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좁다곤 생각했지만 정말 좁군.”
“읏샤, 그래도 이 정도면 거의 다 왔네요.”
좁은 골목과 천막촌 사이를 지나 네마냐 일행은 길에서 보던 오두막에 도착했다.
“오, 목조로 된 건물이군요. 난민촌이라고 하기엔 그래도 의젓하네요.”
살짝 의외라는 보두앵의 목소리에 나머지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목조로 된 건물은 의외였다. 고원지대는 애초에 나무가 잘 자라기 어려운 환경이라 목재 수급이 어렵다. 나무가 없는데 어쩌겠나.
“나무로 집을 지었네. 자원도 많이 없을 텐데.”
삐걱 소리를 내며 세 사람은 마루로 올라섰다. 하라드가 신기한 모양으로 곳곳을 둘러보았다.
“나무가 없는 동네라 그런지, 목재로 지은 집을 보면 신기해지네.”
자신의 고백대로 사막 출신이라 그런 모양이다. 이색적인 처마 아래로 골목 입구에서 보았던 아이는 말도 없이 앞장을 섰다. 보두앵은 살짝 낮게 깔린 톤으로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몇 년 전에 나샤와에 들렀을 때 본 건축물과 비슷하군요.”
“나샤와 출신이라는 건 확실한 것 같군.”
“1년 만에 이 정도로 번듯하게 마을을 꾸려 내다니, 촌장은 대단한 사람이겠어.”
실내로 들어오자 울리는 목소리 때문에 하라드는 목소리를 낮췄다. 네마냐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샤와……. 그저 혹독한 추위와 고블린 침략에 방치된 채 죽어 나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군.’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루의 소리. 나샤와의 비명이 깃들었나 싶은 착각마저 일었다. 곧, 일행은 작은 방에 다다랐다. 아이는 쪼르르 한편으로 달려가더니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할머니!”
“할머니?”
조심스레 입구에 서서 안쪽을 바라본 보두앵이 처음으로 꺼낸 단어였다. 마찬가지로 안쪽을 자세하게 들여다본 네마냐와 하라드도 살짝 놀랐다.
‘이 험난한 시절에 난민촌의 생존이 달린 지도자가 노인이라.’
하지만 겉으로 그런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법. 세 사람은 다시 표정을 갖추었다. 아이를 내려놓은 노인이 주름살 속에 미소를 감추어 일어났다.
“우리 마을을 만들고는 처음이로군.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반기지 않을 리가.”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백발노인은 스스로를 군장, 알마스트(Almast)라고 소개했다.
“……제안서의 내용은 명확해서 좋군. 그러니까 피난민을 정착시켜 영지로 편입을 하겠단 거군요.”
간단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주인과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네. 저희 영지와 상단, 군장님까지 3각 계약으로 영지 개발 및 피난민 정착을 진행하려 합니다. 길어도 내년 안에 끝내도록 말입니다.”
“놀라운 얘기로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흐음.”
알마스트는 무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듣는다면 일단 나쁜 징조는 아니지.
“식량은 기본적으로 저희가 지원해 드립니다. 영지의 광산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에겐 광물 원석의 판매 대금에서 몫을 지급할 겁니다.”
“광산까지?”
“그것도 일부일 뿐입니다. 가공시설을 마련하게 되면 일자리 증가도 가능합니다. 이건 3년 안에 완료되도록 할 겁니다.”
군장의 세상 놀라울 것 없을 듯한 표정에 놀라움의 파도가 일었다.
“몇 년짜리 계획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짜오다니 놀랍군요, 영주님.”
“영지의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려니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이제 중요한 건 알마스트 님의 의지겠군요. 조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마냐가 설명을 마치자 보두앵이 만지작대던 파이프를 내려놓고 군장의 의지를 떠보았다. 마을 사람 누군가 냉수를 가져와 내려놓자 다들 벌컥벌컥 마셨다.
“이제 우리도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당장 올해 날 식량도 부족한 건 둘째 치고. 거기다 망할 놈의 고블린도 쳐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니, 하등 망설일 게 없지요.”
물맛만은 좋다며 대화를 끌어가던 알마스트는 잠시 조용해졌다. 눈을 감은 채 눈웃음은 여전했지만 웃는 게 딱히 웃는 것처럼 보이질 않았다.
‘음, 생각보다 부정적이진 않아. 거기다 피난민이니만큼 고블린에 대한 적개심도 강해 보이고. 잠깐, 그렇다면…….’
네마냐의 계산이 다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영지 방어를 수행할 만한 전문 병력이 부족한 바가반드의 상태. 생각보다 상태는 괜찮고 적에 대한 반감이 강한 피난민들이라면…….
“영주님. 그간 피폐해진 영지 재건에 적극적이란 이야긴 들었습니다. 오늘 보니 그 열정은 진심의 측면이 더러 보이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블린 문제가 가지는 중요성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는 것 같고.”
알마스트 군장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심연조차도 꿰뚫어 볼 법한 그 눈길이 네마냐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 정도로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바가반드의 식량 지원을 우선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내 생각에 경의 영지 재건은 고블린에 맞서는 과정이라 보입니다. 내 생각이 맞는지요?”
아, 이 강렬한 눈빛은 그저 개인의 특징이거나 자질은 아니었다. 배우자를, 군대를 그리고 고향을 빼앗긴 나샤와의 분노가 응어리진 것 같았다. 나샤와의 분노는 곧 네마냐 역시 잘 아는 감정이었다.
‘잘 알다 못해, 직접 겪어 봤으니.’
그렇다면 이 순간, 나샤와와 계약을 맺는 것은 단순 영지 재건이나 돈 벌기 프로젝트 그 이상의 동맹 형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 모든 활동은 바가반드를 우선 튼튼히 하는 데 있습니다. 당장 전쟁에 뛰어들거나 뭔가를 막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죠.”
약간 기대와는 다른 내용이 나온 탓인지는 몰라도 알마스트의 눈빛은 살짝 흐려졌다. 자세도 조금 편하게 의자에 기대도록 고쳐 앉았다. 그와 함께 네마냐는 조금 마나를 모으고 [설득]을 준비했다. 마나가 물 흐르듯 몰리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맞는 말이지. 이해합니다.”
“물론, 그건 시작일 뿐입니다. 이제 걸음마를 뗀 아이가 어떻게 뛸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인즉슨…….”
“1년, 최소한 1년입니다. 전쟁이 임박했고 고블린이 곧 쳐들어올 테지만 그 정도 시간은 벌 수 있을 거예요.”
알마스트에게 1년이란 의미심장한 기간이었다. 딱 1년 전에 고향을 잃었기 때문이다. 천년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1년이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군.”
“하지만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밀어붙인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죠. 예산을 확보해서 곧…….”
“곧, 녹색의 피부를 없애 버릴 창으로 삼겠다!”
알마스트는 탁자에 부딪힐 듯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네마냐는 굳이 대답하지 않은 채 입가로만 미소를 띠었다. 동석한 다른 두 사람도 전혀 이의 없이 침묵을 지켰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건 오직 나샤와를 관리하시는 군장께서만 가능한 결단, 그러니.”
알마스트는 잠깐 진정하라며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본론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피난민을 짧은 기간 안에 안정시킨 경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
“그러지 말고 아예 문서로 여기서 증거를 남겨 놓지요. 아마도 옆에 있는 상인께서 준비를…… 내가 말할 필요도 없었군, 허허.”
보두앵이 때를 맞추어 정성스레 조각 비단으로 말아놓은 깃펜과 잉크병을 꺼냈다.
“계약에 관한 일에서 상인을 빼놓고는 진척이 될 수가 없죠.”
“맞는 말씀이지요.”
하라드가 급한 대로 물로 잉크를 대충 섞어 농도를 맞췄다. 보두앵은 작은 가방에 준비해 놓은 양피지 뭉치를 꺼냈다.
* * *
세 명은 곧 말을 타러 내려갔다. 알마스트도 사양을 물리치고 지팡이를 짚은 채 뒤를 따랐다. 이윽고 생기가 넘치는 마을을 지나 다시 음산한 사기가 감도는 폐허를 지났다.
“그럼 저희는 가서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모쪼록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시길.”
네마냐는 말을 한 바퀴 돌리며 모자를 벗어 예의를 표시했다. 알마스트는 깊숙이 머리를 숙이며 답례했다. 나이가 있으니 가벼운 인사로도 충분했을 테지만…….
“가련한 이들에게 삶의 길뿐만 아니라 함께 싸울 기회도 주었으니 내가 감사해야지.”
“그럼, 저희도 저희지만 군장께서도 바빠지시겠군요. 피난민 촌락이 이곳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니.”
보두앵의 이야기에, 오히려 바빠지니 기쁘다는 웃음을 짓는 알마스트였다.
“지금부터 곧바로 10여 군데의 촌락 대표를 모아 결정사항과 사업에 대해 알릴 것입니다. 일의 진행에 대해선 이 늙은이에게 맡겨 주시길.”
“감사합니다. 그럼…….”
네마냐는 대표로 고개를 숙인 뒤 다시 모자를 썼다. 남은 것은 서둘러 미하일 등이 재정비하는 자루아나 요새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형, 이제 서둘러야 해!”
“……그럼 그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탄 세 사람의 그림자는 신속하게도 시야에서 멀어졌다. 네마냐는 묵묵하게 앞만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라드.”
“응?”
“돌아가는 대로 마법도 마저 공부해야겠어. 준비할 수 있겠지?”
이야기를 들은 하라드가 반색했다.
“드디어, 생각이 바뀐 거야?”
“생각이 바뀐 게 아니라 일의 순서를 지키는 거지. 안 그래도 앞으로 1년 동안은 나, 우리, 영지 모두 계획보다 빨리 성장해야 해.”
“그럼 당장 준비해야겠는데, 나도 드디어 바쁜 나날의 시작이군.”
보두앵도 기꺼이 돕겠다며 나섰다. 최근에 설립된 에카톤 바가반드 지부도 그의 작품이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바가반드 지부에 연락을 넣으시면 됩니다. 가능한 한 전폭적으로 지원해 드릴 테니.”
“그럼 이제 콜라케르트로 돌아가시겠군요? 하긴, 그동안 여기에 오래 머물렀으니.”
“네. 그간 모처럼 모험가로 지냈지만, 슬슬 생업으로 돌아가야죠.”
보두앵은 고삐를 당기면서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알마스트가 아직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마스트…….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고 있습니까?”
“군장님? 그분이 왜?”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을 하라드는 그저 되물었지만, 네마냐는 복잡한 심경을 보였다.
“철위 기사단장의 부인이셨지, 분명.”
“알고 있었습니까?”
“그래요. 그런 분이니 내 제안을 진지하게 여기리라 생각했던 거지.”
그 소리가 들릴 리는 물론 없지만, 알마스트는 왁자지껄하게 멀어지는 세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기우는 태양을 보자니 자신이 많이 늙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정말 그 예언이 사실일지…….”
옛 노인들의 예언을 중얼거린 노인이 허리띠에 매어 둔 아주 작은 검을 꺼냈다. 손가락 길이만 한, 그러나 네마냐가 차고 다니던 아일라의 검과 거의 똑같은 모양이었다.
“어머니, 날이 춥습니다. 아직 가을일 텐데도 이 동네는 참 춥습니다. 들어가시죠.”
“오, 그래. 그러자꾸나.”
멀찍이 뒤에서 기다리던 동리 사람이 이야기를 건네자, 언제까지고 검을 바라볼 뻔한 시선을 거두었다. 텁수룩한 중년은 네 사람이 나눈 이야기가 궁금한 모양이다.
“바가반드의 새 영주가 어째서 여기까지 온 것이랍니까? 설마 우리 동네에서 세금을 받을 생각은 아닐 테고.”
“아닌 말이겠니. 세금을 내게 될 게다, 우리도.”
“네? 세금이요? 저희가 그걸 어찌 냅니까? 오늘 먹을 나무껍질도 없는데…….”
슬쩍 역정을 낸 노인은 한 손에 쥔 지팡이를 들어 입구를 가리켰다.
“타니엘. 네 눈도 정녕 옹이구멍이구나. 저 수레들이 괜히 이곳에 온 줄 아니?”
타니엘이란 사내는 비로소 돌담 건너 은폐된 공터에 수레가 그득하다는 걸 확인했다. 뭐라고 물어보려던 찰나, 알마스트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이제는 시대를 읽는 날카로운 사람이 있을까 했건만. 앉아서 죽으란 법은 없구나.”
“어머니?”
지팡이와 함께 한 보를 결연하게 내디딘 알마스트는 자신을 부축한 사내를 돌아보았다.
“너는 지금, 모든 난민촌에 장로든 무엇이든 살아 있는 대표는 다 내게 오라고 전하렴.”
“어떤 말씀과 함께 전합니까?”
여전히 의아한 눈길이었다. 아들인 타니엘은 어머니이면서도 무엇보다 군장인 알마스트를 잘 알았다. 그는 곧 의아한 기세를 접고 신뢰한다는 자세를 지켰다.
“살아남아 녹색 것들을 죽여 없앨 기회가 왔다고……. 복수를 원한다면 내게 나오라고. 1년이 걸리든, 2년이 걸리든 말이지…….”
서릿발이라도 칠 강추위건만, 가슴 한편에선 분노의 불길이 사정없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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