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우리 영주님께서, 부끄럽게도 고블린에게 영지를 팔아넘겼습니다. 이걸 이야기하는 저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네마냐의 선언은 사방을 둘러싼 건물에 부딪힌 채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이미 퍼지는 소문을 들은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충격적인 이야기임은 틀림이 없었다.
“영주가 배신자였다니!”
“전쟁에 대비한다던 게 고블린과 함께 다른 영지를 치겠다는 것이었나?”
“그 세금을 내느라고 우리 아버지 돌아가실 때 빵도 제대로 못 드셨는데…….”
고블린을 막는다는 대의 하나로 억눌러 왔던 고생이 와르르 무너지는 발언이었다. 네마냐는 한층 더 고삐를 죄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쪼가리는 바난드에 우리 일행이 어느 고블린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진정한 공포를 마주했습니다.”
양피지 조각을 흔들던 네마냐는 분이 폭발하는 목소리로 멍하니 서 있는 공자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 거지 같은 새끼들아!”
그와 함께, 내 손가락 신호를 본 하라드도 옆으로 나서 문서를 받았다. 바람의 프시키를 불러낸 하라드는 자신의 목소리를 실어 사방으로 보냈다.
[건너산맥의 패자, 우레이미야 군단에서 존경하는 백작 가스파리얀께 보내는 서신]
맨 앞부분의 발신자와 수신자 부분부터가 황당한 소리의 연속이었다. 군중 사이에서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우레이미야? 철위기사단을 몰살시키고 나샤와를 대학살한 놈들이잖아. 그놈들과 손을 잡았단 건, 설마…….”
어떤 친절한 학자가 우레이미야와 나샤와에 대한 간략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가 더하며 광장의 소란은 점점 커져만 갔다.
“닥쳐! 감히 네가 내 아버지를 음해하고 왕과 결탁해서 영지를 빼앗으려는 속셈인 걸 모를 것 같나?”
공자 가스파리얀은 벌써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화를 터뜨렸다. 무심결에 그 손은 벌써 검집에서 칼을 뽑아냈다.
‘영지의 지배자답게 훌륭한 재료로 만들었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같지만.’
은은한 마나가 흩뿌려지는 게, 검 어딘가에 마정석까지 삽입한 모양이다. 역시 금속으로 유명했던 곳이니만큼 대장장이의 수준은 괜찮았다.
‘근데 정작 사용자가 검기조차 쓰지 못하는 녀석인걸. 내가 4년 뒤에 소드 마스터가 됐을 때도 여전히 못 한 녀석인데.’
전생에 이런 놈한테 억눌리던 자신이 문득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네마냐는 가볍게 손가락을 휘둘렀다.
[대상 충전. 용량 3.]
판단 능력 11은 낭비하지도 않고 딱 적정한 마나 사용량을 찾아내는 감각을 주었다. 여기에 하라드나 아일라가 알려 준 몇 가지 정보를 활용하면 그만이었다.
‘마정석과 달리 일반 광물은 급격한 마나 과부하가 걸리면 그대로 부서지거나 폭발한다. 이거지.’
네마냐는 그대로 마나에 길을 열어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과충전 우려! 용량 이상으로 금속에 충전 시, 폭발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도…….]
안전장치가 귀찮게 알림을 보냈다.
‘시끄러워, 그게 내가 하려는 거니까.’
보지도 않은 채 무시했다. 비싼 금속으로 된 검신이 폭발하기까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가스파리얀 4세는 감당할 수도 없는 속도였다.
―콰앙!
금속이 찢어지는 파열음과 함께 빛무리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검이 버텨 내지 못하고 강제로 분출시킨 마나의 흔적이었다.
“으아악, 내 손! 내 얼굴!”
부러진 검신을 내팽개치며 공자는 피범벅이 된 채 이리저리 굴렀다. 거기에 네 명의 호위도 폭풍에 휘말려 넘어진 상태였다.
‘방어 마법이 들어간 반지인가. 거의 찰과상밖에 안 입었군. 뭐, 어쨌든 정신은 무너졌으니 상관없지만.’
그때, 녀석의 손에서 아직 빛을 격렬히 뿜어내는 반지가 눈길을 끌었다.
“이 새끼…….”
그 빛만 봐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은은한 붉은 빛을 내며 그 반지는 네마냐가 흘린 마나를 삼키고 있었다.
“감히 내 앞에 고블린의 물건을 가져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녀석에게 다가갔다. 공포에 질린 녀석은 나를 보곤 겁에 질린 채 뒤로 기어갔다.
“죽일 가치도 없으니까 손에 끼고 있는 그거나 내놔 봐.”
신경질과 함께 네마냐는 거친 손길로 공자의 왼손을 잡아 올렸다. 예상대로였다.
“젠장.”
작은 적마정석이 박힌 반지를 뽑아냈다.
“배짱도 좋아, 이걸 감히 가지고 다니다니. 내 눈에 띄는 광물과 금속은 모두 내 마나의 지배권에 있는데데 말이야.”
네마냐는 하라드에게 고개를 돌려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궁정 마법사는 편지를 계속 낭독해 나갔다.
[우레이미야족의 족장 카쉬-림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각하가 양해하신다면 성국, 제국, 왕국을 모두 쓸어버리고 진정 고블린의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겁니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생각보다도 더 어이없는 현실이었다.
‘가스파리얀이 비밀리에 마시스 산의 마나샘을 넘겨 버렸던 거군. 그래서 그렇게…….’
마시스의 샘에서 흘러드는 마나의 원천.
‘그것 자체도 중요하긴 하지만, 마나샘은 산 아래 콜라케르트 도시를 방어하는 결계 에너지야.’
마나의 원천이 차단되면 결계는 무너진다. 거기에 고블린 마도사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무한한 마나 때문에 곧 무한한 공습이 쏟아질 터.
“그……근거가 없지 않나! 단순 조작된 것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여전히 겁에 질려 있는 공자는 고발에 대한 근거로 물타기를 하려 들었다.
“성수 키메라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영지병이 어째서 성수를 쫓았나? 성수 때문에 타티온이 파괴될지도 모르는 걸 모른 척한 건 누구지?”
“그, 그건…….”
네마냐의 폭풍 같은 질타에 젊은 가스파리얀은 대답할 기회조차 찾지 못했다. 기껏 안정을 되찾아 반박하려 했지만, 그것도 우스운 수준이었다.
“그, 그건 단지…… 그래, 실수였던 점이…….”
“실수! 그럼 인간 진영에선 사용이 금지된 이 적마정석을 사용한 건 또 누구일까?”
아까 녀석의 손에서 빼 둔 반지. 네마냐는 가볍게 마나를 주어 붉은 돌을 짓눌렀다.
―삐유우우욱!
증기가 솟구치는 듯한 거대한 붉은 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 불길한 색만 보아도 누구나, 그것이 적마정석이 먹어 치워 오염시킨 마나임을 알 수 있었다.
“붉은 마나라니!”
“고블린도 아닌 인간이 적마정석을 갖고 다닌다니? 그렇다면 정말로 백작이……!”
그 사악한 마기 때문에 바가반드가 한층 더 살기 나빠진 셈이다. 사람들 가운데서 과격한 사람들은 벌써 일어나 있었다.
“이보시오, 공자! 우리가 봄가을에 굶어가면서 그나마 냈던 푼돈들은 어디로 갔단 말이오?”
“딱하긴! 저 얘길 듣고도 목석인가? 당연히 고블린들 뇌물이나 줬겠지.”
생전 이런 저항은 받아 본 적 없는 가스파리얀은 적반하장으로 화를 터뜨렸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무례한…… 다들 침착하고 영주께서 보내신 이야기를 들어라!”
그러나 이미 두려운 것이 없는 사람한테는 아무 소용 없는 분노였다.
“지랄, 무례 같은 소리가 가당키나 하나!”
“그래 놓곤 그 유세를 떨었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애들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움켜잡도록 내더라도 우리를 위한 것이라더니, 제 배 채우고 고블린들에게 빌붙겠다고?”
남녀를 막론하고 고블린의 침략 앞에 피해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진 주민들. 고블린과 연계된 문제라면 신경질적이었다.
‘스스로 불타올랐으니 더 보탤 것조차 없었군. 권력은 재로 돌아가고, 권위는 불쏘시개가 되는 법이지.’
하늘에서 주었다고 생각하던 권력이, 웃기게도 아래로부터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안 되겠군, 이 무지렁이 놈들.”
설득이 무력해지자 젊은 가스파리얀은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을 인정하지 못했다. 녀석이 분노를 가득 담아 네마냐를 노려보았다.
“……네마냐! 네가 정녕 우리 가문과 영지 전체를 적으로 돌릴 생각인가?”
“영지 전체?”
비릿한 비웃음을 입가로 흘려보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 적어도 내게 보이는 장면으론 영주님이 고립된 것 같은데. 지금 보라고. 누가 저들에게 둘러싸였지?”
녀석은 자신을 향하는 수백 쌍의 눈동자를 보고 아득한 절망에 빠졌다.
“개 같은……! 대체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위대한 정복자로 군림할 내가…….”
녀석은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호위로 온 녀석들은 어디론가 벌써 모습을 감춰 버렸다. 바가반드를 멸망시킨 자들이라 해도, 겨우 이런 우스운 놈들일 뿐이었다.
“대충 마무리된 것 같네요.”
“자, 이거. 슬슬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다.”
네마냐가 이제 상황을 정리하려 나서자, 아일라가 불쑥 검 한 자루를 내어주었다. 촉감에서 느껴지는 풍성한 마나의 기운.
“이건…… 마정 합금? 어떻게 만든 거예요?”
“어떻긴. 내가 타티온 대장간을 거의 반쯤 부숴 가며 만들었지. 챙겨 둔 주괴가 몇 개 있어서 다행인 줄 알아.”
지금 다시 보니 아일라가 항상 입고 다니는 작업복은 검댕이 한층 더 늘어나 있었다.
‘타티온에서 식사도 마다하며 대장간에 간 이유가 이거였어?’
마정 합금답게 마정석을 박을 필요도 없는 막대한 마나가 느껴졌다.
“고마워요. 아직 보상해 줄 수는 없지만.”
아일라는 대수롭지 않다며 격려해 주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건 내가 고블린을 막는 방패를 자처한 당신에게 주는 첫 선물이니까. 앞으로가 더 고달플 텐데, 이제 간 보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안 그래 영주님?”
“아일라 씨…….”
“아 씨……. 진지한 건 역시 나한테 안 맞는다니까.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아일라가 쑥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섰다. 살인과 전쟁의 포악을 피해 검을 만들지 않겠노라는 결의.
‘불살생의 의지가 파멸을 앞두자, 수호를 위한 검으로 변했군.’
바로 이 손에 놓인, 차라리 예술품인 검 한 자루가 그렇듯이 말이다.
“이 검은 오직 고원의 사람들을 지키고, 내가 돌아갈 곳을 지키기 위해서만 쓸게요. 그러니까, 앞으론 당신이 더 필요할 겁니다.”
아일라는 대꾸도 없이 돌아선 채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것으로 답은 충분했다 네마냐는 연단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주민 여러분에게 영지의 관리자이신 바난드 국왕의 전언을 전하겠습니다.”
검신을 뽑아 들었다. 민첩한 행동에 검집과 검신의 스치는 소리가 청아하게 퍼져 나갔다.
[설득]의 효과는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소란하던 군중은 마나의 파동에 정신을 차렸다. 모두의 시선은 연단 위에 꼿꼿이 선 흑발의 기사로 향했다.
“……모든 고원의 영지를 관할하시는 바난드 왕의 결정이시다. 가스파리얀은 주군과의 계약을 저버리고 영민의 안전을 위협한 죄가 명백하다.”
품속의 주머니에 손을 넣곤 이내 왕가의 문장을 꺼내 보였다. 몇 발짝 떨어져 있는 하라드는 약하게 바람을 일으켜 내 말을 광장 곳곳으로 퍼트려 주었다.
[오늘부로 가스파리얀 가문의 백작 작위를 박탈한다. 네마냐 나자리안을 차기 백작으로 봉하니, 모든 왕국의 군병과 제후, 영민은 나자리안 백작을 따르도록 할 것.]
제법 갑작스러운 책봉 선언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반쯤 미쳐 버린 가스파리얀 4세가 이 말에 다시 분노를 터뜨렸다.
“흐……푸흡……푸핫! 네가, 네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피를 흘리는 몸인데도 녀석은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네 녀석이 내정에 간섭할 때부터 잡았어야 했다. 그래, 그때 반항하는 무지렁이 농부들과 함께 쳐 죽였어야 했……푸앗! 쿨럭쿨럭…….”
분노가 서린 눈빛엔 제한 없이 담긴 마나가 기괴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났다.
“할 말은 다 했나?”
이야기가 채 이어지기 전에, 손에 들린 검이 한때 공자였던 젊은이를 겨누었다. 넘치는 마나가 감정을 따라 폭발적으로 그 주변을 휩쓸었다.
기운이 들끓은 망상가는 피를 토하며 말이 끊어졌다. 다른 동료들도 머리를 쥐어 감싸거나 두통을 호소했다.
“으아아! 이거 뭐야! 머리가……!”
“나자리안 경, 진정하고 마나를 안정시켜요!”
말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기억 속의 주마등에선 계속해서 고블린 전사의 칼날, 피비린내와 뜨거운 숨결만이 반복적으로 재생됐다.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 죽여 주지 못할 것도 없지.”
검을 번쩍 들었다. 되는대로 마나를 집어넣었다. 마정 합금만이 가능한 무한한 마나 수용. 그리고 곧바로 칼을 휘두르려는 네마냐였다.
“그만. 나자리안 경, 여기까지만입니다. 사형은 국왕에게 재가를 받아야 합니다.”
곧 등덜미에 느껴지는 차가움. 잠시 숨을 내쉰 뒤 돌아본 곳에는 빙결 마법을 사용한 하라드가 있었다.
“이런 기쁜 날에 굳이 불쾌한 피를 보실 이유는 없죠, 영주?”
침착한 말 한마디에 감정을 가라앉히는 마법이라도 걸어 둔 것인지, 그 말과 함께 네마냐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휴…… 네 말이 맞아. 이런 놈은 죽이기에도 칼이 아깝거든. 이 칼은 오직 고블린 군단과의 싸움을 위해 남겨 둬야지.”
검을 집어넣었다. 그 사이에 가스파리얀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네마냐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고원의 인간들 모두의 원수 아닌가. 천천히 고통을 잘근잘근 씹어 먹으며 죽게 만들어도 모자랄 터.
“야, 너.”
“으어?”
극도의 공포로 실어증에라도 걸렸는지 더듬는 녀석은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했다. 닫히지 않는 입에 침이 흐르는 모습까지 보려니, 굳이 손을 사용하기도 언짢아졌다.
“좋은 날에 손을 더럽히기 싫군. 알아서 마을 밖으로 나가겠다면 살려 주겠다.”
“…….”
* * *
“만에 하나라도 장기전으로 갈 수도 있어. 그때를 위해선 준비를 해 놔야지.”
자루아나의 거리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민병대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치안과 방비를 회복하고 있었다. 현지 친구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한 미하일이 결과를 보고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네마냐 너를 돕겠다고 여기 친구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어. 걱정 말고 필요한 건 언제든 얘기해.”
“장로단에서도 얼마든지 지원하겠습니다. 도시를 안전하게 지켜만 주신다면…….”
거리를 거침없이 지나가는 네마냐와 미하일, 그리고 장로단 일행이었다. 마주친 주민들은 제각각 인사하거나 허리를 굽히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네마냐는 손사래를 쳤다.
‘바쁠 때라도 잠깐은 허례허식을 벗어나도 되겠지? 필요하게 되면 어쨌든 잘 이용하겠지만.’
이런 실용성은 네마냐에게 남아 있는 이서준 시절의 현대적 합리성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몇십 년 전의 기억이지만, 그래도 포기하기 어려운 예절이자 효율이었다.
“다 온 것 같아요, 장로님. 여기가 도시의 중심이 맞죠? 최대한 정중앙이어야 해요.”
일행이 멈춘 곳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소란이 일었던 광장 중심 부분이었다. 남녀 노인들 무리 가운데서 기품을 뿜어내는 할머니 장로가 나섰다.
“맞습니다. 도시의 핵심 부분은 설계에 따라 만들어졌고, 특히 광장은 완전히 시내 중심에 자리해 있지요.”
“정말 그래요. 확실히 수도 바가반드보다도 더 정갈한 느낌이군요.”
태연한 네마냐를 보면서 장로들은 어딘지 모를 불안감을 계속 느꼈다.
“……그런데, 젊은 영주님. 이런 탁 트인 곳에서 무엇을 하시겠다고 저희까지 부르신 것인지.”
‘젊은’. 그것은 좋은 말이고 아니기도 하다. 상대는 배울 것 다 배우고 도시를 이끄는 장로단의 수장. 단어 하나하나가 의도를 가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경험 없는 애송이란 뜻도 되겠지.’
나쁘게 본다면 가스파리얀의 열화판이란 소리 아닌가. 그렇지만 여기서 각을 세울 순 없었다. 네마냐는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영주에게 바치는 자루아나의 인장은 가지고 오셨죠? 밀, 너도 가방에서 마정석 하나 꺼내 봐. 제일 큰 거야.”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어도, 두 사람은 각자 주문받은 물품을 꺼내 들었다. 네마냐는 노인이 바치는 인장 반지를 꼈다.
“지금 우리가 주종 계약을 맺는다고 해도 영지 마나 같은 건 사용할 수 없겠죠?”
“당연히…… 고원지대에선 그런 관습도 없었고, 영지 마나 시스템도 구축하지 않으니까요.”
장로단은 나약한 제국 것들이나 사용할 영지 마나를 싫어했다. 기어코 쓰고 싶어 하는 젊은 영주도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우리가 인간들과 고블린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강제로라도 신뢰를 확보해야 해.’
영지에 전속된 마나를 ‘영지 마나’라 부른다. 오늘날 도시 방어를 위한 대규모 마법은 이런 방식으로 마나를 끌어내 사용한다.
“시스템이 없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마음속으로 진정한 태도로 나를 섬겨야 합니다.”
네마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씨익 웃었다. 그리곤 인장 반지를 꼈다. 무슨 의미인지 아는 장로들은 일제히 돌바닥도 개의치 않고 엎드렸다.
“영주님을 따릅니다.”
“그대들의 신의에 어긋나지 않기를……. 자, 일어나세요.”
―탁.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하일은 광장 중앙 흙바닥에 가공된 마정석을 박아 넣었다. 마침 석재로 된 보도가 깨져 있는 게 다행이었다.
“마침 꽂아 넣을 틈이 있었네. 딱 맞았어, 대박.”
“그러게. 운도 좋아.”
미하일이 꽂아 넣은 백색의 마정석은 며칠 전, 바가반드로 오는 길에 폐허에서 얻은 것이었다. 한때 아름다웠을 마정석은 여기저기 손상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빛깔만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백마정석? 그걸 왜 여기다가……?”
“…….”
장로들의 물음에 대답 없이 네마냐는 백마정석에 약간의 마나를 주입했다. 조금씩 마나를 넣으며 수정의 자체 마력이 반응을 일으키도록 유인했다.
‘이쯤 되면…… 왔다!’
점차 반응을 보이는 하얀 수정이 빛을 연하게 뿜어냈다. 그와 함께 커다란 경고음이 발생했다. 눈을 감은 네마냐 앞으로 커다란 화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네마냐에게 주어지던 목적, 즉 고블린 전쟁으로 퀘스트가 연결되기 시작했다.
[주 임무: 고블린 전쟁으로 향하는 길]
[음모가 발각당하고 공식적으로 백작을 받았다. 하지만 고블린과 손을 잡은 그는 과연 순순히 포기할까? 문 ‘너머’로 다가오는 군단을 경계하라!]
[보상: 전체 기초 능력 +2]
[신규 기술 - 설득 2단계]
[신규 기술 - 사자후 1단계]
‘문 너머란 표현에, 주는 기술들도 하나같이 전투에 써먹을 것들인데. 너무 대놓고 전쟁이 터진다는 예언 아닌가.’
네마냐는 띄워진 설명들을 주욱 훑어 내려가면서도, 입으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미하일과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아직 주민들의 완전한 신뢰를 얻진 못했어. 그런데 전 백작께서 고블린과 함께 여기로 들이닥칠지도 모르겠군.”
무심한 듯 중얼거리는 중에도 눈앞에는 마나의 맥이 물길처럼 흘렀다. 은하수가 땅으로 흐른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름다운 빛이었다.
“정말 결계를 형성할 수 있어?”
“밀, 네 친구를 좀 믿고 기다려 봐. 자, 간다.”
‘마나 결계’를 활성화했다. 도시 아래를 흐르는 마나의 맥으로부터 쏟아지는 마나. 마나에 신성력을 부여하는 백마정석이 열심히 작동했다. 펄이라도 뿌린 것 같은 아름다운 흰 빛이 이윽고 도시의 상공에 흩뿌려졌다.
“세상에…… 영지 마나도 없이, 마법사도 아닌데 이런 결계 마법을 턱턱 내놓는다니…….”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지켜보던 장로들이다. 조금 전만 해도 왕이 뒤에 있을 뿐인 젊은 녀석이 뭘 하겠냐고 일삼았던 자들. 그런데 네마냐가 엄청난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펼치자, 자연스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이걸로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우리가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전쟁도 시작되겠지.’
네마냐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광장 저편에서부터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크, 큰일입니다! 강 건너편에서 인간과 고블린이 뒤섞인 정체불명의 군단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성문에 긴급 지원을 요청드립니다!”
“고블린!”
“고블린 군단이 어째서 여기로 온단 말인가.”
잠시 희망의 빛을 떠올렸던 장로들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하지만 신임 백작 네마냐는 변화무쌍한 표정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당황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 전직 백작께서 제게 축하하기 위해 보내 준 선물일 겁니다.”
당황한 인파 사이에서 흔들림 없는 네마냐가 유독 두드러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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