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통성명하자마자 서로가 시험관과 수험생이란 통보를 받은 하라드와 네마냐는 여전히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의 바누라트는 완고했다. 때문에 두 사람은 별수 없이 그 고집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래. 그럼 지금부터 시험을 보면 되는 거지, 어떻게?”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하라드는 네마냐에게로 두 발짝 다가왔다. 파드와 바누라트는 적당히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그럼 우린 결착이 날 때까진 뒤에서 지켜보도록 하지.”
“수습 기사가 검술도 아닌 마법으로 시험을 본다니. 특이한 일이군요, 하하.”
구경꾼들의 이야기에는 상관없이 하라드의 두 손은 로브를 걷었다. 다시 창백한 얼굴이 세상에 드러났다. 창백한 팔로 녀석이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자, 받으세요.”
“이건…… 아티팩트? 하지만 속에 마나도 없이 텅 빈 마정석인데.”
네마냐의 손에 쥐어진 것은 아주 작은 펜던트였다. 정교하게 빚어낸 은제 덩어리. 그 위에 수정 4개가 십자 모양으로 박혀 있었다.
“어디…….”
네마냐는 다른 손을 꺼내 수정 위에 스윽 올려 가볍게 훑었다. 다른 스캔 때와 달리 조금 침착한 느낌이었다. 물론 눈을 감아야 보이니 슬쩍 눈을 감았다.
[스캔.]
[유형: 신성 마나]
[마나 잔량: 소진]
[잔량이 없습니다. 충전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이 느낌을 실제로 확인해 주었다. 잠시 시스템 창을 끄고 고개를 들어 하라드를 바라보았다.
“이거, 마나가 다 빠져 있네? 신성 마나를 담는 마정석 도구는 맞는데.”
“원래 치유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신전용 아이템입니다. 참고로 신성 마나는 4가지 이상의 속성 마나를 동시에 사용할 때 가장 효율이 높아요.”
“결정체가 4개 있는 건 그래서였군.”
하라드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 불, 빛, 흙 속성의 4개 마나만 있으면 그럭저럭 쓸 정도는 뽑을 수 있어요. 그것들 중 하나를 빼고 전기가 들어가면 더 좋지만.”
‘전기’라는 것의 개념조차 흔하지 않은 시대였다. 광역 전기계 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묻지도 않고 뽑아갈 정도로 희귀했고, 그 위력은 타 마나에 비하면 월등했다.
“전기가 들어가면 뭔가 효능이 달라지나?”
“현장 치료사들 사이에선 자가재생 속도를 증가시킨다는 보고가 있다더군요. 아직 검증을 거쳐야 하지만요.”
쓸 만한 정보. 조심스레 머릿속에 정리해 두었다. 어쨌든 내가 할 일은 이 네 개의 마정석에 마나를 채우면 된다, 이 말이지. 손으로 만져 보니 느껴지는 훌륭한 촉감이 내심 감탄스러웠다.
“어쨌든 여기에 마나를 역으로 주입하는 게 내 시험이란 거지?”
“네, 맞아요. 경이 마나 흡수를 안다면 거꾸로 마나를 사물에 주입하는 방법 역시 알 겁니다.”
다시 한번 빈 깡통인 펜던트를 쳐다보았다. 시험 내용은 쉬워 보였다. 하지만 얘기는 그럴듯해도 직접 하는 처지에선 막막할 뿐.
“원리는 알아도 정확한 방법은 모르겠는걸.”
“아니요, 알고 있을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이 아니라 무의식이지만요. 힌트를 드린다면 옛날 문헌에선 이렇다죠. 「부드럽게 달래가며 힘을 불어넣으면 된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손에 마나를 집중했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하마드가 조용히 무어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주변부의 마나 유입이 차단되는 느낌이 들었다. 붉은 경고창이 주변 마나가 차단된다는 것을 재확인시켰다.
‘그럼 이제는 이 작은 공간에 유입된 마나만 남는다는 거군.’
“자, 그럼 시작하자고요. 소리와 빛을 포함해서 모든 마나의 유입을 막았습니다. 대화도 오직 저하고만 할 수 있을 거예요.”
별수 없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실패하면 본전도 못 건지고 망신만 당하려나. 모르지. 어쩌면 다시 한번 농막 앞에서 고블린 콧김을 쐬러 갈지도 모르겠다.
‘설마 그 지랄을 또 하라고 회귀했겠어?’
“눈을 감아 보세요, 경. 전에는 보지 못했던 움직임이 느껴질 겁니다.”
그의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물론 방해될 수 있으니 시스템을 켜지 않은 상태였다. 까매진 시야 너머로 번개와도 같은 빠른 움직임이 보였다.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각종 색깔의 선들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건…….”
각각의 색이 심상치 않은 형체를 이뤘다.
“사람들과 바닥, 물체들의 외곽선이었군.”
자기 전에 눈을 감으면 이따금 희미하게 보였던 그 선이 마나의 움직임이었다니. 눈을 감고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그 형태에 감탄이 절로 솟았다.
“마나를 집중시킨 상태에선 더욱 눈에 잘 띄죠. 마법사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방법입니다.”
그래. 그 지난 세월에 마법사 동료도 있긴 했지만, 이런 경험은 겪어 보지 못했다. 마법사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 바로 이런 미묘한 경험이었구나 싶었다.
“자, 그럼 이제 손바닥 위에 놓인 아티팩트를 보도록 할까요.”
손바닥에 올려진 아까의 그 펜던트, 십자 형태로 놓인 채 연결된 네 개의 수정이 선명하게 빛났다.
“재밌네. 주변 마나의 간섭이 전부 없어지니까 아주 선명하게 느껴져.”
네마냐의 중얼거림을 알아들은 하라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말…… 느낀다고요, 선명한 마나를? 수련도 거치지 않은 2서클 사용자가?”
“응. 왜,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
“허. 아닙니다.”
기가 막힌 듯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녀석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과연…… 저도 한번 기대해 보죠.”
녀석의 목소리는 이내 사라졌다. 네마냐는 아티팩트를 천천히 가슴께로 올려 손안에 품은 채, 안에서 흐르는 기운에 집중했다.
‘따뜻하고…… 일렁거리는 수평선.’
물의 이미지가 달리 생각하지 않아도 전해졌다.
“아일라가 얘기했던 것처럼 물 속성 마나는 넘쳐나나 보군.”
기다렸다는 듯이 넘쳐흐르는 마나의 흐름에, 끝내 나도 통제를 놓아 버렸다.
―쏴!
흘러나가는 느낌. 곧 네 개의 수정 중 하나가 푸른빛으로 차올랐다. 수정 자체는 상당히 작으나 용량은 절대 적지 않았다. 하나를 채웠는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오금이 흔들렸다. 충전 완료 안내와 함께 경고음이 들렸다.
[치유의 기적 펜던트 충전 완료]
[물 속성 충전 용량 5/5]
다섯? 물 속성 수정석을 충전하는 데만 5가 소모됐다. 메모리한 마법을 규모 상관없이 다섯 번 쓸 수 있단 뜻이겠지. 내가 아는 한 보통 마정석은 용량이 이렇게 크지 않았다.
“다섯 번이나 된다니. 휴.”
조합장이 준 마정석을 얼떨결에 받았을 때도 용량은 단 3번이었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강력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당 5회용인 수정체 총 네 개를 충전하라고 하면…….
“총 이십 회분의 마나를 충전해야 한다니. 와, 뭐야 이거. 왜 이렇게 용량이 커?”
그때, 녀석의 짓궂은 목소리가 마나를 타고 사방에서 전해졌다.
“아, 그 펜던트가 작아 보여도 고위 사제가 사용하는 아이템이라서 마나가 많이 필요해요. 뭐, 안 되면 언제든 포기해도 되고.”
당했군. 그것도 제대로. 네마냐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목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어쨌든 다시 시험으로 돌아왔다.
“휴. 그럼 이제 남은 건 불, 빛, 흙 아니면 전기겠군. 마나가…… 부족할 것 같은데. 그래도 불은 일전에 조금 흡수를 했었으니까 나으려나.”
그 생각에 곧바로 불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몸속의 혈류가 요동쳤다. 마치 화염에라도 데인 것처럼. 그리고 이 흐름을 따라 적절하게 주문을 읊어주면 되겠지. 가령.
[퓌르]
불의 속성 그 존재 자체를 드러나게 하는, 이 원시적인 주문처럼 말이다. 역시 새벽녘에 시도했던 불 속성 흡수 덕분에, 물 속성만큼은 아니어도 불러내기가 훨씬 쉬웠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의 기운이 흐름을 타고 전해졌다. 불의 마나가 빠져나가자 한 번 더 몸이 흔들렸다. 몸의 힘이 가파르게 소진됐다.
‘그래도 시험 끝까진 버텨야 한다, 네마냐, 그때 고블린 앞에서처럼 또 쉽게 꺾이고 말 거냐!’
어금니를 단단히 물고 허벅지에 힘을 주어 버텼다.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기암시처럼 혼잣말을 꺼냈다.
“자, 이제 빛과 전기만 남았다.”
말을 하기에도 약간은 벅찬 상황.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큭.”
주저앉을 뻔했던 네마냐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무릎에 힘을 넣어 다시 자세를 유지했다.
‘힘은 빠져도 마나가 소진되지는 않았군. 친화력 덕분에 소모되는 마나도 줄어든 모양이야.’
[마나의 지식]
[마나에 대한 경험을 터득하였습니다. 마나 소모량이 감소합니다.]
시스템이 받쳐주는 느낌을 받으니 긴장 속에서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은 해 볼 만해.’
빛마저 차단된 결계 속에서 시스템의 건조한 한마디가 그래도 희망을 주었다.
“그래, 까짓것. 여기 많은 흙보다는 희귀한 전기와 빛으로 해 볼까. 먼저 빛부터.”
침묵이 가라앉은 사방에는 어두움이 가득했다. 빛, 빛이라. 한 줄기 빛이 없고 어둠이 가득한 이곳. 어디에서 빛을 불러 펼쳐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나가 남긴 했지만 두 번이나 뽑아내긴 힘들겠는데.’
가능하면 한 번에 해결해야 한다. 잠시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보이지 않는 정면을 응시했다.
“어두움, 가려진 시야에도 빛을. 가능하면 전기도 동시에…….”
확실하지 않아 망설여지는 손을 머리 위 높은 곳, 끝까지 뻗었다. 허공을 더듬이는 손. 너무 막연하기에 주문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 뭣이냐, 대충 번개 비슷한 그것.]
살짝 부끄러운 소리지만 다행히 하라드 녀석은 듣지 못한 모양이다. 게다가 네마냐도 마냥 도박을 건 것도 아니다. 시스템이 있으니까.
[마나의 이미지와 언어를 해석하여 적합한 주문을 찾아냅니다. 브론티/라이트닝의 주문이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브론티보단 라이트닝이 입에 익군. 진짜 라이트닝일 줄은 몰랐는데. 이럴 때 시스템이란 게 있다는 게 정말 사기적이라니까.’
우연히도 라이트닝, 그러니까 ‘번개’란 단어가 입에 익었다. 빛과 전기 마나를 함께 사용하는 마법이다. 물론 그러려면 소모량이 막대해서 보통 마법사들은 질색하고 만다.
[라이트닝, 에브티시아.]
‘필요한 마나의 양은 모르겠지만 시스템이 알려준 대로 써 보지, 뭐.’
효과는 탁월했다. 번개 자체는 아니래도 강력한 빛줄기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강렬한 회오리를 탄 마나가 펜던트로 흘러갔다. 비어 있던 나머지 두 수정마저 하얀빛과 노란빛으로 가득 찼다.
“세상에, 브론티까지 대체……. 아니, 감탄할 게 아니라,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갑자기 그 주문을 써 버리면 후유증…….”
“욱……. 일찍 좀 말하지.”
하라드 녀석의 말에 제대로 답할 새도 없었다. 거친 떨림과 무기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이게 녀석이 말하던 후유증인가? 영락없이 5서클은 되어야 할 만하다는 걸 덤벼들었으니 감수할 수밖엔 없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해 보긴 했는데, 두 번은 못 하겠다. 빨리 와서 확인해 봐.”
“……정말 채웠다고요? 포기한 게 아니라?”
적잖이 당황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왜 저래 저거, 보는 앞에선 당돌하게 굴던 녀석이.
“얼른 결계나 좀 걷어 봐. 답답해 죽겠네. 다 채우긴 했어. 이게 안 되면 내 문제가 아니라 펜던트 문제겠지. 아, 힘들어.”
“뭐라고요?”
“다 채워 놨다고. 한번 말하면 알아들어라, 좀.”
짜증 난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급히 결계가 걷혔다. 밀폐된 안쪽으로 상쾌한 공기와 온갖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덕분에 좀 울렁거리던 속도 살짝은 풀리는 기세였다. 급하게 누군가 다가왔다. 보나 마나 건방진 마법사 자식이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2클라시카면 아예 도전할 수도 없었을 텐데……. 친화력이 정말 무시무시하군요, 경.”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지?”
하라드는 조심스레, 네마냐가 쥐고 있던 펜던트를 빼냈다. 그 순간, 수정과 연결이 끊어져 마나를 대거 잃은 네마냐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엇, 무슨 일…….”
“괜찮은 건가!”
조금 뒤에 머물러 있던 바누라트와 병사들이 달려왔지만, 하라드는 조용히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시켰다.
“마나를 급격하게 소모하는 경험은 처음인 모양이네요. 자연적으로 회복될 테니까 지켜보죠.”
“치료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걱정스러운 바누라트의 물음에 하라드는 고개를 흔들면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괜히 마나를 주입하면 대상의 마나 능력에 악영향을 줄 수 있어요. 스스로 극복하는 게 최선입니다.”
하라드는 왼팔로 네마냐를 부축하면서 오른손에 놓인 펜던트를 조심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답이라도 하듯이 펜던트에서 강렬한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정말이네…….”
오른손으로 움켜쥐자 이내 빛은 가라앉았다. 허탈한 건지 어이가 없는 건지 하마드의 표정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무식하게 이걸 다 채웠어요? 위험할 수도 있다고 얘기했잖아요. 까짓것 2차 시험 한 번 더 보면 될걸.”
“난관 앞에서 절대 물러서지 말자고, 그렇게 결심했거든. 절대 잃지 말자고…….”
불안정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하라드에게서는 낮고 바람같이 흐르는 웃음소리가 났다. 조소나 냉소는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조급한 거지.’
이상한 일이다. 얼결에 타고난 약간의 재능으로 되잖은 술수나 부리는 사기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수룩해 보여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목적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아, 역시 못 당하겠네요. 하늘은 감당할 능력만 내려준다더니. 누가 그딴 소릴 했는지 모르겠어요. 인정하긴 싫지만, 나자리안 경의 능력은 진짜가 맞습니다.”
녀석의 한마디 말에 그간 걱정스럽던 바누라트의 표정도 희열에 물들었다. 그는 아들뻘 소년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하라드, 그런 얘기라면 이 친구는…….”
“네, 당연히 ‘완벽한’ 통과죠. 실수한 것도 없었습니다. 진짜 마나를 움직여서 속성별로 채워 놨을 줄이야……. 괜히 걱정했네요. 이 정도면 기사가 아니라 소드 마스터로 인증해도 될 겁니다.”
“소드 마스터!”
바누라트나 파드 모두 자기 귀로 들은 이야기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법사는 어딘가 무안한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마지못해 인정하는 셈이지만, 대단한 재능이네요. 왜 그리 싸고돌았는지 이해됩니다.”
“내가 왜 그리 초조했는지도 잘 알았겠지.”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서도 네마냐는 주마등과 같은 시야 속에서 헤맸다. 알아들을 수는 없는 소음에 불과했지만. 햇빛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따사로운 볕이 시야에 가득할 뿐이었다.
‘그래도, 드디어 내 손으로 벽을 하나 넘었구나.’
문득 포근히 다가오는 위안. 주변은 무척이나 소란스럽건만 기진맥진한 네마냐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네마냐 나자리안은 그렇게 잠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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