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흔들림.
어두운 의식 사이로 전해지는 건 오직 그 느낌뿐이었다. 불규칙적인 충격이 느껴졌다.
“…….”
그래도 죽은 듯이 있으려니, 이내 두런거리는 말소리나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으…….”
흐릿한 시야 끝에서 빛이 보였다. 진동과 거친 호흡, 어지러움이 생겨났다.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나서야 무슨 일인지 알았다.
‘마차……?’
비로소 주변의 모습이 보였다. 무엇인가 아무렇게나 들어 있는 포댓자루. 더미 사이에 파묻힌 자신. 어지러움을 느꼈던 흔들림은 마차가 움직이면서 생긴 모양이다.
“내가 자고 있었나? 뭐지.”
의문에 찬 손을 움직여 나른함을 털어 냈다. 몸을 일으키자 포댓자루에서 쏟아지는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쿨럭!
거친 목을 다듬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눈을 감아 봤으나 변함없이 파랗게 빛나는 UI에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알림 표시가 몇 가지 들어와 있긴 하지만 대수로운 건 아니었다.
“……아, 시험! 어떻게 됐지?”
불현듯 머리를 스친 것은 시험이었다. 경황이 없어서 시험을 어떻게 통과했는지도 기억이 없었다. 그때, 마차 앞에서 두 사람인가가 도란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저 목소리. 딴 건 몰라도 그 고생시킨 녀석의 목소리군.”
네마냐는 마차 앞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흔들리는 천 재질의 발을 걷자 밝은 빛이 쏟아졌다. 눈을 찌푸린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 그럼 에데시온 마법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여기로 오신 거였군요.”
“최종 자격증을 얻으려면 1년간은 공식 기구 소속으로 일해야 하거든요.”
대화하는 것에 정신이 팔린 두 사람 중 누가 하라드일지는 뻔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인상적인 로브를 잊을 순 없겠지. 네마냐는 말없이 손을 들어 녀석의 뒤통수를 조준했다.
―딱!
“악!”
“워워! 일어났군!”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파드는 급하게 말을 멈췄다. 그 고생을 지나오면서 말도 놓고 한결 친해진 하라드 녀석은 머리를 문지르며 아픈 척을 했다.
“아, 뭐야. 아직도 삐치셨나 보네.”
“이걸로 그간 약 올린 건 퉁치자고.”
“몸 상태도 이젠 괜찮은 모양이로군.”
파드 씨의 이야기에 네마냐는 옅은 웃음을 보이며 마부석 뒤의 중간 턱에 앉았다. 발을 걷어 올린 채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았다.
“시험은…… 어떻게 통과하긴 한 모양이야.”
“모르고 있었습니까? 얘긴 듣고 잠드셨길래 알고 계신 줄 알았네요.”
“힘이 빠져서 정신이 있었겠어. 더군다나 일어나니 주위엔 아무도 없고.”
시험 통과. 일단 한고비는 넘겼단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네마냐는 하라드에게 이제 동료니 피차 편하게 말을 놓자는 제안을 건넸다. 하라드도 선선히 동의했다. 잠시 말들이 쉬도록 고삐를 푼 파드 경이 이쪽으로 돌아앉으며 끼어들었다.
“나자리안 경의 일정에 대려면 급히 움직여야 해서 쓰러졌지만 어쩔 수 없었네. 다들 다른 마차에 타고 있어.”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복으로 쓰린 속을 다잡았다. 살짝 비릿한 단내가 나는 게 시험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파드 경은 그 정도이길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그나마 다행이지. 처음엔 큰일 날 줄 알았네. 하라드 경이 자연스럽게 회복할 거라곤 했다지만.”
“마나야, 외부에서 저절로 흡수되니까요.”
그렇게 세 사람이 마차를 세우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다른 마차에 탔던 미하일과 아일라가 찾아왔다.
“왜 멈췄나 싶어서 왔더니. 일어났네. 상태는 어때?”
“억울할 정도로 멀쩡해. 엄살도 못 부릴 정도인데?”
“한번 죽을 뻔한 녀석이 또 희한한 짓으로 생사를 넘나드는데 어떻…… 악!”
마차에 뛰어들 기세던 미하일은 어떤 거친 몸짓에 부딪혀 자빠졌다. 저 정도의 완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음, 역시. 아일라의 모습이 먼지 사이로 드러났다.
“너도 진정 좀 하랬지. 며칠 전처럼 우리 셋만 있는 게 아니라니까.”
“뭐야, 아일라 씨도 걱정했었나 보네요. 내가 인복은 있나 보네.”
네마냐는 웃으면서 쑤시는 어깨를 툭툭 치는 시늉을 했다. 아일라는 언제나 짓던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들여다보았다.
“몸 좀 사려 가면서 해.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덤볐다는 말 듣고 정말 식겁했어.”
“네, 고마워요. 경우는 가려가면서 할게요.”
앞으로도 그런 일은 왕왕 있을 텐데 말이지. 지금 말해 봐야 소용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일라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따 숙영지에서 얘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
“얘기요?”
“응. 하나 확인받고 싶은 게 있어서. 기왕이면 중요한 얘기니까 모두 같이 들었으면 좋겠어.”
아무래도 앞으로의 목표에 관한 이야기려나. 일단 네마냐는 알겠노라며 대답했다. 짐칸에 주인공을 남기고 일행은 다시 움직였다.
“쌓인 알림이 있는지 확인해 볼까.”
덜컹대는 마차의 짐칸에 앉아 턱을 괴곤 그동안 밀린 알림을 확인했다. 어떤 능력 보정치를 획득했다거나 주문 보조 시스템을 개방했다는 것들이었다.
‘직접 도움이 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결정을 도와줄 수 있으니 틈틈이 챙겨 놓긴 해야지.’
가볍게 훑어본 뒤에 눈을 떴다. 그새 도로는 산간 지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앞자리로 살짝 기어가 말을 모는 파드 경을 톡톡 건드렸다.
“저기 파드 경, 우리 어느 길로 가는 거죠?”
“안 그래도 그 얘길 하려고 했지. 최대한 빨리 바가반드로 돌아가야 한다던데. 최대한 직선 경로로 가는 중이야.”
“직선이요? 고갯길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최근 국경의 감시를 뚫고 진입한 고블린들이 산적질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직선 경로에 가까운 도로는 산에 가까우니 아무래도 산적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요즘같이 불안한 시절에 안전하게 돌아가려면 검문이다 뭐다 일이 커져서 며칠 더 걸릴 거야.”
파드 경의 이야기에 기억이 떠올랐다. 현재 안전한 길은 서방 제국의 군대가 통제하는 경로였지만, 서쪽으로 한참을 돌아야 하며 검문도 복잡해서 꼬박 닷새는 걸리는 길이었다.
‘닷새는 너무 길어. 고블린이 언제고 침략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거기다 그 음흉한 백작을 하루라도 가만히 둘 수도 없고.’
단순하게 고블린 문제만 생각하자면 안전하게 돌아가면서 무장을 갖추면 된다.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백작을 막는 게 문제였다.
‘위험하더라도 빨리 갈 수밖에 없겠지.’
네마냐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파드 경과 나머지 일행의 판단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죠. 노숙해야 하는 건 아쉽지만요.”
“그러지 않아도 될 겁니다. 파드 경, 이제 곧 바가란에 닿을 거예요. 도시에 머물죠?”
지도를 잠시 들여다본 하라드의 말이었다. 시험을 치르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네마냐가 쓰러지느라 시간이 지체된 탓이었다.
“잘 됐군. 거기서 쉬다 갈까.”
번듯한 숙소를 잡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일행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여길 가스파리얀 백작이 문제다. 백작이 첩자를 보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요. 길가로 가야 합니다. 국왕께서 바가반드와 갈등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으셔서.”
네마냐는 거절하며 파드 경에게 가능한 민가나 도시와 거리를 두며 이동하자고 제안했다. 필요할 때까진 왕실과 바가반드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지 말라는 왕명 때문이었다.
“백작이 자객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어요. 비열한 인간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민가가 휘말리는 건 피하는 게 좋아요.”
“백작이 어떤 사람인데 그런 정도라고?”
파드 경과 같은 정통 기사로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 국왕과 주종 계약을 맺은 백작이 감히 국왕의 영지에서 그런 짓을 한다니. 왜냐고? 겪어 보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 바가반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면 아마 기절초풍하실 겁니다. 계약과 의리는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엎을 자예요. 국왕 전하와는 이미 적이 된 거나 마찬가지고요.”
“전하께 대충 언질이야 듣긴 했지만, 허. 대놓고 반란을 저지르는 일이 가능하다니.”
파드는 꺼림칙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자신에겐 참 어려운 문제라고 얘기했다.
“소문이 있긴 했어도 현실은 더 지저분하군.”
“뭐, 도착해 보면 나자리안 경의 얘기가 진짜라는 것도 알게 되겠죠. 오늘은 일단 민가가 휘말리는 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라크시스 강가에서 자는 게 좋겠습니다.”
하라드의 제안에 파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좋겠군. 사방이 트여 시야도 좋겠다, 계곡풍 덕분에 우리 냄새나 기척도 지워 버릴 수 있으니까.”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둔 채, 마차와 말들은 사람을 싣고 한참을 달려갔다.
* * *
일행의 잠자리는 정면으로 마시스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싼 곳이었다. 강을 따라 동서로 흐르는 산이 밤안개에 싸여 신비로웠다. 조용한 공간에 입김만이 서늘한데 어둠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안 자고 있었네, 너희들 모두.”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는데, 잊을 수가 있어야죠.”
손을 펼쳐 곁불을 쬐고 있던 하라드가 가볍게 받았다.
“저런, 피곤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무슨 비밀이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지.”
파드 경도 아직 잠들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쿡쿡 웃은 아일라는 일행이 지피고 있는 모닥불 곁에 앉았다. 장작 쪼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떤 점이 우리 금속 장인님의 생각에 고뇌를 불어넣었을까요. 거, 괜히 궁금해지네.”
네마냐가 장난과도 같이 건넨 대화. 하지만 아일라는 아련한 입꼬리로 웃음을 살짝 지을 뿐,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생각보다 진지하네, 아일라 씨…….’
매사 호탕하거나 과음만 하던 모습을 봐 왔던 탓인지, 무척이나 다른 사람 같았다.
“묻고 싶은 건 간단해. 앞으로 어떤 목적이 있는지, 그걸 확인해 줬으면 해서.”
예상하던 그 질문이군. 짐짓 모르는 척히며, 네마냐는 한 번 더 물어보았다.
“목적이요?”
“그래. 나도 요 며칠 보내면서 의문이 들었거든. 요즘 네가 발돋움하는 사건이 좀 많았잖아. 반면에 그렇게 얻은 힘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이게 저번에 아일라 씨가 얘기했던 함께 가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것 같은데. 맞죠?”
그렇게 이야기하는 미하일도 사실은 좀 궁금한 눈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이야기해 줄 걸 그랬나. 물론, 지금도 늦은 건 아니었다. 앞으로 동료로 포섭할 만한 인물뿐이니 여기서 썰을 풀어도 되겠지. 네마냐는 몸을 일으켰다.
“좀 더 정리해 볼까 했는데, 그냥 이번 기회에 말씀드릴게요.”
“역시나. 품고 있던 생각이 있었나 보네.”
작게 한마디를 내뱉으며 아일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목적이라. 그러고 보면 난 그저, 살아남기 위해 고블린을 죽이고, 그러기 위해 영지를 얻으려 한 건가.’
회귀한 뒤로 무작정 파고든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자신의 머리와 이성, 본능마저 지배한 것은 임박한 고블린의 침공. 그리고 거기서 자신과 동료가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고블린의 침공이 임박했습니다, 여러분.”
숨겨 놓은 비밀의 공개. 잠시 따뜻하던 공기는 차갑게 식어 버렸다. 뜬금없는 소리에 당황한 눈빛들. 나는 애써 타는 목을 달래며 이어 갔다.
“제가 개인적으로 모은 정보뿐만 아니라 바난드 왕실에서도 이제는 인정하고 있죠.”
“그건…… 아직 추측인 거지요?”
파드 경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도 않은 채 물어왔다. 네마냐는 정색한 표정 그대로 대답했다.
“아직은 추측이죠. 하지만 반드시 옵니다.”
“그저, 언제나 그랬듯 평소와 같은 침략 아닐까? 그런 거라면 귀찮긴 해도…….”
“아니. 고블린은 현재 대규모 침입을 준비 중입니다. 전하께서 주신 왕국의 첩보에 따르면 수만 이상의 고블린이 후방에 모이고 있어요.”
“놈들의 목적은, 목적은 뭐래?”
아일라가 급하게 묻자 거기에도 물론 친절히 답을 해 주었다. 놀라울 정도로 답은 간단했다.
“생존할 땅. 자신들의 탈 짐승을 먹일 초지.”
“초지가 있는 땅……. 사람들은 불필요하겠지.”
하라드가 누구보다도 빨리 핵심을 알아차렸다. 사람은 필요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딛고 선 땅이 필요할 뿐.
“땅만…….”
“정규전을 벌이려 든다고? 설마, 나샤와 사건이 일시적인 게 아니었단 말이야?”
아일라가 언급한 나샤와 사건. 그것만큼 타당한 근거는 없을 것이다. 주민 3만 명과 철의 기사 1천여 명이 대부분 학살당하고 도시는 완전히 파괴된 사건.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침략과 달리 처음으로 고블린이 정착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모두 그저 나샤와라는 이름만 눈앞에서 지우길 원했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외면하지 않았습니까.”
유대인이 아니어서 외면하고, 집시가 아니었으므로 외면한 대가를 치렀다는 어느 먼 나라 사람의 고백시가 떠올랐다. 마지막에 자신에게 재앙이 들이닥치고서야 깨닫게 되는 건 마찬가지인가.
아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가, 여기에 온 것이다.
“그래서 저는 고블린과 싸울 겁니다. 그러기 위해 방향을 잃은 바가반드를 장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블린과의 결전인가. 바가반드는 그럴 만하지. 하지만 애초에 왕실과 조합에 호소한 건 광산 사업이 아니었나?”
파드 훈련단장에게는 조합장이 자세한 정보를 알려 주진 않았던 모양이다. 광산 사업 경영 역시 네마냐의 계획 중 일부는 맞지만.
“광산은 바로 전쟁을 대비한 마정석과 온갖 금속 생산을 위한 터전이 될 겁니다. 가뜩이나 바가반드는 매년 날씨가 추워져서 농사에 매달리느니 그게 백배 낫죠.”
“광산업으로 생존과 동시에 해낸다?”
아일라가 정확하게 짚어 냈다. 네마냐는 고갤 끄덕였다. 거기에 물론 덧붙일 내용도 하나 더 있었다.
“그것뿐만은 아니에요. 하야스단 전 지방에 갑주와 도검, 마법 도구와 그리고 「비장의 무기」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
아직 심중에 두고 있는 비장의 무기를 공개하기는 시간이 일렀다. 놀라움과 희망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가장 효과적인 순간을 골라야 할 것이다. 우선은 추상적일 수 있는 이야기보단 차분한 로드맵 제시가 우선이었다.
―짝!
네마냐는 손뼉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자! 고블린의 진정한 위협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겨울이 오면 식량이 부족해진 놈들이 밀려올 겁니다. 어쩌면 며칠 안으로도.”
이미 10월이 저물고 있다. 11월이 되면 첫 공세가 시작될 것이다. 그 전에 움직여야 한다. 생각이 채 이어지기 전에 다들 말 한마디씩을 보탰다.
“아무렴, 가스파리얀에게 맡겨 뒀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지. 나야 뭐, 너랑 평생 한 세트니까. 그렇지?”
미하일의 긍정적인 승낙. 아일라는 대충 돌아가는 사정은 알고 있었겠지만 복잡한 표정을 지을 뿐 별말은 없었다. 그나마 파드 경이 덕담을 건네주었다.
“최근 들었던 이야기 중엔 가장 속 시원한 설명이었네. 나는 아마 곧 군인으로 다른 곳에 나가겠지만, 언제고 네마냐 경을 기억하도록 하지. 믿고 의지하게.”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는 파드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득 하라드의 의견이 궁금해졌다.
“하라드, 우리 마법학 선생께선 어떤 생각이신지 궁금한데요?”
하라드는 어쩐 일인지 아까 전부터 말 한마디 없이 침착했다. 뭐지? 만나면서부터 비꼬기와 농담은 끊임없이 던진 녀석인데.
“어이, 고블린이 쳐들어온다니까 겁이라도 먹은 거야? 야, 대답 좀 해 보라니까.”
하지만 녀석은 대답은커녕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참,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군. 그렇게 눈길을 돌리려는 찰나.
‘응?’
순간.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스쳤다. 시원하던 계곡 바람마저 불쾌하게 만드는 냄새였다. 하라드가 그 냄새를 느꼈냐는 시선을 네마냐에게 보냈다.
“이 냄새…… 고블린!”
“뭐라고?”
하지만 불쾌하다는 느낌은 있어도 고블린의 냄새인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네마냐야 코앞에서 실컷 맡아 봤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미하일도 네마냐의 말에 기겁했다. 오랜 망각 속에 잠시 묻어 두었던 악몽이 떠오르는 냄새.
“가까이, 꽤 여러 개체가 있는 모양인데.”
“모두, 고블린…… 읍!”
네마냐는 큰 소리를 내려던 미하일의 입을 막았다. 일행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일라는 불길을 꺼트렸고, 하라드는 작은 바람을 일으켜 냄새와 인기척을 지웠다.
-스릉!
아일라는 몸을 일으키며 단도를 뽑았다.
“하……. 운이 좋은 건지, 불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다니까. 고블린 침공 예고를 듣자마자 기습이라니. 이래서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하…….”
괜한 우연일 뿐이라지만 너무 극적이라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현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야밤의 불청객을 어떻게든 맞아야 했다. 선수를 잡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그럼 좀 갑작스럽지만, 우리 파티의 실력을 보도록 해 볼까요, 여러분?”
누구랄 것도 없이 네마냐의 말을 신호로,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 지도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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