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무척 오래전 고블린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그날도 싸우고 돌아온 용병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고블린의 습성이라고?
―그래, 간단하지. 가족들을 동행한 부족 단위로 다니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놈들.
하지만 평소의 포악한 전투 종족이란 평가와 달리, 놈들의 기습은 또한 다른 의미에서 무서운 점이 있었다.
―놈들의 기습도 만만치 않아.
―울부짖으며 공포에 떨게 하는 소리도 없고 어둠 속에서 소리를 죽여 접근하는 거야.
―정말 무서운 건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쥐죽은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거야. 바로 그 순간에 놈들이 나타나지.
‘용병들의 대화를 들어 두길 잘했지.’
갑작스럽게 풀벌레 소리가 멈춘 것만으론 모를 수도 있다. 고블린 특유의 냄새가 난 것을 눈치챈 것은 네마냐로서도 반은 행운이었다. 안개로 거꾸로 달려든 일행은 여기저기 은폐했다.
‘바람이 이쪽으로 불길 다행이지. 이렇게 조심스레 접근하는 걸 보면 놈들은 우릴 기습하려던 모양이군.’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네마냐는 조심스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손에는 말채찍만이 잡혔다. 나자리안 가문이 기사 가문이지만 학문에 더 정진했다는 건 유명하다. 덕분에 칼을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없었다.
“제길, 녹슬어 빠졌어도 아버지 검을 가져올 걸 그랬나……. 아니, 그러기엔 애초에 검집에서 빠지질 않지.”
숨죽인 중얼거림에 하얀 입김이 서렸다. 어깨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 긴장되어 돌아보니 의외로 편안해 보이는 아일라의 표정이 어스름하게 보였다.
“괜찮아. 저놈들도 우리가 ‘여기’ 있는 줄은 몰랐던 것 같아, 다행히도.”
“바로 공격해 오지 않아서요?”
아일라는 마주친 눈을 떼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오리무중 안개 속에 뭔가 보일 리는 없겠지만.
“너도 눈치챘구나. 정말 기습이라면 여태껏 놈들의 움직임이 없을 리 없지.”
두 사람이 엎드린 수풀가에는 벌레들도 긴장하여 울음을 멈추었다.
‘이상하긴 하지. 놈들이 눈치채고 이쪽으로 다가왔다면 발소리라도 들릴 텐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건가.’
왼쪽 뒤에서 누군가 기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보니 체구가 썩 작은 게 척 봐도 하라드였다.
“하라드, 너 혹시 정찰 가능한 마법 뭐라도 가지고 있어?”
“정찰이요?”
건너편에서 나무에 기댄 채 이쪽을 보는 파드 경이 살짝 들릴락 말락 물어왔다.
“지금 우리 정면으로 1스타디온(약 180m) 지점의 생명체를 탐색해 줄 수 있지?”
“불가능한 건 아니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의 손끝에서 희뿌연 안개가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뿜어져 나온 마나의 기운은 이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응? 원래 저랬나?
“어라, 왜 이러지?”
녀석도 무언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지 허공에 무의미한 손짓을 휘둘렀다. 네마냐가 보기에 이미 마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왜 그러고 있어, 얼른 써 봐.”
“그, 그러게. 왜 이런담.”
동요하는 듯한 녀석의 손짓이 살짝 떨렸다. 몇 번 다시 시도하는 듯했지만 그때마다 마나가 빨려 들어갔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녀석의 떨리는 손을 잡은 네마냐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뭔데 그래. 마나가 이상하게 움직이는데?”
“……마나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아. 마음대로 사라지고 있어.”
“아티팩트 없어?”
그 말에 녀석도 급하게 하나를 꺼냈다. 하지만 그것에서마저 마나가 머리채라도 잡힌 듯 뽑혀나갔다. 뒤늦게 만진 녀석은 절망적이었다.
“이것도 먹혀 버렸어.”
칼을 뽑은 채 언제든 나갈 준비만 하고 있던 파브라드는 살짝 역정이 난 듯 거칠게 긁는 목소리를 냈다.
“여긴 평소에도 사람들이 뻔질나게 오가는 곳인데 그런 문제가 있다고?”
작은 혼란이 일행 가운데 일어났다.
“나도 당황스러워요. 고블린들이 무슨 이상한 술수라도 썼나? 그런 머리가 있는 놈들이 아닌데…… 젠장.”
이미 인간들의 싸움에선 마법이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된 지 오래다.
‘마법 하나 못 쓴다고 혼란에 빠져 버릴 정도군. 이 정도면 바난드에서도 상위 클래스 파티인데.’
그렇지만 이미 고블린 문제라면 질릴 만큼 이골이 난 누군가가 있었다.
「주문이 중단되고 마나가 지면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
분명 예전에 유명했던 사건에서 비슷한 현상을 들어본 기억이 났다. 확실한 건 자연현상은 아니고 고블린의 짓이란 것뿐. 마도술을 쓸 줄 아는 마도사의 짓.
“확실해. 고블린 마도사가 있다.”
“마도사까지? 정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이 우릴 찾는 모양이긴 해. 요 주변을 찾고 있어.”
아일라의 지적이 들렸다. 저벅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셋, 넷, 다섯……. 적어도 열 놈은 되겠군. 파드 경도 바짝 긴장해 칼 손잡이를 고쳐잡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신호를 주면 다가오는 놈들의 중앙을 바로 뚫고 들어간다.”
“잠깐. 아무리 그래도 적 인원과 의도도 모르고 무작정 들어가면 안 되죠.”
미하일이 일행을 만류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건 기사 수업을 받아본 미하일 자신도 잘 알 것이다.
“마법도 안 된다는데 어쩌겠소. 아니면 경에게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놈들은 후각도 좋고 힘도 좋아서 선공을 뺏기면 우리가 훨씬 불리해.”
진정하라며 네마냐가 손을 뻗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은 직전 고블린 침입을 설명한 나를 믿는지, 대번에 집중해주었다.
“제게 방법이 있죠. 냉정하세요. 돌파하면서 최대한 마법을 쓸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볼게요.”
“좋아.”
“후방 엄호는 맡겨 줘.”
호응에 고개를 끄덕인 네마냐는 조용히 눈을 들어 어둠 속 저편을 주시했다. 달조차 뜨지 않아 칠흑 같은 밤. 이것저것 시스템의 보정을 받는다고 해도 야간의 시력을 올려주는 건 아니다. 다만…….
[탐지 Scannio]
‘흐릿하지만 그래도 역시 보이는군. 보조기로는 유감이 없다니까.’
구물거리는 빛들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마나의 기운은 천천히 꼬리를 그으며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저 끝에 무언가 있단 뜻이겠지.’
여기저기 움직이는 빛을 따라 시선이 향한 그곳. 작게 빛나는 붉은 별이 하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역질과 함께.
‘고블린 새끼들, 아티팩트라도 하나 주운 모양이군. 마나를 자꾸 흡수한다니 아예 소화하지 못할 만큼 강제로 터뜨려 버려야겠어.’
대충 휘휘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밝게 뭉친 빛 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역시나 암석과 광물에 깃들인 자연 마나는 흡수하지 못한 모양이다.
‘공기 중의 마나는 몰라도 역시 광물계 마나는 흡수하지 못했어.’
마나가 깃든 물질의 계열이 달라지면 그만큼 마나를 서로 끌어들이는 힘도 달라진다. 설마 고블린들도 광물계 마나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겠지.
“좋았어, 방법을 찾았어요.”
“방법이 있다고?”
파드 경이 놀란 소리로 되물었다.
“네. 제가 적의 아티팩트를 과충전시켜 부수면 놈들이 혼란에 빠질 겁니다. 그때 공격하도록 해요.”
“마나를 흡수하는 원인이 마정석이었다고?”
다들 놀란 눈치였다. 특히 마법사인 하라드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양.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이해하는 속도는 훨씬 빨랐다.
“고블린 따위가…… 적마정석이라도 가져왔다는 건가. 단단히 준비했네.”
아일라의 낮은 신음과도 같은 설명이 따라왔다. 적마정석. 네마냐의 기억이 네 글자에 반응했다. 꿈틀거리는 눈썹. 수많은 사람이 그 돌멩이 덕분에 손도 쓰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었다. 불길한 붉은 빛만으로도 구역질이 일었다.
“가만히 두면 안 되겠네요. 주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모조리 제거하도록 해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띠링’ 하는 알림이 들려온다. 그러면 그렇지.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네마냐는 거리낌 없이 아까의 그 불길한 붉은 점을 주시했다. 아까 전부터 이어진 발걸음 소리는 여전히 네마냐 일행을 찾는 듯 주위를 헤매고 있었다.
“어서 해, 시간 없어!”
파브라드가 다시 재촉했다. 하지만 네마냐는 전방만을 주시했다. 핏빛처럼 치솟아 오르는 기운은 점점 더 강렬하게 주변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였다. 두통마저 느껴졌다. 주변에 마나가 없어서 금세 지쳐 떨어질 것 같았다. 그때, 네마냐에게 따듯한 손이 닿았다.
“하라드.”
“내 마나도 보탤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집중해!”
단단히 다짐한 네마냐. 미리 눈으로 위치를 확인해 둔 광물 표적들로부터 끄집어낸 마나의 방향을 잡았다.
‘적마정석으로 모두 삽입!’
거대한 에너지의 줄기가 붉은빛을 향해, 말 그대로 쏟아졌다. 가까워져도 점처럼 희미하던 붉은빛은 폭발할 것처럼 무섭게 커졌다.
“됐다.”
발걸음 소리만 요란할 뿐 소리조차 없던 고블린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설마?”
점점 자라나는 빛에, 당황한 파드의 당황한 목소리가 금방 묻혔다. 강렬한 빛이 눈에 쏟아져 들어왔다. 불평할 틈조차 허락하질 않았다. 눈을 감자 경고가 드러났다.
[경고]
[마나 폭주! 폭발의 후폭풍에 대비하세요.]
“모두 엎드려-!”
“아 씨, 내 눈!”
제각기 비명과 불만을 내지르며 일행은 수풀과 나무 뒤에 엎드렸다. 새벽의 차가운 흙이 그새 열기에 데워진 뺨을 촉촉하게 적셨다.
―쾅!
―콰콰쾅!
뜨거운 열기를 싣고 폭풍이 한바탕 숲을 뒤엎었다. 일행의 짐꾸러미 중 가벼운 것들이 날아갔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읍.”
먼지가 자욱해 숨을 쉬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적이 혼란에 빠진 순간. 숨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마나가 다가온다, 느껴져!”
하라드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역방향으로 몰려드는 에너지의 파도였다. 환희에 찬 하라드가 앞으로 나서며 손을 정면으로 뻗었다.
“됐다, 마나가 돌아왔어. 뒤에서 보조할 테니까 일점 돌파! 고블린을 향해!”
“고블린 새끼들, 웃기지도 않는 짓을 저질렀겠다? 내 특제 단검으로 칼침이나 줘야지.”
“자, 집중하고! 고블린 마도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돌파한다! 역포위당하지 않게 조심해!”
파드의 지시에 따라 네마냐 역시 곧바로 허리춤에서 말 채찍을 꺼냈다. 아무리 봐도 전투용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천 번, 만 번을 휘둘러 본들 고블린의 단단한 피부에 흠집이나 나겠냐만은 태연했다.
‘마법이 없을 때나 그런 거지.’
“출발합시다!”
힘껏 전력을 모은 하라드는 온 힘을 다해 빛나는 광선을 적 방향으로 쏘았다.
[에드라미 파오스 Edrami Phaos]
혜성과도 같이 빛나는 꼬리를 가진 덩어리가 일행의 전방을 빛으로 가득 메웠다. 순간적이지만 대낮의 햇볕에 불타오르는 듯 사방이 환해졌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마법이지만, 그만큼 바로바로 쓰기 좋은 저마나 마법이었다.
“돌격!”
파드가 거대한 양손 검을 비스듬히 들고 빛을 따라 제일 앞으로 달렸다. 방어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 오로지 공격에 집중한 자세였다.
“모두 내 좌우를 엄호하면서 따라와!”
마력이 폭발하여 혼란에 빠지고 갑작스러운 빛에 일시적으로 시력을 상실한 고블린들. 당연히 작정하고 달려든 5명을 막을 순 없었다.
―서걱.
섬뜩하게 고깃덩이를 가르는 칼날의 소리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누구랄 것도 없이 다른 일행들이 전열을 파고드는 파드의 뒤를 엄호하며 따랐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거침없었다.
취샤앗-
달갑지 않은 손님이 왔단 걸 눈치채고 움직인 녀석들도 물론 있었다. 기억하기도 싫은 목소리를 재현하며 녀석들이 조를 짜, 파드 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도움!”
다급한 목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허공을 가르는 금속성의 소리가 요란했다. 이내 피가 끓는 소리와 함께 한 녀석이 고꾸라졌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아일라는 칼을 뽑아내며 녀석을 마무리했다.
“말하지 않아도 잘 보고 있으니까 돌파나 신경 써, 아저씨!”
“누가 아저씨야! 이제 겨우 스물여덟이구만!”
그래도 여유를 찾았는지 한번 휘둘러 두 녀석을 네 조각으로 동강 내는 파드의 만면에 장난기가 피어올랐다. 완전 교본에나 나올 법한 FM 자세 그대로였다.
‘역대 최연소 훈련 장교라는 게 농담으로 딴 건 아니었군.’
그걸 지켜보던 네마냐의 눈에 좌측에서 장창을 찔러 들어오는 고블린이 보였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딜!”
약한 마력을 함께 실어 휘두른 채찍. 뱀처럼 장창을 파고들어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모든 힘을 창에 실어 달려들던 녀석은 단숨에 균형을 잃었다.
[스파이라 퓌라 Spaira Pyra]
채찍을 타고 순식간에 열 걸음 앞까지 달려나간 네마냐는 자연스레 왼손을 치켜들었다. 이글거리는 불의 공이 시차를 두고 형성됐다. 뒤늦게 네마냐의 뜻을 알아챈 놈의 눈이 뒤룩거렸다.
“불쌍한 척 마라. 역겹거든.”
냉소를 흘리며 왼손을 그대로 놈의 면상에 꽂아 넣었다.
―쿠르릉!
불기둥이 그대로 녀석을 꿰뚫었다. 그 뒤에서 틈을 노리고 있던 또 다른 한 놈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동료는 아랑곳하지 않고 적을 공격하는 녀석들의 수법까지.
“그래, 네놈들 소원대로 다 같이 죽어!”
놈들의 역겨움에 더 분노한 네마냐는 강렬한 화염을 연사했다. 마법에 놀란 녀석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이다, 무리하게 싸우지 말고 돌파!”
“지나간다!”
서로의 정신을 일깨우면서 일행은 몇십 걸음을 다시 돌파했다.
츄륵-!
“시건방진 소리 내지 말고 곱게 좀 뒈져!”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 아니지?”
“그래, 당신한테 하는 소리! 놀지 말고 앞의 놈이나 처리해!”
곳곳에서 저격 중인 활잡이 고블린들은 아일라와 파드가 꼼꼼히 잡았다. 장이족과 난쟁이족 혼혈이라는 집안 혈통이 어디 가지는 않는 모양이다.
“야 이, 얌전히 죽어, 쫌!”
가까이 접근하는 근접 병력은 겁먹은 미하일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네마냐는 미하일이 쳐서 걷어낸 놈들의 칼을 채찍으로 제압하곤, 연소 마법으로 소멸시켰다.
“계속, 계속 돌파해! 거의 다 왔어요!”
네마냐의 말에 다시 힘을 얻은 듯 일행의 발걸음은 다시 탄력을 받았다.
츄륵! 취르릇!
“개새끼들, 대체 얼마나 모여 있는 거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네마냐의 안타까운 목소리. 적마정석에 가까워지자 혓바닥 내미는 불쾌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후우, 온 사방에서 들려. 포위당한 건가.”
벌써 여덟 마리쯤 베었던 파드의 숨소리가 무척 거칠었다. 그건 네마냐나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에 집중한 하라드 정도만 멀쩡한 정도였다.
“대체, 저 새끼들은 어떻게 들키지도 않고 여기까지 온 거람.”
아일라의 짜증 난 소리면서도 정확한 지적. 하지만 무어라 판단을 내리기엔 여유로운 상황이 못 되었다.
―크후후후!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울음소리. 일행은 걸음을 멈췄다. 지치기도 지쳤지만, 심리적인 압박이 컸다. 잔챙이 고블린들 역시 겁을 먹은 모양인지 다가오지 않았다. 한숨 내쉰 밀이 잠시 얘기를 꺼내려 했다.
“다행히, 놈들도 겁을 먹…….”
생사의 감각에 익숙한 어느 장교의 목소리가 경고등처럼 터졌다.
“잠깐, 엎드…….”
불길한 기운은 모두가 느꼈다. 불평 한마디 할 새도 없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서늘한 한 줄기 바람이 아주 찰나의 간격만을 둔 채 뒤통수를 스쳐 지나갔다.
“도끼!”
얼핏 보아도 사람들이 쓰는 전투 도끼와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크기였다.
“아주 제대로 죽을 자리 났구만, 젠장.”
“그냥 고블린이 아닌 모양인데? 이렇게 큰 도끼를?”
“젠장, 검의 날이 다 나갔네. 아일라, 대장장이라던데 좋은 검 하나 없냐?”
파드 경은 반쯤 이가 나간 검을 옆으로 고쳐잡고 뒤에 있는 아일라와 말싸움을 벌였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다고 했으니, 지금 모습이 가장 두 사람다운 일화이긴 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지만.
“그냥 있는 거나 잘 써. 날 빠진 칼로 두드려서라도 저 덩치를 잡아보든지.”
눈이 어둠에 익자, 시야에 건너편이 보였다. 보통의 고블린이나 사람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근육질의 몸체가 어스름하게 드러났다. 그놈이 방금 휘둘렀을 거대한 도끼도 함께.
“하, 칼은 무슨. 그냥 철 몽둥이구만.”
파티원 중에선 유일한 근접전 전문인 파드가 스스로 나섰다. 하지만 벌써 한탕 싸운 덕에 기력이 누가 봐도 없어 보였다. 목이 바싹 말랐다.
‘아니, 회귀하고 난이도 왜 이따위야, 첫 전투에서! 똥겜 밸런스 이따위로 할 거냐 멍청한 시스템아!’
물론 편할 때 골라서 대답하는 시스템이 답해 줄 리는 없다. 끓는 속을 다스리며 네마냐는 채찍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어느덧 삼나무 손잡이에도 땀이 번들거렸다.
―인간, 방해물, 크흐흐, 죽인다, 모두.
놈의 거대한 눈이 빛을 내며 서투른 말을 뱉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로 누구랄 것도 없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26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