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하례회가 열리는 4월 1일. 월요일 아침의 여관이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일하러 가는 이들을 위한 아침 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냄비와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귀를 자극했다.
“시끄러워서 도저히 못 자겠군. 기껏 여행을 와도 잠 한 번 맘대로 못 자게 하네.”
“어쩔 수 없지. 기왕 일어난 김에 차나 한잔 때리고 마저 쉬자고.”
일행은 늦은 아침을 들고 목욕탕에서 몸을 데웠다. 느긋하게 쉰 후 정신을 차리니, 오전이 폭풍처럼 흘러가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마차는 이미 아니 시내의 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눈 좀 붙였어?”
덜컹거리는 소음 속에서 의식을 일깨운 것은 아일라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벌써 마차에 타 있네요. 미하일은요?”
“마음을 조금 느긋하게 먹었더니 피로가 몰려왔나 봐. 녀석도 자고 있어. 나도 살짝 졸 뻔했고.”
잠시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고 있으려니 정신이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문득, 자세한 사정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도 선뜻 계약해 준 아일라에게 고마움이 솟았다.
“아직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계약해 줘서 감사해요.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갑자기 쑥스럽게 왜 이래. 계약만 했지, 딱히 한 건 없는데 뭘.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 마정 합금 얘기도 곧 해야지?”
아일라는 쿡쿡거리며, 진작에 꺼내려고 했는데 마차에 오르자마자 잠들어서 못 건넸다고 농담을 건넸다. 기지개를 켜며 애써 답했다.
“밤에 생각할 일이 많으니 잠을 늦게 자네요.”
밤중에 스킬 육성 계획을 짜느라 잠을 못 잔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아일라는 가벼운 웃음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지금은 일정도 바쁘니까, 차라리 시간이 넉넉할 때로 미뤄 두자고. 어차피 곧 바가반드 영지로 돌아갈 거잖아?”
그래. 생각해 보면, 문제 될 건 없다. 어차피 금속 제련 방식을 배워 보고 가공법을 활용하려면 바가반드 영지여야 한다. 중요한 가공 시설과 비밀이 타지로 유출되는 건 곤란하거든.
‘영지 아닌 곳에서 시설 확보도 문제고, 정보 유출도 걱정이지. 차라리 마정 합금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는 게 낫겠는걸.’
대신 그렇게 된다면 아일라와의 본계약은 꽤 나중의 일이 될 것이다. 하스페다의 장인이란 고급 인력을 이렇게 무상으로 부려먹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동안 동행해도 괜찮겠어요? 그동안만이라도 따로 떨어져 계시다 와도 됩니다. 하스페다의 손이라면 어느 공방이든 믿고 맡길 텐데.”
“너희랑 있는 게 편해. 공방에서도 봤잖아, 도둑으로 몰린 거. 너희 하는 거 보면서 나도 계약을 판단해 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아, 그렇군. 공방에서의 갈등 사건으로 이미 아일라는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제아무리 실력자라고 해도 시장에 서기는 어렵지.
‘스파이나 밀사랍시고 귀찮게 구는 이들마저 있다니, 더 심하겠지. 우리랑 같이 있으면 그나마 길드의 눈치를 봐서라도 덤비진 않겠고.’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네마냐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일라의 이야기대로 하자고 했다.
“좋아요.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 편히 말씀하시고요.”
“내가 불편한 걸 참기라도 할까 봐? 걱정도 팔자네. 나는 노숙도 상관없어.”
“흐흐. 설마 노숙까지야 하겠어요?”
일행이 머무는 숙소는 시내 중앙에 있었다. 시내 중심가는 도시의 입구인 ‘사자의 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저잣거리는 왕성과 관청이 있는 바그라트 요새 앞까지 이어졌다. 그 길은 2km쯤 되어 보였다.
‘그간 봐 왔던 동네들보단 크긴 해도, 역시 현대 도시와 비교하면 애들 장난감이군.’
당연한 소리지만 길은 많이 막혔다. 좁은 도시에 사람이 북적이니 당연한 노릇. 점심도 먹지 않고 나오려니 허기가 강렬했다. 행사에 가기 전까진 최대한 먹지 않을 요량이었다.
“와, 그래도 바그라트 요새를 말로만 듣다가 직접 보니, 확실히 볼 만한데요?”
바그라트 요새의 웅장한 입구를 보는 게 훨씬 나았다. 황량한 사막을 그대로 담아낸 듯 사암 계통의 바위를 쌓은 성벽.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을 그대로 담아낸 모양이었다. 특히 반가운 소식은, 요새 안쪽으로 왔다는 건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우리 동네 영주관은 시커먼데, 여긴 돌도 참 예쁘네요. 무슨 차이가 있는진 몰라도.”
미리 마차에서 내린 네마냐가 아일라의 손을 잡아 부축해 주었다. 자연스레 손을 내민 아일라의 표정은 썩 밝아 보이진 않았다.
“겉모습만 그래, 겉모습만. 예쁘게 지어 놓곤, 안에서는 개도 웃을 만한 썩을 일들이 넘쳐나지.”
“작은 동네라고 썩 좋은 것도 아니에요. 당장 우리 잘나신 바가반드 영주님만 해도 흉년이 계속되니까 백성들 세금을 대폭 올렸죠. 대체 어찌 되려고…… 헉.”
별로 관심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미하일 녀석이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허둥대는 품이 어딘가 어색했다. 설마…… 싶었지만, 역시. 이야기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다. 페넬로파.
‘저 녀석 제대로 덜미 잡혔는데.’
“어, 음. 바가반드 공녀군요. 그간 무탈하게 지내셨는지…….”
“…….”
잠시 어색한 기운이 양쪽 일행 사이에 오갔다. 미하일의 인사에 무엇인가 답하려나 싶던 페넬로파는 곧 입을 닫았다. 한때 혼담도 오갔던 상대가 쓸쓸한 빛을 담은 얼굴로 지나갔다.
‘음……. 지금은 조용히 보내 주는 게 최선이겠지. 좀 더 감정이 진정된 것 같으면 그때 얘기해 봐야겠다.’
네마냐는 연달아 뜻하지 않은 만남이 당혹스러웠다. 어제 일을 몰랐기에, 미하일은 조용히 눈치만 봤다. 다른 게 두려운 건 아니다. 다만 페넬로파와 한번 꼬여 버린 관계가 계속 악화되는 건 아닐지 우려가 될 뿐이었다. 아일라가 다가와 갑자기 네마냐를 토닥여 주었다.
“실연했다고 마음 쓰지 마. 보니까 이제 딱히 시비 걸지도 않는 모양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차라리 그런 거면 다행이게요.”
아무리 부인해도 아일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실연당했든, 걷어찼든.”
“으으.”
차라리 실연으로 걱정되는 거면 이렇게 곤혹스럽진 않았겠지. 돌아가자마자 백작과 싸울 확률은 높지만 페넬로파는 싸울 대상이 아니니 더 그랬다.
“에휴, 말해서 뭐 해요. 얼른 들어갑시다.”
“그, 그래. 그냥 서 있으면 어색하지? 하하하…….”
민망해하는 미하일의 말을 끝으로, 일행은 궁성의 정문으로 향했다. 여길 한번 와 본 적 있다는 아일라가 길 안내를 겸해 계단을 올랐다.
“궁성을 몇 번 와 봤다고요?”
“그래. 이따금 기술 자문이 필요할 때 들르곤 했지. 옛날이야기지만.”
오랜만에 와 본다는 말과 함께 아일라는 걸음을 옮겼다. 거치적거리는 옷은 싫다며, 아일라는 바지와 대장장이들이 입는 상의를 골랐다. 예복이라기보단 일상복에 가까웠다. 그나마 네마냐가 설득하지 않았으면 아예 작업복을 입고 왔을 것이다.
“이게 그나마 편하긴 하네. 그래도 그냥 작업복이 길은 제일 좋아. 작업복 입고 싶다. 새 옷을 입으니까 너무 빳빳해서 피부가 다 쓸리겠어.”
네마냐는 애써 만류하며 옷을 입게 했다. 아무리 그래도 작업복을 입고 갈 수야 없었다.
“이번 하례회는 그래도 왕실 주최니까 신경 쓴 티 좀 내주자고요. 그을음 있는 옷으로 고객 상담하러 가지는 않잖아요.”
“사업 회의차 갈 때도 입었는데……?”
“으…….”
하지만 역시나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하늘색과 하얀색의 조화가 두드러지는 미하일의 옷이었다. 못 입겠다며 투정 부린 것과는 달리, 옷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무늬도 기품이 있게 적당히 달려 있었다.
‘여섯 시간 싸웠는데 졌다고 울상이더니. 주인공인 둘째 왕자 의상보다 더 잘 나왔잖아? 안나 그 녀석이 나한테 사기라도 친 건가?’
그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괜히 장난기가 치밀었다. 나는 미하일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건넸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의 연회장을 향한 채였다.
“야, 뭐 했길래 그렇게 좋은 옷을 받았냐? 아주 그냥, 공녀들이 너 보는 시선 봐. 사교계 깡패인데?”
“뭔 소리야, 어제 이 옷 하나 얻으려고 여섯 시간 싸우느라 죽었구만. 야, 네 옷이야말로 훌륭한 거야. 그런 차분한 검정 옷은 어디서 구한 거야? 하, 부럽다. 적당한 인기 없음!”
인기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돌팔매질로 무덤을 만들 기세의 발언이었다. 그 뜻을 대신해 네마냐가 대꾸해 주었다.
“지랄.”
“허. 너는 잘 모르나 본데, 너 보는 시선도 많아. 어떻게, 급하면 이 형이 사교계에 데뷔시켜 주리?”
“여자랑 대화라도 할라치면 부들부들 떠는 녀석이 할 소리인가.”
이성에게 말도 못 붙이는 녀석, 실전 데뷔나 시켜 드려야겠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네마냐는 미하일을 슬쩍 밀어 명문 공녀들이 밀집한 다과 테이블로 튀어 나가게 했다.
“야, 야……! 뭐 하는 거야?”
당황한 미하일이 이쪽을 쳐다보며 뭐라 항의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네마냐는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왕자 옷을 입었으니 오늘 하루는 왕자님처럼 만끽하라고, 후후.”
“야 이, 개자식이…….”
갑자기 튀어나온 미하일은 대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사방에 보낸 셈이 되었다. 주변의 공녀들과 공자들이 몰려들어 대화를 걸어왔다.
“어머, 공자와 같은 분이 계신 걸 모르고 저희끼리만 담소를 나누고 있었네요. 반가워요.”
“아, 하하하……. 잘…… 브특드릅니드…….”
“공자께선 어느 가문 자제이신가요? 혹시 이웃 나라 출신이신가요?”
“딱 봐도 의장용 검을 차신 게 무관이나 기사 계열 아니겠어요? 후후.”
여러 공녀와 공자의 가운데에 서서 침몰하는 한 척의 미하일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햐, 역시 무섭네. 혹시나 나한테까지 오지야 않겠지만 밑밥을 던져 두길 잘했지.’
미하일이 이쪽을 째려본들 어쩌겠나. 한 손을 입에 대고, 적당히 주변에 들릴 말을 퍼뜨렸다.
“바가반드의 꽃이신 기사 미하일 바드란이랍니다. 꽃밭을 심심하게 하는 건 사내의 도리가 아니라던가 뭐라나…….”
[힘내세요, 기사님! 큭.]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작은 마나에 실어 보낸 응원. 속삭임 소리를 전달하는 ‘위스퍼’란 이름의 간단한 마법이었다. 질문 공세에 말려든 미하일을 버려둔 채, 나는 곁에서 한숨 쉬는 아일라를 데리고 연회장 내부에 진입했다.
“아, 조합장님이 저기 계시네요.”
“옷가지는 또 웬일로 멀쩡히 입고 왔대.”
아일라 말처럼, 조합장은 작업복 차림이던 평소와 달리 훌륭한 모피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몇 명의 귀빈과 이야기를 나누며 포도주를 들고 있었다.
“와하하, 그래서 그놈이…… 아, 왔군. 손님이 와서. 먼저 좀 실례하리다.”
바누라트는 담소가 한창이던 자리에 잠시 양해를 구하곤 잔을 든 채 다가왔다. 알코올 기운에 살짝 홍조를 띤 얼굴이었다.
“오, 정시에 맞춰 잘 왔군. 아일라하고 음, 그리고 네마냐 군도.”
그 뒤에 있던 일행들도 다가오더니 제각기 관심을 표시했다. 정확한 신분을 모르는 이들인지라 우선은 간단하게나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차피 지금 자신의 계획 실현에 중요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지금 시내의 시계들이 하나같이 말썽이라서 사람들이 다 오지는 못했네. 기다리다 보면 다들 도착하겠지.”
“시계에 문제가 생겼다고요? 이상하네. 어지간해선 고장 날 일 자체가 없는 원리인데.”
아일라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그걸 지켜보자니, 기술자의 이른바 작업병 같은 증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자네들도 눈이 커질 만한 주제이긴 하지? 그래. 단순히 기계 장치로 만든 시계는 괜찮아. 문제는 고대인들이 만든 시계들이었네. 날씨가 너무 추워지니 금속에 들어간 특정 성분이 같이 동결된 모양이야.”
“또 기후 문제가…….”
“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 물론 여기서 그런 무거운 얘길 할 생각은 아니네만.”
고대 난쟁이가 시계를 만들던 시절과는 달리, 최근엔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추웠다. 하야스단의 역사에 대해선 네마냐도 이것저것 보고 들었다. 이 고산지대의 건물과 유적은 난쟁이들 시절과 거의 달라지지 않은 그대로란 것도 알고 있었다.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지. 금속 가공과는 별 인연이 없던 나도 궁금해지는걸.’
자신도 모르게 조합장의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에 녹아들었다.
“아무튼 새삼 놀랍네요. 난쟁이들 기술도 그렇고, 이곳 아니가 그렇게 오랜 유래를 가진 도시였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래. 서쪽의 제국이나 동쪽의 토후국들은 하나같이 자기네가 수천 년 역사라고 자랑하지. 하지만 하야스단이야말로 2천 년 전부터 이미 독립국이었어. 기억 속에서 잊혔을 뿐이지.”
난쟁이족의 혈통이 일부 통한다고 자랑스레 여기는 아일라도 이야기를 함께 이끌었다. 지나간 난쟁이족의 영광이라도 그리워하는지, 낯빛이 아련했다.
“가뜩이나 기후가 나빠지고, 하야크 왕국이 무너진 것도 한몫한 셈이지만.”
“음, 뭐…… 이미 지나간 얘기지.”
약간 어른의 사정이 있는 듯한 이야기로 불편한 눈치가 조합장과 아일라 사이를 오갔다. 하야스단의 정치적 문제는 워낙 복잡해서, 이렇듯 뭔가 얘기만 꺼내려 들면 불편해지기도 쉬웠다. 적어도 오늘 같은 잔칫날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기술 얘기나 합세.”
“……그러죠, 뭐.”
아일라와 조합장은 한숨과 함께 협의를 마쳤다. 이후론 기술적인 이야기만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 역시 연회에는 별 관심이 없는 부류인 모양이었다. 기술적 관점에 관한 토론에 격렬한 졸음을 느끼자, 네마냐는 양해를 구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사방을 살펴보던 시종 한 사람이 쟁반 위에 잔을 가득 채운 채 따라왔다.
“기사님, 조금 졸리신 모양이군요. 포도주 한 잔 드시겠습니까?”
“아뇨, 술은 괜찮습니다. 정신 차릴 만한 음료면 될 것 같은데, 다른 것도 있습니까?”
시종이 웃으며 쟁반을 내려 두고, 따뜻한 물이 담긴 항아리를 들었다.
“보통 숙취를 깨거나 속을 깨우는 용으로 포도주 차를 드시곤 한답니다. 따뜻한 물에 포도주를 1:1로 혼합해서 향긋함만을 살린 음료수죠.”
‘술에 물을 탄다고……? 그걸 즐겨 먹어?’
소맥이나 말아먹던 서준의 기억으로는 의아한 배합이었다. 귀족 취향처럼 순수하게 맛을 즐기려는 것 같은 여유는 누린 적이 없었다. 그런 의아함이 얼굴에도 묻어났는지, 시종이 계속 설명조로 말을 이었다.
“물론 보통 포도주가 아니라 정향이나 송진을 배합해서 향을 배로 강화한 것이라, 옅다는 느낌은 안 들 겁니다.”
“정향과 송진이요? 그걸 술에 넣었다고요?”
“네. 왕실에서 특별히 공수한 정향, 왕실 소유 숲에서 바람 마력을 입혀 솔향을 키운 송진을 와인 항아리에 칠한 다음 포도주를 넣죠. 보관은 물론, 숙성도 훌륭하게 됩니다. 바난드의 특산품인 향료 와인이란 겁니다.”
‘귀족들 취향이란. 솔잎 넣은 음료수 맛이겠군. 의외로 맛있을지도 모르겠어.’
예전에 혼자만 즐겼던 비슷한 음료가 떠올랐다. 덕분에 ‘마셔 볼까’ 하는 생각으로 입맛이 동했다.
‘상큼하니 좋겠지.’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설마, 데자뷔? 네마냐와 마주하던 나이 지긋한 시종은 네마냐의 뒤쪽을 보며 웃음을 떠올렸다. 누군진 몰라도 무척 상류층인 것 같아, 뒤돌아 말없이 예를 취했다.
‘아.’
뒤를 돌아보고서야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마음속으로 가볍게 감탄했다. 꼬박 하루만의 재회였는데, 공주는 어제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왕의 첫째 자녀라면 시종이 의상 정도는 매일 바꿔 입히려 들 텐데.
‘뭐, 그래도 하늘색과 연청, 연보라색 조합이 제일 어울리는 건 맞으니까. 자세부터가 완벽한 기사의 모습이군.’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레나는 아주 옅은 미소를 보였다. 네마냐는 살짝 고개를 들고 웃음을 지었다.
‘연출된 표정을 보면 우연한 만남은 아니고 찾아왔다는 느낌. 뭔가 할 말이 있단 걸까.’
첫인사는 이미 어제 했으니, 가벼운 농담으로 본론을 열었다.
“전하, 어디 계시다 오셨습니까. 귀족 자제들과 기사들이 목이 빠지게 찾더군요.”
“남정네들, 말도 마세요. 하나같이 자기 자랑에,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애처럼 대한다니까. 느끼한데 속 좀 풀어 줄 만한 건 없을까요?”
“하하, 그러실 만합니다.”
두 사람과 달리 시종은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부드럽게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엘레나가 딱히 새겨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공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잔 하나를 집었다.
“그렇잖아도 공주님을 위해 제가 화끈한 정향을 두 배로 넣은 포도주를…….”
“아니야 집사! 향료 포도주는 됐어!”
“흠, 역시 입맛이 예민하신가 보군요. 그래도 이렇게 해야 텁텁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면 대신 후추라도…….”
얼굴을 찡그린 엘레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연거푸 거부했다.
“됐다니까. 포도주 차나 줘요, 할아범.”
“할아범이라니……. 아직 50도 안 됐는데 슬픈 말씀이군요.”
도저히 50세 아래론 보이지 않는 노안 집사가 눈물을 닦는 척하며 포도주로 빠르게 차를 만들었다. 자줏빛 액체가 덥힌 물에 색을 입혀 나가는 모습이 꽤 볼 만했다.
“그건 그렇고, 나자리안 경?”
공주가 친절한 미소를 띤 채로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 네마냐 역시 기꺼이 대답했다. 이제 본론이 나오겠지.
“예, 공주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나요. 복잡해질까 싶어서 제가 숙부께는 별다른 전언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우리가 만난 건 아실 텐데.”
“네,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공주님께서 잘 중재해 주신 터라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정작 조합장 자신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두 사람과 함께 만나자던 약속도 잊어버렸지만.
“감사는 무슨. 윗사람으로서 질서를 바로잡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엘레나의 시선이 어딘가 조금 서늘해졌다. 본격적인 사업 이야기로 넘어가는 건가.
“경께서 이미 태연하게 잘 대처하지 않았나요? 나자리안의 계승자가 다부지고 똑바르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어쩌면 바가반드의 미래가 달렸을지도 모른다고……. 아, 방금 얘기는 일단 제 개인적 의견이에요.”
막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왕실에서 벌써 내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단 건가. 바누라트가 일을 뛰어나게 하긴 한 모양이다. 네마냐는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바가반드 같은 변경에도 걱정이 크시군요.”
“부정은 하지 않겠어요. 애당초 가스파리얀 백작이 그곳을 차지한 건 반항적인 영주를 갈아치우기 위해서일 뿐이었으니까요. 설마 그렇게 악독한 줄은 몰랐죠.”
바가반드 영지는 원래 하야크 왕국이 무너지기 직전, 반대파 세력의 영토였다. 현 국왕을 지지하던 가스파리얀이 바가반드의 옛 영지를 점령하며 그는 공신이 되어 영지를 받았다.
“하기야, 그 오래된 영지 법만 아니었어도 가스파리얀이 그렇게 오래 버티진 못했겠지만.”
엘레나의 한마디 평가. 지금 와서 보자면 씁쓸할 뿐이지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네마냐의 머리에 흐르는 건 그다음 단계였다.
“이미…… 왕실에서는 영지의 가문을 교체할 준비를 하는 겁니까?”
왕실에서 벌써 바가반드에 개입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예상을 넘어서는 전개 속도다.
‘내게 이 정보를 흘리는 건 무슨 의도일까? 만약 이걸로 나를 시험하겠다는 뜻이라면 판이 엄청나게 커지겠지.’
그리고 그 추측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었다. 왕실이 직접 공주를 통해 자신을 파악하는 듯한 움직임. 영지에 대한 불편한 지점, 그리고 장래 계획마저 거리낌 없이 공유하는 부분까지.
‘바가반드로 향하는 칼날을 내 것으로 삼을 절호의 기회인가.’
물론 전략적인 자질과 의미 있는 신분을 가진 엘레나가 직접 보증을 하는 것만으로도 완벽했다. 네마냐의 마정석 탐지 능력과 아일라의 마정 합금 제조 능력은 후원자를 낚을 아주 좋은 미끼가 되겠지.
‘아일라 씨를 이용하는 것 같지만, 바가반드가 살아남고, 또 내가 살아남으려면 필요해.’
공주와 검은 망토의 신사는 자신들만이 알아볼 미소를 띄웠다. 이들의 주변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장막이 둘러쌌다.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뿐. 그래도 지금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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