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저, 참전자 등록을 하러 왔는데요.”
“아, 여기서 하시면 됩니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포고문의 효과는 뛰어났다. 첫날에 이미 200명의 귀환자가 등록했다. 시간이 지나도 행렬은 끊어지지 않았다. 먼저 신고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얼마간의 돈과 고깃덩이, 옷가지, 연료용 아마포를 받아 간 모습이 알려지며 자연스레 홍보가 되었다.
“그렇게 벌써 확보한 인력만 700명이랍니다.”
모처럼 즐거운 소식에 관리들이 흥겨워 어깨춤이라도 출 지경이었다. 정부 파악 인구가 늘어난다는 건 세금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소리니.
“그렇지만 역시 가스파리얀의 반군에 참전했던 사람에게까지 수당을 줄 필요까진…….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선 주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적이었던 민병대까지 참전 수당을 제공하는 건 꽤 부담되는 요소였다. 관리들은 어떻게든 이건 막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영주는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어쨌든 애초에 영지를 위해 싸운 사람이 보상받는 경험을 겪지 않으면 안 돼. 누가 앞으로 진심으로 싸우겠어? 정말 문제 되는 게 아니라면, 특정 입장에 따라 예외를 두면 안 되지.”
물론 이렇게 과거를 서둘러 봉합해야 할 필요성은 분명했다. 네마냐 역시 그럴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앞으론 그저 사람을 모으는 게 중요하지 않아. 정말 각자의 뜻을 다한 ‘싸움’이란 걸 하게 될 테니까.”
장래의 일이야 어찌 되더라도, 당장은 확실하게 보상한다는 원칙에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졌다. 영지가 광산의 결실을 팔아 수입을 기록했단 이야기도 입소문을 타고 퍼졌다.
“희한한 일이지? 영주가 바뀐 뒤 겨우 한 달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 같은 기분이라니까?”
“시테와 사나순 영지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지. 그런데, 이제는 부러운 마음이 까맣게 잊히더라고. 상단에서 도시 정비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는데, 완전 딴판으로 변했어.”
지난 수십 년 동안 영지의 몰락을 겪어 온 노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젊은 세대는 아직 어설프긴 해도 생기 넘치는 거리에 앞장서서 적응했다.
“농사가 천직이었지만, 정작 흉년과 세금에 시달리면서 풀칠이나 하면 다행이었지.”
“지금은 좀 바뀌었나, 자네도?”
“그래도 이젠…… 노력하면 결실이 있을 것이란 희망을 처음 보게 되었으니까.”
“다시 한번 골짜기에 황금 물결이 넘실거릴 날도 오겠지!”
농민들로서도 다행히, 새 영주는 농업에도 관심이 컸다. 상당수의 예산으로 퇴비 개량이나 상품 작물 도입이 추진될 예정이었다.
“요즘 여론이 생각보다 많이 좋아졌어. 윗전이 바뀌어서 일시적으로 좋아진 건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사정을 청취하는 기록관들은 그런 호기심과 함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들은 주민들이 인두세를 사실상 없애 버린 데 만족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렇군요. 인두세 폐지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신입인 5급 서기관 하메네라는 불과 두어 달 만에 완전히 바뀐 여론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나 조부모가 언제나 한숨을 쉬며 이야기하던 절망의 이야기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의적절하게 광산을 발견한 게 아무래도 긍정적인 미래 예측을 가능하게 한 건가.’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으론 이 모든 일을 일으킬 수 없었다. 기술력 없고 무력한 자들이 높은 가치의 자원을 보유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강하고 부유한 세력에 속아 넘어가거나 강제로 빼앗기기 일쑤니까.
지금도 작은 영지들은 제국이나 저지대 강국, 상단과 마탑 등에 알짜배기 광산을 헐값으로 팔아넘기고 있었다. 계약서에 도장이 찍힌 뒤에는 알아차려도 소용이 없다.
“그런 상황을 보면, 지금 영주는 마치 한번 겪어 보고 움직이는 것처럼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지.”
선배 서기관 하나가 소름 끼친다는 듯 이야기했다. 하메네라도 그 표현에 동의했다.
“먼저, 광산의 소유권을 왕국으로부터 보장받았죠. 그 뒤엔 최약체인 상단과 제휴하여 기술과 자본이 산업 기반을 유리하도록 마련했습니다. 세금 제도도 합리적으로 개편했고.”
“그래. 확실히 무서운 이야기야. 그런 사람을 영주로 둔 것도 대단한 행운이고.”
선임 서기관들은 일단은 조심스러운 분석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현재는 아직 취임 열기가 남아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하지만 열심히 시나리오를 돌리며 흥분한 초임 서기관의 생각은 달랐다.
“선배, 모르겠습니까?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다는 겁니다, 희망을요! 까딱하면 유랑민이 되어 방랑이나 하기 직전이었던 사람들이 마음을 다잡고 자리를 잡은 거예요.”
“두고 보자고. 젊은 패기를 오랜만에 봤으니 사람들이 잠깐 혹할 수도 있는 거고.”
“그 불가능한 일이, 돌이킬 수 없도록 구조적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딴에는 그랬다. 주민에게 과한 세금은 걷지 않고, 걷은 건 대부분 다시 돌아간다. 반면에 주민들이 일하며 생산한 자원 덕분에 영지 자체는 더 부유해진다.
‘정말 바가반드에 새로운 계기가 온 게 확실한 걸까. 그렇다면 우리 가문의 비전도 드디어, 빛을 볼 날이 오는 걸지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하메네라는 자기도 모르게 갈대로 만든 펜대를 꽉 쥐어 부러뜨렸다. 선배 호바네스가 중얼거리며 일을 보다가 그 꼴을 보곤 달려들었다.
“야야, 주먹 꽉 쥐지 마! 비싼 펜대 하나 사 줬더니만 기어코 그걸 부러뜨리. 아이고, 야!”
흥분한 나머지 펜대가 부러져 통증이 오건 잉크가 손에 묻건, 하메네라는 상관없다는 듯 생각을 이어 나갔다.
‘틀림없어. 누가 뭐라든 이제 변혁은 돌이킬 수 없다!’
그 하메네라가 작성한 여론 보고서는 몇 시간 뒤 네마냐의 손에 들려 있게 되었다.
“이거, 너무 과한데. 누가 중간에 자꾸 손 보는 거 아냐? 보기 힘드네.”
몇 장이고 인내심을 갖고 넘겼지만 낯부끄러운 칭찬만 가득했다. 헛기침으로 얼버무리며 탁자에 내려두었다. 미하일이 알 만하다는 묘한 표정으로 가까이 오더니, 서류를 집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원래 희망에 가득 찬 첫 열광이 강렬한 법이지. 오우야…… 이건 좀 세군. 어쨌든, 당장은 승리의 축배를 들자고. 그래도 이 부분은 좀 보기가 민망하지만.”
“첫 열광이라. 내가 오히려 걱정하는 건 그 열광이 사그라들었을 때의 일인데.”
네마냐는 일어나서 벽난로로 다가갔다. 바구니에 담긴 아마포를 하나 꺼내 불길로 쑤셔 넣었다. 불꽃이 튀며 천을 천천히 집어삼켰다. 연기도 거의 나지 않는 깔끔한 불이었다.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해야지. 넌 별걱정이 많아. 고블린의 위협이 실제로 나타나면 다시 흔들릴 수도 있지, 그게 뭐 어때서. 흔들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게 사람 마음이지.”
튀는 불똥을 보며 미하일은 혀를 가볍게 두어 번 찼다.
“……준비는?”
부지깽이를 기대어 세운 네마냐가 몸을 일으키며 짧게 물었다.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이야기였다.
“완벽. 흠집 하나 없지. 단단히 무장한 기사 10명과 보병 150명. 보병들이 탈 마차 15대도 준비했어. 10명씩 타서 이동하면 될 거야.”
“수고했어. 그래도 말은 40마리 정도만 있으면 되니 부담도 덜하겠지.”
“정말이지, 돈으로는 안 되는 게 없더라고. 물론 상단에서 빌린 돈이긴 하지만.”
“얼른 갚을 수 있도록 해야지.”
미하일은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어 네마냐와 이야기를 이어 갔다.
“가공업이 시작되면, 인프라 설치 명목으로 상단 측에 3천 골드 분량의 마정석을 더 공급해야겠어. 이번 작전 비용도 추가해야 하나?”
네마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야기했다.
“아, 내가 얘길 안 했던가? 이번 건은 바난드 길드에서 지원하기로 했어. 대 고블린 작전 비용은 국왕과 길드 쪽이 맡기로 했거든.”
잠깐 눈을 찌푸린 채로 생각을 되짚던 녀석이 감탄사를 뱉으며 손뼉을 쳤다. 평범하게 잊어먹은 거였군.
“상단에 또 신세를 지나 해서 잠깐 덜컥했지, 휴. 아무래도 계속 의존하는 게 좋은 모양새는 아니니까.”
“동의합니다, 자작님. 모쪼록 작전이 끝나고 내가 돌아오면 환영이나 해 달라고.”
“당연한 소릴. 자, 이거나 받아 둬.”
녀석이 새로 맞춘 옷은 재질은 좋았다. 검은색과 무채색 위주의 옷은 은회색 계열 망토까지 한 세트였다. 그걸 받고 나니, 녀석이 마정석도 하나 더 건네주었다.
“그건…….”
“네가 여기 결계로 처음 세웠던 백색 마정석. 성국에서 만들었던 거라 성능 하나는 죽인다던데. 물론 하라드가 동행해서 큰 문제는 없다지만, 믿을 구석이 하나 더 있으면 좋지.”
“우리 영지는 꼭 윗사람들이 빼돌린다니까.”
“허, 이게 없으면 직접 써본 네가 더 서운할걸? 하라드 말고는 마법사도 안 데려간다니 꼭 챙겨가. 이만한 자연 결계석이면 어디서든 유용할 거야.”
그 말에 순순히 받아들었다. 손안에서 차분하게 찰랑거리는 마나의 응축된 힘이 편안함을 주었다.
‘오늘이 10월 18일. 이제 오늘 밤이 되면, 불안의 근원을 찾으러 떠날 수 있겠군.’
드디어 문제의 뿌리에 다가간다는 생각에 조금 후련해졌다.
* * *
같은 시각.
바가반드 반대편, 아르카시스 강변의 다르빌. 아르카시스 강은 모래사장으로 된 넓은 강변으로도 유명했다. 풍부한 수량과 옥한 토양을 제공하며 한창 번창하던 시절, 이 강은 이렇게도 불렸다.
[하야스단 고원의 생명줄]
거대한 도시가 농촌과 농경지 사이로 즐비하게 들어섰다. 이젠 그 숱한 도시 중, 중류 지역의 다르빌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지만.
“아이고, 기사단 본부에서 직접 오시다니요.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레나는 투구의 눈가리개를 열어 건너편을 보았다. 활짝 열린 문을 등진 채 자신을 향해 조아리는 늙수그레한 시장과 일행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간신히 때를 맞췄군. 모두 말에서 내린다.”
엘레나는 능숙한 동작으로 투구를 벗고 말 안장에서 내렸다. 이제는 주변의 기사들 누구도 자신을 받치기 위해 오지 않았다.
‘이제 좀 편하군.’
몇 번이고 그러던 기사들은 꾸짖음이나 듣고 호위에서 배제당했으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싸우는 데 얕은 인식에서 비롯된 특별 대우 따위는 필요 없지.’
말고삐를 잡은 채 마중 나온 일행을 향해 걸어갔다. 날씨는 서늘했다. 하지만 쇳덩이 속에 두꺼운 옷을 입으려니, 짧게 유지하는 단발머리조차 무척 덥게 느껴졌다.
“오시느라 무리하진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출발했거든요.”
시장이 혀를 차며 안절부절못했다.
“저런.”
“걱정하실 건 아닙니다. 기사 서임의 맹세는 바로 이럴 때를 위해 하는 것이죠.”
그래도 시장은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어지러운 시기에 인구 만 명도 넘는 큰 도시를 지키기엔 턱없는 인물이라는 감상이 진했다.
“그런데, 지원 병력은 혹시 나중에 더 오는 겁니까? 지금 제가 보기론 삼십 명이 조금 넘는 것 같은데…….”
“시장. 켈리도니온의 성기사는 혼자서 고블린 30명은 거뜬합니다. 다른 곳은 고작 몇 명씩 배치됩니다.”
“아…….”
시장은 납득하면서도 불안하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 불안 자체를 엘레나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안정을 위해 평소라면 하지 않을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애초에 부단장이 이렇게 직접 올 일은 흔하지 않기도 하고. 어이, 슴바트. 그것을.”
‘슴바트’라고 불린 기사는 눈가리개조차 걷지 않은 채 묵묵히, 수레 뒤에 있던 거대한 물체로 향했다. 그리고 덮여 있던 장막을 끌어 내리자 시장 일행은 연신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저 빛……! 설마 결계용 마주석을 가져오신 겁니까?”
“덕분에 신관회에서 욕을 무진장 얻어먹었죠. 부디 그만한 성과가 있길 바랍시다.”
신성 기사단 지원병보다 결계석이 훨씬 마음에 드는 듯 시장은 갑자기 어깨를 꼿꼿이 폈다.
“무, 물론입니다! 무적의 성기사단에 더할 나위 없는 보물까지 강림했으니 고블린 놈들이 좀 덤벼 봤자지요, 으하하!”
‘기사단만 봤을 때와는 반응이 너무 다른데.’
퍽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점도 인정했다. 기사단이 정예병인 대신 숫자가 절대적으로 너무 적다는 건 자신도 잘 아는 한계니까. 시장은 엘레나의 속도 모르고 얼른 보챘다.
“자, 자! 이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시지요. 부족하지만 성의를 모아서 식사와 숙소가 준비해 두었습니다.”
“시장의 동의도 얻었으니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자, 오늘은 모두 입성한다. 마주석도 조심히 견인하도록.”
마주석. 마정석의 크기는 용도와 원석의 크기에 따라서 달라졌고, 마나의 용량에 따라서도 달라졌다.
이 기둥 형태의 거대 마정석 하나면 도시 범위의 결계나 대형 공격 마법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제국이 성국에 우호를 약속하며 건네준 선물이었다. 워낙 중요한 전략물자로 여겨져 건국기념일 정도가 아니면 아예 모습을 보기도 어려웠지만. 네마냐가 제안한 새 시스템은 이제 겨우 설계도만 들여다본 수준에 불과했으니, 사실상 유일한 고블린 대책인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약해진 신관회와 성국의 이름이 빛나는 것도 이 거대 마정석이란 보물이 한몫할 테지.’
엘레나는 수레 옆으로 돌아가 다 덮이지 않은 장막을 애써 가렸다. 바로 전날 밤, 고블린의 병사들이 전 국경에서 공격을 개시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벌써 하루가 지난 상태.
“우리 뒤에 고블린 정찰병은 없었지?”
엘레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관측병 역할을 맡은 베드로시안에게 확인하듯이 되물었다. 관측병이라 가벼운 가죽으로 된 갑옷을 걸친 녀석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징후는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게, 여기서 대략 200스타디온(약 36km) 떨어진 농촌 지역으로 우레이미야 군단이 침입한 겁니다.”
“우레이미야.”
신음하듯 다섯 글자를 흘렸다. 신관회가 언제나 자랑하는 신성 기사단이 이 순간 가장 두려워하는 상대. 그 호전성, 죽음을 두려워 않는 광신, 교활할 정도의 용병술, 무력에 압도적 숫자까지. 우레이미야 군단의 진격이 알려지자마자 기사단이 알파급 마주석을 동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디 별일은 없어야 할 텐데. 아쇼트 대왕이시여.”
고원을 아우르고 통일 시조가 된 아쇼트 대왕의 이름을 뇌까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다만 이번 우레이미야의 침입이 일회적인 노략질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만약, 네마냐가 부드럽게 경고했던 그 시나리오데로라면. 위협이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닥쳐오고 있었다.
“근처 농촌은 어떤가요? 피신했습니까?”
시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세워 놓은 계획대로 움직인다고 했다. 허술할 것 같았는데 제법이었다.
“계획대로 저지대 주민들은 주변 산성과 계곡 언덕의 요새로 들어갔습니다. 다르빌에는 주민이 너무 많다 보니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만 후방 지역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작전은 진행되고 있었다. 그나마 네마냐가 강하게 현실을 알려주어서 기사단과 성녀의 주장으로 여기까지 끌고 온 수준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너무 위험해. 좀 더 나은 대책은 없었을까.”
잠깐 약해진 엘레나였자만 잡념을 지우기라도 하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바난드 제일검의 이름이 언제 필요하겠어. 지금처럼 싸워서 버텨 내는 게 최선이지.”
한 가닥 머리칼이 뺨에 달라붙었지만, 침착한 동공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손은 한껏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키킥!
하지만 미처 알아차릴 수는 없었으리라. 덤불 더미에 은신한 채 기사단의 수상한 움직임을 처음부터 살펴보고 있던 낯선 이들의 눈동자를. 그 매서운 눈빛에 비하면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다르빌 시의 방어벽은 애처로워 보였다.
황금빛 모래사장이 두르고 있는 다르빌. 그곳에서 곧 대전쟁의 서막이 펼쳐질 터였다.
- 5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