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기후의 변동과 고블린 침략.
세 사람 사이에선 곧 있을 대전쟁과 이에 대비하는 몇 가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네마냐 경은 이야기를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제 그만 가 봐야겠군요.”
“벌써 가 보게? 해가 한두 시간이면 질 텐데 좀 쉬고 가지 그래.”
“역시 엘레나야. 아예 방을 줄 테니까 둘이서 회포라도 풀고 올래?”
엘레나가 트라야브나를 흘겨보았다. 눈빛 한 번에 백 마디 말보다 많은 심정이 어렸다. 네마냐는 웃음소리로 애써 무마했다.
“하하, 근 몇 달 만에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잖아? 아마 이야기 나눌 시간은 앞으로 많아질 거야. ‘지겨울’ 정도로.”
단념했다는 제스처로 엘레나는 더는 말리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래. 알겠어. 그럼 적어도 마중은 나가도록 하지.”
엘레나가 같이 몸을 일으키자, 트라야브나도 따라서 일어나려 했다. 눈치가 빠른 부단장이 빠르게 제지했다. 시선이 돌아가기도 전에 손이 움직이는군.
‘역시, 손은 눈보다 빠른 건가.’
“정지! 넌 왜 일어나는 거야?”
“왜긴. 영주가 나가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까.”
“주변 시선을 생각해야지. 다들 비밀 회동을 알게 되면 어쩌려고.”
“내가 여기 대장이니 조용히 시키면 되겠지.”
엘레나가 이야기하는 건 꼭 그런 문제만은 아닌 것 같은데.
“엘레나 경이 이야기하는 건 아라가트 마탑일 겁니다. 여기 신관회에도 아라가트 파견 대표들이 있을 테니까요.”
신관회가 다스리는 이 나라의 바로 동쪽. 제국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마탑이 있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유수의 대마법사들을 배출한 아카데미아의 후예다.
‘그리고 현 상황에선 입장이 의심스러운 이들 중 하나지.’
고블린 침략을 예상한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 절망적으로 분열하고 단결이 되지 않은 고지대의 상황은 불에 기름을 뿌리듯 이런 상황을 부추겼다.
‘물론 엘리트 의식에 찬 허영덩어리라곤 해도 마탑마저 절망에 빠졌던가?’
확실히 이들도 결국 고블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그러나 이들이 무능했던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음모가 있었는지, 그건 아직 분명하지 않다.
“아, 마탑 놈들. 사사건건 훼방하고 나서는 놈들이죠. 까먹을 뻔했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진다는 듯 트라야브나는 구역질하는 흉내를 냈다.
“알겠지? 안 그래도 이번 만남도 최대한 새어나가지 않게 비밀스레 연락한 거란 말이지.”
“알았어. 나도 뭐가 중요한지는 알아. 조심히 다녀와. 내가 집무실로 가면서 시선을 끌어보도록 할게.”
“훌륭한 계획이야.”
짝짜꿍 좋은 두 사람이 손뼉을 마주치며 작전은 수립됐다. 성녀는 앞쪽의 문을 열고 중앙 통로로 나섰다. 한마디 아련한 인사말을 남기고.
“그럼 다음, 제대로 만날 때 더 얘기해 봅시다. 조심히 가요, 나자리안 경.”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성하.”
문이 닫히며 실내는 한층 더 침묵이 가라앉았다. 시끄러운 사람이 사라지면 빈자리가 유독 느껴진다더니.
“음, 그럼 이목을 끄는 사이에 우리도 빠져나가자고.”
“그래, 마구간까지 부탁 좀 하자.”
트라야브나가 나선 앞쪽 통로와 다르게, 엘레나가 열어젖힌 골방의 뒤쪽 통로는 어두침침했다. 먼지도 적지 않게 쌓여 있었다.
“보통 밀사나 정보원, 하인들이 사용하는 통로라서 그래. 오히려 이목을 피하기 좋지.”
“좋지, 성국 관계자만 아는 뒷길이라니.”
엘레나는 뒷골목으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조금 어이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움직임을 서둘렀다.
“어서 움직이자. 빨리 출발해야 그나마 좀 덜 힘들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이내 다시 멈출 수밖엔 없었다. 복도의 끝에서 두 사람의 것이 아닌 제삼자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다.
“잠깐…….”
엘레나는 네마냐를 잠시 측면의 구석진 자리로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복도의 작은 공간은 좁아서 숨을 곳이 못 되었다.
‘이렇게 어설프게 숨으려 해 봐야 숨기는 게 있다는 것밖에 안 되지.’
이미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뭔가 있다는 걸 감추기 그른 거지만. 네마냐는 잠자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엘레나를 멈추었다.
“진정해. 내가 앞장설게. 걱정하지 말고 가. 무슨 일이 생겨도 대꾸하지도 말고.”
낮게 깔린 네마냐의 목소리가 어두운 통로 안에 그윽하게 울렸다.
“그래.”
“걸음도 평소처럼만 걸으면 돼.”
약간은 당혹스럽단 표정으로 엘레나는 앞장을 서라며 신호를 보냈다. 네마냐는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영주의 모자를 썼다. 높게 치솟은 모자는 영주의 권위를 상징한다던가.
‘거추장스럽던 권위도 이럴 때는 쓸모가 있군.’
긴장을 유지한 채로 두 사람은 무심해 보이는 걸음을 계속 옮겼다. 반대편의 걸음도 점차 가까워졌다. 코너를 돌아나가면…….
“아이고, 깜짝이야. 오. 부기사단장께서 이런 좁은 통로를 이용하실 줄은 몰랐는데.”
놀란 척한 것은 상아색 로브를 걸친 사내였다. 얼핏 보면 신관 중 하나로 보이지만 외관부터 달랐다.
‘난해하고 사치스러운 문양으로 장식된 스톨리라.’
‘스톨리’란, 좁고 긴 띠처럼 되어 목 뒤에 걸쳐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는 옷을 통칭한다. 최초의 공인 아카데미아가 세워진 600년 전부터 마법사들이 걸친 옷이었다.
‘옷의 문양이 제법 정교한 것으로 보아, 지위가 높은 사람이겠군.’
마법사는 때아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엘레나를 본 감상을 말했다. 그리곤 그 시선은 네마냐 쪽으로 옮겨와 위아래를 샅샅이 훑어내렸다.
“이쪽에 계신 분은…… 제가 얘기로 들었던 네마냐 백작이겠군요. 말로만 듣던 고원의 영웅을 이런 데서 뵙다니 영광입니다.”
너스레를 떨며 사내는 소매에 감춰 두었던 오른손을 꺼내 악수를 청했다. 보통 같으면 여기 있는 네마냐가 누군지도 몰라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어이없을 정도의 스스럼 없는 행동에, 네마냐에게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근데 이 인간, 언제부터 봤다고 대뜸 초면에 이름 운운이야. 함부로 쓰게 할 생각은 없다고.’
네마냐는 손을 내밀어 태연하게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반갑습니다. 보아하니 마탑의 마법사신 듯한데, 성국의 이런 후미진 골목에서 다 만나는군요. 바가반드에 취임한 나자리안입니다.”
“허허, 영주께서 조금 불편한 모양이군요.”
상대방은 안경을 슬쩍 들어 올렸다. 아직 원시적인 형태의 안경이라 금세 콧잔등에서 미끄러지는 종류였다. 얀경을 올리는 건, 뽐내는 것 외에는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혹시 뭔가, 저희가 있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오간 것 아닙니까?”
“말카시안 박사! 제 손님께 무슨 무례입니까? 이분은…….”
네마냐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에브디코 말카시안 박사. 그 유명한 이름을 모를 리야 없지.
‘아라가트 마탑 가운데서도 성국에 반대하는 초강경파였지, 아마.’
마탑의 마법사 중에서도 돋보이면서 마탑 원로회에 19세로 들어간 최연소 인재였다. 나이에 맞지 않게 회백색의 머리칼에 대조되는 가무잡잡한 피부색 속에서 번득이는 눈빛이 섬뜩했다.
“아, 아라가트 마탑의 그 유명한 말카시안 박사군요. 뜬금없이 성국의 은밀한 구석에서 귀인을 다 뵙네요.”
네마냐가 손을 뻗어 능청스럽게 다시 악수를 청했다. 갈색 수염의 사내도 엉겁결에 손을 내밀었다. 수염이라. 자연스레 키운 것이 아니라 일부러 방치해서 억지로 나이 든 것처럼 연출한 수염이다. 나이가 어린 건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니, 그럴 법하다.
“흠, 은밀한 구석이라지만 그런 것 치곤 번듯한 영주님도 이용하는 비밀통로니까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중간에 끊고 옆에 있던 엘레나의 어깨에 아주 살짝 손을 올린 건 아주 자연스러웠다. 조심한다곤 했지만 갑작스러운 터치에 움찔할 법도 한데 엘레나도 태연하게 받았다.
“부단장이 아니에 있을 적에 친구 관계가 되었고, 이번에 바쁜 친구를 만나러 왔을 뿐입니다.”
“흐흐……. 신임 영주께선 친구를 만나러 햇볕도 들지 않는 통로를 쓰시는가 봅니다.”
“흐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데. 아무리 핫바지로 보여도 말이야, 영주에게 이렇게 대놓고 적의를 보여도 쓰나? 고까운 생각에 네마냐의 눈길이 가늘어졌고,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면…… 내가 경험이 없다고 생각해서 도발하려는 잔꾀일지도.’
건너편의 대마법사가 무슨 이유로 화를 참지 못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애초에 마탑이나 신관회의 복잡한 관계마저도 이곳 세계 ‘어른들의 사정’이었다. 전생의 네마냐 정도 일반인은 알 이유도, 알 방법도 없는 그런 문제였다.
‘두루뭉술하게나마 일단은 접근해 볼까.’
“무슨 오해를 하시는지 알 것 같아서 더 당황스럽네요. 괜히 이상한 오해가 생길까 해서 조심히 움직인 것뿐입니다.”
“음…… 그런 생각도 가능하겠지요.”
“아니면, 제게 뭔가 유감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추궁하는 분위기로 대화가 흘러가자, 말카시안도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이내 두 손을 내저으면서 너털웃음을 흘려보냈다.
“하하, 고원의 평화를 바라는 저희 수도회가 어째서 일국의 영주에게 억하심정을 갖겠습니까.”
말카시안은 두어 발짝 물러서며, 알 수 없는 웃음과 함께 두 손을 겹쳐 소매에 감추었다. 얼굴엔 웃음이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만 이상한 이야기가 오갈까 염려가 되었을 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뭐, 차후에 우리 마탑에도 방문하시면 잘 아시게 될 겁니다.”
“말씀대로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한번 방문할 생각입니다.”
“모쪼록 부탁드리겠습니다.”
네마냐는 끄덕였다. 한동안은 눈앞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쉽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이래서 집단끼리의 골치 아픈 문제는 최대한 발을 늦게 들여야 하는데.’
그래도 일단은 영주의 위엄을 보여 줘야겠지만. 무척 비밀스러운 통로의 한가운데라는 게 문제였다.
“그럼, 저는 이만.”
말카시안은 고개를 숙이곤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물러나는 사내의 손가락에서 빛을 내는 반지가 신경이 쓰였지만 관심을 껐다. 엘레나는 긴장한 채 옆구리에 올렸던 손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되나 했는데 잘됐네. 고마워, 네마냐.”
“이 정도로 뭘. 마탑에서도 지금 싸우는 걸 원하는 건 아니고 나를 떠보려는 거야. 적당하게 구슬려 주면 물러나게 되어 있지.”
두 사람은 이내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나섰다. 중간에 시간이 걸렸음에도 다행이랄까, 해는 많이 기울지 않았다. 안장 위에서 고삐를 틀어쥔 채, 엘레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도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못한 게 아쉽군.”
“트라야브나와 만남을 주선하는 게 이번 모임의 목적이었거든. 업무의 연장 아니겠어? 서로 건강한 걸 알았으면 그걸로도 충분하지.”
“그렇긴 하지. 동맹은 굳건히 섰고.”
대답하면서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마탑의 사람에게 회담이 있다는 걸 들켰으니, 곧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렇다 쳐도 성국 신관회와 좋은 관계를 구축한 건 훼손될 수 없는 훌륭한 성과였다.
‘씁쓸한 건 어쩔 수 없군. 어쨌든 곧 고블린들이 닥쳐오면 어떤 동맹이 있어도 지고 들어가서 시작할 테니.’
네마냐는 다시 다르빌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곤 엘레나에게 약간의 조언을 주고자 했다.
“이미 다 얘긴 했지만, 변경에 대해서 내가 말한 것들은 잘 부탁할게. 중요한 것들이니까. 특히…… 음, 다르빌 같은 곳들은 특히.”
“하하, 우리보다도 더 걱정이 많네. 걱정 붙들어 매, 대비도 해 놓을 테니까. 뭣보다 네가 준다는 ‘그것’도 있고.”
다르빌을 강조했지만, 지금 바로 네마냐의 뜻을 알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래도 준비하겠다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약간이나마 마음을 달랜 네마냐는 고삐를 들었다.
“그럼 이제 가 봐야겠다. 더 늦었다간 업무에 쌓여서 압사할지도 몰라.”
“조심해서 가. 참, 선물은 고맙게 잘 마실게.”
“그래. 가끔은 편지라도 넣어서 서로 생사 확인 좀 하자고.”
엘레나가 말없이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마냐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인사하곤 고삐를 몰았다.
“풍요로운 저지대 강변을 떠나, 다시 삭풍이 부는 골짜기로 갈 시간이군.”
혼잣말하며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엘레나의 표정에도 그늘이 내려앉고 있었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은 어느 정도로 거셀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엘레나는 서쪽의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겨울도 아닌데 나오는 입김 속에서 세상은 참 불투명하게도 비추고 있었다.
* * *
“네, 원장님. 다음번에 수도원의 초빙을 받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성국 측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문제를 제기할까요?”
지붕 위에 앉아 있던 말카시안은 마당을 내려다보는 자세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손가락에 끼워진 작은 가락지에서는 빛의 밝기가 변화하며 음성이 흘러나왔다.
“……성국? 일단은 놔두도록 하지. 공식적으론 바가반드의 영주가 친구를 만나러 온 명분이 있긴 하니까.”
“그렇긴 합니다. 처음부터 영주급과 관계를 나쁘게 만들 순 없는 법이니.”
“자네의 판단에 따라 좋은 대로 하게. 하지만 역시 중요한 건, 바가반드 영주를 회유하는 거니까.”
말카시안의 시선 끝에는 이미 언덕 너머 작아진 점만이 들어오고 있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음흉한 이미지를 벗어나려면 영웅이 필요하니까요.”
통신석의 연결이 곧 끊어졌다. 반지의 빛이 사라지자 말카시안은 뒤로 벌러덩 누웠다. 열여덟의 것이라 보기 어려운 무표정이 드리웠다. 아직은 침묵이 드리운 상태지만 바야흐로 막후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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