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아무래도 경로를 수정해야겠어요.”
네마냐가 불쑥 얘기를 꺼냈지만 반대의 뜻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그 소리가 언제 나오나 기대하고 있었어.”
예정에도 없던 고블린 습격대부터 거대 고블린까지 만났다. 달랑 손잡이만 남은 검에 허탈해하는 파드 경도 몸서리를 쳤다.
“그래, 어떻게 이번엔 어떻게 처리했다지만.”
“고블린들이 적마정석에 정예 병력도 보내는 모양인데 계속 행운만 바랄 순 없죠.”
누구보다도 전쟁에 일가견이 있을 파드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리 통에 말도 달아나고 짐도 없어져서, 어차피 그렇게 해야겠지. 다행히 마정석 부스러기들 얻었으니까 가져다가 보상이나 받자고.”
“총독부에도 고블린을 경계하라고 알려야겠네요. 전쟁이 일어난다지만 일개 산적 같은 몬스터가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질린다는 듯 두 손을 들고 얘기하는 하라드의 말에 아일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벌써 지도에서 기존의 직선 노선을 지우고 동쪽 지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경로를 수정해야 할까? 어차피 길은 대충 정해져 있긴 하지만.”
“직선 아니면 어차피 길이 하나잖아. 콜라케르트로 가서 쉬었다가 마시스 산 옆으로 지나는 국도를 쓰자고.”
“완전 정석이네.”
네마냐의 제안에 뭔가 신선한 의견이라도 기대했던 모양인지, 미하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슨 산등성이라도 넘자고 할 줄 알았냐. 나는 콜라케르트에서 할 일도 생겼어.”
“할 일? 거기서 뭘 하려고?”
“비-밀.”
의문에 빠진 미하일을 뒤로한 채, 네마냐는 두어 걸음을 앞서 나갔다. 강가를 따라 계속 걷는 일행 중에서 지도를 든 하라드가 가장 앞서 있었다.
“새벽 내내 뛰어다녔는데 몸은 좀 어때?”
“몸을 쓰고 다닌 건 아니니까. 마법사들도 체력은 중요해서 달리기 정도는 해. 걱정할 것 없어.”
이제 두 사람은 완전히 말을 놓았다. 한번 생사고락을 나누었더니 절친이 되었다. 네마냐는 웃으면서 하라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다면야 다행이지.”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약간 눈치를 보는 듯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하라드. 의문의 문서 얘기겠지, 분명.
“얘기할 게 있으면 스스럼없이 얘기해.”
“어? 어…… 알고 있었구나.”
멋쩍은 듯 녀석이 머릴 긁는 모습이 옆으로 살짝 보였다. 네가 뛰어 봐야 손바닥 안이지. 네마냐는 하라드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그 문서…… 번역해 봤어?”
어제보다 조금 도톰해 보이는 하라드의 품. 아마도 어제 얻은 양피지 조각을 보관하고 있는 탓이겠지. 하라드는 소용없다는 듯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고블린 문자도 날림인 데다가 문법도 일상어가 아니었어. 암호문이 아닌가 싶던데.”
“암호문이라. 우릴 습격한 게 보통 산적 떼가 아닌 건 분명하군.”
“뭔가 짚이는 거라도 있는 거야? 어쩌면 고블린들이 영주의 이름을 도용했을 수도 있으니까.”
죽기 직전의 기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30년이 넘게 전쟁이 계속되긴 했고, 이따금 전투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최후의 순간까지 고향 바가반드가 전쟁에 직접 휩싸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따금 주변 영지나 제국의 땅을 병합했지. 지금 와서 보면 이상할 정도로 아무 일이 없었네?’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뭔가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명료하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지만, 아직 입 밖에 낼 정도는 아니었다. ‘배반’이란 소재를 활용하기 위해선, 명확하게 입증할 자료가 필요했다. 문서의 정체도, 내용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선 오히려 역공을 당하기 쉽다.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살포시 대자 빠르게 뛰는 맥이 느껴졌다.
“하, 역시 영주가 이상한 놈이 있으니 삶이 고달파진다니까. 문서를 분석해 보는 게 좋겠어.”
하라드가 그럴 줄 알았다며 자신이 해 보겠다고 나섰다.
“어떻게 하게?”
“문서 건은 내가 아는 인맥을 통해서 한번 알아볼게. 그럼 진위를 알 수 있겠지.”
네마냐는 능청스럽게 호들갑을 떨었다.
“너…… 그런 인맥이 있었냐? 저번에 얘기할 때는 겉돌기만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 그건 내가 무슨 별종이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 독자적인 입지가 있다는 거지, 무슨…….”
“보통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말이야…….”
네마냐가 살짝 비꼬듯이 말하자, 하라드는 이내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오, 하여간 능글맞아선!”
웃으며 어깨에 손을 걸쳤다.
“하여간 잘 좀 부탁하자, 마법사님.”
“콜라케르트에 닿는 대로 연락은 해 볼게. 많이는 기대하지 마. 아직 고블린학은 걸음마 수준이거든.”
“좋아, 좋아.”
어느덧 지평선 저 너머로 목적지인 콜라케르트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야스단 지방에 콕 박혀 있는 제국의 총독부. 그들 군대가 하야스단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주둔 중이었다.
‘그렇지만 저들도 역시 자기네를 위한 병력이지, 우리를 위한 군대는 아니니까. 정말 위급할 때는 막상 뒤로 물러설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이곳에서 가장 안전하다. 그만큼 기회의 땅이기도 하고.
‘바가반드가 장차 회생하려면 바난드와 연결해주는 콜라케르트를 반드시 지켜내야지.’
지금 여기서 지쳐서 축 늘어져 있을 때는 아니란 소리다. 네마냐는 다시 힘을 내 일행에게 전달했다.
“자자, 조금 더 서둘러요, 여러분! 해질 때까진 도착해야 검문도 제때 통과할 수 있을 테니까.”
“졸지에 탈 것도 잃고. 짐도 잃어서 기운이 빠지네. 저기 가면 먹을 건 있는 거야?”
“아,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모처럼 파드가 바지춤에서 작은 철판을 꺼내 보였다. 바난드에 흔해 빠진 너구리가 망토를 뒤집어쓴 채, 왕의 홀을 쥐고 있는 모습이 돋을새김이 된 장식물.
[너구리 왕이 산에 올라탄 모습]
‘오랜만에 보는 인장이네.’
바난드 왕국의 국장. 왕실의 상징이기도 했다. 네마냐가 파드 경에게 물었다.
“조합장이 준 건가요?”
“어, 알고 있었구나, 의외네. 놀라게 하려고 했더니. 맞아, 왕실의 문장이지.”
놀라게 만들려 했던 파드는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급히 팔을 내렸다. 왕실의 문장을 주먹 안에 품으며 파드 경은 문장의 효능을 설명해 주었다.
“이것만 보여 주면 먹거리는 물론 숙박에 목욕 시설이며 돈이며. 얼마든 당겨다 쓸 수 있을…….”
“그걸 지금 얘기하면 어떡해! 바로 가자고!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뭐…… 으앗!”
절대 카드의 존재를 알게 된 아일라의 동작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나름 거구인 파드의 멱살을 잡고는 먼지 바람과 함께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저, 저기……?”
누구도 말릴 엄두는 내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 * *
석양이 들판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일 역시 날이 좋겠군. 오늘의 문지기 당번은 무난하게 끝나고 있었다.
“흐아암, 드디어 끝이구나.”
“오늘도 덕분에 꿀당번이었어.”
이대로 땅거미가 질 때쯤에 신전의 종이 울리면 꿀맛 같은 잠을 신나게 느낄 수 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하품이 요란했다.
“어이, 수문장! 이제 슬슬 문을 닫는 게 어때?”
“그래. 그래야지. 둘 다 이제 들어와라.”
두 사람이 슬슬 철수하려는 찰나, 성문이 있는 언덕 아래로부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
절규에 가까운 소리.
“뭐야, 뭐야!”
“적이냐? 농민반란?”
기겁한 문지기들이 장창을 내민 방향. 먼지 바람을 끌며 나타난 건 굳은 피 낭자한 여자가 남자의 멱살을 끌고 오는 모습이었다.
“뭐야?”
“적이냐?”
수문장이 진정하라는 듯 두 사람에게 호통을 쳤다.
“진정해라, 좀! 남자 멱살 끌고 오는 여자 일행한테 뭘 놀라는 거야.”
하지만 뒤늦게 뒤에서 헉헉대며 달려오는 일행도 합류했다. 남자, 여자, 소년, 아마도 군인이었겠지만 거지꼴을 한 난봉꾼(?)까지. 대체 무슨 조합이야. 당황한 이들의 앞으로 이상한 조합의 무리가 몰려들었다.
“정지, 정지! 거, 무슨 일로 온 거요!”
일단 위험한 이들은 아닌 듯하니 겨눈 창을 내리고 정지 수신호를 보냈다. 하나같이 누더기가 된 옷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비린내가 은근했다.
“하하…… 늦은 시간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도시에는 문제없죠?”
“아니…… 대체 어디서 뭘 하는 사람들인데 꼴이 그 지경이오? 누굴 죽이기라도 했소?”
말 한마디 잘못하면 곧바로 창을 들어 찌를 듯한 태도였다.
“음, 이거 무슨 오해를 사나 했더니, 허. 우리는 고블린 습격대와 맞닥뜨려서 돌파하고 온 겁니다.”
“고블린? 습격대 단위나 되는 병력은 어떤 정보도 없었는데. 자네 뭐 들었어?”
반대편에 있던 수문병도 투구를 올리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네마냐는 어딘가 짚이는 점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웃으며 질문을 꺼냈다.
“평소에 고블린 탐지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척후를 보내고 있는지.”
촌뜨기냐며 수문병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시대에 누가 일일이 척후병을 보내나. 요지에 파견된 게 아니라면 항상 척후를 보내진 않소. 도시의 신전에 설치된 결계석주를 통해 생명 탐지 기능으로 확인하는 거지.”
“그렇군. 그래서…….”
적마정석으로 탐지 마나를 흡수해 버리면 당연히 탐지될 턱이 없었다. 네마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았으면 됐군. 자, 서둘러 통과하자.”
파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깝다는 듯, 소매에서 아까 전 그 문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대수롭지 않게 들여다보던 문지기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바난드 왕실?”
“보면 알겠지만, 왕실과 조합이 보증하는 여행객입니다. 이걸로 신원 보증은 가능하겠죠?”
당연히 다른 소리가 나올 리는 없었다. 병사들이야 제국 소속이라지만 상대는 왕실로부터 특별 통과증을 받은 이들.
“어……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 이름을 내걸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총독부에서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다. 봐라, 단번에 말부터 달라지지.
“어서 들어가시죠. 필요한 것은 있으십니까?”
선두에 나선 파드가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어 갔다. 역시 다른 사람보단 이런 일상에 능숙한 사람이 나았다.
“바난드에서 오는 길에 고블린 정예로 구성된 습격대를 맞닥뜨렸는데, 군사기밀과 관련해서 논의가 필요합니다.”
“고, 고블린 정예요? 동쪽도 아니고 서쪽에서 말입니까?”
도시의 서쪽이면 고블린이 사는 곳과는 정반대 방향. 그러니까 도시의 결계에 탐지되지 않은 채 통과했다는 의미다. 수문병들은 비로소 그 뜻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어서 담당자를 만나고 싶군요. 바난드 기사단의 훈련단장 파드가 왔다고 알리시오.”
“여기 동료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
말을 마친 수문병은 정중하게 경례를 올렸다.
“고맙군.”
경례를 받은 뒤, 보란 듯이 일행에게 브이 자를 펼쳐 보이는 파드. 닫히지 않은 성문 너머로 성문 폐쇄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시간 안에 도착했군. 일정이 늦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미하일의 안도에 찬 한마디에 나도 고개를 힘겹게 끄덕였다. 석양볕이 등 뒤에서 쏟아져 내렸다. 네마냐는 뭔가 떠오른 듯 일행을 불러세웠다.
“미안! 지금부터는 다들 잠깐 떨어져서 행동해야 할 것 같아.”
“아, 출발하기 전에 들었던 것 같은데. 전리품을 팔러 상단에 간다고 했던가? 그 도끼를 팔러 가는 건가?”
파드는 네마냐가 어깨춤에 매고 있는 묵직한 도끼를 가리켰다. 아까 쓰러뜨린 보르크의 도끼였다. 족히 20kg은 될 법한 쇳덩이를 지고 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 그걸 이고 지고 오느라 어깨 떨어질 뻔했지. 제값 안 쳐 주기만 해 봐라.’
“아, 마침 잘됐네. 나도 적마정석 조각 몇 개 주웠는데, 이거라도…….”
미하일이 마정석 부스러기를 꺼내려 들자, 하라드가 재빨리 빼앗아 갔다.
“허튼짓은 마요, 형. 적마정석과 흑마정석은 인간국가 전체와 마법계에서도 유출이 금지된 돌이에요. 관청에 내고 보상금이나 받아요.”
“관청 보상금은 짜단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장물아비가 될 사람은 없었다. 파드 역시 할 일이 떠올랐다고 했다.
“이곳 수비대장과도 얘기를 좀 해 봐야겠다. 숙소 잡고 후딱 처리한 뒤 모이자고. 네마냐, 자네도 다녀와.”
“예, 그럼 조금 이따 봐요. 참, 아까 그 문장패 좀 잠깐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상단에 신분 증명을 해야 할 수도 있어서.”
잠깐 고민하는 듯하던 파드는 이내 주머니에서 문장을 꺼내 던져주었다. 두 손을 펼쳐 받은 문장은 무척 고급스러웠다.
“멀쩡히만 가져오라고. 은제 합금으로 만든 거라 아마 괜찮겠지만!”
네마냐는 의미 깊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요. 우린 먼저 가 볼 테니 이따 봅시다. 파드 경, 네마냐도.”
네마냐는 멀어지는 일행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일행이 멀리 떠나자 비로소 왼쪽의 길을 택했다.
“콜라케르트가 파괴되기 전까지 몇 번 거래차 온 적이 있어서 길 찾는 건 쉽네.”
더군다나 이곳의 상단주라면 지금 내게는 매우 익숙한 인물이었다. 상대방은 네마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 손님. 상단본부 운영은 이미 끝나서요. 내일 찾아오실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의외의 장벽, 근무 시간이 있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일은 이곳을 떠나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요.”
비서도 내 행색을 보며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바로 블랙리스트로 넣어 버리고 싶은 옷차림이긴 하지.
“그, 몬스터 전리품을 팔러 오신 것 같은데, 이미 점원들도 퇴근한 데다가 금고 열쇠도 제 담당이 아니라서.”
기왕 이리된 거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필요할 땐 부끄럼도 얼마든 깔고 갈 수 있는 의지의 한국인이었지.
“괜찮다면 기다려도 됩니다. 상단주는 아직 근무 중이시죠?”
“……상단주를 만나시겠다고요? 무슨 용건이 있으신가요? 죄송합니다만 상단주님께선 귀하를 모르실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세상은 리셋되었고, 내 기억만 계속 남아서 혼자 기억을 곱씹고 있었으니까. 네마냐는 다시 강하게 밀고 나갔다. 민폐로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보두앵 씨께 상단의 존폐와 흥망을 가를 사업안을 제안한다고 전해 주세요.”
어처구니없는 비서의 표정. 그걸 지켜보면서 내 손에 움켜쥔 문장을 어루만졌다. 네마냐의 계획은 이미 바가반드의 영지를 넘어섰다. 하야스단 지방 전체로 확대되고 있었다.
- 2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