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튿날 재개된 여정은 훨씬 평화로웠다. 족히 이틀은 걸리는 길이라지만 산속을 위험천만하게 달리는 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진짜 이 동네는 가는 곳마다 망루와 초소가 보이네.”
하라드가 신기한 광경이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하일은 살짝 불편한 모양이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어쩔 수 있나. 다른 덴 몰라도 이쪽은 고블린 군단과 근접한 군사 지역이라고. 요즘은 더 빽빽하게 세운 것 같지만.”
“남부 사막 지대에도 요새는 있지 않나?”
네마냐는 짐짓 모른 척 질문을 던졌다. 하라드는 어깨를 들썩해 보였다.
“내 고향은 절반이 사막이라서 이런 망루가 대부분 필요가 없거든. 대신 필요한 지점에 대형 성채로 대신하지.”
“뭐,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적어도 여기 사는 나나 네마냐는 망루가 많을수록 안전하다고 느끼면서 자랐지.”
길가를 따라 곳곳에 배치된 망루와 초소는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는 존재였다. 물론 삼엄한 경비가 있다면 그만큼 검문·검색도 엄중하단 뜻이지만.
“……음! 확인됐습니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바가반드로 가신다면 아마 여기가 마지막 검문소가 될 겁니다.”
“휴, 마지막 검문소도 잘 통과했다.”
마지막 안장까지 샅샅이 확인한 뒤에야 출발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나는 동안 6번의 검문이 이어졌다. 미하일이 몸을 한껏 펴면서 총알같이 불만 사항을 쏘아댔다.
“어쩌겠어. 인간을 위장한 놈들도 있다고 하고, 지금 고블린 움직임도 수상하니까. 안 그랬으면 우리가 만났던 투사형 고블린은 두 번은 더 만났을걸.”
역시 미하일 전용 카운터인 아일라가 일대일 마크를 해 주었다. 일일이 나설 필요가 없어진 네마냐는 한결 편했다.
“머리론 이해하지만, 귀찮으니까요.”
“젊은 녀석이 자꾸 귀찮다 타령은. 내 나이만 돼 봐라. 진짜 늙은 게 느껴지니까.”
“얼씨구? 겨우 10살 많으면서?”
“식사로 따지면 1만 끼거든? 내가 먹은 밥에 네가 익사할 수도 있어.”
‘싸워도 정말 수준 참…….’
네마냐는 무심코 말고삐를 오른쪽으로 당겼다. 왼쪽, 그러니까 북서쪽으로는 아르사니아스 강이 흘러 내려오는 깊은 계곡이 보였다. 울창한 삼림과 군데군데 작은 촌락들이 뒤섞여 있는 미개발지 천지.
“왜, 그쪽에 뭐라도 있어?”
“아뇨. 저 건너편은 볼 때마다 익숙해지질 않아서요.”
상류의 미개발지를 내다 본 아일라도 무슨 소린지 알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긴 하지. 여기도 바난드 땅이라지만 나도 처음 올 정도니까.”
파드 경은 풍경이 시원스럽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본 듯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하라드도 같은 걸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북쪽 삼림에 사람이 사나? 연기가 좀 많이 올라오는데. 너도 보이지, 하라드?”
“촌락은 꽤 있겠죠. 정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은 잘 없거든요.”
네마냐도 두 사람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촌락이 있으면 보통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대여섯 줄기 정도는 보일 수 있었지만.
‘족히 수백여 갈래는 될 법한 연기인데.’
“……피난민들이 정착한 난민촌이에요. 벌써 정착한 지 반년 정도는 지난 것 같은데.”
“아…… 철위 기사단이나 황금모래 백작령에서 피난 온 난민들인가 보군.”
“황금모래 영지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다르빌에서 온 사람들도 많아요.”
나샤와, 황금모래펄 영지, 그리고 다르빌은 모두 바난드의 동쪽 영지들이었다. 거기서도 앞의 두 곳은 이미 고블린에게 파괴되어 점령된 상태다.
“다르빌이라.”
파드 경은 어딘가 깊은 생각에 빠져든 모양이다. 아일라도 혀를 찼다.
“거기면 지케른 성국의 영토잖아? 성도에서도 몇 시간이면 닿는 곳인데.”
한심스러워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발언. 틀린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성국 지도부나 바난드 왕실만 최대한 모른 척했을 뿐, 위기는 이미 매우 가까웠다.
“아니, 이 정도면 피난민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거 아냐? 한둘이 아닌 것 같은데.”
네마냐는 하라드의 상식적인 질문에 비상식적으로 답을 해야 한다는 게 서글펐다.
“우리 영주님은 안 한다네. 돈 없다고. 대신 공백지인 영지 서북쪽에 정착해도 된다고 허락했어. 올해부터 세금을 내야 하지만.”
“6개월 만에 황무지에서 세금을 내라고?”
듣고 있던 파드 경이 아무 소리 없이 잠자코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네마냐는 다시 다른 생각에 젖어 들었다.
‘피난민……. 그냥 놀리기엔 머릿수가 너무 많고, 사회불안 요소가 될 수 있지. 어떻게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골똘한 생각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곧 바가반드 영지의 입구인 타티온 관문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푸르릉!
“워, 워.”
말에서 내린 네마냐 일행은 관문으로 다가갔다. 관문이라고 해 봐야 계곡 입구를 막은 허름한 건물에 가까웠다.
“이게 창세 신화의 무대인 바가반드 영지로 들어가는 관문이로군. 가슴 설레는데.”
“가서 실망하지나 마세요, 하하.”
나무를 얼기설기 섞어 대충 지어낸 목책은 밖에서 안쪽이 훤히 보일 정도로 엉성했다. 병사들마저 열의가 없어 보였다.
“저기요, 검문 좀 하세요. 저희 들어가게요.”
“어이구, 손님이네, 손님. 야, 정신 차리고 나가 봐!”
얼마나 열의가 없는지, 낮부터 모여 술을 마시느라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누가 뱉은 말인진 몰라도 참 시의적절한 얘기를 했다.
“한심하군.”
곁에 있던 미하일이 다가가 다시 한번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저기요?”
“엉? 거, 누구요?”
“적군인가?”
“에라이, 미친놈……. 낮부터 술을 처마시니 그렇지, 딸꾹!”
하나도 빠짐없이 낮술을 들이켜던 병사들끼리 서로 탓을 하는 모습은 가관이 따로 없었다. 검문해 달라고 노크하는 모습이라니. 노크 검문이야?
“노크 검문이군.”
“정확하네, 노크 검문.”
네마냐의 평가에 파드 경도 쓴웃음으로 동의를 보탰다. 그러고 보니 파드의 임무는 호위라서 임무 자체는 끝났다는 게 떠올랐다.
“저, 파드 경.”
“응?”
“임무는 원래 저희를 데려다주는 것까지였죠?”
“그래. 일이 다 끝났군. 그래도 타티온(Tateon) 마을 입구까진 바래다주겠네.”
“헤어지게 되니 아쉽군요. 아, 가시는 길에 조합장님께 몇 가지 전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마냐가 윙크를 하니 파드 경은 선뜻 못 알아들었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아…… 어, 그렇군.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는 모양인데. 너무 혼자서 재미 보진 말게.”
“까짓것. 파드 경이 다시 올 때까지는 한번 시간 끌어 보죠, 뭐.”
두 사람이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교환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경비병 하나가 나왔다.
“어…… 미안합니다. 이 시간에 사람이 오는 줄은 몰랐는데. 어디서 오는 중이쇼?”
미하일이 서글서글하게 대답했다.
“예, 바난드에서 오는 일행입니다. 영지로 들어가고 싶어서요.”
“바난드? 오, 큰 동네에서 모처럼 사람들이 오셨구먼. 그, 뭐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댁들 가운데 네마냐 나자리안이나 미하일 바드란이 있진 않겠지?”
“그 사람들은 왜…….”
미하일은 자기 이름까지 거론되자 잠시 흠칫했다.
‘왜 그 두 이름을 떡하니 박아 놨겠어. 우리 영주님께서 하셨겠지.’
“친애하는 영주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일일이 확인하시나 보네.”
가볍게 미하일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무 말도 없이 지긋하게 상대방을 향했다.
“여기, 네마냐와 미하일이 도착했다. 얼른 애타게 기다리시는 영주님께 알려드려.”
“서, 설마…… 기사 네마냐 경?”
“그럼 내가 누구겠어? 지금도 영주님이 기다릴 텐데 빨리 가서 보고해야지. 술은 좀 깨고 가고. 어휴, 냄새.”
기겁한 경비원 하나가 소식을 전하러 달려나갔다. 나머지는 문 양옆에 서서 경계의 눈빛으로 일행을 보았다.
“어, 어서 들어가쇼! 다른 분들은 신원 검사를 마저 해야겠으니 통행증 좀 꺼내시오들.”
“이거 첫 대면부터 영 체면이 안 서는데. 고원 최고의 금속 기술자님이 푸대접도 받아 보네.”
아일라의 너스레를 들으며 일행은 다시 말과 노새에 올랐다. 코앞에 거친 돌로 쌓아 올린 작은 산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난 미하일이 곧바로 말을 몰아 앞으로 뛰어나갔다.
“자, 도착했어요. 여기가 고향 바가반드의 첫 마을인 타티온이에요, 여러분.”
“여기까지 오는데 끔찍하게도 힘들었어, 에휴.”
말에서 내리는 모두가 한마디씩 한탄을 털어놓았다. 그래도 직접 고갯길 넘다가 고블린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귀찮은 게 낫다는 걸 다들 알았다.
“저기, 형?”
“응?”
하라드가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야기를 걸어왔다.
“바가반드 영주……와 불화가 있는 건 분명한데, 듣고 생각한 것 이상인데? 이제 영지에 들어가면 바로 전면전 되는 거 아냐?”
가스파리얀 백작을 직접 겪어 본 미하일 정도가 아니라면 이런 노골적인 적의가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바가반드를 얻으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이었다.
“글쎄, 어떨까. 지금 봐서는 차라리 시원하게 싸움을 거는 게 내 스타일이긴 한데.”
하라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야 원. 고블린은 둘째치고, 영주와 한바탕해야 할지도 모르는 판이라니. 마법 학교 졸업장이 있어도 정치싸움은 내가 알 길이 없잖아.”
“하하, 그저 네가 할 수 있는 도움만 주면 되는 거야.”
한편, 앞으로 금속 기술 분야를 전담할 아일라도 나름의 고민이 있는 모양이었다.
“광산 소유권은 기본적으로 영주가 갖는 건데, 이래서는 곤란한데.”
“곧 ‘해결’해야죠. 그때까지는 불편하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당분간은 저를 믿어줘요, 아일라 씨도.”
“그래. 네 말대로 잘 되기만 바라야지.”
곧 일행은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길을 걷는 내내, 한가로이 소 우는 소리만 들렸다. 하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뭔가 되게 어색한데.’
가장 먼저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마나의 움직임이었다.
“잠깐 멈춰 봐요. 마나가 요동치는 게 이상합니다.”
네마냐의 그런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하라드가 다른 사람들을 만류했다. 각자 고삐를 부여잡은 아일라나 미하일, 파드는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마나가 요동을 친다고?”
“어…… 뭐라고 해야 하지. 무슨 소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인간의 마나가 이렇게 불규칙하게 날뛰진 않는데.”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마을에 있다는 건가?”
거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충분히 알 노릇이다. 일행은 재빠르게 탈것에서 내려 제각기 무기를 뽑았다.
‘전리품 처분한 값으로 무기를 채워 둔 게 다행이로군.’
네마냐는 가슴께에 감아 둔 검이 겨우 단검인데도 제법 든든했다.
“모두 벽으로 붙어서 이동하자고.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니까.”
역시 연륜 있는 군인다운 파드 경의 판단이었다. 기본적인 은·엄폐 정도 수준. 2년간 땅개로 굴러 본 네마냐는 그런 말이 필요 없어도 담벼락의 그늘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 보니 큰 마을인데도 사람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게 이상하네.”
“쉿, 잠깐만!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뭔가 작은 소리라도 들린다는 건지 하라드가 미하일의 말을 끊었다. 그리곤 빠르게 작은 바람을 사방으로 일으켰다.
[스카니오 프시키 Scannio Psyche, 트라비시티 Trabixite]
익숙한 듯하지만, 살짝 끝이 다른 영창문이었다. 프시키. 숨결이라는 뜻인데.
‘뭔가 색다른 탐지법인가.’
하라드를 떠나간 바람은 골목길 곳곳으로 사라졌다. 조금 숨을 돌리고 있으려니, 떠나갔던 바람이 되돌아왔다. 손으로 바람을 움켜쥔 녀석이 눈을 꼭 감고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뭔가 확인됐어?”
잠시 궁금증을 접은 네마냐의 물음에 하라드가 망설이다가 대답해 주었다.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네.”
“사람이 아니라는 기운은? 그것도 광장에 같이 있었어?”
“……음, 잘 느껴지진 않지만 그런 느낌?”
그거면 됐다. 뭔가 이상한 상황이지만 사람들이 광장에서 문제없이 모여 있다면 당장은 괜찮단 얘기지. 사람이 아니라는 기운의 소유자는 직접 규명해 보면 될 것이다.
“미하일.”
손짓하자 미하일이 빠르게 다가왔다.
“나하고 네가 앞장서자. 그래도 동네 사람이니까. 여기 마을에 너 아는 친구들도 있다고 했지?”
“어. 치안대 놈을 좀 알고 있지. 그건 왜?”
“잘 됐다. 무슨 말썽 생기면 네가 잘 비벼 봐.”
입이 딱 벌어진 녀석은 신세가 참 처량하다며 청승맞은 표정을 지었다.
“비벼 보라고? 뒤치다꺼리하라는 거지? 아니 원래 매일 하던 건데. 내 신세도 참…….”
“말끝이 어째 좀 이상하다? 동료끼리.”
“아니, 참 기쁘다고…….”
두 사람은 몇 개의 작은 골목길을 빠르게 지나쳤다.
‘큰길로 가면 더 빠르지만, 남의 눈에 띄지는 말아야지.’
세 번째 골목을 돌아 물웅덩이를 뛰어넘었다. 큰길의 포장석에 반사된 빛이 눈에 시렸다.
“광장에서 사람 소리가 시끌벅적한데. 오늘이 무슨 축제일도 아니잖아? 며칠 전에 빛의 마법사 대축제일도 끝났고.”
네마냐의 얘기에 미하일도 손가락을 몇 개 꼽아 보았다가 이내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긴 몰라도 신전이나 영주관저에서 보낸 사절이 뭔가 발표하는 것 아닐까.”
“흠.”
벽 너머로 들여다본 광장은 온 마을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수백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다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 모여 있던 모양이다. 연단 위에는 검은 로브에 뭔가 검은 망토로 칭칭 감은 사람도 있었다.
“못 본새 우리 동네 패션도 많이 바뀌었군. 검은 천으로 둘둘 말고 다니는데.”
“영주가 그새 사람 하나 더 영입했나. 처음 보는 사람이네.”
“사람……일까, 과연. 그랬으면 차라리 좋겠는데.”
연단 위 검은 대상을 보는 네마냐의 눈이 찡그려졌다. 어쩐지 저 인물이 마나 요동의 원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떡할까.”
녀석의 물음에 네마냐는 한껏 옷을 털고 머리를 다듬었다. 망토의 끈까지 새로 매듭을 지었다.
“가자. 영주의 공식 포고문이라니 영주민으로서 우리도 들어 줘야 예의지.”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겠어?”
숨겼던 몸을 드러내고 담장 너머로 움직였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오히려 우리 모습을 드러내놓고 움직여야 사람들 이목을 끌어서 우리가 더 안전해지지. 그러지 말고, 자.”
마을 광장의 아우성은 그저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소의 항의와 불만 토로가 섞인 거친 음색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 대체 괴수들 처리해 달라는 민원에 답변이 그게 뭐요?”
관청 측의 입장은 그저 완강했다.
“대관절 어디가 뭐가 이상합니까?”
“우리가 병력을 조직해서 상대하라고?”
“그럼요.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자치라는 겁니다, 자치. 세금을 내는 만큼 여러분들의 자치를 보장해 주는 것 아닙니까?”
한창 말싸움을 하던 이는 제법 있어 보이는 옷차림에 반지를 서너 개 낀 사람이었다. 그는 대거리를 몇차례 주고받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말문이 막혔다.
“……허허, 참. 내가 별일을 다 보네.”
다른 농민 하나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아니, 자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거고. 세금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 달라고 내는 것 아닌가?”
검은 옷의 사내는 성질을 억누르는 듯 대꾸도 하지 않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저 뒷산의 괴수 몇 마리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영지 병사들은 결정적인 위기에나 동원하는 겁니다.”
하지만 역시나, 불만의 원인이 되는 지시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녹음기를 보는 기분이군.’
네마냐는 겨우 몇 분 만에 고구마 한 상자를 삼킨 듯 답답해졌다. 역시나 주민들 사이에서 성토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서, 몇 명이나 더 죽어야 만족하려고? 사람들이 떼로 죽어 나가서 농사도 못 짓는다는 걸 다섯 번째로 얘기해 줄까?”
“농사를 정 못 지으면 어떻소? 이왕 그리된 것, 시원하게 그만두십시오. 괴수들이 떠나갈 때까지만 집 안에 있으면 되겠는데.”
거의 도발이나 다름없는 대답. 소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미 연단 앞에 모여든 남녀노소의 항의에 검은 망토의 인물은 목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자꾸 이야기를 방해하면 영지 운영에 간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대응할 수 있다. 말본새에 유의하라.”
검은 인물이 분노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런다고 가라앉을 주민들도 아니었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잠잠히 광경을 지켜보던 검은 사내.
“심상찮군. 저 검은 옷.”
“저런 사람이 영지에 있었나? 난 처음 보는데, 네마냐 너는?”
네마냐는 고개를 저었다.
“저거 뭐 하는 거지?”
검은 옷은 목걸이를 하나 꺼내 들었다. 마법 도구를 만지는 손길이었다. 연단 근처에서 호위병과 군중이 충돌하는 소리에 완전히 묻혔지만, 그는 무언가를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다.
“어, 어, 네마냐? 네마냐!”
거침없이 발걸음을 떼고 달렸다. 미친 듯이 몰려드는 마나의 흐름, 본능적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니 거침없는 힘을 가로막는 저들에게로 그 분노의 발길을…… 어엇!”
검은 옷은 어느덧 주문의 마무리 단계까지 접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끝을 낼 순 없었다. 갑자기 어느 소년이 자신의 팔목을 비틀어 잡은 것이다.
“뭣 하는 짓이냐, 공무 방해로 잡혀 가고 싶나?”
“영주청에서 보냈다는 사람이 주민한테 그런 걸 써서 되나? 진정 좀 하시지, 나리.”
“이……이익, 이거 놔라!”
“어쭈, 덤벼?”
행동에 심각한 제약은 있으나 마법 자체는 얼마든 쓸 수 있었다. 검은 옷은 황급히 손으로 강한 마나를 흘려보냈다.
“어……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라?”
그러나 수정을 통해 발화해야 할 기운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로선 전혀 있을 수 없는 실수였다. 아니면 누군가의 개입이거나.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혼자서만 마법을 쓴다는 착각은 마셔야지. 바가반드가 그렇게 우스워 보였어?”
네마냐는 애초에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주민을 공격하는 데도 거리낌 없는 녀석의 모습에 놀랐다. 특히 너무 공공연한 적의까지.
‘이게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이란 말인가? 아니지. 그렇다면.’
“다쳐도 이건 네 탓이다. 내 탓이 아니야.”
녀석의 몸 안에 강제로 마나를 주입했다. 녀석이 불의 마나를 잔뜩 돋운 상태라, 그 상극인 물의 마나를 주입했다.
“끄아악!”
속성 마나를 직접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검은 옷의 몸이 진동으로 부들거렸다.
“우욱!”
격한 구토 증세와 함께 검은 옷은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네마냐는 순순히 팔을 놓아주곤 두 손을 내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앗, 나리! 괜찮으십니까?”
호위병들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연단 위로 오르려는 주민들을 막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주민에게 공격 마법을 쓰는 마법사가 정작 괴수는 못 잡겠다니, 놀랍네.”
“네가 무슨 상관이지? 네가 누군데?”
“헉, 헉…… 누구긴! 우리가 바로 바가반드의 진정한 주인공이지!”
뒤따라온 미하일의 갑작스러운 대사. 인파를 뚫고 오느라 늦은 모양이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검은 옷과 병사들. 네마냐는 이들은 무시한 채,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란 군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 바가반드의 기사인 네마냐 나자리안. 타티온의 괴수는 내가 맡도록 하겠다. 영주청에서 나온 관리들은 가서 그리 보고해라.”
그러자 주민과 병사들이 모두 그 일곱 자의 이름을 듣곤 경악에 빠졌다.
“네, 네마냐 경이라고?”
“나자리안 가문이 다시 돌아오는 건가?”
“백작이 다시는 발도 붙이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내쫓았다고 들었는데.”
‘허, 그 사이에 또 유언비어를 퍼트려 놓으셨군, 우리 영주님.’
기가 찬 기분으로 네마냐는 연단의 한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저린 팔을 부여잡은 채 주저앉은 검은 옷. 얼굴도 칭칭 검은 천을 싸매고 있었다.
“네, 네마냐 나자리안? 그대가 영주의 기사라면 영주청의 관리를 이렇게 대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지 않소?”
달달 떨고 있는 팔을 붙잡은 검은 옷에게 다가갔다. 굳어 버려 미동조차 못 하는 녀석. 굳이 더 건드릴 것도 없이 귓전에 대고 작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리고 영주가 백성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지. 이 인외의 종족아.”
“……!”
놀란 모습의 검은 옷. 네마냐는 멈추지 않고 그다음 대사를 선전포고와 함께 들려주었다.
“당장 꺼져. 다시 보였다간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거다. 영주에게도 잘 전해 주고.”
네마냐 나자리안이란 이름은 더 이상 바가반드의 기사가 아니었다. 이제 왕국의 후원을 받는 영주 인수자였다. 새 영주가 당당하게, 옛 백작에게 도전장을 보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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