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호흡이 턱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거칠었다. 눈앞에 저리 버티고 선 덩치에 누가 여유를 부리겠는가.
“지랄 맞게도 크네.”
같이 서 있는 일행들도 기가 질린 모양이었다. 녀석이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두 사람분의 덩치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임무: 거대 고블린 처리]
[고블린 습격대와 만난 일행은 거대 고블린과 맞닥뜨렸다.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을 쓰러뜨리면 나머지는 도망갈 것이다. 녀석을 쓰러뜨려라.]
조건도 없는 갑작스러운 임무. 이제는 저걸 쓰러뜨리란다. 네마냐는 막막함을 느꼈다.
“말이야 쉽지. 몇 번을 두드려도 핏방울 하나 안 맺히는데. 저런 별종은 어디서 나온 거야.”
“애초에 저게 고블린이라고? 고블린들이 키우는 괴수 아니야?”
“눈앞에 집중해!”
이따금 하라드가 정기를 회복해 주었고, 아일라의 우렁찬 소리로 정신을 다잡았다. 일행은 지쳐 정신없는 와중에도 닥치는 대로 날아오는 도끼날을 요리조리 피했다.
“이렇게 계속 대치할 수는 없어! 우리 힘이 빠지면 주변 고블린들도 달려들 거야.”
‘저런 덩치들이 아직 튀어나올 때는 아닐 텐데, 제길. 초반부터 저런 게 나오고 지랄…….’
거대 전사형 고블린. 그렇게 분류는 종족이다. 방심한 인간 군사들의 앞에 드러나 전열을 무너뜨리던 포악한 병사들.
“어찌 됐든 놈을 죽여야 길을 낼 수 있겠지. 다들 연장 들어.”
아일라의 말에 복잡한 생각은 접고, 네마냐는 채찍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놈에게 약점이 있어 그것을 찾아야 하는데, 직접 대면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부딪쳐 가며 알아볼 수밖에.’
―투웅
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아닌, 무거운 금속끼리 충돌하는 묵직한 음. 파드 경이 거구의 움직임을 잠깐 봉쇄하면 곧바로 나머지가 비수, 마법, 검격을 날렸다.
[스파이라 퓌라 Spaira Pyra]
틈틈이 네마냐 역시 불을 쏘았다. 그러나.
“엄청 날쌔잖아!”
미하일이 요란한 비명을 내질렀다. 네마냐는 이미 전사 고블린의 위력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건 어쩔 수 없다.
‘2m는 되는데도 진짜 민첩하군.’
녀석이 허리를 앞으로 숙이자 불의 공이 놈을 스쳐 지나갔다. 네마냐는 이를 악물었다.
“쳇.”
하지만 이쪽도 쉴 틈이 없었다. 어떻게든 주위를 돌면서 놈의 허점을 만들어야 했다. 다행인 건, 놈이 워낙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무기를 휘둘렀다는 점이다.
―끼에엑!
용감한 소형 고블린들은 닥치는 대로 도륙을 당했다. 지레 겁먹은 일반 고블린들은 아예 다가오지도 못했다.
“후우…….”
파드 경이 완전히 지쳤다. 다행히 다른 고블린은 싸움에 끼어들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미하일이 선뜻 앞으로 나섰다.
“괜찮겠어요, 파드 씨? 힘들면 잠깐이라도 제가 교대를…….”
“하, 무식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놈을? 그 잘빠진 검으로 뭘 할 생각은 말라고. 이건 강 대 강의 싸움이야.”
코웃음을 치면서도 상당히 지쳐 보이는 말이었다.
‘모든 주공을 홀로 받아내니 그렇겠지.’
지친 호흡을 가다듬던 파드 경이 손잡이를 단단히 틀어잡았다. 일행에게만 들리게 낮은 소리가 들렸다.
“자…… 다시 일제히 달려든다. 마법은 최대한 강하게 부탁하네, 하라드 경.”
“내 참. 어떻게 된 게 고향을 떠나자마자 바로 죽을 고비지.”
태연한 건지 무감각한 건지. 아일라는 한 점 변화도 없이 말하며 단검의 피를 닦아 허리춤에 찼다.
“됐나? 자, 하라드!”
“가요, 갑니다!”
[마나 오둔 Mana Othoun]
마나에 낭랑한 목소리가 실려 사방을 뒤흔들었다. 힘의 파동이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게 땅을 흔들었다.
“가자!”
그것을 신호로 다섯 명의 일행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모두 녀석을 감싸며 시계 방향으로 파고들었다.
“하앗!”
일성을 내지르는 파드의 강한 일격. 녀석에게 전혀 피해를 줄 수 없어 봉쇄됐지만, 적어도 녀석의 균형은 깨졌다.
“놈이 무너진다! 빨리!”
말할 것도 없었다. 놈의 손이 봉쇄된 사이, 나머지 일행은 일제히 달려들었다. 수상한 액체를 바른 아일라의 단검 두어 개가 손을 떠나 굳센 피부에 꽂혔다.
―쿠으윽!
녀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게다가 미하일이 녀석의 주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네마냐가 놈의 살갗에 손을 얹고 힘을 모았다.
“불이 안 먹히면 속까지 바싹하게 익혀 주지.”
―우르릉!
있는 대로 마나를 쏟아낸 손. 살갗 너머로 진동이 거셌다.
“윽!”
격렬한 통증을 느끼면서 네마냐는 물러났다. 거대한 덩치가 사라지면서 주위로 모래 폭풍이라도 인 것처럼 흙먼지 바람이 휩쓸었다.
“됐다!”
“죽었구나!”
다행히 말려들지 않은 동료들은 무사히 몸을 빼내 뒤로 돌아왔다. 네마냐는 제발 플래그 세우지 말라고 속으로 애원했다.
‘제발…… 해치웠나 좀 쓰지 마라!’
“큭.”
“괜찮아요?”
안개 사이로 어렴풋하게 파드 경의 자세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미하일이 급하게 한쪽 팔을 붙들었지만, 어딘가 다친 건 분명했다.
‘혼자서 몇 합이고 저 덩치를 상대했으니 안 아픈 게 오히려 문제지.’
문제는 파드가 흔들리면 그다음은 누가 저 무식하게 휘두르는 놈을 막아 낼 것인가였다.
그르렁대는 짐승의 소리가 몸으로 전해졌다. 귓전을 울리는 역한 목소리. 그 야단법석을 떨었는데도 녀석은 멀쩡했다.
‘바가반드에서 마지막 날에 맞닥뜨렸던 놈과 동급 정도 될까.’
단내가 느껴지자 침을 억지로 삼켰다. 모래가 씹혔다. 그래도 그런 걸 챙길 여유는 없다. 흙먼지가 걷혔고, 우리들의 작은 기대는 철저히 배신당했다.
“여럿, 인간, 제법이구나.”
큼지막한 혓바닥으로 입맛을 다시는데 그 장면만으로도 절로 밥맛이 뚝 떨어졌다. 문장은 못 쓰지만 의사전달은 확실하군.
“바난드 땅에서 뭐 하고 있나, 네놈들.”
파드 경이 조금 기운을 되찾아 질문을 던졌다. 녀석은 피식 웃으면서 조롱했다.
“너희 알 것, 상관없다. 죽은 몸들.”
“……야, 너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그러다 죽는다?”
아일라가 호기롭게 도발해 보았다. 그래도 역시, 녀석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죽음, 패배자의 것. 고블린은 필요 없다.”
“에휴…… 어련하겠어. 돌대가리들.”
덩치의 눈이 느릿한 말과 다르게 번쩍이는 안광을 뱉어낸 것은 그 직후였다. 갑작스러운 우발적 행동에 네마냐의 일성이 터진 것 또한 그 직후였다.
“피해요!”
“으앗!”
사건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산만 한 고블린 대장의 거대 도끼가 파드 경을 덮쳤다.
“이런 개…….”
파드는 바닥에 칼을 꽂고 버티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삼십여 걸음 뒤로 날아간 몸뚱이는 조금의 움찔거림도 보이지 않았다.
“파드!”
그나마 가까이 있던 아일라가 서둘러 달려갔다. 네마냐 역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저렇게 도끼눈을 뜨고 보는데, 움직였다간 곧바로 포가 뜨이겠지.’
한숨을 삼키면서 옆을 돌아봤다. 그나마 근접에서 놈을 상대할 만한 무기가 있는 건 미하일뿐이었다.
‘하라드는 아예 자기보호용 무기도 없으니 후보조차 못 들지.’
미하일도 계속 전방을 주시하면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녀석이 먼저 작전을 제안했다.
“어떡할까, 그럼. 내가 앞으로 나설까.”
그렇게 말하는 녀석이 손은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어느덧 익숙해진 짐승의 소리가 다시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조심-!”
누구랄 것도 없이 앞으로 몸을 굴렸다. 거대한 둔기의 무게감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팔다리가 잘리거나 뭉개질 것이다.
“어차피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 다 죽어!”
내 말대로다. 처음엔 시간을 끌어서 놈의 체력을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쪽만 지치고, 놈은 지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덩치는 커져도 고블린 특유의 운동신경은 여전하군, 망할 것들.”
먼지 구덩이 속에서 두 번 구른 네마냐는 모래를 토해내며 일어났다. 파드 경이 꽂아 놓은 큰 검이 눈에 들어왔다.
“크악!”
힘겹게 받아치는 금속성 타격음. 녀석이 미하일 쪽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먼지 바람 속에서 그림자가 드러났다.
“어!”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녀석의 도끼는 근처에 있던 바위에 꽂혀 버렸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부아가 치민 녀석의 울부짖음이 섬찟했다.
“……마법.”
의식이 흐려져서 정확히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정 안 맞아도 주변 공기를 타고 감전될 수 있는 전기 마법을 본능처럼 골랐다.
[라이트닝]
겨우 두 번째인데, 박자가 척척 맞았다. 오른손에 잡은 대검을 뻗어 균형을 잡았다. 왼손은 녀석의 도끼를 향해 뻗었다.
‘이걸 맞는다고 죽진 않겠지만, 적어도 시간 벌이는 되겠지. 감전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으니.’
꽤 강렬한 전류가 허공을 날았다. 도낏자루에 닿은 전류는 이윽고 거대 몸뚱이로 흘렀다. 단백질이 타는 냄새가 주위로 퍼졌고, 사방이 잠시 조용해졌다.
―휙!
다시 뒤로 구르면서 밀이 있는 쪽을 향해 외쳤다.
“밀! 뒤로 빠져서 엄호해!”
“뭐? 쿨럭, 퉷! 네가 그 새끼를 상대하려고?”
“그나마 저런 놈을 한번 보기라도 한 놈이 싸워 볼 만하지 않겠냐.”
“뭐?”
미하일이 땅에 검을 짚고 일어섰다.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맞짱은 아니지만, 직접 맞부딪쳤다가 죽어 보긴 했지.’
덩치 고블린은 조용히 자빠져 있었다. 어지간히 순진한 주인공이라면 이 정도에서 ‘끝났나?’라는 흔한 클리셰를 던지겠지.
‘난 속지 않는다. 일어나라.’
아무 말 없이 태연하게 스킬창을 열었다.
‘어디…… 그게 얼마나 남았더라. 예비 포인트는 5밖에 안 남겨 뒀나. 어쩔 수 없지.’
남아 있던 기술 포인트 5를 모조리 대검술에 쏟아 넣었다. 단번에 입문 단계가 됐다. 다행히 한바탕 경험을 쌓은 덕분에 수치 투자만큼 증가할 수 있었다.
“안 죽은 거 다 안다. 일어나라. 진짜 사생결단을 내야지.”
끙끙대며 땅에서 파드 경의 장검을 뽑아내 들었다. 3kg은 넘어 보였다.
‘키도 사람만 해서 더 힘들군.’
어깨 위에 잠시 얹은 채 몸을 반쯤 틀어 앞을 보았다. 여전히 놈의 검은 그림자는 앞으로 기울어진 채로 잠잠했다.
―크르르릉.
내 도발에 그 낮은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만 죽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자……. 그럼 어디 실력 좀 볼까, 친구?”
농담은 던졌지만 그렇게 여유가 많지는 않았다. 눈꺼풀은 계속 감기고 시야는 점점 좁아졌다.
‘앞으로 기껏 몇 합 안에 끝을 봐야겠어.’
녀석의 저주파 소리가 이어지더니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을 쿵쿵 울리며 눈에 보일 듯 말 듯 재빠른 움직임. 네마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어중간한 검술로 놈을 때려잡을 수는 없을 텐데. 대체 어쩌려고?’
파드 경을 나무에 기대두고 후방을 경계하고 있는 아일라. 그 역시 감을 잡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네마냐 역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안 되면 어쩌냐고? 마법은 어디 무너졌다니? 쓰라고 있는 건데.’
어깨춤에서 검을 내려 양손으로 빗겨 잡았다. 어찌나 큰지, 시야의 1/3 가까이가 가려졌다.
‘덩치가 덜 보이니 겁은 좀 덜 나네.’
마법이라, 어떤 마법? 어지간한 마법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불도, 전기도 쏴 봤지만 두터운 놈의 신체를 꿰뚫지 못한다는 것만 드러났다.
‘그렇다면…….’
그러나 편하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놈이 곧바로 거대한 도끼의 쌍날을 휘두르며 밀어붙였다.
“윽!”
엉겁결에 검을 들어서 막아 냈다. 면적이 넓어서 큰 힘을 받아 내는 건 가능하다. 그래도 그 충격만큼은 스스로가 버텨야 했다. 거센 압력에 십여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역시, 장기전은 무리야.’
애써 웃음을 지었다.
‘마법이 안 된다면, 마나의 기운을 차라리 검에 불어넣어야겠어.’
영창도 해야 하고 시전도 오래 걸리는 마법. 그러느니 차라리 검에 마나를 넣어 직접 타격하는 편이 최선이었다.
‘옛날에 봤던 신성 기사의 움직임을 대충 따라 하는 수준이지만, 이게 최선이지.’
검을 극단적일 수준으로 뻗어 올렸다. 마나는 계속해서 천천히 주입됐다. 서서히 검신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만으론 부족하지.”
하지만 빛이 보이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채를 뿜어내야 했다. 온몸에 있는 마나를 검으로 집중시켰다. 오직 이 한 방을 위해.
“설마, 아우라-스파타를?”
“아우라…… 그게 뭐예요?”
“검(Spata)과 마나의 기운(Aura). 검에 마나의 기를 불어넣는 건데…… 저 녀석 뭐야, 대체? 신성 기사들이 몇 년간 배워야 겨우 사용할 수 있는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미하일이 그저 신기해하는 것에 반해, 아일라는 놀라움을 넘어 허탈한 지경이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파드 경도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 회복도 안 됐는데 저렇게 마나를 주입하면…… 큰일인데.”
두 사람을 지키고 선 하라드도 걱정스레 한마디를 얹었지만, 지금은 지켜볼 뿐이다. 그나마 보이지 않게 마나를 조금씩 지원해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
생각보다 대검의 무게가 대단했다. 물리적인 무게도 있지만, 흡수하는 마나의 양도 엄청났다.
‘그나마 검 자체가 마정석을 박아 넣은 검이라 마나가 있어서 다행이지.’
검 자체가 가지고 있던 마나를 끌어다 쓸 수 있는 체질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해골이 되어 쓰러졌겠지.
‘됐다, 이제 거의…….’
“크릉!”
한동안 상황을 지켜보던 전사 고블린이 위험을 알아차리고 달려들었다. 검기의 위협을 알아챈 걸까. 득달같은 움직임을 보였지만, 네마냐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퓌라, 트리아 도리]
등 뒤에 엄연히 아군이 있었으니까.
‘하라드, 역시 필요할 때 도움이 되네.’
불타오르는 창 세 개가 어깨너머로부터 튀어 나갔다. 이미 네마냐를 향해 잔뜩 기울어졌던 녀석이 당황한 듯 급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몸의 균형은 다시 한번 무너졌다. 놈의 도끼가 움직이는 궤적도 흔들렸다.
―쐐액!
두 개의 불기둥은 막아 냈지만, 마지막 화염 창은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악!
녀석이 당혹과 분노, 그 어딘가 사이에 있을 분노를 잔뜩 토해냈다. 일전에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소리였다.
‘녹음해서 잘 때마다 듣고픈 후련한 소리군.’
회심의 웃음과 함께 입김이 피어오른다. 강도를 높이기 위해 빙결 속성의 마나를 골라 검에 주입했으니 당연했다.
“이제 그만 폼 잡고 녀석을 잡아!”
아일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깻죽지에 강한 화염 창을 맞은 놈이 거세게 버둥거렸다.
‘진정…….’
네마냐는 더욱 천천히 자세를 잡고 방향을 조준했다. 길어지는 싸움에서 최후의, 단 한 번의 움직임이 승부를 가를 것이다. 옹이구멍처럼 작았던 녀석의 눈이 이젠 매우 커다래졌다.
―인간. 먹이, 당하지 않는다!
자유롭지 않은 팔을 억지로 움직이며 녀석은 도끼를 들어 올렸다. 이성을 잃은 움직임에 따라가지 못한 몸 이곳저곳에서 출혈이 일어났다.
―크아아아아!
기다림이 있었다고 하면 바로 지금의 순간만을 위한 것이다. 녀석이 가장 절정에 이른 순간, 그리고 가장 큰 허점이 드러나는 순간!
“으랴앗!”
과도하게 비어 있는 품속으로 냉기를 온전히 품은 대검이 수직으로 찔러 들어갔다.
―푸욱!
단단한 조직을 파고드는 느낌, 울컥하는 고무공을 찌르는 느낌을 지나자 검은 막힘 없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처음 베었던 몇 놈과는 느껴지는 감각마저 달랐다.
―크와아아!
“늦었어.”
드디어 먹이가 느끼는 공포를 녀석도 느끼게 되었다. 괴성이 무척 듣기 좋았다. 녀석의 팔꿈치가 네마냐의 머리맡을 노리고 다가왔다.
“아직도 나를 노릴 정신이 있다니.”
혀를 차면서도 네마냐는 이미 좌측으로 중심을 옮겼다. 빠르게 반 바퀴를 구른 네마냐는 냉기에 얼어붙은 녀석의 상처 위로 재빨리 손을 올렸다. 마지막 순간이었다.
“……너, 이름이 뭐냐.”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살기를 포기한 녀석. 뒤룩거리는 눈에 한 줄기 의문이 자라났다.
―전사에게 이름이 필요한가.
“훌륭한 전사의 이름은 알아 두는 게 예의지. 너희들도 그럴 텐데.”
썩은 동태 눈같이 흐리멍덩한 녀석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굳어 가는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
―보, 보르크.
네마냐는 차가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보르크. 영광으로 생각해라. 앞으로 모든 죽어갈 고블린들의 머리에 떠올릴 단 하나의 이름. 그런 게 있다면 그건 내 첫 사냥감인 네 이름일 것이다.”
거대한 놈의 눈이 조금 실룩거리나 싶지만 뜨거운 숨결만을 내쉬었을 뿐, 눈마저 감아 버렸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스파이라 퓌라 Spiyra Pyra]
공기마저 찢어발기는 불기둥.
―화르르륵!
이번에는 어김없이 놈을 꿰뚫고 불살랐다. 하늘을 가리고 대지마저 둘로 쪼갤 것 같던 위엄찬 덩치가 한 줌의 재로 변했다.
“끝났군. 퉷.”
입가에서 씁쓸한 피의 단내가 치밀어 올라 뱉었다. 강한 힘을 쏟아낸 파드 경의 대검은 모든 힘을 쓴 채 가루가 됐다. 손에 남은 건 고작 손잡이뿐이었다.
[임무 달성]
무감정한 알림과 민첩, 근력, 체력 등의 성장을 알리는 창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하아.”
잔뜩 숨을 몰아쉰 네마냐는 이내 성큼성큼 걸어 고블린이었던 것의 잿더미를 넘었다.
“마도술사, 여기 있었군.”
대략 주술사의 지팡이로 보이는 것과 함께 부서진 아티팩트 조각이 널려 있었다. 반쯤 타 버린 양피지도 보였다. 코끝을 찌르던 고블린 냄새가 사라졌다. 마도술사 무리는 도망친 모양이었다.
“이제 다들 와도 괜찮아요. 놈들은 도망친 모양이니까. 그것보단 이거…….”
제법 큰 조각과 양피지를 함께 집어 들었다.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놈들이 사용한 것은 적마정석이었다.
‘마법사들만 채굴하고 제련할 줄 안다는 적마정석. 대체 누가…….’
나머지 일행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의 반응이 나왔다.
“정말 적마정석이네, 쯧. 귀찮아지겠어.”
저마다 적마정석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 사회에서는 사용을 금지한 악마의 물건 수준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건 뭐죠?”
하라드의 이야기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곳엔 타다 만 양피지 한 장이 있었다.
“그거…… 한번 펴 보죠, 형?”
“그래. 고블린어로 쓰였으면 못 읽겠지만.”
그을린 양피지를 열어젖히자 보는 것만으로 구역질을 유발하는 고블린 문자들이 보였다. 미하일은 고개를 들이밀곤 빠르게 문서 하단을 살폈다.
“어, 저거. 저 아래쪽에 서명한 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뭐, 왜. 어딘데…… 엉?”
“…….”
전투로 달궈진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필기체지만, 당당한 글씨로 쓰인 [백작 가스파리얀].
“어라, 왜 이런데 이 이름이 있지?”
하라드와 파드는 말없이 그 부분을 들여다봤다. 아일라와 미하일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네마냐에게는 이 발견이 당황스러웠을까?
‘천만에. 오히려…… 미칠 것같이 기쁘군.’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네마냐 자신이 바라던 기회일 테니까. 녀석에게서 영지를 해방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희열에 찬 손이 피곤함을 모르고 주먹을 쥐었다.
‘넌 이제 뒈졌다. 전생의 한을 아주 뼈를 잘근잘근 씹어서 풀어주지.’
그리하여 갑작스럽긴 하지만, 계획은 약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이려면 기꺼이 감수할 생각인 네마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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