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고놈, 때깔이 제법 사는데? 껄껄.”
영주 직할 마구간지기가 된 야코프. 그는 성격은 퉁명스러워도 말을 기르는 것만은 인정받는 마부였다.
“그나저나, 갑자기 말을 준비하라더니…….”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한 점 흔들림 없이 말의 채비를 갖추며 명성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입증했다.
“뭐냐, 네마냐 네가 간다는 거였냐?”
“아, 네. 오늘도 야코프 씨가 준비하셨어요? 잡일은 조수들한테 맡기셔도 된다니까.”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는 노인.
“어디 그 뜨내기 같은 것들을 믿을 수가 있나. 그놈들이 자기 앞가림할 줄 알게 되면 그때나 맡길 거다.”
“고집도 참…….”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네마냐의 오른손은 말머리를 쓰다듬었다. 왼손에는 자고새가 들어 있는 은제 새장이 들려 있었다.
“뭔가 했더니 자고새로구먼. 성도에서 온 건가? 고놈 참 예쁘게 생겼어.”
“저…… 말씀은 예쁘다면서 입맛은 왜 다시죠. 얘는 연락용이에요, 전신조.”
영주는 부드럽게 새장 문을 열고 자고새를 날려 보냈다. 영롱한 빛깔을 뽐내듯 자고새는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크…….”
녀석을 뒤쫓는 시선은 동남쪽으로 이어졌다. 들켜서 그런지 당황한 노인은 애써 자신의 식성을 부인했다. 네마냐는 어딘가 못마땅했지만, 애써 부정적인 생각은 털어 냈다.
“혹시 드시고 싶어도 시장에 많이 파니까 그걸로 대신하세요. 전서구 건드리면 저도 곤란하니까.”
‘왠지 찝찝하군. 돌아오면 관리 잘하라고 얘기해야겠다.’
“휴, 저는 며칠 정도 자리를 비울 겁니다. 이 새장은 담당관한테 주세요.”
“그래. 성도에 가 있는 동안 큰 문제는 없겠지. 간 김에 성녀님이라도 뵙게 되면 소감이나 좀 얘기해 주게.”
“성녀가 뭐 그리 만나기 쉽겠어요, 후후. 좋은 술이라도 구하면 한 병 드리죠.”
성국에선 술의 제조와 반입, 판매와 섭취가 금지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도 바로 발끈했다.
“대머리한테 모자 사 주겠단 꼴이군. 허튼소리 말고 얼른 출발해, 철없는 놈 같으니.”
빈 머리의 영감은 뒷짐을 진 채 마구간 옆에 마련한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다.
“휴.”
네마냐는 한숨을 쉬더니 말채찍을 꺼냈다. 상아 재질에 조각칼로 새긴 돋을새김이 선명한 촉감이 손바닥 살갗에 느껴졌다. 아버지가 남겼다는 유일한 유산.
“휴…… 켈리도니온까지 가려면 종일 달려도 사흘은 가야겠지. 기왕 늦는 거 콜라케르트에 들를까.”
아니로 여행을 다녀온 후 혼자서 가장 멀리 떠나는 여정이었다. 노숙하다가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만나면 큰일이니 콜라케르트에 들르기로 했다.
“엘레나는 지금쯤 잘 적응했을까 모르겠군. 성기사들도 어지간히 드세다고 들었는데.”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연예인 걱정, 정치인 걱정에 버금가는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생전 영주도 안 하던 나도 익숙해졌는데, 별 남의 걱정을 다 하는군.”
지금은 내가 잘 적응하는 게 더 급하지. 문제와 불만 가득한 사람들의 면면이 떠올라 머리가 복잡해졌다.
“에라, 바람도 쐴 겸 우선 신나게 달려 보자!”
고삐를 힘차게 당기며 네마냐는 순식간에 바나반드의 분지를 벗어났다. 말의 허벅지 근육이 팽팽해질 때마다 거리는 한층 한층, 더 빠르게 시야 뒤로 옮겨졌다.
“후아!”
바람에 숨이 답답해질 정도로 속도감이 느껴지자 한결 해방된 듯 후련했다.
* * *
하루 뒤, 콜라케르트.
에카톤 하야스단 지점은 요즘 들어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관리 부서의 직원들이 바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선배, 제조 길드에서 배송품들이 밀려오는데 어떡하죠?”
“제3 창고가 지금 비어 있지 않아? 관리 부서에 가서 확인 좀 해 봐.”
후배 직원은 고개를 저으며 비보를 전했다.
“아까 갔다 왔어요. 거긴 시세 오를 것을 대비해서 철제 품목을 보관해 놨다는데요?”
“아니야, 지부장님 지시다! 지금 급한 가공 기기랑 수송할 생필품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바로 시장에 방출해!”
“그러나 그랬다간 가격 손해가…….”
누가 보더라도 지금 공급할 필요가 없는 과도한 물량은 손해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망설이는 직원의 등 뒤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대로 해요.”
직원들이 일제히 바라본 곳에는 보두앵이 서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묘하게 싱글벙글하는 태연스러움이 사람들을 열 받게 했다. 후배란 사람이 마침 잘 됐다는 듯 질문을 시작했다.
“지부장님, 말씀대로 하긴 해야겠지만 도통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설명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알겠다는 듯, 보두앵은 묘한 미소를 그렸다.
“바가반드에 외상을 내줘서?”
“그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왜 바가반드 같은 오지 산골에 투자해야 하는 겁니까?”
보두앵은 크게 변함없는 안색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말단 사원 하나가 총대를 멨을 뿐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위기였다.
“……다들 같은 생각인가?”
“분명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계약이니 하실 겁니다. 하지만 바가반드가 정말 그런 가치가 있는 땅입니까?”
“내가 A급 마정석 수입 하나만으로 경쟁 상단을 압도할 거라 설명했잖나.”
물론 그걸 모르는 직원들이 아니다. 보두앵은 성격상 어지간한 사업 상황은 공유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원들의 걱정은 단순히 이익을 넘어선 차원에 있었다.
“그 상단들은 더 강력한 왕과 제후들의 뒷받침을 받고 있습니다. 후발주자인 우리가 벌써 정치적 문제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곤란합니다.”
현지인들의 커넥션을 중심으로 구축된 두 개의 거대 상단은 기성 세력인 왕과 제후들과 깊은 관계를 구축한 상태였다. 정경유착이야, 여기선 나쁘다는 개념도 없는 상태.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래선 우리가 발전할 가능성이 없어.”
한숨과 함께 보두앵은 항상 쓰고 다니는 안경을 벗어 닦았다.
“기후가 변해서 농업은 어렵고 전쟁이 임박한 지금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지. 이럴 때는 오히려 과감한 역발상으로 치고 나가야 해.”
상인의 감각, 보두앵에겐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다. 직원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럼, 지부장께서 보시기에 바가반드와 그 영주의 앞날이 좋습니까?”
“장차 우리가 바난드와 성국까지 사업 관계를 구축하면 어떨 것 같아?”
오래전부터 고원으로 건너와 이곳 사정을 잘 아는 배불뚝이 길드원 하나가 놀란 듯이 대답해 왔다.
“왕국에…… 성국까지요? 그들이 바가반드를 밀어주기라도 하는 겁니까? 신임 영주치곤 상상도 못 할 연줄인데.”
“연줄이라, 흐음. 그게 그렇게 되려나.”
보두앵은 살짝 코웃음을 치며 얘기했지만, 워낙 낮게 이야기해서 아무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없었다.
“지부장님.”
날아오던 새를 지켜본 길드원 하나가 작은 쪽지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바가반드에서 연락이 왔나?”
“네. 거래에 동의한다고 했습니다. 나자리안 영주도 잠깐 콜라케르트 지부에 방문한다고 하는군요.”
“나자리안 경이?”
보두앵은 다시 안경을 끼면서 눈썹 하나를 찡그렸다
“네. 어제 아침에 출발했다니 곧 오늘 해뜨기 전에는 도착할 것 같군요.”
“그렇겠군…… 자, 그럼 일단 의혹에 대해서 대답은 됐지? 모두, 마저 힘내 보자고.”
“네!”
다시 감은 눈으로 웃음을 되찾은 보두앵은 열심히 자기 일에 매진한 길드원들을 지켜보았다. 불안이 다 해소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자신마저도 불안함은 있으니까. 지나가는 길드원들의 인사를 기계적으로 받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 황당무계할 정도로 사람을 홀리고 다니는 소 영웅을 어느 정도로 믿고 함께 갈 수 있을까.’
자루아나의 전투는 ‘누가 고블린의 군대를 물리쳤느냐’와 상관이 없었다. 그저 새로운 백작의 이름이 고원지대에 처음으로 휘날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소식에 고원의 주민은 힘을 되찾고, 영주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지.”
저지대의 부유한 제후들은 지금 무관심했다. 과연 자신들의 재산인 광맥이 말라붙은 이상에도 계속 바가반드를 무시할 수 있을까.
“업계에선 막내라서, 우리 행동이 자유로운 건 이럴 땐 다행이군. 다른 상단은 기존 제후들 눈치 보느라 손도 못 댈 테니.”
휘장을 걷고 도로에 면한 창문을 열었다. 동쪽 하늘에서 밀려오는 여명의 기운이 거리에서 어두움을 몰아내고 있었다. 불확실의 그림자는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오는 익숙한 그림자.
“과연, 우리는 사업의 동업자에 머무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될까. 그대라면 그 길을 알려 줄 수 있지 않을까.”
10분 뒤.
감상을 씻어내린 보두앵은 파이프에 담뱃잎을 눌러 담았다. 평상시의 표정이지만 여전히 생각을 읽기 어렵운 건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보두앵이군.’
그 모습이 익숙한 네마냐는 맞은 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넘친 담뱃잎을 살살 털며 보두앵이 질문을 던졌다.
“놀랐잖아, 새벽부터 갑자기 방문한다니. 게다가 켈리도니온으로 간다고 하고. 성국과는 언제부터 얘기가 통한 거야?”
몇 살 나이 차이도 나지 않은 듯하니 편하게 놓자는 보두앵의 제안이 있었다. 사실 네마냐는 자기가 여덟 살 어리단 걸 알지만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자기가 선택한 거지 뭐, 훗.’
네마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보두앵에게 대답을 해 주었다.
“그냥 엘레나가 방문해 달란 요청을 보냈을 뿐이야. 지금 영지 재건하기도 바쁜데, 달리 이유가 있겠어?”
“아, 엘레나 부단장이 부른 거군.”
수긍한 보두앵과 침묵을 나눈 이후 네마냐가 다시 물꼬를 텄다.
“저기, 상단 내부에서도 말이 슬슬 나오지 않아? 우리 영지와 편을 같이 하는 건, 상업 길드로선 좋은 선택지는 아닐 텐데.”
“어…… 어디서 얘기라도 들었어? 설마, 우리 애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담뱃대를 잡는 손길. 하지만 일순간 눈꼬리의 끝이 경직된 것은 분명했다. 네마냐는 새로운 패시브 스킬 역시 추가된 상태였다.
[간파 Lv. 1]
[당신에게 마음을 연 사람의 표정, 손짓, 마나의 흐름으로 상대의 생각을 추측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마나에 담겨 방출되는 기억의 일부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정확도는 이해, 판단, 상대와의 친밀 정도에 따라 달라지며, 스킬 수준에 따라서도 정교해집니다.]
네마냐는 눈을 지그시 감고 슬쩍, 보두앵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를 분석했다.
‘토착 상단…… 접근…… 우려. 그런 걸 걱정하고 있나.’
주인의 불안한 심기를 내포한 마나는 사방으로 요동치며 뿜어져 나간다. 그런 기억 조각들을 모아서 이해할 수 있다니. 참 편리한 스킬이었다. 곧바로 눈을 뜬 네마냐는 손사래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뭘 긴장을 하고 있어. 설마하니 다른 길드에서 나한테 접근이라도 했을까 봐 걱정하는 건가?”
반면 보두앵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이제 네마냐란 이름 세 글자는 고원에 널리 알려졌어. 네가 영주와 고블린을 물리치고 바로잡은 이상, 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모두의 관심을 끌게 되지. 더군다나…….”
“우리 계약에 이미 들어온 마정석 광맥도 슬슬 존재가 드러날 테고?”
보두앵은 떠보기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 그것도 크지. 상단만 덤벼들까? 제국 지리학회에서도 지금쯤은 갑자기 신설되는 광산에 대한 정보를 접했을 테지.”
“아. 그 건은 나도 알고 있어. 요란하게도 돌아다니던데.”
지부장은 손가락으로 네마냐를 가리키면서 진지한 조언을 남겼다.
“앞으로는 움직일 때도 더 조심하는 게 좋아. 성국에 갔다 온 뒤로는 혼자 다니는 것도 조심하라고.”
“그래, 내가 좀 더 조심하긴 해야겠지. 조언 잘 받도록 하지. 에카톤과 바가반드의 관계는 불변하겠지만.”
“반복하면 입만 아프죠, 백작 각하.”
대꾸 없이 웃음을 지으며 네마냐는 몸을 일으켰다. 새벽의 여명과 함께 찾아왔던 콜라케르트에 벌써 아침 햇빛이 쏟아졌다.
“벌써 갈 건가? 괜찮으면 좀 쉬었다 가지.”
“친구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한 서너 시간만 신세를 질까?”
“상인도 필요할 때는 베푸는 걸 좋아한단 걸 보여 주지. 기대하라고.”
보두앵은 다시 안경을 벗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런 모습도 녀석의 좋은 점 중 하나였다.
“하하, 이미 영지를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입증이 된 것 같은데?”
“가자. 지금 가면 아침 준비가 되어 있을 거야. 눈 붙일 방도 미리 잡아 두고.”
두 사람이 함께 몸을 일으키면서, 사소한 듯 사소하지 않은 대화는 끝났다. 폭풍을 예상하는 내용만은 전혀 가볍지 않았지만.
* * *
그날 저녁. 성도 켈리도니온.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트라야브나는 비로소 바가반드에서 온 연락에 관심을 보였다.
“바가반드라면, ‘그 사람’이 보낸 게 맞겠지?”
“직접 쓰기야 했겠냐만…… 맞네. 내일 정오쯤엔 도착할 것 같다는데. 근데 넌 갑자기 왜 그 친구를 불러 달라고 한 거야?”
차를 홀짝이던 트라야브나는 별소릴 다 듣겠다는 듯 대수롭잖은 표정을 지었다.
“왜기는, 흥미롭잖아. 툭하면 험상궂게 생겨선 정치도 못 하고 주민이나 괴롭히는 영주밖에 없었으니까. 고블린들이 턱 밑까지 다가왔단 걸 아는 사람은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야…… 성녀면 입단속 좀 하라고 누가 얘기 안 해 줬어? 진짜 얘기 나올 때마다 나까지 조마조마하다.”
엘레나가 면박을 주었지만, 성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성녀라는 존재에 로망을 가지고 있을 사람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를 광경.
“야, 별걱정을 다한다. 나도 공사는 구분할 줄 알아. 성녀만 몇 년을 했는데. 말이야 바른말이지, 네가 죽도록 고블린을 막아도 공은 태평한 영감이 누리고.”
아아. 그건 분명하다. 무슨 말을 하겠냐며 엘레나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찻잔에 홀로 떠도는 차 이파리가 퍽 고달팠다.
‘소규모 고블린 도적은 때려잡아도 아무도 관심도 없고. 이래서야 성국 체면도 참…….’
하야스단과 남쪽 엘라니아 저지대를 아우르는 지역에서 성국 그리고 성녀(남자라면 성자)의 입지는 절대적이었다. 마나의 오염을 방지하고 불순한 이용을 방지하는 것이 그 역할이었다.
성국은 ‘순전한 마나의 교리’라는 슬로건 아래, 제국으로부터도 존중을 받았다. 그 덕분에 성국이 작은 영토로도 번영을 누렸다.
“암만 그래도, 기왕 물려받은 성국의 지도자가 이렇게 푼수여서야, 원. 네 전임자, 성자 안도라스도 안목이 의심스럽다니까.”
“야, 따지고 보면 기사단장도 아니고 부단장이 말대답하는 것부터가 잘못됐단 생각은 안 들어?”
“…….”
“…….”
두 친구는 서로를 마주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이내 눈가로부터 웃음이 퍼져 나가며 방안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하하……. 시절이나 좋았으면 사냥이나 나갔을걸. 나나 너나 뭔 짓이냐.”
“그러게. 그러니 뭔가 탈출구를 찾으려고 네가 네마냐를 부른 것 아니겠어?”
웃느라 눈물이 나는지 눈꼬리를 만지는 엘레나. 트라야브나는 눈꼬리가 가늘어지며 추궁하는 눈빛을 띠었고, 테이블을 짚은 채 엘레나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마냐라고? 어느새 벌써 애칭까지 부르네?”
“아, 그거야 뭐. 친구 하기로 했으니까.”
“아하, 그러시군요?”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째 얼굴이 더운 건지. 이게 다 ‘성녀 전하께서’ 들이댄 탓이리라. 가까스로 다잡는 엘레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다행히 성녀는 자기 자리에 앉아 생각에 빠져들었다.
“흠.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고블린보다 무서운 엘레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나 더 궁금해지네.”
“뭘 깊은 인상까지야. 물론 대단한 자질을 가진 건 분명하지만.”
무기력에 빠진 채 대답조차 없던 주민들에게 스스럼없는 눈높이로 다가가 일으켜 세우기까지. 네마냐의 영상이 기록석이라도 사용한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났다.
“어떨지 궁금한걸. 바가반드의 새 백작이라.”
“곧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참, 이번 만남은 수도회에는 비밀로 한 거 맞지? 괜히 트집잡힐 수 있으니까.”
성녀는 말도 말라며 피곤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 음험한 사람들. 지금은 아예 관저 근처에 발도 못 붙이게 했어, 걱정 마. 헛짓하면 기사들 좀 불러서 쫓아내. 그러라고 기사들 돈 주는 거지.”
반쯤 식은 차를 마저 들이켜더니 트라야브나는 찻잔을 내려두었다.
“그래도 오늘은 변경도 조용하네? 며칠간 힘들게 잡은 덕인가.”
“그래, 공교롭네. 마치 네마냐를 잘 만나 보라는 마나의 안배인지도 모르지.”
트라야브나의 의문은 곧 엘레나의 의문이기도 했다.
‘마나의 안배함과 함께.’
성국의 사람들이 기계처럼 읊고 다니는 인사말.
[모든 일은 마나의 흐름처럼 순리대로 흐른다. 그러니 후회하지 말고, 후회할 일은 말자.]
그러니까 일반적인 자기 다짐의 문구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엘레나에게 진심으로 다가오는 문장이었다.
‘정말, 마나의 안배함이 우리들의 운명을 이끌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 끝은 대체 어디로 이어진 걸까.’
어느덧 식어 버린 찻잔과 함께 성국의 최고 지도자는 벌써 새로운 루키를 만날 기분에 들떠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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