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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33화 (32/200)

33화

타티온에서 떠나야 할 아침은 금세 찾아왔다. 마을에서 받은 마차에 짐도 실었다. 장로인 크냐트를 앞세운 타티온 사람들도 배웅을 나왔다.

“그럼 저희는 이만 출발하겠습니다. 더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을 떠나시면 다음은 자루아나겠군요.”

“네.”

고삐를 잡고 내려다보자 장로의 얼굴이 상당히 어두워진 게 보였다.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습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영지와 영지민을 지키러 온 것이니까요. 어떤 일이 생겨도 타티온은 지켜 낼 겁니다.”

마지막 말은 다분히 타티온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흰 수염이 가지런한 장로는 묵묵히 서 있었다. 그를 부축하던 중년 사내가 대답했다.

“이미 한번 우리를 구하셨는데 어찌 잊겠습니까. 다만 영주가 이제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라는 게…….”

말끝을 흐리는 사내. 네마냐와 가스파리얀의 관계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돌아섰다는 건 자명했다.

“어렵겠죠. 그래도 대화를 할 수 있다면 해 볼 생각입니다. 저쪽에서 응해 준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굳이 위험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대신 앞으로 모든 책임은 저쪽의 대응에 달렸다는 것만 교묘하게 강조했다.

“그러나 정말, 백작이 배반을 꾀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황망한 물음에 네마냐는 쓰게 웃었다. 무어라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느꼈던 황당함과 절망의 맛을 순하게 느끼도록 해 줘야 하나?

“음, 기사님.”

고민하던 상념을 치웠다. 크냐트 장로는 네마냐를 부르곤 잠시 숨을 돌렸다. 몇십 년이고 시간을 농축한 듯한 걸걸한 목소리는 천천히, 하지만 완고하게 말을 이어 갔다.

“타티온은 밤새 이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어느 특정한 편을 드는 건 위험한 것인 줄은 아실 겁니다.”

“그럼요. 줄 한번 잘못 서면 파리목숨이 되는 세상인걸요.”

‘당장 내가 그렇게 죽었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못내 급한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네마냐가 직접 영주를 끌어내리는 것이 먼저였다.

‘그래야만 고블린을 막는다는 목적에 집중할 수 있겠지. 확실한 뭔가를 보여 줘야만 저들도 움직일 터. 지금은 백작이 바보짓을 해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안도한 것인지 답답한 것인지는 몰라도, 네마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반응을 보고 자신만만하게 성공을 보장하던 미하일도 약간 민망한 표정이다.

“아직 말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

장로 크냐트는 몇 번의 헛기침 뒤 갑자기 어조를 바꾸었다.

“영지의 위기에서 저희 같은 약자가 선택할 것은, 단순 중립이 아닙니다. 살길을 열어 주는 편을 택해야죠.”

“그 말씀은…….”

단숨에 표정이 밝아지는 이야기였다. 네마냐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장로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까지 내다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아는 것도 짧지요. 다만, 모두가 버린 이곳을 지켜 준 분을 잊지는 않을 겁니다. 자…… 그것을 가져오너라.”

장로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뒤편의 누군가가 꾸러미를 들고 다가왔다. 각종 열쇠가 고리에 매여 있는 꾸러미였다.

“열쇠…….”

사막 유목민들의 문화에서 자라난 하라드는 난데없는 열쇠 꾸러미의 등장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도 주변에서 진지한 표정을 짓기에 조용히 말을 삼켰다.

“도시나 마을에서 열쇠 꾸러미를 내온다는 건, 항복하거나 따르겠다는 뜻이지.”

“아하.”

아일라가 대충 짐작을 한 듯 소곤소곤한 말투로,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하라드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하야스단에 내려오는 오랜 전통이었다.

“보시는 대로 저희는 이제 돌이킬 곳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적폐를 해결해 주십시오. 영주의 자리를 취하시길.”

네마냐는 마을 노인 중 한 사람이 건네준 열쇠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기분이…… 묘하군.’

차가운 피비린내를 맡으며 의식을 잃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열쇠에서 피어나는 쇠 냄새는 기억과 반응해 복잡한 감정을 일으켰다.

―잘그락.

꾸러미를 잠시 매만진 네마냐는 살짝 덥힌 쇳덩이를 다시 건네주었다.

“나는 여러분의 정복자로 온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동료이자 관리자가 되기 위해 온 겁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 열쇠를 집으시는 게…….”

손을 들어 장로의 말을 가로막은 네마냐. 아직 섣불리 충성을 받기보단 자신의 자질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아뇨. 앞에는 백작, 뒤에는 고블린이 버티고 있습니다. 당분간 여러분의 순종보다는 자발적 협력이 필요합니다.”

아무렴. 지금부턴 만만치 않게 고난의 세월이 올 텐데 스스로 협력을 할 수 있도록 해야지.

“물론 타티온에서 보내 준 진지한 고민과 지지는 잊지 않겠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를 지금 이 화기애애한 자리에서 밝힐 필요는 없었다. 어두운 이야기는 어두운 자리에서 하는 것. 네마냐가 회귀한 이후 세운 원칙이었다.

“저희는 이만 결론을 내러 가겠습니다. 길어도 사흘이면 결판이 날 겁니다. 그동안 마을은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그 점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괴수 건도 잠잠해졌고, 자경대도 있으니까요.”

“하긴, 자경대는 믿을 만하죠.”

이내 네마냐는 하라드와 눈을 마주쳤다. 하라드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첫날 맞닥뜨렸던 영주 직속 병사나 자객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영지를 위한 장로 이하 주민의 절절한 마음은 정확하게 전해졌습니다. 좋은 소식을 곧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마냐는 망설임 없이 고삐를 돌렸다. 작별의 인사가 등 뒤에서 쏟아졌다. 이제 곁에 남은 것은 바난드에서부터 함께 해 온 동료들뿐.

“다들 오래 기다렸네. 그럼 이제 맡겨 놓은 영주 자리를 찾으러 가 볼까?”

가벼운 네마냐의 대사에 다들 기다렸다며 화기애애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미하일만은 뭐가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넌 또 왜 그래?”

“아, 너 잠깐 이야기 좀 하자.”

그리곤 가까이 말을 몰아 다가온 녀석의 귀띔.

“너…… 헬레나 유모님께는 미리 연락 드렸냐? 지금도 바가반드 성읍에 계신 거면 위험할 텐데. 백작이 딴생각할지도 모르잖아.”

유모. 녀석이 고맙게도 유모까지 걱정해 주었다. 물론 네마냐 자신이 잊었을 리는 없다. 부모를 잃고 몇 년은 영락없는 부모 역할을 해 준 유모를 잊을 리가.

“콜라케르트에 있을 때 상단 편으로 대피시켜 달라고 했거든. 괜찮을 거야.”

아마 지금쯤은 상단이 제공한 피난처로 옮겨 갔을 것이다. 그런 위험 요소조차 헤아리지 못하면 영주가 될 자격은 더 없겠지.

“자, 이제 더 의문이 남은 사람은 없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지체할 이유가 없다. 준비가 너무 길어도 일을 그르치기 쉬운 법. 네마냐는 천천히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황금처럼 반짝이는 모래사장을 따라 물길이 굽이쳤다. 낮은 언덕을 몇 개 건너면 곧 영지의 경제적 중심지, 자루아나였다.

“출발합시다.”

* * *

자루아나는 작은 도시인 타티온과 상황이 달랐다. 인구야 비슷하지만 언제든 요새로 쓸 수 있도록 성벽을 갖추었다.

“바가반드가 영지 수도라지만 자루아나가 점령되면 영지의 2/3가 마비되거든.”

“경제, 통신의 측면에선 훨씬 중요한 곳이란 이야기군.”

아일라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개 성채를 영지 본성 급으로 쌓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맞아요. 바가반드를 장악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지입니다.”

성채 앞으로 펼쳐진 목화밭과 익어 가는 보리밭. 지나가는 길에 제법 낯이 익은 얼굴들도 보였다. 반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은근슬쩍 모른 척 피하는 얼굴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론 성 외부에 사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농성이라도 할 생각인가.”

미하일이 갸우뚱할 만했다. 공성전이라도 하려는 생각인가. 겨우 다섯 명을 상대로?

‘아니지, 아니야.’

네마냐는 고개를 저었다. 자존심 강한 영주가 모양새 빠지는 그런 그림을 자처할 리 없었다.

‘고블린과 손도 잡았는데, 오만한 백작이 냉정해졌을 리는 만무하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과히 두려워할 것도 없다. 네마냐는 고블린 편지 건을 떠올리고 하라드에게 말을 건넸다.

“하라드. 그 편지는 해독해 봤어?”

“아, 그거. 조금 늦어지긴 했는데 도시에 들어가 있으면 도착할 거야.”

“그래, 너무 늦어지지만 않게 해 줘.”

그 사이 일행의 대열은 자루아나의 성문에 다다랐다. 역시나 의문을 가졌던 대로 영주의 군대가 성안에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문도 활짝 열려 있는데?”

“마치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군.”

멍하니 문만 바라보던 일행들을 대표한 미하일의 표현에 네마냐가 대답했다. 군대가 아니라 다른 술수일 수도 있었다.

“빈 성에 우리를 들여보내서 자격 시험이라도 치르시려나. 시험 과목이 궁금한데?”

무슨 소리인지 대강 알아차린 아일라나 하라드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만약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강짜를 부릴지도 모른다. 주민들을 방패로 쓰거나 자폭하겠다고 위협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영주에게 이 이상 시간을 줄 순 없어. 다른 생각을 못 하게 지금 들이쳐야 해.”

마침내 일행은 자루아나 안으로 들어왔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정리되지 않은 낙엽이 도보 위를 구를 뿐이었다.

“중앙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데.”

잠시 마나를 느끼던 하라드가 눈을 뜨고 꺼낸 말이었다.

“또 광장이라. 미리 무대를 다 갖춰 놨어.”

서서히 광장으로 향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몇 사람은 어릴 적부터 아는 친구들이었다. 다들 애써 눈을 피하고 있었고, 네마냐는 매우 껄끄러운 지인도 맞닥뜨렸다.

“가스파리얀 공자? 영주가 없으리라 생각은 했는데 대변인께서 오셨군.”

연단 계단에 반쯤 앉아 있던 젊은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호위병도 단출하게 네 명이 전부였다. 삭막한 환영식에 아일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물어왔다.

“아는 사람이야?”

“제가 몇 번 말씀드렸죠? 현 백작의 후계자인 가스파리얀 4세. 저랑 같은 나이예요.”

“어지간히도 머리 썼네. 공자를 맞상대로 세워서 너는 자기 아랫급으로 두겠단 소리잖아.”

“그러게요. 그와 함께 도전자를 제압하는 공을 세우면 후계자로서도 지위가 공고해질 테니까요.”

영주가 상황을 제대로 안다면 오히려 공자를 내세울 수 없을 것이다. 백작의 아들은 아버지 이상으로 통치 자질이 없고, 주민들의 거부감을 사는 형편이었으니까.

“지금부턴 제가 앞에서 이동하겠습니다.”

네마냐는 말을 마치고 공자에게로 다가갔다. 상대방의 만면에 자부심이 넘쳐나는 낯빛은 보기에 과할 정도였다.

“공자, 오랜만이군요. 잘 지냈습니까? 뜻밖에 자루아나에서 뵙는군요.”

“아버지를 도와 영지 운영에 집중하기도 힘든데, 누구 씨께서 분란을 일으키셔서 말이지.”

손가락으로 네마냐를 가리킨 가스파리얀 공자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 네마냐와 공자의 사이에서 가시 돋친 농담이 오갔다.

“글쎄요. 제가 한 일은 버려진 타티온을 지켜 낸 다음 자루아나에 지금 막 들어온 것뿐이라서.”

“영주의 대리인을 위협한 나머지 쫓아내고 봉토를 무단 점령한 것을 ‘보호’라거나 ‘입성’이라고 표현하진 않지, 나자리안 경.”

무익한 설전이었다. 이런 것으로 시간을 벌려는 모양이지만, 대응을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거침없이 대화를 전개했다.

“그래, 영주께선 나를 ‘역적’으로 선포라도 하겠답니까?”

“우리가 뭐 하러 자네를 ‘역적’으로까지 키워 줘야 할까. 깜냥이 안 되는 상대를 맞상대하는 건 과분하지 않을까 싶네만.”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연하게 맞받아치자 공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 엉뚱하게도 협상안을 건넸다.

“……이전의 일은 잊을 테니 사과하고 봉신으로 돌아와라. 영웅 놀이 정도는 후계자로서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으니까.”

“같잖긴.”

네마냐의 답은 짧고 빨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자에겐 충분히 들릴 소리였다.

“후후…… 어리석은 결정에 후회는 말라고.”

이야기를 마친 젊은 녀석은 두 손가락을 마주쳐 튕겼다. 등 뒤에 있었는지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다. 공교롭게도 또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번의 그놈하곤 조금 다른 놈인걸.’

아닌 게 아니라, 지난번의 그놈이었다면 감히 내 실력을 보고도 얼쩡거리진 못했겠지.

‘후드 뒤집어쓰고 대충 위장 마법을 쓴다고 고블린 술사가 감춰질 것 같나, 쯧.’

그때 하라드가 무언가 집중하는 듯하더니 곁으로 다가섰다.

“네마냐 영주님, ‘그것’이 온 것 같습니다.”

딴에 공식 석상이라고 격식을 차린 녀석은 아주 정중했다. 영주님 세 글자에 공자의 눈썹이 다시 찌푸려졌다.

“아, 그럼 부탁드립니다, 궁정 마법사님.”

네마냐도 기분 좋게, 하라드의 직함을 또박또박 읊어 주었다.

‘내 뒤에 바난드 궁정이 있다는 걸 알겠지. 그런다고 덤비지 않을 백작은 아니지만.’

대답을 받은 하라드는 잠시 연단 아래로 내려가 모습을 감췄다. 가스파리얀 공자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 참견하기 좋아하는 노인께서 뒷배를 서 줬나 보군. 네가 권력에 눈이 멀어 영지를 왕국에 팔아먹을 작정이냐?”

“바가반드는 바난드의 영지인데 무슨 소릴 하는 거거야 이젠 그냥 막 나가기로 했어?”

내 이야기를 듣지도 않은 채, 가스파리얀은 로브의 사내로부터 두루마리 하나를 받아 펼쳤다.

“수습 기사 네마냐, 살기 좋은 우리 영지의 평화를 파괴하고 영주민에 대한 선동을 획책했다.”

“얼씨구?”

듣는 사람들은 다들 어이가 없었지만, 네마냐는 어디까지 하나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심지어 영주 대리인을 위협하여 영주의 권위를 무너뜨림은 물론 공무 수행을 부정한 죄가 인정된다.”

이상한 노릇이다. 찍어내려는 권력자가 더 불안해지는 처지라니. 주변에 모인 주민들이 호응은커녕 야유조차 없이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 무식한 것들이 오늘은 왜 이리 조용하지?’

공자는 초조했지만 그래도 조서를 읽어 내려갔다. 영지의 후계자로서 이 정도 위협에 굴할 순 없으니까.

“……영지의 안전과 방위를 떠맡은 기사가 할 수 없는 행위다. 따라서 나는 백작의 직권으로 나자리안 가문의 봉토와 작위를 회수한다.”

공자는 두루마리를 말고 로브 사내에게 건넨 후 불안한 자신감의 눈빛을 보였다.

다시 눈을 뜨기 전의 세상이었으면 적당히 먹혀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네마냐가 그러기엔 이미 많은 것을 걸고, 선을 넘어 버린 상태였다.

“지금 상태에서 나올 발언은 아닌 것 같은데. 주변 반응 안 보여?”

네마냐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들썩여 줬다. 공자가 끝내 노여움을 드러내도록 돕는 건 쉬운 일이었다. 초조함은 섣부른 판단과 행동으로 치닫기 마련이었다.

“아직도 입을 놀려?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호위!”

‘효과가 확실해서 좋은 친구야.’

서너 명 있는 영지의 호위병이 칼을 뽑았다. 조급해진 아일라가 자신도 무기를 뽑으려는지 금속이 스치는 소리가 후방에서 들렸다. 네마냐는 재빨리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싸우기 전에 확실히 해야 할 소식이 있으니까 신나게 싸우는 건 잠시 미뤄둬요.”

“소식?”

모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든 사이, 자리를 비웠던 하라드가 급하게 뛰어 올라왔다. 무척이나 반가운 등장이다. 그 옆구리에는 말아 놓은 양피지가 보였다.

“자, 오늘 중대 발표가 있어요. 특히 영주나 공자만이 아닌 바가반드 전 주민에게 말이죠.”

하라드가 건네는 양피지 묶음을 받아들면서 네마냐는 연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연단 아래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이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들 아는 사람이군.’

심호흡을 삼켰다. 이제는 준비된 각본을 자연스럽게 펼쳐내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지금 이렇게 팔 동작을 크게 펼쳐 시선을 끌며 시작한다든가 말이지.

“시민 여러분! 오늘 저는 제 고향 바나반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말로 하지 못할 짓을 저지른 영주를 고발합니다.”

[설득]

높이 치켜든 채 양피지 사본을 흔드는 오른손. 모두의 이목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누구도 설득력을 보조하는 희한한 스킬이 있었으리라곤 몰랐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발언자의 설득을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리도록 작용한다. 상대가 정보가 적다면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도 그럴 듯하게 들리도록 만들 수 있다.]

가스파리얀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얻은 기술이다. 그게 영주를 내쫓는데 도움을 주다니 말이지. 이제 자신의 말 한마디는 ‘설득’ 기술의 효과로 사람들의 마음에 콕콕 박힐 것이다.

“고블린의 마수에서 우릴 지키겠다는 백작님 아니었습니까?”

다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목소리를 높일 부분은 바로 이 다음.

“그러나 저희는 확인했습니다. 영주의 배신을! 우리 영지를 고블린 군단에 팔아넘겼단 사실을! 인간을 저버렸다는 사실을!”

“뭐, 뭐라고? 어디 그런 헛소리를……!”

공자가 분노와 당혹에 말을 더듬었으나 군중의 소란에 파묻혀 버렸다.

“뭐라고? 고블린과 내통을?”

“고블린과 싸운다고 가져간 돈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놈들에게 갖다 바친 거야?”

“미친 소리!”

네마냐의 발표는 표면으로나마 이어지던 평화를 깨뜨리는 엄포였다. 보호라는 거짓 명분에 묶여 있던 주민들이 분노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영주는 해명하라!

―공자 가스파리얀이 해명해!

미리 이야기를 전달받은 지인들을 중심으로 소란이 퍼져 나갔고, 마침내 첫 시위의 함성도 터져 나왔다.

- 3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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