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카시온 의상실의 휴게공간.
냉수를 기다리는 사이, 바깥쪽 가게 공간이 소란스러웠다. 새로운 손님이 오기라도 한 모양인데 그 손님은 좀 심하게 까탈스러운 모양이었다.
“카시온 의상실도 이제 끝났네. 귀빈을 이렇게 대우하는 건 무슨 예의지? 아직도 준비가 안 됐다니, 언제 주문했는지는 알아?”
접객하는 직원의 난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주문하신 드레스의 공정이 복잡해서 계속 지연되고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못 알아들었어? 취소한다니까. 돈 충분히 벌었다, 이건가? 볼 만하네.”
여기까지 보고 네마냐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진상이네. 저걸 보면 꼭 회사 다닐 때 진상부리던 상사들이 생각난다니까. 특히 김 부장 그 개자식.’
그나마 김 부장보다 나은 점은 있었다. 일단 말투는 품격을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은은한 노기를 내뿜는 절제된 표현법. 어지간한 신분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성격이 썩 좋지 않은 건 확실하지. 하지만 어째 목소리가 낯이 익은데……. 설마 아니겠지.’
애써 불길한 생각을 지워 냈다. 생각이 많아 공연히 불안감이 든 거겠지. 아직 뜨지 않은 눈앞으론 각종 창이 띄워져 있었다.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기술 목록을 보며, 차후 능력을 어떻게 키울지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스킬이 많은데 어느 것부터 사용해야 효율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까.’
마나를 흡수하거나 설득과 같은 활동을 거치면서 일정한 효과나 스킬을 얻었다. 그러나 투자해야 할 기술은 다양하고, 각각 필요한 능력치도 다르니 적절한 계획이 필요했다.
‘완벽한 계획을 짤 수 없단 건 아쉬운 점이지. 지금 당장은 채굴이나 금속 활용 능력을 높여 보는 게 좋으려나.’
여전히 방 밖으로 들려오는 소음은 시끄러웠다. 그래도 용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에 집중했다.
‘그래도 역시, 최소한 칼 쓰는 법 같은 기본 기능도 필요할 것 같고.’
고민하며 바라보는 화면 너머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구들이 한가득해서 요란스러웠다. 일단 당장 활성화되어 있는 목록을 간추려 보기로 했다.
“대략 이 정도 되겠지.”
[광업 능력: 3 (초보자)]
[기초적인 이해가 끝났다. 연습차 곡괭이를 들고 주변의 돌덩이라도 캐 보자.]
[광물 채집 효율 -1%, 광산 경영 능력 -1%]
[마정석 탐지 능력 확대]
[검술 능력: 1 (문외한)]
[검을 쓰는 일이 뭔지 모르고 대충 식칼 휘두르는 수준. 아직 검을 맡겨선 안 된다.]
[자해 확률 +5%, 치명타율 +1%]
[남은 스킬 투자 수치: 5]
“씁, 아직 개방한 건 이 정도려나. 근데 무슨 능력이 이렇지. 키울수록 능력이 증폭되는 방식인 건가.”
어설프게 능력을 키웠다간 이해도가 낮은 수준이 된다. 3단계까지 개방한 광업 스킬의 부정적인 효과가 거의 없어진 걸 보면, 4단계까지는 열어야 추가 능력을 얻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불리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검을 휘두르다 상처를 입는다든가 말이지.
“아, 골이야. 집중해서 육성해야 할 부분을 골라야 한다는 거네.”
오픈 월드 게임류는 서준이 회사에 들어가기 전에 가장 즐겼던 종류였다. 거기선 충분한 시간만 들이면 원하는 모든 스킬을 습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설프게 육성하면 안 되는 건데. 꼭 할 것만 선택하라는 거군.”
안 그래도 골치가 아픈데 설상가상으로 주위도 점점 소란해졌다. 앙칼진 목소리가 응접실로도 가까이 다가왔다. 자연스레 나도 혼잣말을 멈추고 표정을 찌푸렸다.
‘아, 집중하기도 힘든데 시끄럽게 자꾸 저러네……. 아직도 계속 있는 건가?’
괜히 휩싸였다간 더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이쪽 사정을 봐줄 만한 기세가 아니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진상이 누구인지나 보고 슬쩍 피해서 나가야겠어. 미하일 녀석, 그러게 빨리 나왔으면 좀 좋아?’
고통받고 있을 미하일을 괜히 탓하며, 네마냐는 슬며시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런.”
하필이면 정확히 그 진상 목소리의 주인공과 눈을 마주쳤다. 이쪽이 누군 줄 알고 기다렸던 것 같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역시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어라. 땅굴이나 파겠다며 약혼한 상대를 내치신 분 아니신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나자리안? 귀족도 아닌 분이 잘도 들어왔네?”
‘하아……. 제일 마주치기 싫었던 상대라니.’
내키지 않았지만 피했던 시선을 마주했다. 오랫동안 시스템을 봐서 그런지 눈은 뻑뻑해도, 시야에 가려지는 건 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올려다본 너머. 실패했던 네마냐의 전반기 인생, 그 증거가 눈앞에 있었다.
‘페넬로파 가스파리얀. 가스파리얀 백작가의 따님. 실패한 전반기 인생의 증거이자, 내가 지고 가야 할 불편한 짐.’
무거운 짐을 다시 가슴 한편에 올려 둔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페넬로파는 아버지 가스파리얀 백작의 성질머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나쁘진 않아도 소위 ‘센캐’ 느낌이라는 거다.
‘나쁜 애는 아니었지만 결국 행복한 삶을 보내진 못했지. 어쩌다 저렇게 차갑게 변했을까. 어릴 땐 부드러웠는데.’
괜한 트집이 잡히지 않도록, 네마냐는 몸을 일으켜 오른손을 왼편 가슴에 올렸다. 정중한 말투를 한층 더 가식적이게 보일 정도로 가다듬었다.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없는 냉정함 그 자체였다.
“백작 공녀께서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경께서도 구태여 걱정해 주지 않아도 평화를 누리고 있답니다. 걱정스러운 건 무책임한 모험심에 무일푼이 될 경의 영지죠.”
‘뭐, 이 정도면 예전 직장 기준으로 봐도 온순한 편이지.’
험한 말, 궂은 말을 받아내며 천덕꾸러기 시절을 몇 년이고 보냈던 나다. 이 정도 도발에 넘어간다면 의지의 한국인이던 과거가 무색하지. 얼마든 맞받아칠 수도 있었다. 다만 백작 여식의 말을 맞받아치면 바난드에서의 사업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정면에서 귀족과 대거리하는 건, 비즈니스적으로 좋지 않은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활짝 웃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제 가련한 토지도 다행히 망할 일은 없어서요.”
어째서 내게 이렇게까지 원한을 품은 건진 모르겠다.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페넬로파의 얼굴이 흙이라도 씹은 듯 구겨졌다.
“어떻게 카시온에서 또 당신을 보는지 모르겠군. 인연도 저버리고, 짝이라도 찾으러 왔나? 영지의 명예에 누가 될 일은 삼가야지 않겠어? 아, 혼담도 멋대로 취소할 배짱이 있으니 상관없다 이건가?”
‘혼담을 망쳐 놔서 어깃장이라도 부리겠단 건가. 그건 너희 아버지가…… 아, 당연히 내가 파혼했다고 얘기했겠군.’
괜히 당사자끼리만 마음 썩이는 셈이다. 나는 썩소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화는 났지만, 파혼의 원인을 여기서 얘기해 봐야 나아질 건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직원이 불쌍할 뿐이었다.
처음부터 페넬로파와 네마냐의 사이가 아무렇지 않게 험담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였던 건 아니다. 아직 서준이 빙의하기 전, 어렸을 때만 해도 제법 친했던 기억이 있었다. 하물며 이 시점에선, 5년 전만 해도 약혼에 관한 이야기도 오가곤 했으니까.
‘통치 초기에 힘이 없던 백작이 영지 내에 이름이 있는 내 가문을 이용했을 뿐이지만.’
그렇게 보자면, 아무리 당사자 둘이 친하다고 해도 연결될 수 없는 관계였다. 아니, 그걸 넘어서 연결되어선 안 될 사이였다.
‘안 될 인연이었어. 미운 건 아니지만 차라리 페넬로파도 정말 상대를 찾는 게 낫고. 그리고 이젠…… 내가 백작과 싸울지도 모르니.’
일부러 왕성의 길드까지 와서 보험 사기 깽판을 친 건, 백작을 이기기 위한 우군을 얻는 목적이 있어서다. 예상보다 일이 빠르게 전개되어 왕실과도 뜻을 맞추게 되면 더더욱 좋겠다, 대충 그런 속내였다. 그런데 여기서 옛 썸녀가 나타난다고 달라질게…….
쾅!
‘쾅?’
의식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으로 전해졌다. 신경조차 쓰지 않는 쿨함에 화가 돋았던 모양이다. 페넬로파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친 채 가시 돋친 눈빛을 쏘아댔다. 얽힌 악연은 무시하기도 어렵군. 하지만 계속 이렇게 나오면, 네마냐도 참을 수만은 없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연설이 필요하시다면 광장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만, 저희 둘의 이야기라면 나중에 따로 하시죠.”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예 관심도 없고. 그냥 자리를 비켜라?”
도대체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휴, 나중에 진정하거든 이야기해 볼까 했는데, 이래서야 불륜 로맨스 소설 소재만 하나 나오게 생겼군. 이게 다 밀 녀석 때문이라니까. 빨리 안 나오고.’
애꿎게도 레이스와 장신구의 폭풍에 휩쓸리고 있는 미하일이 욕을 먹어야 했다.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면서 몸을 일으켰다. 더 마주하고 있어 봐야 사정을 이야기할 수도 없고, 감정만 나빠질 것이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시는 모양입니다. 주의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곳에 바가반드 백작의 기사로 온 게 아닙니다. 바난드 왕실의 원로이자 길드 조합장의 손님 자격으로 하례회에 참석하는 겁니다.”
“……조합, 왕실?”
페넬로파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 네마냐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 갔다.
“여기서 저와 설전을 나누면 곧 바난드와 바가반드의 명예가 실추될 겁니다. 공녀께서도 그걸 모르지 않으실 터.”
“그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할 말은 아닙니다. 다음에 다른 곳에서 만나서…….”
왕실의 원로가 초청한 손님과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는가. 자기 아버지는 물론, 자기 명예까지 실추가 될 것이다. 하지만 네마냐가 간과한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페넬로파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한지 미처 몰랐다는 점이다.
촤악!
‘흐아, 드라마에서 주인공들 당하던 수법인데. 하마터면 옷 젖을 뻔했군!’
아직 분을 못 푼 페넬로파의 손에는 아까 의상실 직원에게 네마냐가 주문했던 찻잔이 들려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서늘한 기운은 네마냐를 피해 갔다. 이쪽의 말투 역시 자연스레 존대에서 평대로 바뀌었다.
“이건 무슨 짓이지?”
“일언반구 없이 혼담을 내칠 땐 언제고, 이제는 정계 데뷔라고? 그게 나와 우리 집을 얼마나 거지같이 만드는지는 알고 있어?”
네마냐는 이마를 짚으며 다시 달래 주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이번엔 친구 입장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만하자. 여기서 이래 봤자 가게 측에 폐만 끼칠 거야. 나중에 제대로 이야기해 줄 테니까 지금은 여기까지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먼저 응접실에서 나서려 일어섰다. 그렇지만, 역시나 그렇듯 페넬로파는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디 가, 나자리안!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내가 이야기하는데 자리를 떠?”
미하일 녀석은 알아서 잘 돌아오겠지 싶어 급히 몸을 움직였다. 완전한 무시에 격분한 페넬로파. 고운 손에서 떨어져 나온 찻잔이 허공을 갈라, 완전히 떠나 버린 옛 썸남을 찾아갔다.
“……무슨!”
뒤통수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깨닫고 뒤돌아 피하려는 찰나.
―쨍강!
누군가의 그림자가 재빨리 네마냐의 앞을 막아섰다. 날아오던 잔은 그대로 허공에 가로막혀 떨어졌다. 깨어진 조각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상징하듯, 조각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페넬로파는 화낼 새도 없이, 상대방을 보곤 급히 굽혔다.
“그……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 놀라운 언행이군. 이곳은 귀하가 아니어도 여러 귀빈, 심지어 성국에서도 손님들이 오시는 가게인데. 하물며…….”
침착을 되찾은 네마냐는 일장 훈계를 늘어놓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연녹색 계통의 색으로 테두리를 채운 하얀색의 가벼운 복장. 여느 귀족 자제들이 입는 종류라지만 한층 더 날렵하게 선을 살려 냈다.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낯설지 않은 기운이라.”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보고서 여성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종들이 쩔쩔매는 걸 보면 상당히 지위가 높다는 것도.
‘그렇다는 건, 이 사람이 조합장이 얘기했던 조카딸인가? 공주 전하란 거군.’
대충 행동거지만 보더라도 귀한 신분인 건 분명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향해 돌아보는 투명한 눈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래, 예전에 먼발치에서 본 적 있는 눈매야. 공주님이 맞아.’
조용히 반쯤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눈앞의 인물은 그런 네마냐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마주 보진 않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아차렸다. 다만.
‘어째서 나를 이렇게 주의 깊게 쳐다보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공주가 변방의 일개 기사를 알 리는 없을 테고.’
친구보다 가깝고, 연인보다는 멀다며 음유시인들이 가십거리로 신나게 써먹을 관계. 새 인연이 빚어지고 원래 것은 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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