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10월 11일.
하야스단 고원의 변방 영지 바가반드에선 다시 한바탕 떠들썩한 소동이 일어났다. 거리에 나붙은 커다란 공고문의 제목 때문이었다.
[바가반드 영주의 포고문]
부임한 지 두 달 하고도 며칠 지난 신임 영주 네마냐의 이름으로 작성된 포고문이 영지 곳곳에 나붙었다. 영주의 신신당부에 따라 포고문은 제빵소 같은 영지민들의 가게는 물론 주택가 골목 여기저기에도 게시됐다.
“기왕 선포하는 거면 모두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도록 선정해야 하지 않겠어?”
덕분에 몇 장 없는 수입산 파피루스나 양피지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영지 총괄자인 미하일은 월동용으로 들여놓았던 아마포까지 동원했다.
지면도 거칠기 짝이 없고, 새벽 날씨는 추워 잉크도 굳기 일쑤인데 필사로 일일이 작성했다.
“이건 꼭 추가 비용을 받아낼 테다!”
미하일의 으름장을 막으며 어찌어찌 이틀째 새벽이 되자, 모든 포고문이 게시되었다. 여명이 밝아오자 주민들도 마침내 포고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 영주인 가스파리얀 3세는 공금을 횡령해 사적인 목적에 사용하고 고블린과 손을 잡아 역모를 모의했다.]
사람들은 읽으면서도 다음 결론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바난드의 국왕께서는 이에 왕국령 바가반드의 기사인 나, 네마냐에게 백작위와 영지 관리를 위임하셨다.]
“다 아는 얘기로구먼.”
아침잠이 아직 덜 깬 상태로 아침밥을 지으러 왔는지, 장작을 든 채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농부는 코를 후비며 얘기했다. 퍽 천연덕스러웠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아직 반도 안 읽었어.”
농부들은 글씨를 잘 몰랐으므로 동네 선생 하나가 읽어 주고 있었다. 그 선생은 세련되게 작성된 포고문에 감명이라도 받았는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스파리얀’이란 글자를 볼 때마다 흠칫거렸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가스파리얀 놈이 그런 벼락 맞을 생각을 어찌했는지 모르겠다니까.”
“뻔하지! 영지는 팔아먹고 자기 한 몸이나 지키려 했겠지.”
물을 길러 가던 어느 부인은 아침부터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벌써 한마디를 던지곤 멀리 사라졌다. 한쪽에서 침묵을 지키던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답답하다며 선생을 재촉했다.
“아니, 그래서 포고문의 내용이 뭔데. 설마 이미 다 알고 있는 걸 얘기하려는 건 아닐 테고.”
“빨리 보고 밭에 가야 한다고!”
“조금 뒤면 갱도에 들어가야 할 시간입니다. 거, 빨리 좀 얘기하쇼! 벌써 해가 중천이네.”
거듭되는 재촉에 작게 신경질이 난 선생은 티가 다 나는데도 애써 태연하게 지면을 보았다. 종이로 쓰기엔 아마포가 좋지 않아서 읽는 데 불편함이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알아보고 읽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니까.”
[가스파리얀과 그 일당이 고원의 인간들에 대하여 저지른 죄는 막중하다. 그러나 가스파리얀 본인은 이미 죽음으로서 그 죄를 치렀다. 모종의 이유로 전투에 휘말렸다가 생환한 병사들에게는 죄가 없다.]
“오호, 죄가 없다고.”
“그게 정말인가?”
[그러니 생환하였으나 보고하지 않은 병사가 있다면 영지 측에 신고하기 바란다. 영지에선 과거와 상관없이, 모든 참전자 가정에 생필품을 추가로 공급할 예정이다.]
선생과의 대독이 끝났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생각보다도 잠잠했다.
“엥, 사면령이었네? 나는 적어도 추방하거나, 손목은 자를 줄 알았는데.”
“그러게, 원래 그렇게 해 왔는걸.”
“새 영주님이 가스파리얀인 줄 아나. 돈이나 뜯어가고 보탬도 안 되던 놈과는 다르다니까.”
바쁘다고 재촉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끝이 날 줄 몰랐다. 하지만 유독 시종일관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조금 반응이 달랐다. 그늘진 채로 혹은 옷가지를 덮어쓴 채 군중의 끄트머리에서 가만히 있던 사람들은 곧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었다.
“네 시간 만에 200명이나 등록했다고?”
읽던 책을 내려놓는 네마냐의 표정은 예상했단 표정이었다. 다만, 반나절 만에 그런 수치가 나왔다는 데 조금 놀랐을 뿐. 미하일은 자신이 들고 있던 파피루스를 건네주며 자리에 앉았다.
“가스파리얀의 존재가 그만큼 대단했다는 방증이지. 우리가 뭐만 해도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원인이랄까.”
“……가스파리얀의 시신은 잘 처리했지?”
미하일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그렇다고 끄덕였다.
“그럼. 먼 친지들도 맡을 생각이 없다고 해서 신전에 부탁해서 장례를 했어. 물론 도굴당할 수 있으니 공동묘지에 이름 없이 묻었고.”
“잘해 줬어. 어차피 공개적으로 해 봐야 사람들이 파헤치려 했겠지.”
이걸로 하나는 끝났다.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두 손은 깍지를 낀 채 책 위에 올렸다. 옷깃을 정리하며, 미하일은 근무 시의 껄렁한 태도는 집어치웠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뭔가 걸리는 점이 있냐? 어딘가 기분이 석연찮아 보이는데.”
“내가? 석연찮다니. 하긴 반년간의 사연 하나하나가 다 석연찮은걸.”
미하일은 풋 하는 웃음과 함께 가벼운 손사래를 쳤다.
“야, 내가 너랑 같이 지낸 게 기억으로만 15년이거든? 내가 마나 전문가는 아니어도 네 숨결에 흐르는 어두운 기운은 더 잘 알아본다고.”
“어이구, 전문가 다 나셨네. 무당 가문이냐?”
농담에도 넘어가지 않는 미하일은 오랜만이다. 한 5개월 전쯤 콜라케르트 여관에서 한 번 본 모습이군.
“설마…… 페넬로파를 의식하는 건 아니지? 뭔가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다던가.”
“죄책감? 아니지, 아니야. 나나 우리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그저 너만큼이나 오래 지내 왔던 친구여서, 짧게 감상에 빠지는 정도야.”
네마냐는 오해 말라며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미하일도 쉽게 물러서진 않았다.
“그때 정략 결혼이 깨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너희 둘이 갈라진 건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선 잘된 거야.”
미하일이 이야기하는 것은 불과 16~17년 동안의 경험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60년 가까운 다른 삶을 기억하는 네마냐였기에, 페넬로파에 대한 기억은 쓰라렸다.
‘어둠 속에 있던 나를 찾아왔었고, 끝내 어둠 속으로 떠나 버렸던 녀석.’
페넬로파와 만났던 기억엔 매번 쓰라림과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고통의 빵과 시련의 포도주라 해도 네마냐는 기어코 쓴 잔을 삼키며 페넬로파를 기억했다.
‘뭐, 결국 페넬로파나 나나 모두 이겨내질 못했지만. 특히 동생을 막으려던 그 녀석이 그렇게 비명에 갔을 줄이야.’
젊었을 적의 표독스러움을 간직한 또 다른 페넬로파를 접한 네마냐. 유달리 남들은 모를 속앓이를 할 수밖에는 없었다.
‘대체, 왜. 나만큼 정의감이 있을 녀석이 어째서 고블린과 함께하는 거지.’
미하일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내 네마냐의 마시스 방문 계획을 들고 나섰다.
“그래서 더 녀석을 좇아 마시스 산으로 가겠단 생각이지? 포고문 발표에도 유달리 신경을 다 쓰고.”
마시스. 지금까지 확인된 고블린 특수 부대, 그리엘크의 행적은 모두 마시스 산과 연관이 있었다. 마나의 샘에 가스파리얀과 고블린 그리고…… 페넬로파까지.
“모르겠어. 놈들이 이미 성국을 치기 위해 원정을 준비하는 건 확실해. 하지만 어째서 마시스를 노리는 건지는 몰라. 적어도 녀석을 만나러 가면 알아낼지도 모르지.”
애써 대답을 끌어내며, 네마냐는 며칠 전에 나누었던 하라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응? 가스파리얀 계통 마법사들에게 상속되는 비기? 비기라면 가문별 특수 마법을 이야기하는 건가?”
하라드는 네마냐의 질문을 듣고는 자신의 추측을 제시했다.
“어. 내가 알기론 페넬로파가…… 음, 어릴 적에 마나의 맥을 자유자재로 만지고 놀았다는…… 이야기가 있었거든.”
전란이 계속되고 흉작과 추위가 이어지는 어느 밤. 그럴 때마다 지친 모습에 닳은 복장으로 페넬로파는 자신을 찾아오곤 했다.
[오랜만에 재미난 거라도 보여 줄게.]
대충 외투를 씌운 채 나간 이슥한 한밤의 오솔길 언덕.
‘그때 춤이라도 추듯 녀석의 손길에 반응한 건 마나의 흐름이 분명해. 녀석이 정말 마법사라면 바가반드 지배자 가문에 전해진다는 마법을 알겠지.’
마나 원천을 통제하는 마법. 네마냐는 그것을 추정하고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으니 선뜻 꺼내진 않았다. 하라드는 네마냐의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린 채 최대한 답을 내놓았다.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마법으로 이름을 떨치는 명문가라면 보통 대대로 전해오는 비전이 있지.”
“비전이라. 그걸 알아볼 수는 없는 건가?”
“비전은 말 그대로 가업의 비밀이잖아. 거의 비밀이라고 봐야지. 혹시나 살펴보고 싶어도 성국 문서보관소에서 몇백 년짜리 기록을 살펴야 할 걸.”
역시나 쉽게 알아챌 수는 없는 종류의 정보다. 그렇다면 직접 만나든지 흔적을 찾든지 해야지. 성국에 어찌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아라가트 마탑의 눈치는 물론, 몇백 년짜리 기록을 뒤져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직접 발로 뛰어야겠군.’
자그마한 한숨과 함께 회상이 끝났다.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던 미하일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그래. 성국에 다녀오고 네가 일행한테 모두 얘기해 줬지. 정말 그렇다면 그 산을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의혹을 품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을 테니까.”
“밀?”
미하일은 손을 뻗어 네마냐의 두 손을 굳게 다잡았다. 포개진 두 쌍의 손. 진지한 분위기에 자꾸만 손 아래 깔린 ‘동물의 분뇨의 활용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시선을 끌지만 어쩔 수 없지.
“이번엔 제발 몸조심하고 다녀, 네마냐. 네 말대로 첩보 보고를 생각하면 그냥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가만히 두고 싶을 정도야. 이번에 고블린이 달려오는 건 장난이 아니니까.”
“우리가 움직이고 안 그런 적이 있었나?”
“태연한 척하지 말고. 매번 죽을 게 뻔한 자리에 발을 들이미는 갈 보면 내가 다 초조하니까. 그리엘크 때만 해도 정말, 어휴.”
미하일의 뜻은 잘 알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다.
“……설사 다리나 팔 하나가 부러지더라도 나가야지. 그만큼 어쩌면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건 분명하니까.”
“그래, 네가 이겼다. 알겠어. 네가 한번 고집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리지. 그걸 또 잊어먹어 버렸네. 알았으니까 단단히 채비를 갖춰서 산을 가든 도시를 가든 해.”
찡긋하며 손으로 목을 긋는 흉내를 내는 녀석. 다시 예의 장난기를 되찾은 미하일의 시선이 책으로 옮겨갔다.
“그러고 보니 웬 분뇨? 이번엔 또 무슨 바람이 부셨대?”
“아, 굳힌 가축 배설물을 보조 연료로 사용할 수 없나 찾아보고 있었어.”
“말린 똥으로? 연료가 된다고?”
“그래. 지금은 아는 사람이 적은 것 같긴 한데. 노인 중에는 어떤 가축의 것을 사용하고 어떻게 건조해서 쓰는지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거야. 효율이야 좀 떨어질 수도 있지만.”
팔짱 낀 채 턱을 괸 녀석이 갸웃거렸다.
“똥이 얼마만큼의 효율을 낼지는 모르겠다만, 정말 연료 대체가 가능하다면 좋지. 꺼려지긴 해도 추위에 떠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좋아, 영지 관리관인 자작 미하일 님의 긍정적인 답도 들었으니, 내 할 일은 다 했군.”
“좋아. 네가 없는 사이에 바흐람 씨한테 들어오는 정보가 있으면 바로바로 보내 줄게.”
대화가 시작될 즈음엔 올곧게 솟아 있던 촛불은 어느새 그을음을 뽑아내며 천천히 녹고 있었다. 공기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일렁이는 불길 사이로 말 없는 두 벗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나마 동지가 있다는 게 이렇게 편할 줄은 몰랐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수렁에 가더라도 이대로라면 불안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째서인가. 불길이 그림자를 집어삼킬 듯 화르륵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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