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이제 여기부터는 영지 바깥입니다. 주의해서 전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군.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기사단이 태세를 갖추는 것을 느긋하게 돌아본 네마냐는 자신도 다시 고삐를 고쳐 잡았다.
“드디어 시작이군.”
일행은 타티온을 지나 영지 바깥으로 막 나섰다. 성국을 다녀온 뒤 한 달여만의 외출. 그동안 영지 외곽의 관문은 보강되어 있었다.
“두 달 전에 왔을 때는 엉망이었는데.”
처음 이곳을 지나갈 때 나무 울타리 수준이라 모두를 당황하게 했던 이름만 관문이 아니었다.
“두 달 빡세게 구른 효과는 있었군. 한눈에 보일 정도니까.”
마찬가지로 두 달 만의 외출인 하라드도 풍경에 신나 보였다. 바깥바람도 제대로 쐬지 못했으니 어쩌면 그럴 만도 싶은 일이었다.
“이봐, 신난 모양인데. 즐기는 건 좋지만 너무 빠지진 말라고. 곧 있으면 안전지대 밖이니까. 마나에서 다른 점은 느껴지지 않고?”
하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러니 느긋한 표정이었겠지.
“딱히? 여기선 마시스의 맥이 느껴지지 않아서 좀 더 가까워져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한 달 전쯤에 형이 켈리도니온에 다녀왔잖아? 그땐 무슨 일 없었나?”
“켈리도니온 쪽으로 마나가 흐른다?”
손을 내밀어 바람을 느낀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10월 중순의 강추위와 달리 오늘은 조금 따스한 훈풍이 불었다. 켈리도니온에 마나의 흐름이 흘러간다는 건 처음 알았다.
“켈리도니온이나 콜라케르트 두 도시가 결계주를 반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건 강 아래로 흐르는 마나의 흐름 때문이야. 충전이 되거든.”
“그쪽으로 갈 때마다 확실히 힘이 넘치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구나.”
“그렇게 느꼈어? 그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맥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단 건데.”
일행은 계속 이동했다. 한겨울도 아닌데 나뭇가지에 이파리가 다 떨어져 벌써 황량했다. 가지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에 괜한 추위가 느껴졌다. 고삐를 고쳐 잡던 네마냐는 어딘가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왜 또?”
“놈들은 마시스 산에서 키메라를 몰아냈어. 그 무서운 성수도 정면으로 물리친 거야. 더군다나 그 산이 마나의 샘인 것을 안 이상, 놈들도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 아무 일도 없다니.”
뭔가 일이 일어날 판인데, 아무런 조짐이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수상했다. 그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초조해하는 네마냐가 그저 귀엽기만 했는지, 하라드 녀석은 피식 웃었다.
“너무 부정적으로 빠지진 마. 당장은 문제 될 짓은 하지 않았겠지. 변화가 있으면 어떻게든 탐지될 거야.”
녀석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우리에겐 믿음직한 배후도 있고.”
그 이야기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도 없이, 파란 하늘만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호흡을 안정시켰다.
“그래야지. 최근에 자꾸 고블린 생각만 하면 더 초조한 것 같아. 준비를 그렇게 했는데도 마음은 불편하군.”
“욕심이야. 일개 소영주가 갑자기 완전무장한 병력 330명을 데리고 나올 수나 있겠어?”
애써 포장해 주었다. 바가반드가 영토는 대영주지만, 사실 부강함으론 소영주 정도다.
‘그나마 소영주 단위에선 최강자라는 게 위안이긴 한가.’
우스꽝스럽긴 해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처음 꼴에 비하면 잘 대비하고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정비했잖나. 사실 대영주라고 해도, 완전 무장 병력 300명을 즉시 동원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아! 저기 마시스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마침 팻말이 보이는군요.”
“그래, 무사히 도착이군.”
팻말은 무슨 일이 있냐는 듯 평온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불안감이 착각으로 끝난다면 더 바랄 것은 없었다. 차라리 헛수고라면 피는 흘리지 않을 테니.
[마시스(출입금지) → 70스타디온(약 12.6km)]
[콜라케르트 → 200스타디온(약 36km)]
[켈리도니온 → 350스타디온(약 63km)]
‘휴, 산이 지랄 맞게도 크네. 10km나 산길을 올라가라니.’
그나마 산길치고는 경사가 급하지 않은 산이라 다행이다.
“그렇다곤 해도 정상까지 닿으려면 새벽은 되어야겠군요.”
난처한 이야기가 뒤따르던 기사 하나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별 탈 없이 오긴 했습니다만, 이상하군요.”
다른 신참 기사 하나가 고삐 잡은 손을 내리더니 이상하다며 두어 마디를 중얼거렸다.
“뭐가 이상하지, 알리테스?”
내가 물어본 상대는 최근 우수한 마나 능력을 인정받아 초급 기사가 된 알리테스였다.
“두 달 전부터 제국군이 일정 거리마다 검문소를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군요.”
“그래……. 어딘가 괴리감을 느낀 게 그 때문이었어.”
불안감의 실체는 갑자기 도로에서 실종된 제국군이었다. 곳곳에 세워진 임시 초소조차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현지 제국군도 전선으로 동원되는 모양이야. 정말 전쟁이 임박하긴 한 모양이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느긋해 보이는 일행 유일의 마법사님.
‘느긋하군. 하기야, 저 녀석 어릴 적이면…….’
녀석이 태어난 사막의 도시 아란은 결코 평화로운 도시가 아니었다. 하라드가 어렸을 때라면 특히나…….
‘아니, 굳이 스스로 이야기하는 걸 꺼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생각을 떨쳐 내듯 고개를 흔들며 박차를 가한 발에 힘을 넣었다. 곧 아라크시스 강변이 아래로 내려다보일 것이다. 아름다운 야경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기를.
하야스단 고원의 제국 도시 콜라케르트.
초저녁이었다. 야간 당직을 맡은 병사들이 저녁을 먹고 막 근무를 시작했다.
“아, 안드로스 님. 벌써 올라오십니까? 아직 초저녁밖에 안 됐는데 좀 더 주무시고 오시지.”
“요즘 대대장 신경이 바짝 섰잖냐. 여기까지 놈들이 올 리야 없겠지만.”
초급 장교는 눈을 비비는 병사들을 툭툭 쳐 가며 인사를 건넸다.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이 돈 걸까요? 아직 야만족 관찰국에서도 별다른 소식은 없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아직 정식 보고는 없지만 게림나 쪽 상인이나 용병들이 얘기하더군.”
“에카톤이요? 상단에서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었답니까?”
들고 있던 횃불을 기울여 화로에 불을 붙인 안드로스란 장교는 으쓱했다. 불빛이 오르니 비로소 어깨에 작게 바느질로 붙박이 된 십인대장의 표시가 보였다.
“뭐, 모르지. 최근에 바가반드 영주랑 여기 지부장이 손을 잡았다던데? 뭔가 있나 보지.”
그 소리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흠칫 뒤쪽의 어느 장소를 바라본다. 3층으로 높게 건설된 건물. 중심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람나 상단 지부.
한눈에 봐도 퍽 비싸 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초저녁부터 불도 꺼진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에이, 시골 영주랑 만년 꼴찌 상단이 뭘 알겠어요. 소문에 혹해서 저렇게 후다닥 도망가기나 하고…….”
“하기야,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을 듣곤 갑자기 철수라니. 좀 웃기긴 하군. 괜히 용병들까지 동요하는 건 짜증 나지만, 제길.”
근무 직원과 일정량의 상품만 남겨 둔 채, 에카톤 상단은 바난드의 수도인 아니로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 덕분에 괜히 불온한 기운을 만든다며 제국군 사령관과 상단 관계자 사이에 갈등도 있었다.
“어휴, 다 쓸데없다니까. 빨리 전역하고 나가야겠다 싶다.”
“얼레? 십부장님, 저기 저거 뭡니까? 저런 게 있었나요?”
옆에 있는 다른 망루에서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귀찮은 듯 머릴 긁적인 안드로스가 입을 크게 열고 하품했다.
“하으윽, 뭐야?”
당직을 맡은 시간엔 아무 일 없는 게 최고인데, 귀찮게. 괜히 일 생기면 저녁에 반주로 포도주 마신 게 문제 될 수도 있는데.
“왜, 어디 주정뱅이라도 돌아다니나?”
“아, 아뇨! 저 산 위를 보시라는 겁니다. 원래 저 산에 저런 불빛들이 있습니까?”
“불빛?”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듣곤 병사 안드로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 산’은 보지 않아도 어딘지 알 수 있다. 콜라케르트 시 북쪽 성벽에서 ‘산’이라 부를 수 있는 단 한 곳. 마시스.
“마시스에 무슨 불빛이 있다고. 기껏해야 별빛이겠지, 자꾸 이런 귀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 면…….”
사람 좋게 허허 웃음과 함께 얼버무리려던 안드로스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 시간대에는 어두워야 할 산꼭대기가 불빛으로 환했다. 하늘과 봉오리가 닿는 곳은 타오르듯 점처럼 빛나는 불빛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10여 년 전에 일어난 내전 이후로 출입이 폐쇄된 산이다. 나라가 쪼개지는 와중이었고, 제국은 혹시 모를 변수를 막고자 사람들의 산악 출입을 금지했다. 덕분에 왕의 성수인 키마이라가 새로 태어났음에도 방치되었었다.
[고원이 통합된다면 제국의 이익 면에서도 좋을 것이 없다.]
제국이 고원을 통치하는 데는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불빛이 나타난 것이다. 누군가 잠입한 건가?
“안 되겠군. 지금 당장 대대장님께 보고해야지. 아니, 대체 무슨…….”
불길한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최근 오갔던 수많은 불길한 소식들이 떠올랐다. 키메라가 산을 떠났다느니, 고블린 특수부대가 바가반드를 쳤다느니 하는 소식 말이다. 그리고, 불안감은 재수 없게도 꼭 틀리는 법이 없었다.
“와앗! 저쪽에서 뭔가 날아옵니다!”
“저기, 저거는…… 으아악!”
거대한 푸른 점이 산등성이로부터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곤 이쪽을 향해 점차 점이 커지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궤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모, 모두 엄폐해! 엎드려!”
안드로스는 거친 손짓으로 병사들에게 숨으라고 지시했다. 처음엔 작은 점에 불과하던 빛의 덩어리는 이제 주먹 이상으로 커졌다. 창백한 푸른 빛이 이글거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댕댕댕!
훈련으로 익힌 습관만이 공포를 뚫고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안드로스의 불안한 시선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푸른 불덩이들에 꽂혔다. 누가 보아도 그 빛의 군체는 이곳으로 쏟아진다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콰쾅!
불과 몇 초 전까지도 당당하게 도시의 전면에 버티고 있던 망루들을 눈 부신 빛과 강렬한 폭음이 덮었다. 수백 미터 밖에서도 살갗을 태울 듯한 열기가 새벽의 차가운 안개를 뒤덮고 전해졌다.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던 방어벽, 그 자부심이 한 줌 재가 되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댕댕댕!
곳곳의 신전에서 급하게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겹쳐 울리며 세기말의 모습을 연출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들이 바깥으로 쏟아져나오려는 찰나, 도시를 굽어보는 산으로부터 다시 한번 불덩이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콰콰쾅!
첫 번째보다 훨씬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불길에 사로잡힌 도시는 그대로 죽음과도 같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 * *
같은 시각. 다빌 시.
마주석으로 서둘러 결계 기둥을 설치한 기사단 파견원들이 막 저녁을 먹은 뒤였다. 내일 당장 해자 및 방어 시설을 점검하고 수리하자는 이야기를 시장과 나눈 엘레나는 관저를 나와 밤길을 걷던 중이었는데, 급하게 초병이 달려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푸른 빛이 떠오르더니 지평선 쪽으로 갔다고? 무슨 소리야 그게?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제대로 보고해.”
“드, 드린 말씀이 전부입니다, 부단장님. 북쪽 산에서 빛 몇 줄기가 떠오르더니 북동쪽으로 향했을 뿐입니다. 북문 대장이 얼른 소식을 전해 드리라고 해서 그다음은 알지 못합니다.”
미간을 찡그리며 엘레나가 상황을 정리하는 사이, 허공에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상당히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지만 결코 작은 폭발음은 아니었다.
“이 소리…… 근처에서 번개가 친 건 아니지?”
“그렇습니다.”
“하…… 마침내, 그렇군. 시장에게 알리고 당장 비상종을 울리고 민병대를 모두 소집해, 당장! 켈리도니온에는 1급 비상이라고 알려!”
“네!”
여전히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지만, 잔뜩 얼어붙은 초병은 서둘러 골목길 가운데로 사라졌다.
‘충분히 늦지 않았다고 위안을 가진 것이 패착이었나.’
정체를 알 수 없이 불안하게 뛰던 맥박이 이제는 대놓고 쿵쿵거렸다. 갈 곳을 모르는 손은 가장 잘 알고, 유일하게 의지할 검을 굳게 잡았다. 그와 함께 성기사의 대표적인 증거인 하얀색의 반투명한 기운이 엘레나의 주위를 둘러쌌다.
“상황이 어쨌든 달라질 것은 없다. 얼지 말고 본 실력만 발휘하자, 엘레나.”
자신을 다잡으며 엘레나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웠다. 얼음과도 같은 침착함을 되찾은 기사는 검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골목길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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