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네마냐와 바난드의 공주가 시선을 마주했다.
‘이름이 분명…… 엘레나였지.’
엘레나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시선을 잠시 보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페넬로파가 있는 곳이었다.
“……신분과 경위가 어찌 되었든, 귀빈의 자격이 있다면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네. 무례가 이만저만이 아니군, 공녀.”
그녀는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네마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건 그녀만의 색채였다. 연두색과 연한 청보라의 배색을 갖춘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세검까지 허리에 차고 있으니, 영락없이 홀로 전장을 지배할 기사의 모양새군.’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한껏 멋을 부린 페넬로파가 빛이 바랠 정도였다. 하지만 페넬로파는 억지로라도 힘을 짜내 입을 열었다.
“전하의 말씀은 황송하오나…….”
기껏 입을 열었지만, 곧 공주의 단호한 손짓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귀하가 잘못을 인정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도 방관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과 함께 긴장의 끈은 끊어졌다. 꾀죄죄한 행색에 머리칼도 헝클어진 어떤 사내가 급하게 옷가지를 가져오는 중이었다. 옷에 얼마나 많은 보석을 박아넣었는지, 자칫 잘못 보면 미늘 갑옷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장신구조차 일일이 세공을 거친 것처럼 보였다.
‘……저게 그 문제의 드레스로군. 저걸 만드는 데 3주밖에 안 걸렸으면 그게 더 기적이다. 보석 장신구들 세공에만 3주는 걸렸을 텐데.’
페넬로파는 잔뜩 성이 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냐의 말을 듣기도 전에, 거친 손짓으로 옷가지를 앗아갔다.
“늦게 드려 죄송합니다, 공녀. 유감의 뜻에서 값을 받지는 않겠습니다.”
“처지를 잘 아니 다행이군.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만, 아무쪼록 처신에 유의하도록.”
진상 손님이 나와 마찬가지로 익숙한 모양인지, 사내가 익숙한 자세로 머리를 조아렸다.
“예…… 감사합니다.”
“손님도 좀 가려서 받고. 정말 불쾌하군.”
보나 마나 내 얘기겠지만, 이 정도 도발은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페넬로파는 내가 여전히 무시하고만 있자 말없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물론 지나치던 그 순간,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제대로 얘기하자고.”
“허.”
무섭지는 않지만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네마냐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었다. 그러고 보니 저런 모습이 완전 낯설진 않은데, 그, 마치 뭐라고 해야 하나…….
“음…….”
“곤란을 당하시는 것 같더니 괜찮으신가요? 표정은 괜찮아진 것 같은데.”
“아.”
어느샌가 잊어버리고 있었다. 엘레나. 바로 몸을 돌이키니 살짝 낮은 위치에 있는 상대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인상적인 파란 눈빛. 말이 필요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마치 영혼이라도 꿰뚫어 볼 것 같은 강인한 의지가 담긴 눈빛이었다.
‘아차, 인사!’
네마냐는 정신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그대로 조용히 엘레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전하. 윗전에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불쾌하셨는지요.”
“아니. 괜찮아요. 공자, 아니 경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성명이 어찌 되나요?”
“네마냐, 나자리안입니다. 신분은 아직 수습기사입니다.”
이름을 살짝 외워 보더니 그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마냐라, 그래서……. 재미난 이름이군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라니.”
공주는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라고 했다.
“일어나세요. 숙부께서 만나도록 해 주셨는데 이렇게 이상한 상황에서 인사를 나눌 줄은 몰랐네요. 잠시 기사단을 다녀오느라 늦었습니다.”
그래, 검집을 평소에 차고 다니는 공녀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네마냐는 온기가 흐르는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하지만 명문가 자제와 싸우는 일은 피하도록 해요. 오지랖 넓은 귀족들 사이에서 피곤해질 만한 사건이니까요.”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전하.”
수없이 많은 귀족의 갑질에 시달려본, 이미 체득해 버린 불편한 진실인 것 같았다. 다만, 아직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째 조언이 귀찮다는 투 같군요.”
아까 전과는 다르게 상대방은 약간 장난기가 눈빛에 떠올랐다. 싫지는 않았다. 오만한 귀족들만 보다 보니 오히려 신선하달까. 다시 오른손을 가슴께 올렸다. 예의의 표시다.
“그럴 리가요. 감사의 표시로 전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혹시, 당신께선 저를 알고 계셨나요?”
당황하지 않고 시종일관 예우를 지키는 게 특이하다는 듯이, 엘레나가 네마냐를 주시했다.
‘100% 확실한 건 아니었는데, 미소를 보니 정말 맞군. 엘레나 공주. 지금은 아니지만 그래도 먼발치에서 꽤 익숙하게 봤었으니까.’
편안한 웃음을 띠며 절친한 친구라도 본 것 같은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바가반드 내에선 엘레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가 네마냐 자신일 테지. 내적 친밀감만은 두둑했다.
“여러 명성이 자자한 성함을 제가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엘레나 공주 전하.”
다른 누군가가 들었으면 뒤집히고 난리라도 났을 이름이었다. 재밌어하는 눈빛과 함께 공주, 아니, 기사는 손등을 내밀었다. 엘레나의 무명지에 끼워진 반지의 마정석에는 깨끗한 백색의 기운이 돌고 있었다. 신성기사단의 상징인 치유의 마나 인장이었다.
“딱히 속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라 모를 줄 알았는데, 제가 거꾸로 당했네요. 쉬운 상대는 아닌가 보군요?”
“하하, 글쎄요. 이미 전하께서 의상실에 나타나셔서 충분히 놀랐답니다.”
“아무리 봐도 놀라는 표정은 아니었어요. 상대가 음료수를 끼얹어도 침착하니 말이죠.”
“하하…….”
‘역시 고블린 성전의 최전선에서 전황을 뒤집던 명장답게 흔들림이 없군. 옷차림이나 장비로 보면 대략 이즈음 기사단에 들어간 건 맞는 것 같은데.’
머릿속의 생각은 복잡했지만, 나는 변함없는 미소와 함께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네마냐로선 차후 강력한 동맹자이자 후원자를 만날 절호의 기회였다.
“혹시나 무례한 적이 있다면 다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천만에요. 삼촌이 하도 걱정을 하셔서 도와드리러 왔지만, 혼자서도 잘 맞추셨다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엘레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일 보셨다면 편히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옷을 고르려면 또 한참 걸릴 테니까요. 저 옷이 아마 네마냐 경의 것 같은데.”
엘레나의 손가락이 향한 끝에는 아까의 그 궁색한 몰골의 중년 사내가 내 치수에 맞춰 재단한 예복을 들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 보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얼떨결에 자리를 떠나 옷가지를 받아들었다. 최대한 단순하게 골랐음에도, 고급 재료로 만들었는지 이 세상 촉감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 기분이 묘해서 더 그런 건가?
‘사치스러운 감정은 갖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순간, 아주 순간 흔들릴 뻔했지. 침착해라, 네마냐. 큰 물주님께 가볍게 보여선 안 되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볼 일은 마쳤으니 돌아가야 했다. 얼떨결에 꺼 버린 시스템도 다시 열어 봐야 하고. 미하일이야, 이제는 기억 속에 묻힌 지 오래였다. 인사차 잠시 들러, 다시 엘레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먼저 자리를 떠나겠습니다.”
“기꺼이. 내일 만나면 인사나 해 주겠어요?”
“물론입니다. 어떻게 모른 척을 하겠습니까.”
“그래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열 발짝을 옮긴 뒤, 살짝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페넬로파의 화풀이를 받았던 사내와 엘레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사내가 이곳 의상실의 주인인 카시온인 모양이었다. 이야기에 집중하는 엘레나를 잠시 지켜본 뒤 조용히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엘레나가 예상보다도 인상적인 인물이었군. 내일 만나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 볼까.”
비록 원하지 않는 일이 여럿 끼어든 하루였지만, 지나고 나니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후련한 점도 있었다. 중요한 인물을 만나서 그런 것일까.
“……앞으로 업무로도 종종 보게 되겠지.”
그렇게 혼잣말을 흘리며 입구를 걸어 나왔다. 바누라트의 집사는 공주를 따라갔고, 마부는 아직 휴게소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네마냐는 마차에 올라 한숨을 쉬었다. 옷가지는 가지런히 정리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정신 차리자! 오랫동안 연애를 못 했다고 일일이 흔들려선 큰일을 어떻게 하나. 일단 가스파리얀 가문과 싸우는 데 집중하자.’
네마냐가 조심스럽게 계획해 둔 일정은, 약간의 오차를 제외하면 빠르게 진행 중이었다. 방해될 수 있는 여지는 최대한 없어야 했다. 엘레나의 손과 가볍게 스쳤던 오른손을 무의식중에 만지작거리는 건 몰랐지만.
“일단 새롭고 강력한 친구를 만드는 건 남는 장사야. 내가 충분히 강해지기까진 누구라도 이용해 주도록 하지.”
다시 카시온 의상실을 쳐다보았다. 강렬한 빛으로 사방을 덮어 버린 붉은 석양이 화려한 상점의 미사여구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석양에 건물이 묻혀 버리니 이제 좀 편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눈꺼풀의 힘을 풀었다. 어두운 차양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이윽고 피곤한 시야를 차단하였다. 참 안락한 어둠이었다. 아주 잠깐, 잠깐 정도는 쉬어도 될 것이었다.
- 17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