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며칠 뒤, 사라타 광산.
2천 년 전에는 7왕국을 세웠던 난쟁이족의 광산이었다. 고원의 황량한 바위산 곳곳을 뚫어낸 난쟁이족은 작은 키를 이점으로 광산을 채굴했다.
“그래서 옛날부터 우리 동네는 집에 구멍을 많이 내면 집에 복이 들어온다는 속설이 있었습니다.”
“정말 미신이네요. 요즘 같은 날씨에 구멍 뚫다간 어머니한테 등짝 맞습니다.”
“그건 어딜 가든 똑같군요.”
반쯤 실없는 옛날 전설과 농담을 나누던 네마냐와 보두앵은 광산 입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광산 입구에선 무관심 속에 쌓여있는 돌을 치우느라 일손이 바빴다.
“어이, 조심해. 거긴 바위투성이라 짐 나르다 다칠 수 있어.”
“어어!”
“에헤이, 그러니까 조심하래도…….”
영지 내에서 처음으로 모집한 채굴단이 맡은 곳은 바로 사라타 광산이었다. 난쟁이족의 왕국이 몰락하면서 이유도 모르게 버려진 곳이었다.
“파드 경하고 엘레나 경도 이 모습을 보시면 기뻐했을 텐데, 아쉽군요.”
“각자 할 일이 적지 않으니 어쩔 수 없죠. 편지로 알려 줘도 충분히 기뻐할 겁니다.”
파드와 엘레나 일행은 각기 일이 바빠 떠났다. 아일라 등 다른 일행은 도시 재건을 진행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보니 네마냐와 보두앵만이 광산을 올 수 있었다.
“역시, 규모만으로 지금까지도 광산업자들이 우러러볼 만한 곳이군요, 영주님.”
“난쟁이족에 있어 최고의 보물을 꼽는다면, 단연 이 광산이라고 하죠.”
보두앵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지만.
“여기서 제가 걱정하는 게 있다면……. 여기에 진짜로 말씀하시는 그 광맥이 있느냐의 문제겠죠.”
“보셨잖아요? 여기서 캐 갔던 마정석 조각들. 스캔 기술도 보여 드렸겠다, 조금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아, 물론 그건 그렇죠.”
살짝 움찔한 보두앵은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안경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오래 버려진 곳에 그런 고급 원석들이 있다니, 믿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죠. 고원에서 기존 광산 말고 새로운 맥을 찾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요.”
그때 광산 입구에서 숯검댕을 묻힌 광부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복장도 없어서 대충 민병대 무기고에서 찾아낸 투구를 안전모로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는 사람입니까?”
“물론 아니죠.”
들고 다니는 곡괭이는 찰랑찰랑 빛이 났는데, 워낙 단단한 마정석 전용으로 마나를 조금 부여한 도구다. 마나를 서로 충돌시켜 마정석 원석이 비로소 떨어지기 때문이다.
“들고 있는 자루를 보니, 뭔가를 발견하긴 했나 봅니다.”
얼굴이고 몸이고 시커멓기 짝이 없지만, 하얀 치아가 훤히 드러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영주님, 영주님.”
“무슨 일이죠?”
“대박입니다! 광맥이에요, 마정석 광맥! 지금 바로 채굴을 시작해야 합니다!”
생각보다도 빠른 발견이었다. 아니, 못해도 갱도가 몇백 미터는 될 텐데 벌써? 그렇게 얕은 광산이었나?
“흠, 광산이 아래로 파고 들어간 것 아니었나요? 그럼 벌써 시작하긴 어려울 텐데.”
아무 말 말라는 듯, 사내는 건장한 몸을 뒤틀며 거대한 자루를 내려놓았다. 돌을 캐내서 버리는 용도로 쓰도록 거칠고 튼튼한 직물로 짜인 포대기. 그 입구를 여는 순간,
―콰르륵!
“헛.”
헛바람을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밀려 나왔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의미 모를 바람이 느껴질 뿐이겠지만, 네마냐는 물론이고 보두앵조차 뒤로 두어 걸음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넘치는 기운. 보두앵의 표정이 대번에 달라졌다.
“요즘도 이런 마정석이 있었던가? 이건 못해도 B급 상위의 힘……!”
“……어떻습니까. 이제는 믿으시겠죠?”
이미 이 광산의 파괴력을 알고 있는 네마냐에게도 실제로 보는 경험은 더 충격이었다.
‘가공도 안 한 원석에 위압감을 느낄 정도라니. A급 광산으로 밝혀지고 세계에 충격을 끼칠 정도였단 게 이해가 가는군.’
“두 분, 먼지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렇지만, 역시 광석은 원석 상태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답지요.”
무슨 일인지 모르는 작업반장은 싱글싱글 웃으며 겉으로 보기엔 그저 아름다운 수정 더미를 툭툭 쳤다.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을 기대할 때의 마음만큼 대단한 즐거움이 없으니까요. 이것이 저희가 드리는 첫 채굴 결과입니다, 영주님.”
“채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어려움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수평으로 쭉 뻗은 형태였습니다. 지하에는 파지도 않은 광맥이 있습니다.”
‘그랬군. 그래서 그때도 그렇게 빨리 엄청난 채굴이 가능했던 거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알고 나니, 머리가 아찔할 정도다. 대체 수백 년이 넘도록 아무도 이 곡괭이질 한 번에 갈릴 운명을 몰랐단 말인가.
“하…… 개 같은 고생을 한 보람이 있었다고 기뻐해야 하나.”
“네, 뭐라고 말씀하셨는가요?”
“……아뇨. 잘 됐다는 겁니다. 어서 작업 시작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마치 군인인 듯 절도 있게 경례한 작업반장이 허겁지겁 뛰어갔다. 아마도 저 걸음 하나에 아내와 어린 딸, 아들의 염원이라도 서렸는지 힘차 보였다.
“가스파리얀을 내몰면서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이대로 영주를 몰아내는 것이 끝이 아니란 것 말입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죠.”
보두앵의 말에 네마냐도 그렇다고 답했다.
“이제부턴 온 힘을 기울여 고블린을 막는다는 게 공식적인 목표가 된 겁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이군요. 그리고 실제로 지금 그렇게 하고 있죠.”
네마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석양이 산허리로 내려보내는, 그 빛을 피해 보두앵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걸로 영웅이 된다고 해도 내게 좋은 건 아닙니다. 고블린과 싸우는 건 그게 신나서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이니까요.”
“장사를 위해서라도 고블린은 막을 필요가 있죠. 우리 상인들도 물론 연대할 겁니다.”
네마냐는 감사하게 받겠다고 답했다. 쓸데없는 사양이 이런 상황에 필요할 리가 없지. 헛된 겸손에 흔들리지 않는 네마냐의 모습에 보두앵은 역시 맞는 선택을 했음을 확신했다.
“자, 그럼 이제 말씀하신 광맥의 존재들은 확실하군요. 이곳뿐 아니라 총 이십여 군데의 지점을 파악하셨다지요.”
“제가 얘기한 대로죠. 이제 실제로도 산출물의 수준을 보았으니 의심은 없으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럼요, 그럼요! 이제는 거래 대상이 실재하는 걸 확인했으니, 제가 보따리를 풀 때가 되었지요.”
“보따리라! 기대됩니다.”
그간은 계속 보두앵의 즐거운 눈빛이 이익에 관한 관심이라 생각했다.
‘저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볼 기회가 오겠지.’
그런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두앵은 그저 안경을 벗었다.
“자, 그럼 가시죠. ‘그들’의 수장에게 미리 연락을 취해 놓았습니다.”
“그들이라. 그런데 일전에 제가 부탁드린 건 그들한테 줄 선물뿐인데 굳이 지부장까지 같이 가실 필요가……?”
대답도 없이, 보두앵은 박자가 제멋대로인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들썩이는 어깨가 가만히 서 있는 네마냐를 지나쳐 몇 발짝 앞에서 멈췄다. 바람에 스치듯 두런거리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확실하게 아군이라고 느껴진다면, 상인은 때로는 어느 협객보다도 의리를 발휘하는 법.”
협객이라. 설마하니 중국도 아니고, 네마냐는 차원 너머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 몰랐다.
“의로운 협객 상인이라도 되실 모양이군요. 괴짜 상인으로 이미지는 확실하게 남겠어요.”
“하하, 제가 또라이 소릴 듣는 걸 좀 좋아해서요. 영주님께서도 좋아하십니까?”
네마냐는 정색하면서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그럴 리가요. 저는 지극하게 정상인이라.”
“아, 그런…….”
급작스러운 전개에 보두앵의 말문이 막힌 사이, 네마냐는 다시 몇 걸음을 걸어 그의 앞에 선 후 반쯤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또라이 친구를 두는 건 좋아하죠.”
“아, 하하……. 사람을 조련하는 방법이 세련되셨군요.”
땀과 곡괭이 소리로 화끈한 열기가 넘치는 광산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자리를 비웠다. 돈이 쌓이는 소리를 오랜만에 들어보는 사람들에게 그 빈자리는 체감조차 되지 않았다.
* * *
다음날, 네마냐는 보두앵과 다시 길을 나섰다. 물론 이번엔 하라드가 바득바득 우겨서 따라나섰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많은 수레가 뒤를 따랐다.
“수레를 200대 분량이나 요청한 게 영지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고? 아무렇게나 막 지르는 게 아니고?”
“이 새끼가 또 시작이네.”
둘과 거리를 둔 채 담뱃대를 물고 있는 보두앵은 두 사람의 입씨름을 듣고 있었다.
“너는 그냥 마법 고문으로 가만히 있으면 된다, 이 동생아.”
“동생? 나는 바난드 왕께서 직접 보내신 형의 마법학 선생이야. 확실히 하자고 이건.”
“그래, 선생님 해라, 선생님. 그런데 지금 이건 꼭 해야 할 일이야. 따라올 거면 얌전히 따라와. 다 보고 그다음에 얘기해.”
이내 보두앵도 끼어들어, 점차 난처해지는 두 사람을 위해 주제를 돌렸다.
“올 때는 급해서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아르사니아강도 꽤 아름답습니다. 이라크시스강만큼은 아니지만.”
“선생의 고향인 게람나에도 강은 많지 않았었나요?”
게람나. 창백한 피부에 키가 큰 금발에 파란 눈인 이질적인 주민들이 산다는 곳. 역시나 검은 눈이지만 금발인 보두앵도 고향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아, 물론 제 고향에도 강은 있죠. 굉장히 커다란 강도 있었답니다. 이 강의 열 배쯤?”
“에이, 농담이죠? 이거의 열 배면 그냥 바다일 텐데.”
사막 근처 오아시스 출신인 하라드에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입니다. 제 고향은 프랑카와 게람나 사이에 있는 곳인데. 굉장히 낮은 곳이죠.”
“벨기카이(Belgikae).”
“뭣!”
단 하나의 표시로 반응을 나타낼 수 있다면 느낌표 하나가 적절하리라. 보두앵은 의외란 표정이었다.
“벨기카이! 맞습니다. 헌데 서방 제국에서도 정말 가끔 쓰이는 단어인데, 어떻게……?”
얼결에 튀어나온 단어지만 그래도 해명하기엔 어렵지 않은 주제였다.
“광산 서적만 읽으니, 지리학 도서야 당연히 읽지 않았겠어요. 책에서 묘사된 벨기카이의 늪지는 한 번쯤 보고 싶은 풍경입니다.”
“그 냄새 나는 늪지에서 살아 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후후.”
그리 웃어도, 보두앵의 얼굴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잠시 묻어났다. 이내 낯빛을 정리한 그는 뒤로 늘어선 수레를 한번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이 조금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상인을 움직여 말썽꾸러기인 피난민을 포용한다는 건 재밌는 생각입니다. 그걸 바탕으로 영지를 키울 생각도 했다니.”
말을 마친 보두앵은 파이프의 주둥이를 물고 힘껏 연기를 빨아들였다. 이파리를 태워 얻은 향내가 독하게 주변으로 퍼졌다.
“그 담뱃잎은 어디서 구했나요? 향이 좋네요. 살짝 맡아 보니까 마나 안정 효과도 있네요.”
하라드가 코를 킁킁대며 좋아했다. 이전 생에서 길거리 흡연자로 아침부터 짜증 내기가 일쑤였던 네마냐는 코를 막아 버렸다.
“왜, 피워 보실 생각이신지?”
“이 형이랑 계속 얘기하면 답답해서요.”
“거기서 내가 또 왜 나와.”
태연하게 맞받아쳐 주면 녀석은 어쩔 줄을 모른다. 어릴 때 어른이 약 올리던 게 이런 느낌이었나.
‘보두앵이 형제냐고 물어볼 만도 하군.’
“흐흐, 피우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웬만하면 피우지 마세요. 특히나 마법사라면 말입니다. 중독이 심각하거든요.”
“효과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네요.”
하라드의 말에 보두앵은 파이프를 탈탈 털어 재를 떨어내고선 눈을 감았다.
‘……저거 마약은 아니겠지?’
네마냐가 걱정스레 쳐다보는 사이, 연기를 만끽한 보두앵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더 문제란 겁니다. 이거에 자꾸 의지할 일이 생긴단 뜻이니까.”
이제 얘기에서도 담배 냄새가 날 판이라 네마냐는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자신이 찾던 무언가가 시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 저기, 저쪽에 오두막! 저기가 거기 맞지?”
이야기의 맥이 끊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담배보단 영지의 부흥책이었다. 다들 금세 지금의 문제로 돌아왔다.
“저곳이 난민촌이로군요.”
“초라하네.”
두 사람의 대화가 가리키는 곳. 차가운 공기 속에 있는 피난민들의 천막 사이로, 홀로 우뚝 선 낡은 오두막이 있었다. 피난민촌 주변으로 솟는 연기가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맞네. 임시로 정한 마을 이름이 아마…… 엘피스였지. 엘피스.”
“엘피스가 무슨 뜻이더라? 이 동네 말은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엘피스, 아마도 기억하는 게 맞다면 희망이었지.”
희망이라. 고향과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그 희망이 궁벽하게나마 이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이 난민촌인 셈이었다. 보두앵이 낯선 사투리로 마을 이름을 되뇌었다.
“희망이라…….”
초라한 마을, 옹기종기 모인 누더기의 골목에서 희망을 품어낸 걸까. 하지만 너무나도 언덕배기 위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과 좁다란 천막 사이 오솔길들. 꿈을 꾸기는 힘겨운 환경이었다.
“……내려서 올라가죠, 보두앵 씨.”
“그럽시다, 읏차!”
세 사람은 오래전엔 문이었을 돌무더기를 지났다. 돌무더기 건너편엔 가지도 앙상한 나무가 하나 겨우 살아 있었다. 이곳에 각자의 말을 매어 두었고, 이제는 언덕을 올라가는 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여기도 원래 마을이 있었던 곳이었어?”
“글쎄…….”
하라드만큼이나 이 동네 사람인 자신도 궁금했다. 바가반드의 영지는 사실 굉장히 넓다. 남쪽에서 관문을 지나면 동·서 양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모두 포함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주민 대부분은 동쪽에서만 살았어.”
최근 수백 년 동안은 사람이 산 적이 없는 곳인 건 확실했다.
“그렇지요. 설사 백 년이 걸려도 돌집은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이건 좀……. 거기 돌부리 조심하세요.”
나이가 가장 많은 보두앵이 당연하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길가로 튀어나온 나뭇가지를 걷어내며 길을 내려는 모양이었다.
“제가 길을 내도록 하죠.”
하지만 네마냐에겐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아일라가 넘겨준 특수강의 검을 뽑았다. 비록 전투용으로 쓰기엔 이가 갈려 어렵더라도, 나뭇가지 정도는 식은 죽 먹기.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길을 직접 내는 주의라서요.”
“오, 역전의 용사께 비켜드려야죠.”
“……오글거리니까 그런 얘긴 사양합니다.”
거의 가루가 된 벽돌과 담벼락 사이로 나뭇가지들이 통행을 방해했다. 용케도 피난민들이 이걸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갔다 싶었다.
“제대로 농성하는 방법을 아는 지도자가 있나 봅니다. 벽 하나 없이도 잘 막았습니다.”
“이곳 피난민의 두령이 나샤와 출신이라던데 그럴 만하겠네요.”
“나샤와, 그렇군요.”
여러 번 이야기가 나왔던 나샤와. 강철과 같은 위세라는 뜻을 지닌 ‘철위’ 기사단의 수도였다. 이라크시스강이 굽이쳐 나가는 평원에 자리를 잡아 무역과 농사 모두 활발한 곳이었다.
“나샤와가 파괴된 지도 이젠 1년이 넘었군.”
불과 1년 전이었다. 무척이나 강력한 겨울 추위에 곡물이 얼어붙고, 풀조차 말라 버린 날.
“카라쥬라는 짐승에 올라탄 고블린들이 이라크시스강에 도착한 날을 누가 잊겠습니까.”
설마 고블린들이 조직적으로 마도사를 길러내 기사단을 전멸시킬 줄이야. 한발 더 나아가 나샤와까지 멸망시킬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네마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떠들긴 떠들어대도 강추위의 시대가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을 겁니다.”
“……누, 누구세요?”
대화를 깨트린 것은 아이의 목소리였다. 조용히 눈을 들어 앞쪽 골목 귀퉁이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로 돌렸다.
“너…… 여기 사는 아이니?”
“그, 그런데요……. 아저씨는 누구세요.”
‘아저씨라니!’
열일곱이란 말이다, 열일곱! 아직 꽃다운 나이에 모처럼 미모도 갖추었건만, 제길!
“아저씨, 아저씨래…… 아악!”
“방증믖게 을지믈어즐래?”
“아, 아파, 아파! 알았어!”
이를 앙다문 네마냐가 자지러지게 웃던 하라드를 다시 쥐어박았다. 이내 입구의 소란 때문에 주민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가서, 어른 좀 불러주겠니? 그리고 나는 아저씨가 아니라 형이야, 형.”
“아, 애한테 주입식 교육…… 윽, 알겠어. 형 맞아, 형…….”
어딘지 영양 상태가 부실한 아이는 두 사람의 티격태격에 잠시 웃었다. 그리곤 재빠른 걸음으로 어느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자, 그럼 우리도 따라서 들어가자고.”
“치안이 불안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보두앵은 영 지저분하고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골목이 내키지는 않는 눈치였다.
“아이도 저렇게 잘 돌아다니는걸요. 담배나 좀 끄고 들어갑시다. 머리가 냄새 때문에 아찔한데.”
“허허, 미안하지만 이 담배로 말할 것 같으면…….”
“주민들에게 안 좋은 냄새 이미지를 줄 수 있으니까 얼른요.”
“하, 하…….”
스스럼없게 대하는 네마냐를 민망한 웃음으로 대하는 다섯 살 위 보두앵. 그러거나 말거나 네마냐는 왼팔로 대마법사의 멱살을 잡고, 오른손으로 대형 상단 지부장의 옷자락을 틀어쥔 채, 걸음을 옮겼다. 피난민 마을의 시끄러운 일상 소리가 점차 귓전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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