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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31화 (30/200)

31화

하야스단 지방의 창세 신화. 그 무대는 주로, 이제는 한적한 산골 영지인 바가반드였다.

―아주 오랜 옛날, 바가반드는 성산 마시스의 마나로 넘쳐나는 곳이었단다.

성산으로부터 흘러들어와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는 마나의 무한한 샘. 그것을 난쟁이 왕국의 말로 바가반드라 불렀다.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괴수는 여느 괴수와 달리 신성하고 온화하여 ‘신령’ 또는 ‘성수’라 불렀단다.

그 이름은 익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네마냐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이름을 꺼냈다.

“키메라.”

이서준이 살던 저쪽 세계에선 끔찍한 괴물의 이름이었다. 신화적인 괴수. 사자 머리에 염소 몸통, 뱀 꼬리와 날개까지 갖춘 기괴한 형태. 그것만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기억나는 특징이었다.

‘그런데 저런 괴수를 여기선 성수라고 받들어 모신다, 이 말이지. 하긴 나도 이젠 친숙하게 받아들인 존재지만.’

네마냐는 조심스레 칼을 고쳐잡았다. 하라드도 다가오는 성수에 주목했다. 아직 녀석은 주변을 날아다니며 자신을 유인한 마나의 근원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작은 알림 소리가 들렸다.

[왕의 동물, 오염되다]

‘왕의 동물이라. 키메라 얘기군. 그런데 오염되었다니, 뭔 소리야.’

의구심을 참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로 스크롤을 훑었다. 여전히 불친절하지만 대략적인 정보는 담긴 글이 이어졌다.

[하야스단의 왕권을 상징하는 키메라. 그러나 지금은 단지 광분한 괴수가 되어 주민을 위협할 뿐이다. 당신이 할 일은 다만 오랜 친구를 안정시키는 것뿐.]

[보상 : 전투형 기술 수치 능력 보정. 명성 수치 개방.]

‘키메라를 몇 번 만나 본 적은 있지만, 오랜 친구까지야……. 게다가 날 기억할 리도 없고. 광분한 녀석을 어떻게 진정시킨담.’

“와 버렸네.”

“……응. 올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바로 올 줄은 몰랐어.”

“잡는다고 유세는 떨었잖아. 잡을 수 있겠어?”

“성수만 아니었다면 내 마법으로도 충분했을걸.”

네마냐는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여기서 저 녀석을 알고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마법도 필요 없겠어. 내가 아는 녀석은 그리 위험하지 않아. 그리고 진짜 적의를 품는다면 우리도 순식간에 죽겠지.”

사람의 마법으로 마나의 축복을 받아 ‘신의 총애’라 불리는 성수를 잡을 순 없었다. 궁지에 몰리면 칼이건 마법이건 쓰겠지만.

“고달프군. 아직 보르크를 잡은 후유증으로 허리가 쑤시는데.”

“미하일 형에게도 말해 볼까? 아일라 씨도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네마냐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늘어 봤자 소란만 커져. 진짜 싸움이 일어나면 성수가 광분해서 도시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녀석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곤 움직이던 오른손을 멈췄다.

“알겠어. 그럼 믿어 보지.”

“잘했어. 안 그래도 지금 막, 저 녀석을 어떻게 잘 달래서 써 먹어 볼까 생각하고 있었거든.”

“잡을 생각도 안 하고, 써먹을 생각을 한다?”

하라드의 말은 미처 이어지지 못했다. 재빨리 돌아온 프시키가 자신의 어깨 위에 앉았기 때문이다.

[……아마 너희가 찾던 주인공은 키마이라인 것 같군, 맞나?]

“키마이라?”

하라드도 무슨 소리냐며 되묻더니 이내 무어라 몇 마디 중얼거리며, 스스로 답을 찾았다.

“고대어군. 키마이라 Khimaira.”

“응. 키메라, 맞아. 정말 인적없는 산꼭대기서나 산다는 녀석인데. 소리나 생김새는 무서워도 하는 짓은 영락없는 고양이거든.”

“고양이라기엔 이미 충분히 위협적인걸.”

“덩치는 호랑이니까. 작으면 야옹이지만 크면 으르렁인 거지.”

[너희, 지금은 조심하는 게 좋다. 키마이라의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이거든.]

프시키가 경고를 보내왔다.

“불편이라. 뭔가 문제가 있긴 한 모양이지?”

본래 키메라는 모든 생물체와 오랫동안 한 장소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블린이라면 발각되는 순간 죽는 신세였고.

‘그 덕에 한번은 마시스 산에서 고블린한테 죽을 뻔했던 걸 살 수 있었지.’

원래 바가반드, 심지어 하야스단 전체를 통틀어 딱 한 마리만 있는 키메라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다. 옛날이야기 속에나 전해지던 신비로운 존재일 뿐이었다.

―마시스 산 정상의 순수한 마나를 먹이로 삼으며 기맥을 지키는 존재라고 하지.

‘제길, 그 녀석이 자꾸 떠오르냐.’

눈을 벅벅 문지르며 생각을 지웠다.

“그래도 저 녀석은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아. 성수라는 이름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오른손에 잡힌 금속제 마패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호랑이 몸체에 달린 날개가 하야스단의 왕관을 껴안고 있었다. 하야스단을 통합한 군주의 상징이 바로 「키메라」인 것이다.

“내가 아라가트 마탑을 방문했을 때는 포악한 흉수라고 들었는데.”

“그거야, 그쪽 마법사 입장에선 마시스 산의 마나를 이용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일 뿐이거든. 일종의 민간신앙을 타파하려는 경향도 있고.”

어디 아라가트의 마탑뿐이랴. 지케른 성국조차 마나의 ‘의지’를 신격으로 숭배하며 키마이라 전통신앙을 공격했으니까.

“이것도 복잡한 얘기군.”

쓰라린 표정을 삼키면서 네마냐는 하라드의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어쨌거나 어른의 사정은 천천히 얘기하자. 지금은 우선 저 친구 상태나 좀 봐야겠어.”

“나도 뒤에서 엄호할게.”

녀석도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며 뼈마디를 두드렸다. 녀석을 일으켜 세운 뒤 조금 넓게 펼쳐진 공터로 함께 걸어갔다.

―크르릉!

늙은 호랑이의 낮은 울음이 허공을 타고 흘렀다. 저주파라 그런지 오감이 저리면서도 어딘지 슬피 들려왔다.

“녀석, 오늘따라 구슬프게도 우는군.”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 녀석도 우리가 있는 걸 지금쯤은 알아챘겠지. 역시 그걸 짐작했는지 하라드도 어깨에 올라탄 프시키를 돌려보냈다. 모래처럼 흩어지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키마이라 녀석이 화가 난 모양이니까 적당히 진정시켜야 이야기가 통할 거다.]

“할 수 있겠어? 위험천만한 짓인데.”

“녀석이 그렇게 악한 놈까진 아니라니까. 정 걱정되면 뒤에서 보고 있어.”

“위험하면 바로 몸을 피해. 마법 날릴 거니까.”

“그렇게 잡힐 놈이면 시작부터 때려잡았지.”

피식하면서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 줬다. 몇 걸음 더 앞으로 나가자, 구슬픈 울음소리는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한 15년 전쯤에 만났었나. 오랜만에 제대로 얼굴 보겠군.’

이윽고, 깃털이 가볍게 펄럭이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신비로운 소리였다.

“왔다.”

네마냐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선 신비의 동물이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와. 오랜만이라 반갑네, 키마이라.”

“키마이라를 언제 봤다고 오랜만이야.”

하지만 키메라는 조용했다. 뭔가 말을 잘못했나? 설마 말을 못 알아먹는다는 건 아니겠지. 일부러 고대어로 말 걸었는데. 다행히 착각은 아니었다.

[의외로군. 네가 나를 불렀나. 미약한 인간치곤 대범하구나.]

기억 속에 묻힌 줄로만 알았던 무감정한 음성이 머릿속으로 전달되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것 같은, 미성의 깔끔한 목소리였다.

“역시, 목소리가 아니라 마나 전언으로 이야기하는군. 정확하게 키메라야.”

실제 입을 열고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마나를 전달해서 대화하는 방식. 말조차 못 하는 괴수와 성수의 차이점이었다.

‘키메라 당신이 얘기했었지. 살아남으라고.’

지금 와서 보자면 15년 전 키메라가 지나가듯 건넸지만, 그 말이 네마냐를 만든 셈이었다.

[살아남거라.]

그때의 상대를 다시 만난 탓에, 네마냐는 기쁜 마음으로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아쉽게도 지금 다시 만나는 이 키메라는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렇게 과거의 나는 잊히고, 새로운 내가 담담하게 만나는 건가.’

하지만 눈앞의 녀석은 프시키의 말대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대답조차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녀석의 입에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어딘가 자신이 알던 녀석이 아닌 기분마저 들었다.

“멍하니 뭘 하고 있어, 얼른 피해!”

하라드의 외침을 신호로 삼아, 오른쪽으로 몸을 던졌다. 뒤통수 왼쪽으로 뜨거운 화기가 전해졌다. 불길을 뿜는 소리는 그 뒤에야 귓전으로 들어왔다.

“프시키, 가서 형을 보호해 줘!”

하라드는 프시키의 도움으로 강풍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때 불길은 왼쪽으로 틀어졌고, 프시키가 곧장 다가와 네마냐의 몸을 화구로부터 지켜 냈다.

“휴, 이거 화가 단단히 나셨군.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 거야? 이야기 좀 하자.”

[한낱 인간하고 이야기나 할 만큼 내가 쉬워 보이나. 고블린에 이어 인간도 나를 우습게 보는 게로군.]

성난 듯한 날갯짓은 태풍이라도 부는 듯 요란한 소리를 일으켰다. 네마냐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거, 말 좀 나누자는데 왜 이렇게 안달인 거야. 물론 네가 힘으로 우위에 있긴 하지만 그럴 놈이 아니잖아.”

[움직이는 건 좀 재빠르군그래. 하지만 감히 내가 누군지를 멋대로 규정할 생각은 말아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키메라는 온 힘을 다해 땅으로 내리꽂기 시작했다. 마치 전속력으로 들이받는 기관차가 이런 느낌일까.

[그 허세도 끝이다!]

“프시키!”

하라드의 외침에 급하게 프시키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정령이라도 족히 1톤은 될 성수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젠장, 형!”

하라드는 자신이라도 급하게 뛰어들어야 하나 고민이 스쳤다. 하지만 공기의 흐름을 타는 마나조차도 그곳에 미치지 못할 만큼 짧은 찰나였다.

―쿠웅!

묵직한 충격파가 지면을 타고 몸으로 흘러왔다. 사색이 된 얼굴로 하라드는 먼지 구덩이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만.’

창백한 하라드가 손짓을 하며 프시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프시키, 바람.”

한 줄기 바람이 싸늘하게 먼지구름을 밀어냈다. 장내에는 헝클어진 나뭇가지와 부러진 나무들이 이리저리 나뒹굴었다.

“설마, 설마…….”

그러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피투성이나 쓰러진 네마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은…….

―몇 초전.

키메라가 철판을 긁어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끼에에엑!

“어우, 무서워라.”

놀리는 듯한 말. 그러면서도 네마냐는 흔들림 없이 단검을 똑바로 쥐었다. 고블린 때를 경험으로 삼아 미리 모아 놓은 마나가 손길에 반응하며 밝은 빛을 냈다.

‘침착하자, 분명히 저렇게 날뛰는 데는 이유가 있어. 그것만 알면 간단했을 텐데.’

허공으로부터 이쪽을 향해 내리꽂히는 거대한 몸체. 그러나 그 순간, 그것을 보고야 만 것이다. 붉은 동공을 띄운 채, 광분하는 녀석의 목을 두른 붉은 고리를.

“저거다!”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욕지기와 함께 단검에 온 힘을 싣고 녀석이 다가오는 위치로 달려갔다.

“으랴아앗!”

불과 두 발짝도 떼기 전에 엄청난 중압감이 전신을 덮쳐 왔다.

‘이대로 부딪쳐 버리면 그 자리에서 내장이 터져 죽어 버리겠지.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한 줄기 밀어내는 힘이 불어닥쳤다. 거센 바람에 몸은 가누기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무슨 허튼수작을!]

덕분에 당황한 녀석의 자세에도 작은 틈이 생겼다.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틈. 아주 작지만 네마냐와 키메라가 부딪히지 않기엔 차고 넘치는 틈이었다.

‘피했다!’

그쪽으로 서서히 몸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흡!”

새어 나오는 비명을 누르며 몸을 틀었다. 갑자기 휘어진 허리에서 비명이 났다. 정신을 바짝 쥐어짠 네마냐는 오른손에 집중했다. 단검은 이제 과충전으로 균열마저 생겼다.

‘이런 검으로 때려서야 타격이 없겠지.’

하지만 애초에 찌르거나 베기 위한 검이 아니었다.

“피뢰침!”

제발 전기가 통했으면 좋겠다는 소망과 함께, 네마냐는 마지막 힘을 끌어냈다. 단검은 키메라의 목에 걸린 수상한 고리에 닿았다.

―지이잉!

마치 전기가 오르는 소리와도 같았다. 붉은 고리는 시뻘겋게 끝도 없이 달아올랐다.

[무슨 짓이냐!]

변화를 눈치챈 키메라는, 뜨거운 열기라도 닿은 것처럼 이리저리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어딘가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콰쾅!

―후드득!

말 그대로 붉은 고리는 과충전된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폭발했다. 잠깐 멈췄던 키메라의 거대한 덩치가 날아갔다. 네마냐도 반대편으로 튕겨 날아갔다.

“큭!”

뻑적지근한 소리와 함께 뒤섞인 두 개의 그림자는 수풀 이곳저곳을 헤집었다.

“쿨럭! 와…… 이 씨.”

땅바닥을 한참 구르고 났더니 그간 들어왔던 충격이 드디어 삭신을 쑤시고 들어왔다. 자욱한 먼지 구덩이 속에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와…… 이번엔 진짜 위험했다.”

생각 외의 변수가 있어서 위험천만이긴 했다. 위험한 걸 몰라 덤비는 게 아니다. 하지만 고비 때마다 나서지 않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바랄 순 없는 일.

시스템에 넘길 수 없는 네마냐, 자신의 일이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몸이 닿았으면 전신의 뼈가 으스러졌겠지, 퉷!”

몸을 덮고 있던 나뭇가지를 치우고 겨우 일어나려는데 어느새 하라드도 달려왔다.

“정말, 그러니까 무리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도 이렇게 주인공 클리셰를 쌓으시네.”

“하하, 설마 저렇게 난폭할 줄이야 몰랐지. 원래는 성격 좋은 친구야.”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준 녀석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머리를 짚는다.

“하, 그래. 그럼 원인은 알아냈어? 저렇게 뻗어있는 걸 보면 뭔가 건드리긴 건드린 것 같은데.”

네마냐는 주먹 쥔 왼손 안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촉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마 보여 주면 깜짝 놀랄걸. 나도 겨우 포착한 거라서. 어디…….”

“아니, 먼저 몸을 추슬러야지.”

녀석이 억지로 쉬게 하려는 모양이지만 거절하고 일어났다. 사고 후유증은 거의 회복되었기 때문에 회복력은 괜찮았다.

“괜찮아. 막판에 구르느라 따갑긴 하지만. 그 와중에 정령으로 도와줘서 살았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그런 건 어떻게 느꼈어. 막판에 검을 통해 마나를 흘려보낸 판단 아니었으면 위험했을 거야.”

매우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녀석이 간단하게 요점을 짚었다.

“마나를 주입시켜서 상대의 마정석을 훼손시킨다고? 그런 계산상 복잡한 일은 배워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녀석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정형화된 계산과 수학적인 방식으로 준비된 마법과는 또 다른 영역이라는 이야기. 묵묵히 들은 뒤 네마냐는 왼손에 쥐고 있던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아, 다 가루가 된 줄 알았는데. 조금 남아 있었네. 이걸로 뭔지 알 수 있을까?”

네마냐는 반쯤 타다 남겨진 작은 고리 조각을 건넸다.

“응? 금속이잖아? 정교한 거로 봐선, 장인이 아니면 이런 건…….”

“좀 더 살펴봐. 아직 더 놀라운 것도 있을걸.”

자연스럽게 어떤 물체인지 알아보기 위해 마나를 주입해보는 하라드. 그런데 그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적색……! 어떻게 성수의 몸에서 이런 게?”

“후…….”

긴장감에 땀에 젖은 머리칼을 들어 넘겼다. 생각보다 적마정석을 사용하는 세력이 곳곳에 손을 뻗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적마정석만 몇 번을 보는 건지. 사실 여기저기 많이 쓰고 있는 거 아냐?”

대략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도 문제는 깊었던 모양이다.

“그, 아까 우리를 미행하던 사람들은 영주의 부하가 맞지?”

녀석의 물음에 선선히 대답해 주며 그간 발견한 단서도 다시 확인해 주었다.

“응. 그리고 고블린 부대가 가지고 있던 편지엔 그 영주의 이름이 쓰여 있었지.”

“미리 설계한 것도 아니고, 하나씩 맞아떨어져 가네. 아마 그럼 영주가…… 고블린들을 끌어들여서?”

그렇겠지. 적마정석 같은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건 가난한 백작이 댈 수 없었겠지만.

“……이런 상태가 바가반드에서만 있진 않을 거야, 분명히. 적마정석을 공급하는 세력이 있다면 마수가 다른 곳으로도 뻗치겠지.”

그래도 급한 것은 당장 눈앞의 일이었다.

“가스파리얀.”

다섯 글자를 속으로 되뇌는 네마냐의 손이 굳게 쥐어졌다. 하라드는 네마냐의 굳게 쥐인 주먹을 보고 쓴웃음을 흘렸다. 잠시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침묵을 깬 건 두 사람이 아니라…….

“어이! 괴수랑 만났다면서! 늦어서 미안!”

“일어났으면 두들겨 깨워서라도 가자고 하지. 네마냐 녀석도 정말, 똥고집은 못 이기겠다니까.”

아일라와 미하일이 헐떡거리면서 고개를 올라오고 있었다. 분노와 혐오가 떠오르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멋대로 들끓던 마나도 진정되었다. 대신 허탈감이 솟았다.

“그래도 너희랑 이 순간에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그건 다행이야.”

굉장히 낯부끄러운 순간에 낯부끄러운 소리였다. 그래도 잘못했다간 처음처럼 홀로 이 사태를 맞닥뜨려야 했을 네마냐다. 그 마음만은 진심일 수밖에 없었다.

“부, 부끄럽게 그런 소리를!”

“부끄러움 많이 타시네, 선생님.”

민망함에 달아오른 하라드를, 네마냐는 열심히 웃어댔다.

“헉, 헉…….”

“이제 도착…… 뭐야?”

뒤늦게야 도착한 두 사람은 흙구덩이 속에 드러누운 거대한 괴수에 놀랐다. 더군다나 그 성수가 전설적인 키메라라는 것에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3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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