음의 기운이었다.
‘이 정도 정보를 유출하는 건…… 페넬로파인 건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가혹하군.’
“주민을…….”
넘실거리던 감정은, 폐허가 된 들녘을 바라보는 하라드의 독백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전히 떨리는 무릎을 굳히며 애써 왼손으로 허리를 붙들었다. 감상에 빠지기엔 당장 방치된 주민들이 급했다.
“계획을 바꾸어야겠어.”
아래에 깔린 녀석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뭔가 이상해서 오른손을 살펴보니 포크가 들려 있었다. 식사 도중에 뛰쳐나와 들고 있던 모양이다. 하라드가 당황한 기색으로 물어왔다.
“어떻게 할래? 이대로 산 위로 갈까? 병사들은 지친 것 같지만.”
대답이 무슨 의미가 있나. 저렇게 긴장으로 땀에 젖었어도 눈빛만은 타오르는 동료가 있는데. 손에 들린 포크를 미련 없이 내던졌다.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포크는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너, 나. 둘이면 충분하지.”
“그렇네. 대마법사와 기사라니, 완벽하지.”
녀석은 오른손을 허공에 뻗었다. 공중으로부터 은빛의 지팡이가 나오며 손에 달라붙듯이 잡혔다. 평소엔 아공간에 넣어 둔 채 쓰지 않는다는 지팡이였다.
“오늘은 자비를 거두는 날로 하자고.”
네마냐가 선언했다.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선을 향한 곳.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그곳엔 어둠에 잠긴 키메라의 성소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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