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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39화 (38/200)

39화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이곳에서 전쟁을 했었단 말을 하면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당했을 거다.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서렸다.

“그, 이제 손을 놓아도 될 것 같은데…… 네마냐 경?”

“아…… 그렇군요, 부단장.”

네마냐와 엘레나는 갑자기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듯 잡았던 손을 거두었다.

‘묘하군.’

네마냐는 거두어들인 오른손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시선을 마주치기 어려워 성문만 바라보게 되었다.

“보두앵 지부장을 모셔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양해를 구하고 다가선 도시의 입구. 부서지고 대충 나무판자를 덧댄 성문이 마치 지금의 영지 상황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영주님.”

옆 계단에서 장교들이 다는 초록색 술을 투구에 매단 군인 하나가 다가왔다.

“수비대장이 연락을 보냈나요? 누가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아, 아일라 마스터께서 직접 전해 주셨군요. 에카톤 상단의 일, 알고 계셨습니까?”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알다마다요. 애초에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게람나 사람을 들여도 괜찮겠습니까? 어쩌면 도망친 영…… 아니, 가스파리얀의 첩자일 지도 모르는데.”

장사꾼은 믿을 수 없다는 일종의 상식.

‘그토록 시달리다 보면 모든 새로운 것을 거부하기 마련이지.’

네마냐도 기존 상식을 깨뜨리지 못한 채 농촌의 삶에 익숙해졌다면 당연히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겪어 본 사람에게 있어, 똑같은 위기란 곧 기회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그래서 부른 겁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간단한 얘깁니다. 정말 장삿속에 밝은데도 결국 휘말릴 거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어쩔 수 없다면 먼저 사용하라는 겁니까?”

어리둥절한 장교를 보곤 웃은 네마냐는 그를 지나쳐 문으로 다가섰다. 어차피 말려들 거라면 먼저 뛰어들어라.

“문을 여세요.”

장교가 계단을 올라 명령하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문이 열리는 동선을 피하고자 몇 걸음 물러섰다. 성문이 드디어 열렸다.

“허…… 언제 이렇게 많은 수레가.”

“저 깃발, 분명 에카톤의 것일 텐데.”

후방에서 지켜보던 파드나 엘레나에겐 뜻밖의 광경이었다. 족히 수백 대는 될 수레가 가득 들판을 메우고 있었다. 파드는 연신 감탄하며 말했다.

“에카톤과 대단한 계약을 했나 본데? 저 정도로 힘쓸 정도라니. 더군다나 상단 지부장이 직접 온 거잖아?”

익숙한 낯이 선두의 멋진 장식을 걸친 말 위에 올라 있었다. 속이 빈 웃음소리와 함께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보두앵 씨. 바가반드의 영주로서 친구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친구라고 해 주시는군요. 어찌 보면 위험한 순간을 이용할지도 모르는 상대일 텐데요.”

입구까지 나와 환대한 네마냐의 행동에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어 보두앵은 고삐를 잡은 채 말에서 신발에 걸리지도 않고 내렸다.

‘한때는 게람나의 이름난 용병 기사였지. 마상술이 장난 아니겠는데?’

몇 군데를 가벼운 가죽 조각으로 덧댄 외출용 옷을 걸친 보두앵이 네마냐 앞으로 다가섰다.

“다시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제 예상보다도 훨씬 일찍, 수월하게 영주가 되셨군요.”

말은 그래도 영지 함락 몇 시간 만에 보급 수레를 도착시킬 정도면 이미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했단 뜻일 거다. 정보가 상인의 목숨줄이라지만 엄청난 속도였다.

‘그게 이 녀석의 가장 큰 강점이었지.’

앞으로 정보는 훨씬 더 중요해질 것임을 아는 네마냐로선 결코 놓칠 수 없는 녀석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식량이 다 떨어졌는데 기다린 듯이 찾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필요할 때 잘 찾아왔다니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죠.”

처음부터 식량난을 예상하진 못했지만, 보두앵의 도움으로 인기를 얻더라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서로 은혜를 주고받다 보면 결국엔 떨어질 틈도 없이 가까워지는 법.’

서로 차가운 이성으로 계산하면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계속됐다. 보두앵도 열심히 두뇌를 굴리는 중이었다.

‘역시, 속내에 구렁이 몇 마리는 들어앉은 녀석이라니까……. 하지만 일단 영주로서 어떤 지도력을 발휘하는지 좀 더 살펴볼까.’

보두앵이 그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새 영주가 어떻게 식량난에 대처하는가’였다.

“식량 배분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지.”

“기왕에 환심을 살 거라면, 드러내놓고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부자들이 빈민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방법이랄까요.”

좋은 일을 하되, 이익은 챙기겠다는 의미였다. 전통적으로 정계에서 힘을 얻으려는 돈 많은 귀족들이 쓰던 방식이다.

“좋죠, 저는 가급적 화려한 쇼는 꼭 보기 위해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편이랍니다.”

두 사람은 불과 하루 만에 분위기가 달라진 거리를 걸었다. 그 사이에 미하일이 소식을 알렸는지 곳곳에서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이제 더 많은 사람이 모일 겁니다.”

“영지 상태가 좋지 않다곤 들었지만 생각보다도 영양이 엉망이군요.”

핼쑥한 얼굴들과 앙상한 팔다리, 체념한 듯한 얼굴빛까지. 몇 가지 신나는 변화만으론 어림도 없다는 눈치였다.

‘역시, 상황을 뒤집지 않으면 안 돼.’

엘레나 일행에게 돌아온 네마냐가 바로 보두앵을 소개했다. 어느 정도 들어서 아는 바가 있는지 파드까지 포함한 세 사람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바난드의 촉망받는 일선 지휘관에, 신성 기사단까지. 이거, 저 같은 상인이 있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보두앵의 겸손한 말에 신분을 개의치 않는 엘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몇 년 만에 고원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상단 아닙니까? 영지를 도우러 오셨다니 어쩌면 기사단보다 여기선 중요한 손님일 겁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보두앵이 슬며시 네마냐의 귓전에 머리를 가까이하고 작게 이야기했다.

“바난드와 성국까지 지원하는 걸 보니, 말씀한 큰 그림이 잘 짜인 모양이군요. 보기 좋습니다.”

“흠, 흠.”

네마냐는 헛기침으로 살짝 흘리곤 연단 너머를 건너다보았다. 광장 한쪽에 족히 200대는 됨직한 수레들이 비집고 자리를 잡으려는 중이었다.

“자, 나눌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래도 역시, 공개적으로 앞으로의 방향을 밝히는 게 우선일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세 사람의 동의를 받고는 네마냐는 계단을 올랐다. 어느새 달려왔는지, 미하일이 현장에서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다. 네마냐는 미하일의 어깨를 탁 짚었다.

“고생했어. 오늘은 이 준비만 하고 들어가서 쉬어.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게.”

“그럴까. 오늘은 밤이 깊기 전에 자야겠어.”

녀석의 다크서클 짙게 내린 눈가를 보며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가 안 자면 그 짜증을, 어휴……. 내가 이렇게 영민들을 한 번 더 구한다.”

“내가 지금 피곤한 걸 다행으로 생각해라, 쯧.”

실소를 지은 미하일은 연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등을 향해, 네마냐는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네가 있어서 빨리빨리 해결했다. 고맙다.”

녀석은 가볍게 손을 흔들곤 천천히 내려갔다. 연단 위에는 이제 미래와 과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신만이 남아 있었다.

―삐걱.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나무로 된 조잡한 바닥이 비명을 토했다. 모여든 사람의 숫자를 생각하면 묻혀 버릴 미약한 소리였다.

“…….”

그러나 거리로 나온 주민들은 잠자코 나무 바닥의 거친 비명까지 그대로 듣고 있었다. 새 영주님의 취임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했다.

“영민 여러분, 엉터리 영주의 지배 아래서 그간 고생이 많았습니다. 주민들 등골을 빼먹은 이가 배신한 게 일찍이 드러나 그나마 다행입니다.”

전임자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상대적으로 대조적인 모습을 드러내려는 의도. 재치있게 얘기해 본답시고 꺼낸 말이지만 보기 좋게 실패한 것 같았다.

‘역시 미리 준비라도 해 둘 걸 그랬나.’

역시 그 소릴 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과히 밝지는 않았다. 적당히 현실적이어야 하는데, 너무나도 잔인할 만큼 정확한 상황판단이었으니까. 심지어 시스템까지 거들고 나섰다.

[재미없는 농담]

[당신이 분위기를 띄우려던 말에 사람들이 기분이 나쁩니다. 영지 생산성이 1%만큼 감소합니다. 적용 기간: 일주일]

‘이게 왜 필요할 땐 안 나오더니 이럴 때 한마디 얹으려고…….’

역시 맞지 않는 옷은 입는 게 아닌가. 기껏 바로잡은 자세는 풀어 버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휴…… 고생하는 분들께는 영지의 녹을 먹는 기사였던 입장에서 못할 말이긴 합니다. 그냥 편하게 말할게요. 모두들 가까이 와서 들어 보세요.”

네마냐는 아예 앞으로 더 나가 턱에 걸터앉았다. 맨 앞에는 네마냐와 면식이 있는 친구들과 아이들이 있었다. 손짓으로 사람들을 한층 더 가까이와 편히 앉게 했다.

“멀리 있으면 안 들리니까 그냥 가까이 와도 됩니다. 안 듣고 나중에 못 들었다고 하소연하면 안 됩니다.”

어르는 말에 쭈뼛거리면서도, 사람들은 나무 단상에 몸을 기대거나 바닥에 앉으며 자리를 잡았다.

“다들 요즘 사는 건 좀 어떠신가요? 당장 먹을 게 부족하다는 건, 저도 확인했지만.”

“…….”

싸한 침묵이 흘렀다.

―영주님 물음에 대답해야 하는 건가?

사람들이 제각기 눈치를 봤다. 왜 그런지는 알 만했다. 세금을 바치라는 강요나 받고, 질문이라도 했다간 몽둥이와 칼을 맞았다.

‘가스파리얀의 상처가 그만큼 깊다는 거지.’

어떡해야 하나 싶던 네마냐는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부담 갖지 않고 얘기해도 괜찮아요. 전 가스파리얀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지내 왔던 그 네마냐는 어디 가지 않았어요. 이 작은 동네 골목길을 지키라는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여전히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도 침묵의 성격은 조금 달라진 것 같지?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졌어.’

네마냐는 조금 달라진 시선과 반응에 힘을 얻어 다시 말을 잇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솔직하게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앞으로의 장래가 밝지는 않습니다.”

잠시 숨을 쉬면서 반응을 살폈다. 여전히 대부분 침묵을 지키면서도 올 것이 왔단 반응이었다. 조금 더 강한 반응을 끌어내 볼까.

“고블린 군단은 빠르게 전진하고, 나샤와는 불타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는 멈추지 않고 이곳으로 향하고 있어요.”

“아…….”

“맙소사. 또 전쟁…….”

침묵을 지키던 목소리들이 장탄식을 뱉었다. 네마냐는 양팔로 허리를 짚은 채 반응을 조금 지켜보았다. 충격을 받는다고 해도 사람은 애써 무시하며 지나가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걸 봐줄 네마냐는 아니다.

“안 올 거라고 생각합니까? 고블린은 반드시 이곳으로 옵니다. 내 장담합니다. 가스파리얀이 제거된 것과 상관없이 놈들은 옵니다.”

그때 뒤에서 하라드가 다가왔다. 녀석이 건네주는 천 조각 다발을 받고는 앞에 한 장씩 펼쳐놓았다.

“자, 이게 어제 우릴 공격한 고블린 대장의 물건이에요. 이거 뭔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둘둘 말아 놓은 형형색색의 천 꾸러미가 거듭된 칼질과 마법의 후폭풍으로 이리저리 찢겨 있었다. 사람들은 무릎 위에 천 조각을 펼쳐서 한 장, 한 장을 들어 보였다.

“손수건인가요? 놈들도 코를 푸나?”

“창의적이지만 오답. 맞추는 분한테는 작은 선물도 드리죠.”

어른 하나가 쭈뼛거리며 대답하자 아이들도 나서기 시작했다.

“정답!”

“그래, 새치기 안 하니까 천천히 얘기해도 돼.”

“장로 어른한테 들은 적 있어요! 그거 그리엘크가 파괴한 도시들의 흔적이죠?”

“…….”

눈이 찌푸려졌다. 누가 아이한테 그런 절망스러운 이야기를 천진난만하게 뱉도록 알려 준 건지. 장로 대표가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 장로들이 가장 패배주의적이라는 소리를 하긴 하던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까진 패배주의에 걸맞을 수도 있다. 앞에 있던 꼬마를 오게 하여 머리를 한껏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는 녀석은 그저 기쁘게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그런 자기 암시적 예언은 맞지 않으리란 걸 보여 줘야겠지.’

그러면서도 네마냐는 아이에게 동화 몇 닢을 쥐여주었다.

“하, 그래 정답이야. 잘했어, 잘했다.”

“저……그럼, 새로운 영주님께서도 전쟁을 하실 생각이신가요? 녀석의 옷가지를 굳이 보여 주시는 건…….”

중년 여성이 쭈뼛대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태도는 조심스러워도, 말하는 것만은 본론을 짚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맞아요. 하게 됩니다. 나는 정말 하기 싫습니다. 간절함으로 따지자면,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도 전쟁이 싫을 겁니다.”

이건 사실이다. 내가 전쟁 중에 직접 죽어 보지 않았나. 아직 죽어 보지도 않은 이들이 어떻게 내 간절함을 넘어서겠어.

“그렇지만 이제 모두 잘 압니다. 놈들은 이 땅을, 이 골목을 차지하기 위해 내려올 거예요. 언제까지? 우리 모두 죽거나 자기들이 막힐 때까지.”

“그렇다면…….”

한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지팡이를 짚는 것도 힘겨워하는 모습에 주변에서 부축해 주었다.

“공물을 바친다거나 하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껏 저 산맥 북쪽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단 소문은 들었다. 그러나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 네마냐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식량 수확량도 줄어드는 마당에 저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곤 자비만 바란다는 말인가요?”

“거센 바람을 피해야 한다면, 굽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미덕이 됩니다. 제 경험상…….”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리 있는 의견이었지만, 다가오는 위기의 강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판단이란 건 마찬가지였다. 부드러운 말투를 거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침 중재를 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던 엘레나와 파드도 잠자코 들었다.

“아뇨, 아닙니다……. 장로 어른의 말씀은 옳은가 싶다가도 틀립니다. 우리는 싸워야만 길이 생깁니다.”

장로의 반론은 만만치 않게 계속되었다.

“전쟁은 기사들이 보기 좋게 창을 겨누고 돌격하는 연극 같은 게 아닙니다.”

“아뇨, 아뇨. 오늘날 기사들은 그런 철부지 같은 낭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내 반격에 잠시 주춤한 노인은 그 부분에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주제를 옮겼다.

“아니, 잘 아실 겁니다. 이곳에 사셨고, 보셨으며, 들은 바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구름이 햇볕을 가렸다. 잠시지만 차가운 바람에 사람들의 옷자락과 머리칼들이 흔들렸다. 한 줄기 바람일 뿐인데도 흔들리는 마음과도 같았다.

“그래서.”

살짝 벅차오르는 무엇인가에 목이 메었다. 전쟁이 괴롭고 슬퍼서? 만약 그랬다면 저 멀리 동쪽으로 도망가서 잘난 재주로 돈이나 벌었겠지.

“…….”

네마냐의 말을 사람들은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네마냐 역시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아래에서 올려다보지도 않은 채 함께 시선을 맞추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에 온 겁니다.”

미래가 갈라지는 분기가 발 앞에 드리워졌다. 수백 쌍의 눈은 네마냐가 선 곳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전쟁은 피할 수 없고, 혹독한 시간이 기다립니다. 평화를 돈이나 공물로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점은 장로께서도 변함없으시지요?”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자, 그럼 어디 보도록 하죠.”

다시 털썩 연단의 바닥 위에 양반다리를 꼬고 앉았다. 입식 생활에 익숙한 이곳 사람들로서는 편안하게 앉는 네마냐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마침 보여 줄 게 있었습니다.”

등 뒤에 매어놓았던 두루마리 문서 하나를 꺼내 주르륵 펴고 훑었다. 내용은 다시 봐도 가관이었다.

“가스파리얀은 부유하고 안전한 영지를 받기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대신, 이 영지는 완전히 파괴되어 고블린의 목초지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세상에.”

아찔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각기 곁의 가족을 감싸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네마냐는 끔찍한 문구로 가득한 문서를 말아쥐었다.

“뭐, 그런 겁니다. 상식선에서 생각하기엔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예컨대, 그토록 믿는 제국의 결계 기둥……. 이건 성국 기사단에서 설명해 주면 좋을 것 같네요, 부단장님.”

적마정석 사용에 먼저 민감하게 반응한 세력은 성스러운 도시, 켈리도니온이 있는 지케른 성국이었다.

[적마정석이 고블린에게 사용되었다는 정황이 있다. 어떤 경로로 유입되었는지, 어느 정도로 사용하고 있는지 자세하게 분석하라.]

여기서 바가반드에 파견된 부단장에게 조사가 내려졌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두 사람은 이미 여러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다.

“좋습니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편에서 걸어와 네마냐의 조금 옆에 기대며 자리를 잡았다.

“결계주(結界柱), 참 좋은 수단이죠. 기둥 위에 수정석을 올려놓았을 뿐이지만 마나와 존재를 감지하니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지.”

네마냐는 바로 적마정석 조사와 관련해 어떤 결론을 얻었는지 엘레나에게 물었다.

“……기존의 방식과 상식으론 상대할 수 없단 건 확실합니다. 특히 놈들이 인간이 사는 토지를 노린다는 점에서.”

“마지막, 결론 부분을 다시 한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장난기와 의미심장한 표정이 교차하는 엘레나가 알겠다는 듯이 친절하고 또박또박하게 한 음씩 짚었다.

“지금 움직이는 고블린들은 인.간.이 사는 토.지.를 바랄 뿐, 인.간.이 있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항복하고 공물을 바치며 노예가 된다면요?”

이번엔 파드 경이 바난드 문장을 단 깃발을 한 손에 쥔 채로 전면에 나섰다.

“지금껏 수십 년간 그렇게 해왔던 변경 마을들이 전멸하는 중입니다. 지금까지처럼 대응한다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확실한 단정. 거기서 다른 해석이 허용될 가능성은 없었다. 네마냐는 잠깐 턱을 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표정엔 적당한 위기감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너무 겁에 질려 멘탈이 나가는 상황 말고. 공포의 실체를 명확히 분석해야 한다.

‘그래야 두려움에 맞설 수 있지.’

접었던 다리를 펴고 단상 위에 오롯이 섰다.

“……이 정도면 괜찮은 답변이라 생각합니다. 장로님?”

음, 침묵. 조용히 이쪽을 쳐다볼 뿐이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판을 완전히 뒤엎는 일만 남았다.

“어두운 얘기가 길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누굽니까? 돈이나 뜯어서 영지 바칠 준비나 하던 누구 씨랑은 달라야지 않을까요.”

세 번 박수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돈’ 얘기에 사람들의 표정도 조금 달라지는 게 보였다.

‘하늘이 솟아날 구멍 없이 무너지더라도 돈이 있다면 얘긴 달라지는 법.’

작은 퍼포먼스를 위해 두둑하게 챙겨 온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자…… 여러분 여기 앞에 계신 분은 우리 영지에 투자해 주실 지갑…… 아니 투자자, 에카톤 상단의 보두앵 지부장입니다.”

“뭐 팔아먹어야 하는 게 있는 모양이군요?”

능청스러운 호들갑에 보두앵은 쓰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만 그놈의 트레이드 마크인 안경을 쓴 지 오래였다. 네마냐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상인 모드 ON’이랄까.

“무엇이든 팔아서 영지만 부유해질 수 있다면 공짜 강물이라도 팔아야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난세에서 부(富)만 한 배경이 없으니.”

한참 끙끙댄 끝에 두 사람의 네 손바닥 위엔 반짝이는, 아니 단순히 햇볕뿐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하는 물체들이 수도 없이 쌓여 있었다.

“아니, 저 반짝이는 건 대체 뭐야?”

“보석인가?”

사람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금속은커녕 잡목을 짓이겨 만든 나무 숟가락조차 아껴 쓰는 사람들이다.

“이게 내가 보여 줄 장래의 전망입니다.”

네마냐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렸던 사람에게 가능성의 한 가지 길만을 열어 줄 뿐이었다.

―후드득.

미련 없이, 두 사람은 마정석 조각들을 사방에 뿌렸다. 작은 소란 속에 대부분은 조각을 잡으려고 움직였다. 어떤 이들은 멍하니 단상 위를 주시했다.

‘그래도 아까보단 생기가 좀 돋는군.’

네마냐는 상단주와 눈빛을 교환한 뒤, 오글거림을 무릅쓰고 오른팔을 한껏 치켜들었다.

“갑시다! 곡괭이 들고. 모두 광산으로! 부자 한번 해 봐야지!”

- 4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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