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바흐람 아르투니.
지금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다. 수백 년 전 명문이었던 아르투니 가문의 가주다. 이들 정보 부대의 옷차림은 민병대와 다를 것 없이 비슷하게 가벼웠다.
‘검과 장식물은 영지 병사들과는 다르군.’
다른 게 정상이다. 통일성은 군복으로도 충분하니까. 오히려 어느 정도는 독립성을 주는 편이 특수 부대에 자신감을 주기엔 적절했다.
“영주께서 감사하게도 허용해 주셔서 독자 문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작전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고맙지.”
네마냐의 시선이 닿은 바흐람의 어깨너머엔 허름한 수레 한 대가 있었다.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나무 관이 있었다.
“……그래서, 열다섯 명의 병사가 이 수레를 발견해 끌고 왔습니다.”
“지금까지 집이나 병영으로 복귀한 상대 병사들은 얼마나 되지?”
네마냐가 묻자, 곁에 있던 장교 하나가 귀띔했다.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끄덕였다.
“대략 3할 정도는 부대 복귀가 확인됐습니다.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만, 그냥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확인이 안 됩니다.”
“음, 역시나 처벌이 두려운 건가. 분명히 전사자 숫자가 70%나 되지는 않을 텐데.”
“영지 안의 인구를 조사할까요?”
고개를 저었다. 좋은 방법이 아니다. 현대식 행정은 엄두를 낼 수 없는 세계다. 계속 이러면 겁먹은 주민들의 이탈만 심해질 것이다. 이럴 땐 살살 당근을 쓰는 게 훨씬 효과적이지.
“지레 겁을 먹었을 뿐이니까 공식적인 사면령만 반포하면 될 겁니다. 제 명의로 공문 준비 좀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럼 가스파리얀의 시신은 어쩌시겠습니까?”
바흐람의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단어들이 뇌리마저 차갑게 얼릴 듯했다. 나샤와 전투의 생존자. 파란만장한 사연이 넘치는 이 인물에게 전 영주에 대한 자비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전 영주가 살아온 것도 아니고 죽어서 왔는데, 불필요한 모욕을 할 이유는 없지. 고블린에 휘둘려 골칫거리가 된 것보단 훨씬 나아.”
그리곤 바로 우측에 선 미하일에게 고개를 돌려 눈짓으로 의견을 물어보았다.
“음, 어…… 죄가 있긴 한데, 어차피 죽었으니 그건 됐고. 일반 주민의 예절대로 장사하면 되겠네.”
“적절한 판단이야, 밀.”
하고 싶은 얘기를 아주 잘 정리해 준 미하일의 판단력은 언제나 그렇듯 미더웠다. 앞으로 필요할 때마다 영지를 맡기더라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밖에서 머물 시간이 훨씬 길어지면, 그때부턴 마냥 영지 개발자 노릇만 하긴 어려울 테지.’
벌써부터 뻑적지근해질 일상을 생각하며, 아주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스파리얀은 적절하게 수습해서 공동묘지에 장사합시다. 자녀들은 어떻게 됐지? 분명히 아버지와 같이 머물렀을 텐데.”
“그건, 들어가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있다는 암시를 팍팍 넣은 대답이었다. 수긍의 끄덕임과 함께 몸을 돌렸다. 층계를 올라 문루 위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밀착이라도 한 듯 바흐람도 거의 동시에 따라 들어왔다.
“첫 임무부터 꽤 골치 아픈 문제를 만났더군. 고생했어.”
“난민이 정착할 수 있게 도와주셨으니 당연한 의무입니다.”
거, 딱딱하긴. 풀어질 새를 모르는 사람은 어쩔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살짝 피식했다.
“아무려면 어떻겠어. 자, 그럼 가스파리얀의 자녀들 얘기를 들어 볼까? 무슨 일이야?”
“정확하게 어떻게 된 건진 모릅니다. 두 사람 모두 그리엘크를 따라 고블린과 함께하고 있단 것뿐입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네마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고블린들에게 합류를 했다고?
“가스파리얀에 페넬로파까지? 고블린을 굳이 따를 만큼 좋은 감정은 없었을 텐데, 내 기억이 맞다면…….”
마지막에 굳이 사족을 단 건 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한번 새로운 경로를 밟아 가면서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혹시나 간과하고 넘어가지는 않아야지.
“글쎄요. 저는 영주님처럼 그 사람들과 교류하진 않았으니 뭐라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다만?”
본론이 여기서부터란 뉘앙스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네마냐는 다리를 꼬았다.
“시신을 수송한 한 패잔병과 이야기해 보니, 갑작스레 죽은 영주 곁에서 페넬로파가 마시스니, 마나의 뿌리니 하는 이야기를 중얼거렸다고 하더군요.”
“마나의 뿌리…….”
지금 상황에선 그다지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지금도 분명히 마시스 성산은 가스파리얀의 지배 아래 있을 테니까.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마시스 성산의 마나라면…….”
“키마이라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거겠지. 로브를 쓴 의문의 마법사가 있었다더니 그게 페넬로파였단 말인가.”
한쪽 팔걸이에 기댄 왼손에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졌다. 생각해 보면,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시나리오였다. 제국보단 흔하다지만 역시 손으로 꼽을 만한 실력의 여자 마법사였고, 거침없이 키메라의 성역에 들어올 만한 신분이었으니.
“페넬로파가 더 신경이 쓰이십니까? 보통은 영지 상속권이 있고, 침략의 명분으로 쓰일 만한 공자 쪽이 더 문제일 텐데요.”
“가스파리얀은 걱정할 만한 위인이 아니야. 그릇도 작은 녀석이지. 오히려 위협이 될 만한 건 페넬로파야.”
마무리가 개운하진 않았다. 사람은커녕 짐승을 죽이는 것도 무서워서 채식만 한다던 페넬로파가? 자기 아버지 영향을 받긴 했어도 근본적으로 악할 인물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몇 분이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생각했다. 그러나 끝끝내 답은 나올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 알고 있는 증거만으론 결론을 내리긴 어렵겠어.’
잠자코 지켜보던 바흐람은 길어지는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세를 고쳐잡은 네마냐는 고개를 흔들며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감상 모드는 잠깐의 여유로 충분했다.
“흠, 이렇게 하자고. 활동하는 걸 보니, 이제는 첩보 활동도 가능하지? 대충 어느 정도 가능해?”
“하야스단 고원 안에서라면 뭐든 가능합니다. 신분에서도 제한 사항은 없습니다.”
“대단한데.”
자신감이 기본 사양으로 탑재된 대답에 만족스러웠다. 원하는 대로 충분히 수행할 수만 있다면, 쪼들리는 사정에서도 지원할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저희는 평범한 자경대가 아닙니다. 예전부터 고블린과 싸워 왔던 최정예 전력이 중심을 이뤘습니다. 그늘 속에서, 필요하다면 양지에서 영주님을 도와 싸우겠습니다.”
“……그럼 페넬로파와 가스파리얀 소공자의 첩보를 부탁하지. 그리고. 나코르잔과 연락할 수 있는지도 알아봐 줘.”
“나코르잔……. 고블린, 그중에서도 가장 지저분한 벌집 아닙니까? 그런 놈들과 연락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며 뜸을 들인 네마냐가 오랫동안 생각만 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낸 순간. 굳게 다문 채 언제까지나 난공불락일 것 같던 바흐람의 표정도 흔들렸다. 고블린 세 글자면 저토록 완강한 기사단 출신을 뒤흔들 수 있었다. 참 흥미로운 일이다. 유념해 두면 앞으로 여러 군데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연락할 거야. 고블린 군단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더군다나 우리 영지에서 병력을 빼면서까지 대응을 피했고. 그 이야긴즉, 마법사 전력과 영지 병력의 일부까지 편입했단 거야.”
“조만간 놈들의 공세가 다른 쪽에서 닥칠 거란 말씀이시군요.”
이해가 빠른 상대와 이야기하는 건 이래서 좋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골치 아픈 일이지. 우리 영지는 겨울 필수품도 부족해서 난리인데. 그러니 더더욱, 고블린 중에서도 협조자를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수든지 써야 할 거야.”
“잘 알겠습니다. 나코르잔이면 그런 용도로는 충분하죠. 이용하기 위한 대상이라면 저 역시도 기꺼이 동의합니다.”
‘이용 대상……만은 아닐걸. 어쩌면 동맹까지 올라갈지도 모르는데. 그 영웅이 이번의 세계에도 그대로라면.’
고민을 지워 버리려는 듯, 네마냐는 눈을 감았다. 일단 지금은 정보대와의 사이가 나빠질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눈을 감고 몇 초 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누가 또 애타게 찾으시는군요.”
바흐람은 어느새 다시 뚝뚝 떨어지는 건조한 말투를 되찾았다. 씁쓸한 표정으로 답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애초에 그러려고 바라지도 않던 영주 자리를 꿰찬 거니까.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다른 건 몰라도 스스로 지옥을 찾아간다는 점은 우리들의 공통점이군요.”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비릿한 웃음 한 조각을 나눠 든 채 자리를 마무리했다. 문을 두드린 건 하라드였다. 갑자기 사라져서 어쩌지도 못하고 다들 마냥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바흐람은 얼굴 중앙의 흉터 외에는 존재감도 없이 방을 나갔다. 유일하게 하라드 정도가 흘깃거리는 시선으로 바흐람의 뒷모습을 살펴보는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네마냐는 미하일에게 말했다.
“미안. 기밀 보고가 있었어. 다들 오래 기다렸나요? 그냥 영주관으로 돌아가 있지.”
“뭐 얼마나 기다렸다고. 마침 상단에서 보내온 물자도 받아야 해서 겸사겸사 기다렸지.”
한쪽 팔에 서류뭉치를 낀 채로 미하일이 가볍게 대답했다.
“오, 정말이네. 생각보다도 일찍 도착했어. 이걸로 초겨울은 무사하게 지낼 것 같군.”
고개를 돌리니, 성문 안쪽 공터 한구석에 수레와 포장된 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추위가 싹 가시는 것만 같았다.
“이번 들여온 것도 생필품들이지?”
“그래. 하지만 이번에는 외상이 아니란 게 기념할 만한 점이지.”
“외상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주변 사람들은 갑작스레 모두 제자리에 서서 침묵을 지켰다. 오직 미하일만을 제외하고. 녀석은 저벅저벅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외에는 누구도 같은 높이에 있지 않았다. 성벽 너머로 아직도 하얗게 서리가 낀 대지가 눈이 부셨다.
“이게 정산을 마치고 우리 영지가 거둔 첫 순수익이야, 네마냐 영주님.”
녀석이 손으로 건네준 것. 금화 한 닢이었다. 은화로는 열두 닢, 동전으로는 1,728닢.
“아.”
팔아먹을 물건 하나 없고, 사람들은 절망의 수렁을 헤매던 산골. 이런 바가반드가 외상을 갚고도 금화 1개라는 순수익을 냈다. 아무 말 없이 떨리는 손으로 금화를 받았다. 단기간에 석탄과 마정석 원석을 저렴하게 팔아치워야 했으나, 처음받는 순수익이었다.
‘이 금화 하나를 보려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냈군.’
겉으로만 보자면 불과 몇 개월 만에 모든 상황이 뒤집혔다. 하지만 직접 그 속내를 겪어 본 네마냐로선 체감하는 시간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치 30년 하고도 6개월.’
그 대부분은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싸우며 얻어 낸 순무 뿌리뿐이었다. 어디 네마냐뿐인가? 모든 사람이 바스러져 가면서 버텨야 했던 과거다. 주마등처럼 굶주림과 추위, 칼날과 그날의 입김…….
―후우.
찬 공기를 파고드는 여러 쌍의 하얀 입김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네마냐?”
목소리가 기억의 수많은 질곡을 넘어 자신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손바닥 위에 놓인 묵직한 무게감은 어느 때보다도 남달랐다. 목이 살짝 메었다.
“이거 참…… 영지 전체보다도 귀한 선물을 받아 버렸네, 하하.”
좌절이 계속되면 그만 무감각해져 버린다. 지금의 바가반드는 겹겹이 쌓인 상처로 아픔마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실패가 누적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첫 가능성.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비할 수 없이 귀중한 선물이 되겠지. 모두한테 알려 주고 싶어졌어.”
“그래, 꽁무니 빠질세라 잠도 못 자고 닦달했는데 잘됐네. 장인들도 기뻐하겠어.”
그뿐만일까. 다행히 우리를 신뢰해서 무모해 보이는 일에 앞장선 광부나 병사들도 작은 결실에 한몫했으니. 다들 잠시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만. 작은 성공을 거둔 영주는 금화를 놓칠세라 손으로 꽉 쥐었다.
“이제부터는 더 중요하지 않겠어? 더 열심히 위기를 헤쳐나가야지.”
“그렇지. 그게 우리 역할이니까. 우리가 여기서 ‘기사’ 역할을 받은 건 이런 순간을 위해서야.”
입성 이후, 네마냐는 하라드와 아일라에게도 기사 작위를 주어 지위를 굳혔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아, 어쩐지 대장장이로만 계약하겠다던 나한테까지 기사로 임명하더니만 그걸 노린 거였군, 쳇.”
아일라가 속았다는 투로 툴툴거리니 일행들 모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기사 서임, 자신이 드는 한 자루 칼로서 주민을 지키겠다는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었다.
“오늘날에는 귀족이 되는 단계로 전락해 버렸지.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우린 그렇지 않죠.”
다시 내려다본 시선엔 계곡의 저 아래로 굽이치는 고갯길이 이어졌다. 황량한 모습은 여전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를 것이다. 모래폭풍도, 그 폭풍이 데려온 불청객들도 이번엔 없을 것이다.
“모래바람이라.”
네 명의 시선은 점차 겹겹이 쌓인 산맥, 그 위에 홀로 치솟은 높은 봉우리로 옮겨졌다. 흐릿한 정상 언저리를 보며 네마냐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대체 성산의 마나 원천과 고블린은 무슨 관계인 걸까. 페넬로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답답하군.’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야의 오른쪽 아래에선 마시스 산을 정찰하라는 임무가 반짝거렸다.
‘좋아, 영지의 일만 빠르게 수습하면 곧바로 마시스 산으로 가자.’
일단 작은 성공을 맛본 이상, 더는 자잘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곧 다음 목표는 마시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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