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46화 (45/200)

46화

그간의 과거를 돌아보던 성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이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심해지는 겨울 추위에 대해서 확고한 의견이 있단 소식은 들었습니다. 뭔가 확신을 가지고 계시다던데요.”

“아, 얼음의 시대가 온다는 것 말이군요. 그건 엘레나 경이 얘기했겠습니다.”

엘레나는 자신이 그랬다며 인정했다.

“그래요. 다들 한목소리로 ‘마나의 흐름이 역전되었다’, 심지어는 ‘오염되었다’라고 떠듭니다. 추위가 심해지자 이제는 통치자들도 그런 소릴 하고 있죠.”

오염이라. 하긴 뭔지 몰라도 일단 자신이 알던 세계가 아니라는 불안에 빠지면, 모든 게 의혹의 대상이 된다. 여기선 마나에 대한 의심과 성국에 대한 불신이겠지.

“하지만 그런 현상을 곤혹스레 생각한다는 건, 성녀께서 동의하지 않으시는 거겠군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마나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내밀한 비밀도 알고 있을 성녀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세계 질서나 마나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안타깝지만 그래요. 내가 아는 한 마나는 고블린 침공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나자리안 경의 의견은 어떤가요?”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되는 모양인지, 자세를 고쳐 앉는 트라야브나. 엘레나가 진정하라며 손을 잡자 자신감을 되찾고 다시금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마냐…… 아니, 미안합니다. 나자리안 백작의 이야기가 듣고 싶군요. 들어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잠시만요.”

잠시 침묵 속에서 바가반드의 새 영주는 말을 정리했다.

“간단한 이치입니다. 어디선가 태양의 빛을 가리는 거대한,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 일종의 ‘그늘’이 생겨난 겁니다.”

“그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되물었다. 어째서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는 분명하다.

“500년 전쯤에도 먼 열대 지역에서 화산이 폭발한 적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도가 무섭게 떨어졌죠. 저는 그 부분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화산…….”

성녀는 뜻밖의 이야기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엘레나는 의문을 표했다.

“500년 전 단 한 번의 사례로 그대로 설명하긴 어렵지 않겠어? 다른 사례는 없어?”

네마냐는 고개를 흔들었다. 달리 행성 표면의 온도를 낮출 만한 요인이 있을 리 없었다.

‘산업화도 못 한 이곳 인간들 때문에 뭔가 생겼을 리도 없고.’

이곳 시간으로 약 3년 전부터 시작된 분출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화산재니 이산화탄소니, 현대인이 보기엔 너무 당연한 것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테다.

‘이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울 뿐이지.’

실제로 40년 뒤엔 다들 화산 이야기를 알게 되었지만, 그게 기후 변화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회귀 전에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오직 네마냐만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았을 뿐이다.

‘화산 분출 후 15년이 가장 위기야. 그때까진 어떻게 해서든 버텨 나갈 판을 만들어야 해.’

고개를 다시 흔든 네마냐는 뭔가 다른 설명을 바라는 엘레나에게 변함없는 답을 내놓았다.

“지금 조사단을 보내면 2년쯤 뒤에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중대한 화산 폭발 때문이란 건 내가 보장하도록 하지.”

순수한 믿음만을 요청하는 태도에 엘레나는 잠시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과학적인 설득이 가능한 상태라면야 네마냐 자신도 이러진 않았겠지만. 하지만 이례적인 경우엔 이례적인 태도가 있는 법이었다.

“그, 그래. 그 정도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전제하고 조사를 해 보지.”

“고마워, 정리되면 최대한 설명하도록 하지.”

엘레나에게 가 있던 시선을 돌려 트라야브나를 향했다.

“저는 마법학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아는 것은 오직 하나, 마나가 항상성을 유지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뿐입니다.”

“마나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잘 아는 얘기죠. 마나를 초월적인 존재로 보는 우리 신관들도 받아들이는 원칙이니까.”

신관들한테는 마나에 대한 학문적 규정 자체가 불쾌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성녀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니면 정치적으로 너그러운 척 연기를 하는 걸 수도 있지.

‘실제로 마탑과 성국 사이의 해묵은 악감정은 고블린 전쟁에도 영향을 끼쳤어. 그것도 앞으론 걱정이로군.’

그렇다곤 해도 마나라는 에너지에 대한 이 세계의 마법학적 규정은 설득력이 있다. 신관들조차 그 정도는 인정했다.

‘마치 뉴턴이 말했던 법칙의 지위 같군.’

이 세계에선 마나라는 불분명한 개념이 에너지와 같지는 않아도 일종의 법칙으로 작용했다.

“마나의 맥은 스스로 순환하며 한번 사용된 뒤에는 원천으로 흘러가는 완벽한 흐름입니다. 밖에서 유입되지도, 안에서 유출되지도 않는 폐쇄된 세상이죠.”

“그러니까, 지금의 심해지는 추위는 세간의 이야기처럼 마나가 줄어들거나 늘어서 생긴 게 아니라는 얘기로군요.”

턱을 괴며 생각에 잠기는가 싶던 트라야브나는 빠르게 핵심을 짚었다.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모습도 새삼스레 다시 보이는 순간이었다.

“맞습니다. 바난드 국왕께는 단순히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말씀드렸습니다. 상식선에서 설명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래요…… 뭔가 사건이 있다면 거창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그럼 경이 이야기한 ‘그늘’이란 건 뭐죠? 말 그대로 태양의 에너지를 차단하는 어떤 존재인가요?”

마침내 이야기는 화산재의 그늘에까지 닿았다.

“해의 빛을 가리는 모종의 존재들이죠. 화산재 구름과 같은 것들. 해를 가려 빛이 지상에 닿는 양을 줄인다면…… 그 피해는 헤아릴 수가 없을 겁니다, 지금처럼요.”

“음.”

성녀는 신선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아예 ‘마나의 오염’이란 전제를 부정하는 이론은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군……. 마탑에선 지금까지 마나 오염 문제로만 밀고 들어왔어요. 우리도 그 논리 자체는 깨질 못했네요.”

“흔한 함정이죠. 그 문제에 대해선 빠르게 대응 논리를 만드는 게 좋을 겁니다. 마나의 원천과 변경 요충지를 지키려면 신관의 힘이 필요하고, 따라서 버텨야 합니다.”

네마냐가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라가트의 마탑에선 기후 변동의 원인으로 마나의 오염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켈리도니온의 신관회를 공격하는 명분이 된 것이다.

‘그렇게 몰아가면 기후변화의 피해자들은 신관회를 공격하겠지.’

대응법을 찾지 못한 신관회가 쇠퇴하며 마나의 원천들은 대부분 마탑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고블린이 쳐들어올 때는 오히려 더 무력한 모습만 보여 줬어.’

진짜로 마나를 오염시키는 고블린을 상대로, 신관만큼의 정화 능력이 없는 마탑은 적절한 상대가 아니었다.

“고블린을 전투에서 이기려면 마탑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기려면 신관회가 있어야 합니다.”

대화가 여기까지 이르자, 임무창의 일지에도 마탑 관련 항목이 생겨났다. 참 부지런한 시스템이시라니까. 자신이 생각하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제목으로 들어가 있었다. 이거 내 생각이니까 스포는 아니겠지, 설마.

[마탑의 의도: 무능한 이익 집단? 혹은 심오한 배신자?]

‘그래, 우선은 켈리도니온을 내 편으로 굳히고 얼른 고블린에 대응할 준비를 만들어 주는 게 급선무야. 마탑은 조금 더 두고 봐야지.’

복잡한 여러 가능성이 정리되자, 트라야브나는 안도감과 답답함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의 오염에 대해서는 돌파구를 찾아냈지만 새로운 조사가 필요한 데다, 고블린 문제는 언제나 생각해도 두통만 유발할 뿐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말씀 고마워요. 큰 도움이 되겠네요. 그렇지만 고블린 문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던데, 지금도 그런가요?”

“지금도라뇨?”

“바가반드 영지를 평정하고 반역자와 고블린 병력까지 격퇴했잖아요? 최근엔 그만큼의 대승리도 없었을 텐데.”

허, 이 성녀님이 어지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신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을 들면서 스피드웨건에 빙의해서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재개했다.

“겉보기에 그건 큰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진짜 위기?”

들었던 오른손은 탁자 위에 있는 어느 한 지점을 짚었다.

“여기가 바가반드라고 하면, 고블린들에게 이곳은 인간들만큼이나 큰 관심이 없는 변경 거점일 뿐이죠.”

그리곤 손을 들어 주먹을 쥐곤 꽤 떨어진 지점에 올려 두었다.

“그래, 단순히 약탈을 위한 것이라면 추수가 끝난 늦가을, 초겨울에 들어왔어야 했지. 그런데 지금은 초봄, 여름, 한겨울을 가리지 않잖아.”

엘레나가 때맞추어 최근 고블린의 작전 특성을 언급해 주었다. 네마냐로선 해야 할 말을 덜어주니 고마울 노릇이었다.

“즉, 놈들은 인간이 모여 사는 거점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나샤와, 다르케르트의 얘기로군요.”

두 도시 모두 강력한 방어 시설과 정규군이 있었다. 그것도, 고블린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2백 년 전부터. 그 덕분에 고블린이 이곳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모든 게 지난 2, 3년 동안 벌어진 겁니다.”

주먹을 쥔 손은 그대로 반대쪽 탁상 표면을 훑고 지나갔다.

“그전까지 없었던 대규모의, 계획적인 공세라는 뜻입니다. 놈들이 인간의 실력을 가늠했으니 앞으로는 더 거세질 겁니다.”

“가장 부정적인 신관들의 주장과 같군요.”

드디어 사태의 심각함을 눈치챈 트라야브나의 파란 눈빛이 우울한 파란색으로 대체되는 순간이었다. 이야기를 줄곧 듣고만 있던 엘레나는 그 와중에 중요한 점을 하나 지적했다.

“기후 변동이 고블린 이동의 원인인데, 그 기후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손을 볼 수 있는 마나와 관계가 없다. 이게 현 상황의 문제란 거지?”

제대로 분석했다. 탁상을 훑었던 손을 거두면서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블린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후 변화를 막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 그런데 당장 고블린을 막지 않으면 방법을 찾을 시간조차 없을 거야.”

성녀는 아직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몇 번 망설임 끝에 그가 추려낸 질문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고블린은 정말 그렇게 많나요? 제 말은, 바가반드의 승리와 같은 전투를 몇 번 하면 녀석들도 줄지 않을까 해서.”

“성녀께선 지금 고블린 종족의 숫자가 얼마쯤이라 생각하시나요?”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가락을 계산하더니 트라야브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몇 가지 후보를 내보냈다.

“5만?”

“하하, 귀여운 숫자네요.”

백 년 전 고블린 숫자다.

“음…… 그럼 10만이려나?”

“우레이미야 족이 병력을 모으면 그 정도?”

“부족 하나의 병력이 그 정도라고요?”

충격에 빠진 엘레나와 젊은 성녀에게 충격스러운 숫자를 전해 주어야 할 때다. 자신도 전쟁 개시 후 3년 만에 나온 추산을 듣고선 놀랐지.

“고블린들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족히 80만은 될 겁니다.”

“…….”

“참, 개떼 같은 숫자군.”

엘레나의 거친 한마디는 어느 정도 상황을 짐작하던 사람이 가능한 이야기였다. 대부분은 성녀처럼 놀라서 말조차 꺼내지 못하겠지.

“아시겠죠? 제가 왜 바가반드에서 수백 마리의 고블린을 물리친 게 아직 시작도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충격이 작지 않은지 엘레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아무렇지 않게 대단한 소리를 꺼냈다.

“그래. 그렇다면 머지않아서 기사단이 본격적으로 놈들과 피 터지는 싸움을 하겠군.”

“좋은 시절 다 간 셈이지. 그래서 내가 더 바쁘게 움직이는 것도 있고. 성국의 움직임이 중요하단 것도 그 때문이지.”

다 귀찮다는 듯, 성녀가 한껏 기지개를 켜며 현실에서 도피했다.

“아, 왜 내가 자리를 받자마자 이 난리들인지. 어휴, 아레다스 이 인간은 나한테 물려주곤 홀가분해서 저승에서 춤이라도 추겠지.”

트라야브나가 전대 성자를 헐뜯었다. 그 소릴 들으며 웃은 네마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비단 주머니를 열었다. 몇 번이고 곱게 접은 양피지가 들어 있었다.

“자…… 제가 방문 요청에 응한 건 이 상황에 성국과 바가반드의 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알아요. 우리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트라야브나의 응답에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제가 원하는 건 고블린 위협을 종결하는 겁니다. 그 뜻으로 선물을 하나 드립니다. 고블린을 상대할 땐 가지고 있는 게 무조건적으로 이득인 물건이죠. 전방의 다르빌(Darbill)에 시범적으로 설치하면 좋을 겁니다.”

네마냐가 조용히 탁상 위에 올린 것. 그것은 어떤 물건을 수치와 재원까지 상세하게 적어 둔 설계도였다. 의아한 두 쌍의 눈길이 탁상 위로 쏟아졌다.

“뭐지? 고블린을 상대로 좋다고?”

“그럼! 고블린한테 이게 참 좋은데 말이야.”

네마냐의 너스레에 아랑곳하지 않은 엘레나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트라야브나도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고 같이 들여보았다.

“마나 집중과 집단 마나의 활용을 위한 결계주 강화……. 잠깐, 이거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설마?”

설계도를 계속 들여다보던 엘레나가 뭔가 깨달은 듯 다급하게 네마냐를 쳐다보았다. 설계도는 트라야브나가 가져갔다.

“전쟁 한번 하려거든 제대로 준비해야지 않겠어, 엘레나 경?”

이제는 성국도 정신을 차리고 진정한 적에 맞설 준비를 할 것이다. 물론 성국이 정신을 차리더라도 고블린 주력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한 건 여전했다.

‘앞으로 벌어질 싸움은 내 기억과 지식을 써도 당분간은 이기기가 쉽지 않겠지.’

특히 다르빌 사건까지는 불과 몇 주의 시간밖에 없다. 다행인 건 적어도 힘을 기를 수 있는 시간을 벌 것이고, 그 나비효과가 엄청난 기회로 돌아올 것이란 점. 그리고 그때까지, 네마냐는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 볼 참이었다.

- 47화에 계속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