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연회장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며 시끄러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네마냐와 엘레나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 사이에 복잡한 시선이 얽혔다. 이윽고 공주가 입을 뗐다.
“조금…… 거슬리는 이야기를 한 걸지도 모르겠군요. 미안합니다.”
바가반드 영지의 기사에게 괜한 소리를 했다고 자책이라도 하는 걸까. 정작 나만 해도 어떻게 백작을 쫓아내야 좋을지 고민을 하는 마당인데.
“아니요. 저 역시 평소에 가지고 있던 고민이었습니다.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 오히려 후련하군요.”
엘레나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의외로군요. 나자리안은 영주에게 충성스럽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역시 정보 수집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 세계 기준으로 내가 전이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당연히 그 전과 지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태의 바가반드는 영지민을 지켜낼 방법이 없어요. 더군다나 공공연하게 역모 소리가 나오고 있으니.”
잠시 근처의 창가를 바라본 공주가 다시 네마냐를 바라보며 나머지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일로 이곳에 왔겠지만, 경이 여기 나타난 건 우연만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작은 농장이나 가지고 있는 일개 기사입니다. 어제도 보셨지만, 영주 일가와의 관계도…….”
어제의 얘기가 나오는 구도가 되자 살짝 어색하고 민망했다. 말꼬리를 흐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왼쪽에 찬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로, 엘레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흥미롭게도 우리 왕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란 건 확실하게 보여 줬으니.”
‘하는 말로 보자면 이미 내 의도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연회장에서 만나 나랏일을 논하는 부조리함에 자신도 어색함을 느꼈는지, 엘레나도 부연해서 설명을 달았다.
“아, 방금 드린 이야기는 확정된 게 아니에요. 다만 저 역시 자문회의에 참석하니, 전반적인 상황만 말씀드린 겁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제게 이런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시는지 모르겠군요.”
이제 조금 여유를 찾았는지, 엘레나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바가반드는 엄연히 왕국의 영토이고, 창세 신화의 무대라는 상징이 있죠. 포기해 버리면 그만큼 국가적인 손해일뿐더러, 간악한 자들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습니다.”
검집을 붙잡고 있는 엘레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나. 네마냐도 왕국이 포기한 바가반드가 어떻게 엉망진창으로 변했는지 알고 있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알게 되겠지. 어쨌건 지금은…….’
어쨌거나, 자신을 긴요하게 도와줄 수 있다는 뜻은 잘 드러났다.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대화해 보니 역시, 엘레나는 후계권을 버리고 기사단으로 떠나기엔 아까운 인물이었다.
“공주께 통치자의 자질이 있으시단 이야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공자께서 보시기엔 어떤가요? 세간의 평과 같나요?”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둔 뒤 대답했다.
“오늘 뵙자니, 오히려 그 평은 과소평가였더군요. 이런 분이 왕실에 계시다면 그것이 곧 마나의 섭리라 생각합니다.”
엘레나는 이어지는 칭찬에 민망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왕국의 꼬여 버린 상속 순위에 당연한 것을 포기하는 데 익숙해진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오직 이미지 하나는 멀쩡, 아니 더욱 선명해졌다. 위기 시에 필요한 전쟁 지도자의 면모다.
‘앞으로 기사단을 운영하게 된다면 특히나 더. 고블린과 싸울 유효한 전력이 되어 주겠지.’
나는 인사치레를 멈추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제가 이곳에 온 건, 어쩌면 공주께서 신성기사단에서 찾으시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하야스단의 안정과 고블린 방어 전략의 정상화를 위해 왔습니다.”
공주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자세히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숙부, 그러니까 조합장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만 자립과 정상화라면, 지금의 바가반드 영주가 있는 한 곤란한 일이죠.”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곳에 온 것 아니겠습니까?”
네마냐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넉살도 좋다고 생각하며, 엘레나 역시 네마냐의 말에 동의했다.
“무엇보다 아버지인 국왕께서도 동의하는 얘기예요. 이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었어요.”
“아.”
‘대강 어떤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미리 알려 주러 왔단 거군.’
앞서 만났던 귀족들은 조합장의 체면을 고려해 웃는 낯으로 반기긴 했다. 하지만 바가반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난색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 공주가 굳이 와서 이런 이야길 전한다는 것. 좋은 징조다.
“어떤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앞으로 충분히 원하시는 대로 진행될 겁니다.”
엘레나는 그 대답으로 만족했다. 앞으로 엘레나가 자신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 되리란 걸 알기 때문에 반가운 반응이었다.
‘앞으로도 기사단뿐 아니라 바난드에서도 내게 우호적인 세력으로 남으면 좋겠는데. 역시나 후계 구도 문제 때문에, 쯧.’
잡생각과는 별개로 한 가지 고민거리가 더 늘어났다. 분명한 건 바가반드 영지에 위기이자 기회가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제 네마냐에게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주가 직접 얘기할 정도면 왕실에서도 곧 공식적으로 접선해 오겠군.’
시간을 많이 소요했는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일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념식이 곧 시작되는 탓에 마무리 정리가 한창이었다.
“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오늘은 동생이 주인공이니까요. 오늘 이야기를 나눠 반가웠어요.”
“행사가 끝나면 조합장과 동행해서 전하도 알현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아버님도 기대하고 계시더군요. 숙부님처럼 독특한 분을 어떻게 홀리셨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후후…….”
“으음, 호의에 찬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괴상한 표정과 함께 마지못한 감사 인사를 올리자 엘레나가 재밌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별말씀을. 나중에 내게도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유를 가지고 다시 보니, 엘레나의 옷차림은 어제와 비슷한 색 조합이었다. 회귀 전에 종종 본 적 있는 신성기사단의 정복과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공주께서는 특정 색상의 옷을 좋아하십니까?”
“……그건 어떤 의미의 말씀이죠?”
“아, 대수로운 건 아닙니다. 그저 어제 뵈었을 때도 그렇고, 신성기사단 정복의 색 배치와 비슷한 것 같아서요.”
어떻게 기억을 하냐는 듯 공주는 신기한 표정으로 옷소매를 어루만졌다.
“저는 기사용으로 개량된 편한 옷을 입습니다. 아실진 모르겠지만 너무 하늘거리는 옷은 검을 쓰기엔 지…… 좋지는 않거든요.”
‘방금 분명 지랄 맞다고 하려 한 거지?’
가벼운 헛기침으로 맥락을 흐린 뒤 엘레나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어쨌든,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만 있으면 되니까요. 대신 야전에서 갑옷 안에도 입을 수 있도록 손을 보았죠.”
야전. 그 두 글자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화려한 연회 소리는 잠시 기억 저편에 남겨 둔 전쟁의 이미지에 파묻혀 갔다. 전쟁. 지금 상황에서 그 단어와 어울리는 대상은 하나뿐이었다. 마음이 차게 가라앉았다.
[고블린.]
“그렇다는 건 공주께서 동쪽 국경으로 가신다는 말씀이겠군요. 고블린 군단과 맞닿은 곳은 그쪽이니.”
원한다면 여자 계승을 반대하는 귀족 상대로도 왕국 상속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왕가의 검 한 자루만 가진 채 상속권마저 버렸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갔다고 전해졌었다. 신성기사단의 대장다운 일대기였다.
‘하지만 끝내 그 전설의 기사마저 막을 수 없었지. 이 전쟁은 단지 영웅 홀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야.’
비명, 피 내음, 무언가의 타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잠시 굳은 안색을 바로잡으며 네마냐는 어렵사리 현실로 돌아왔다. 엘레나는 꽤 먼 곳으로 간다며 자신의 새 직장을 소개했다.
“동부 국경보다 고블린과 더 가까운 곳으로 가죠. 성도 기사단에서 근무할 겁니다.”
“켈리도니온. 성도(聖都)를 지키는 기사단으로 가시는군요. 저도 당면한 문제를 두고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이미 몸가짐이나 표정으로만 미루어보자면 어지간한 기사, 그 이상이었다. 네마냐가 건네는 덕담에 엘레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꼭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우선은 바난드가 되겠죠. 모든 시작은 그곳에서.”
엘레나는 잠시 한 박자 쉬고 입을 열었다.
“적이 들어올 구멍부터 하나 막아야 합니다. 바가반드라는 댐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곧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겠지만.”
“십분 동감합니다. 저도 같은 대열에서든 후방에서든 함께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왕자의 성년식 준비가 거의 끝났다. 주위의 사람들도 북적였다. 그래도 네마냐의 관심은 여전히 곧 성기사가 될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 전선 앞에서 싸우기로 마음먹었으니 전선에서 함께 싸울 날이 곧 올 것이다.
인사를 마친 엘레나가 자리를 뜨자, 시스템 창에서 효과음이 들렸다. 임무라도 주려는 건가.
[추가 임무: 정보 수소문. 성기사단과의 연결 방법을 찾아보자.]
‘추가 임무라. 그런데 이건 미리 충족해야 할 조건도 있는 모양인데. 어디…….’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허공을 매만졌다. 슬쩍 구석 자리로 옮겨서 하길 다행이다. 누가 본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몰렸겠지.
[선결 과제: 기사단용 장비의 생산, 공급 능력을 충분히 갖추기]
‘아, 이제 금속 기술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고 퀘스트도 그쪽으로 나오는 건가.’
아직 필수적으로 선택할 스킬과 몇 가지 보조로 고를 스킬 세트를 정하진 못한 상태였다. 단지, 일종의 사업화를 통해 영지가 대규모 전쟁 군수기지가 될 수 있도록 재편하겠다는 목적만이 있을 뿐.
‘그러려면 어차피 금속 기술 방향 위주로 찍게 되겠지. 천천히 할 일을 하면서 정해야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떴다. 그때, 조금 먼 뒤쪽에서 익숙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아아, 나자리안 경. 여기 있으셨군.”
밀물과 같이 중후한 너털웃음의 목소리가 뒤통수로 밀려왔다. 바누라트. 한바탕 폭풍 같은 인사를 나눈 끝에 조합장으로서의 업무가 끝난 모양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른 분들은 만나 보셨나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 휴. 게다가 자네 친구도 겸사겸사 구해 왔지.”
“음, 생각보다 그리 반가운 선물은 아닙니다만. 모른 척하고 오시는 편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야, 네가 살려고 나를 버리고 가?”
미하일은 멱살을 잡으려 들었지만 정작 손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어딘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런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왜? 네가 평소에 노래를 부르던 꽃밭에 살포시 내려줬는데.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몇 분 동안의 승강이가 펼쳐진 끝에 간신히 가라앉았다. 바누라트의 말에 의하면, 곧 주인공인 아쇼트 왕자가 감사의 연설을 한단다. 네마냐의 기억을 되짚어보니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나중에 누이인 엘레나와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에 휘말려 들어갈 아이였다.
‘아쇼트 왕자라.’
마지막으론 행사의 주최자 격인 바난드 국왕이 등장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하야크 왕 대신 아니를 다스리는 하코브 4세. 지루한 연설 끝에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면 공식 행사도 끝날 것이다.
‘하코브 4세라. 계승 전쟁을 다루던 역사 시험 때나 봤던 사람을 직접 보게 되다니.’
계승 전쟁이란 어두운 기억과 관련된 이름이니 반가운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진정한 어둠과는 거리가 멀었다. 순한 맛이지.
“그러고 보니 나자리안 경, 엘레나를 만났겠군? 어제랑 오늘 귀가 먹먹하도록 자네 얘기를 들었어. 엘레나 녀석이 이것저것 물어온 것도 거의 경이 처음이야.”
“방금 공주님과 말씀을 나눴던 참입니다. 참 뛰어난 인재시더군요.”
바누라트는 껄껄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
“그럼, 그렇지. 국왕 내외께서는 교양이나 인간 사이의 교류는 등한시하고 검술이나 병서에나 열중한다면서 고민이 많은 모양이지만. 지금과 같은 시기엔 차라리 군사 작전이나 용병술에 능한 후계자가 필요하지. 그래서 현재로선 내가 일일이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네.”
생각만 해도 아찔한 모양인지, 바누라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것저것 소란이 많았을 것 같았다. 무심한 엘레나와 바누라트의 질린 얼굴이 교차했다.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네마냐는 연회장의 중앙으로 시선을 옮겼다.
“환관이 하나 나오는군요.”
“어, 그래. 시작하는군.”
“왕자님의 성년 하례식을 시작합니다.”
환관의 나직한 한마디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일행은 조합장의 뒤를 따라 아쇼트 왕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한 점 구겨짐 없이 자라난 왕자.
‘뭔가…… 엘레나와 달리 와닿는 구석은 없군.’
부족함 없이 잘 자라났단 건 알겠다. 모난 것 없는 인상까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좋은 미소 사이에서 약간의 공허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바난드의 군주께 세세토록 이어지는 복이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길, 만세!”
“만세! 만세!”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공식 절차가 모두 끝나 있었다. 만세 삼창이 끝난 후 국왕인 하코브 4세도 전면에 나서 짤막하게 소회를 풀었다. 거침없이 졸음을 유발하는 의전관의 답사가 사람들의 인내심을 자극할 때쯤, 행사가 끝났다.
“수고 많았소, 경들. 미하일 경은 인기가 하늘을 찌르니 초대도 많이 받았겠구만. 근데 아일라는 어디로 갔는지 혹시 봤나?”
“아일라는 양고기를 네 접시나 먹은 게 체한 것 같다고 잠깐 나간다더군요.”
“아, 그래. 나중에 안부나 전해 주게. 아니, 그러지 말고 자네가 직접 아일라와 같이 술친구나 좀 하겠나? 여비는 내가 좀 보태 줌세.”
품에 손을 집어넣은 바누라트는 이내 작은 양털 주머니를 미하일에게 던졌다. 손으로 받아내는 순간의 소리로 보아 역시나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짤랑짤랑. 바보 같은 소리지만, 그 소리에 네마냐마저 잠시 고민에 빠질 정도였으니까.
‘아, 저게 제일 부럽네. 나도 국왕 안 만나고 같이 가면 안 되나?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워, 오늘 3차까지 달려도 되겠는데요?”
들뜬 기분의 미하일은 이내 스트레스가 증발이라도 했는지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바누라트 역시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할 것 없이 놀다 오게. 내일까지 푹 쉬면서, 짐이랑 준비할 것들을 준비해서 모레 아침에 출발하면 될 테니까. 대신 네마냐 군은 내게 빌려주게나.”
모레 아침 출발이라고? 그렇다면 국왕에게 꺼내려던 기사 교육 과정 문제는?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과 함께 내가 손을 들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제 문제를…….”
그러자 무슨 소리인지 바로 알아들은 조합장. 멍청하게 자기가 얘기를 안 해 줬다며 바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 내 생각보다도 빠르게 일이 진전되어서 말이지. 헤어지기 전에 얘기했지? 지금 나랑 같이 들어가서 전하를 알현하자고. 사업 이야기랑 그 학업 얘기도 같이 처리하세.”
“다행히 일이 잘 풀려가나 보네요. 잘됐네요. 네마냐 저 녀석, 숙소에서도 종일 고민이었다니까요? 걱정도 팔자다, 참.”
‘어, 음……. 그때 그건 내가 시스템 창 보느라 그랬던 건데. 그냥 차라리 오해하는 게 낫겠지?’
말을 마친 미하일은 내 오른쪽 어깨 위에 팔을 올려 얼굴을 괸 채로 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귀찮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털었다. 미하일 카운터 용으로 미리 준비해 놓은 대사를 읊을 준비가 끝났다.
“아무렴 ‘백의의 기세를 떨치는 기사님’만 하겠어? 용도 제압하는 검술이 뛰어나다던데, 어릴 적 같이 지낸 나도 궁금하던걸.”
“그만해! 누가 그런 소설을 지어낸 거야?”
녀석의 버럭 소리에 한바탕 웃음이 일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밀은 아일라를 살피러 간다며 자리를 떴다. 손을 흔들어 헤어졌다.
“공기가 벌써 차군요.”
“이제 여름이 가고 있으니까. 계절은 짧지.”
촛불만이 어스름하게 켜진 성 바그라트의 전당은 침묵이 깊었다. 잠시 허공에 차가운 입김을 피워내던 바누라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 그럼 가 볼까?”
“네. 그런데 알현은 어디서 하게 됩니까?”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성 바그라트 전각 안쪽의 출입구로 나왔다. 대리석으로 완벽하게 포장된 안쪽 마당을 통해 건너면 보이는 거대한 대리석 건물.
“이제 다 왔어. 저 멀리 슬슬 보일 걸세.”
아직도 건물 곳곳엔 빛이 들어와 있었다. 두 사람의 대리석 밟는 소리만이 허공에 자박자박 퍼져 나갔다.
“저 건너편의 건물이 알현 장소라네. 회견실이라고 할까? 전하와 몇 사람 정도만 남아서 기다리고 있을 걸세. 사업을 위해서라도 자네 ‘특례’ 문제는 마무리해야지.”
바누라트는 평소 말버릇대로 입을 열다가 회견실을 하야스단의 말이 아니라 동방 제국의 말로 꺼낼 뻔했다.
‘그만큼 서방 제국의 영향은 거스르기 어려울 정도란 뜻이겠지.’
하지만 네마냐가 조합장의 이야기에 곤혹스러운 웃음을 자아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하…….”
‘이젠 대놓고 특례라고 하는 걸 보면 그냥 끝없이 부려먹을 기세인데, 으아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네마냐의 등덜미가 어스름한 반달 빛을 받아 소름이 끼친 듯 푸르게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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