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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더하기 회귀는 먼치킨-14화 (13/200)

14화

점심이 되자 바누라트가 보낸 집사가 여관으로 찾아왔다. 겨우 잠이 깬 상태였던 우리는 간신히 눈곱만 뗀 채 마차에 올랐다. 네마냐는 새벽까지 새로 확장된 스캔을 공부하느라 잠이 모자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시는 길까지는 거리가 꽤 되니 미리 눈을 붙여 두시죠.”

집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일행 상태를 보곤 애써 미소를 지었다. 고맙단 말도 채 못한 채 다들 잠에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의 도착했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죠.”

넌지시 집사가 건넨 말에 부스스 일어나니, 한결 기분이 개운했다.

“의상실에 도착했나요?”

내 물음에 집사는 차창 밖을 가리켰다. 한눈에 봐도 크고 화려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카시온이구나, 오랜만이네.”

미하일이 으스러질 듯 기지개를 켜며 꺼낸 첫마디였다.

“맞네. 밀 너는 예전에 수도에서 기사 학교 시험을 쳤었지? 떨어졌지만.”

“시끄러워. 시험이 어려워서 잠시 미룬 것뿐이야. 나야 어차피 막내라서 작위 상속을 받을 일도 없고.”

티격태격하면서 쳐다본 공터 앞에는 ‘카시온 의상’이라는 입간판이 있었다. 상당히 큰 가게였다. 다만, 비단과 모피로 된 형형색색의 의복이 화려하다 못해 촌스러울 정도인 게 아쉬웠다.

‘정말 중세 패션은 과몰입이라니까.’

이곳 사람들은 카시온에서 옷을 해 입는 것이야말로 교양인이 되었단 증거라고 생각했다.

‘절제미가 하나도 없어 가지곤. 물론 하야스단의 유행이고, 카시온이 그 선두라지만. 그게 가능한 이유는 지극히 정치적인데.’

점주인 카시온은 직조 길드에서 대대로 조합장을 맡아 온 집안 출신에, 왕실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 정치적 배경이 유행을 이끌면, 선도한 유행이 다시금 사회적인 권력을 끌어모으는 희한한 구조를 보였다.

‘아무래도 좋다 이거야. 그래도 너무 심하게 화려한데. 지금 대체 이 동네가 무슨 상황인지는 알고들 좋아하는 건가?’

나름의 이유는 있다. 상류사회의 사교계 역할을 하는 의상실이다. 그 덕에 왕실에선 적당히 귀부인들의 허영을 자극해 정보 수집 기구로 활용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이건 좀.’

유일한 문제는 최대한 사치스럽게 입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진다는 것. 이런 인식은 수십 년 동안 강박증처럼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기본적으로 현대적인 단순함의 장식미를 즐기는 네마냐는 두통을 느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아일라도 마찬가지였다.

“여긴 언제 봐도 소름이 끼친다니까. 얼마 전에 유행한 옷도, 아예 보석을 줄을 세워 박아 넣더라고.”

“그만큼 인기가 받쳐 주니 그렇게 하겠죠. 2년 전에는 아버지가 억지로 끌고 갔었는데, 정말 시야를 마비시키는 옷이었어요.”

아일라와 대화하던 미하일이 어색한 표정으로 가게 표지판을 보았다. 표지판조차 유치할 정도로, 온갖 장식을 투머치하게 달아 놓고 있었다.

“딱 산적들이 좋아할 만한 옷인데? 걸어 다니는 보석상자.”

회귀 뒤로는 처음으로 방문한 네마냐도 분위기에 맞춰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치 예언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은 흉흉한데 장식은 더 화려하죠. 결국 험한 날이 오면 유행도 가라앉을 테지만.”

‘화려한 사치도 언젠간 가라앉지. 무덤 속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잿더미 속에서라면 골치가 아픈데…….’

걱정도 태산이다. 잘 사는 사람이야, 전란이 오더라도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재산을 팔든, 피난을 떠나든. 그러나 하야스단 사람들은…….

‘먹고 죽을 돈조차도 없는 사람들이 어딜 갈 수 있겠냐고.’

그런 네마냐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두 사람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이 구체적인 미래를 알 리는 없겠지만. 불안감에 찬 눈동자를 굴리고 있노라니, 마차가 마침내 멈췄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마부와 시간 일정을 좀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마부와 이야기를 나누러 나왔던 집사도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음을 지었다. 태연한 일상이로군. 아이들도 거리낌 없이 내달리는 거리는 아직은 평화로웠다.

‘이런 웃음이 앞으로 얼마나 빛나려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시간을 헤아렸다. 마차의 거친 움직임은 남은 시간이 얼마든 소용없다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고개를 저었다. 문득 띄워 놓은 채로 잊었던 창이 떠올랐다. 눈을 살짝 감아 보니 아직도 창이 남아 있었다.

[결정장애 치료제]

[판단 수치(현재 10)에 비례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습니다. 여기서 ‘합리적’이란, 주어진 정보의 범주 한정입니다.]

몇 가지 결정과 거래를 과감히 하면서 얻어낸 특성이었다. 대학 학부생 시절엔 점심 메뉴도 누군가의 제안이 없으면 고르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당시엔 유행어라도 되는 듯, ‘결정장애’라 불렀을 정도였다.

‘우스운 건 정작 회사 일에선 그렇지 않았단 거지. 나를 위한 일일수록 정작 나 자신은 사라지고 남의 주관만 남아 버렸으니.’

그래도 일단 새로 부과된 효과치곤 좋은 성격이었다. 결정을 내릴 때의 부담을 조금은 덜 수 있다는 뜻이니까.

“일단은 좋은 건 좋은 거겠지.”

결단력을 높여 준다는 건 좋다. 그런데 생각이 깊어지다 못해 온갖 부정적인 시뮬레이션까지 돌린다는 건 문제였다. 판단이 성장할수록, 그만큼 절망 회로가 불타오를 수 있었다.

‘지혜가 더해지면 고민도 더해진다는 건가.’

절망 회로를 돌리다가 우울해지는 건 바라지 않는데. 다행히도, 더 우울해지기 전에 바깥에서 구원이 찾아왔다.

“기사님. 아가씨께서는 일이 생겨 늦게 오실 모양입니다. 나중에 인사를 나누시고, 옷은 아가씨께서 미리 준비시키셨다니 지금 맞추러 가시죠.”

한참 마부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 집사의 말이 네마냐의 의식에 끼어들었다. 덕분에 구들장을 뚫고 지하실로 내려가던 절망 회로의 가동도 멈췄다.

‘그래, 시작도 전부터 절망하지 말자고. 이번에 가는 길은 저번보단 나을 테니까.’

“네, 그렇게 하죠.”

기운찬 대답과 함께, 마차 밖으로 내려왔다. 거대한 3층 건물이 눈앞에 들어찼다. 몇 번 오지는 않았어도 40년 전 기억 그대로다. 데자뷔 현상에 살짝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팔을 잡는 느낌과 함께 미하일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닿았다.

“왜 그래?”

난처한 웃음과 함께 녀석의 손에서 팔을 뺐다.

“아, 별것 아냐. 오래 앉아 있어서 잠깐 어지러웠나 봐.”

“그래, 고생했어. 카시온은 오래 있으면 부정 타는 곳이니까 용무만 빨리 보고 가자고.”

아일라가 카시온이라면 충분히 쓰러질 수 있다며 의도치 않게 분위기 환기를 해 주었다. 멋쩍은 웃음이 세 사람 사이에 흘렀다.

“휴, 다 끝났다. 얼른 나가자고!”

“그래, 부정 탈라. 마차 출발해!”

어쩐 일인지 가게를 나오는 집마다 다급하게 무언가에 쫓기는 듯 핼쑥했다. 주로 귀족가의 자녀인 모양인데, 피곤함 속에서 체통을 지키려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역시…… 카시온다운 악명은 여전하군.”

집사는 마차와 함께 밖에 머물겠노라고 전해 왔다. 혹시라도 바누라트의 조카딸이 도착하면 맞아야 한다나.

입구에 늘어진 발을 걷고 가게에 들어선 세 사람. 아치형 입구의 곡선을 따라 한 치의 틈도 없이 박아 넣은 보석을 보며 이미 공포를 느꼈다. 특히 아일라는 몸서리를 치며 마치 병균이라도 보는 것처럼 질색했다.

“어휴, 여기 덕분에 의사들이 새로운 병도 발견했다고 하던데, 환 공포 증후군이라던가?”

그 소리에 미하일이 슬쩍 아일라를 바라봤다.

“아, 그건 그냥 농담 아니었어요?”

“병이란 게 중요하다기보단, 사람들한테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거지.”

아일라와 미하일의 문답을 듣노라니 안쪽에서 직원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주저하는 두 사람을 뒤에 둔 채 네마냐가 입구에 걸린 장막을 걷자, 일행들도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바난드를 넘어 세계로 뻗어 가는 카시온 의상실입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접객 역할을 맡았는지, 직원 하나가 고객 명부를 든 채로 다가왔다. 눈을 찡그리며 이쪽을 바라봤다. 시력이 좋지는 않은 모양.

‘참, 안경 같은 기술도 아직 발전하지 않았지. 광학 분야 연구를 선행해야 하지만…….’

갑자기 안경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상념에 빠진 네마냐 대신, 그래도 와 본 경험이 있는 미하일이 맨 앞자리로 나섰다.

“예, 안녕하세요. 이번에 아쇼트 왕자님 하례식에서 입을 옷을 살펴보려고 왔는데요.”

“아! 예약하신 손님인가 보군요. 제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가문이신가요?”

“어, 난 귀족은 아니라 옷 맞추지는 않을 건데. 대신 여기 젊은 기사 둘이 바누라트 경의 도움을 받아 옷을 맞출 거야.”

직원은 아일라의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윽고 가볍게 손뼉을 치며 알아들었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아, 길드 쪽에서 모신다는 특별한 귀빈들이셨군요. 한창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오다 보니까 저희도 정신이 없답니다. 드시죠.”

직원은 그나마 수수한 옷들이 있는 일반 진열장 쪽을 지나쳐 앞장섰다. 향한 곳은 울긋불긋 눈이 아픈 귀빈용 의상실.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 수수한 옷가지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하일 역시 그 심정을 잘 알겠다는 눈치였다.

“내가 보기엔 네마냐, 네가 입고 싶을 만한 검소한 의복은 없을 것 같은데. 이 가게에선 일반 평민용 옷이 아니면 뭘 골라도 똑같은 것처럼 느껴져.”

아일라 씨의 말이 백 번 맞고 천 번 옳았다. 절제와 수수함이란 건, 애초에 이 가게에는 없는 선택지였으니까. 더군다나, 네마냐의 진정한 취향은 평민복이나 작업복에 가까웠다.

“어머, 손님들은 역시 귀티가 나시네요. 지금 입고 있으신 옷이 아름다움을 가릴 정도니까요. 저희 의상실에 정말 잘 오셨어요.”

네마냐는 애써 어지러움을 참으며, 그나마 방패막이로 나서 줄 만한 아일라를 가리켰다. 의상실 쪽과 싸워서라도 옷을 얻어낼 작정이었다.

“저희랑 여기 계신 여성분도 같이 옷을 맞출 거예요. 조합장께서 같이 예약을 했으니…….”

“아니, 나는 진작 가지고 다니는 게 있으니까 그걸 가져가면 된다. 너희끼리 맞춰. 난 슬슬 또 멀.미. 기운이 도져서 가 봐야겠다, 호호.”

지난번의 보험 사기 이후 펼쳐진 두 번째 연기에 다시 소름이 돋았다.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아일라는 출입구로 나가 버렸다.

‘이럴 때만 연약한 척을…… 비겁하다!’

미하일의 표정만으로도 비명이 생생하게 들렸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입구를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등 뒤로 어두운 기운이 닥쳐 왔기 때문이었다.

“그럼 두 분 손님들께 직접 맞춤형으로 예복을 준비해 드리죠. 어디 갔니, 안나! 이분을 안내해 드리렴.”

“예!”

어디 있었는지 보이지도 않던 어린 직원이 나타나 나를 안내해 주었다. 페이라라는 이름의 직원을 따라가게 된 미하일이 처연한 눈빛으로 인사를 건넸다.

“부디 ‘적당하게’ 갖추고 만나자고.”

“그러지 말고 못 버티겠으면 미리 사망신고서를 쓰고 가도 좋아. 유언장 상속인에는 꼭 내 이름을 쓰고.”

농담을 받아칠 기분도 아니었는지, 녀석은 조용히 손만 흔들었다.

“에휴, 말도 마라. 이따 보자고.”

“살아서 돌아와라.”

“그럼 가실까요, 손님? 어떻게 불러 드리면 될까요?”

안나라는 이름의, 또래 나이로 보이는 직원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왔다.

“뭐, 딱히 귀족도 아니고 그냥 기사 신분이니까 편하게 네마냐라고 불러요. 어차피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그렇군요. 그래도 손님이니까 저희 가게 정책상 언제나 경어를 쓰는 게 맞아서요, 공자.”

‘하, 공자(公子)라.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기 빼고는 그런 이름으로 불러 주는 데도 없었지.’

바가반드 지역이야 워낙 작은 곳인 데다가 사람이 적었다. 자연히 신분은 형식상의 직책이었고, 기사나 작위를 가진 귀족, 심지어 영주도 평민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10년 전, 갑자기 영지로 부임한 지금 백작 정도나 되어야 예외라 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현대인의 관념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곳 생활에서조차 신분 의식은 많이 약했다.

‘이 세계의 국룰이라면 인정해 줘야지. 이제 또 거창한 판을 벌여 보려면 지위가 있는 편이 움직이기에도 훨씬 편할 테고.’

현대인의 강점은 다른 어떤 게 아니라 유연한 적응력이겠지. 네마냐는 옷을 든 채로 잔뜩 벼르고 있는 안나를 우선 진정시켰다. 그냥 놔뒀다간 무슨 지옥의 패션이 탄생할지 모르니까.

“그…… 편한 대로 보여 주세요. 최대한 어둡고, 장식은 최소한으로 말이죠.”

안나가 접객용인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잠시 고민하더니 어쨌든 보기는 좋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

“그런 거라면 저랑 같이 오신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걸요, 공자. 같이 오신 도련님에겐 화려함의 극치를 쫓는 페이라 언니가 붙었죠. 아마 오늘 돌아가시면 쭉 뻗어 있게 될 거예요.”

“하하, 저런…….”

등줄기에 땀이 맺히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옷 하나 해 입기가 이렇게나 무서운 일이었던가. 하례회가 어려운 줄 알았더니, 사교계의 첫 문턱은 바로 여기 있었다.

‘일단 진짜 명복을 빌도록 하지. 미하일, 여기 묻히다.’

비록 그렇다고 해서 네마냐의 고난마저 끝났다는 이야기가 될 수는 없었다.

“아니, 내가 레이스 장식 달린 건 안 된다고 얘기했잖아요!”

“대체 레이스를 왜 싫어하는 거예요? 요즘 사교계를 주름잡는 남성들의 대세는 레이스 장식이에요!”

옷 전체를 휘감는 온갖 장식에 어지럼증이 다시 시작됐다.

“으아아, 제발 좀!”

마침내 장식물의 상당수는 빼 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나진 않았다. 본 라운드는 이제 시작이었다.

“이렇게 끼는 옷을 가져오면 어떡하라고……. 적당히 맞춰야지! 움직이기 편한 옷을 가져와!”

“글쎄, 이런 게 유행이라니까요. 좀만 힘을 들이면 훨씬 태가 산다고요. 눈에 분명하게 띄어야 하례회를 가도 살아남지. 아, 내 정신 좀 봐! 여기에 금실, 은실에 루비 장식도 더 끼워 넣으면 진짜로…….”

“안 돼, 좋게 말할 때 손 떼!”

다시 한 시간이 지나자 말투마저 사뭇 달라졌다. 비교적 수수한 편이라고 했던 자기소개마저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다시 차 하나를 우려낼 시간이 흘러갔을까. 내 손길이 멈춘 곳은 평민 전용 코너였다.

“……아, 그나마 좋은 옷이 여기 있었네. 그래, 이거. 이걸로 할게…….”

“이걸로 하시겠다고요? 점잖은 옷 열 벌을 갖다 줘도 생각도 없으시더니, 아예 평민복을. 이런 옷은 예법…….”

‘자꾸 예법 소리를……. 이 정도면 이미 장례식도 화려해서 못 입고 가겠다.’

마치 엄마를 따라간 대형 마트에서 두 시간 넘는 뺑뺑이에 지쳐 느낄 법한 무력감이었다. 결국엔 타협안을 내놓았다.

“바가반드 전통엔 이게 최고야. 장례식을 가든 무도회장을 가든 내가 할 테니 이걸로 줘. 대신 소매와 바지 끝단에 금은 자수 놓는 건 허락할게. 망토도 마찬가지고.”

그러자 안나의 철통같던 태도도 조금 누그러졌다. 하, 드디어 끝이 나는 건가.

“어휴, 알겠어요. 그럼 이걸로 준비해 드릴게요. 수치는 아까 재 놨으니까 대기실 안에서 쉬고 계세요.”

“응? 밀은 이미 끝나서 기다리고 있던 거 아니었어?”

미하일은 끝난 것 아니었느냐는 말에 안나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끝나다뇨? 저희 가게는 옷 고르는 데 세 시간은 잡는 게 보통이라서. 거기다 저 언니는 극성이라 족히 네 시간은 걸릴걸요?”

“……나는 적어도 지옥에 있는 건 아니었군.”

마음이 편안해지며 갑자기 웃음이 나는 한마디였다. 혼자 당하는 게 아니라는 말 만큼 마음 편해지는 말이 없었다. 옷가지 일체를 한쪽 팔에 낀 채 웃는 낯으로 두 시간을 이야기하던 안나는 의상실 내부로 사라졌다. 고작 두 시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세상의 모든 싸움을 혼자 다 치르다 베테랑이 되어 돌아온 느낌이었다.

“밀 자식, 돌아오면 아주 초주검이겠는걸.”

페이라라는 이름의 어원에 ‘경험’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곱씹으며, 네마냐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녀석이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는 동안 기다려 볼까.”

대기실도 역시 화려하고 거대했다. 조용히 혼잣말과 함께 푹신한 소파로 몸을 던졌다. 비단 재질의 촉감과 비싼 향료 냄새가 느껴졌다.

‘역시, 밤중에 눈을 감으면 바로 자야지. 화면은 틀지 말아야겠어. 아직도 눈이 뻑뻑하네.’

안구 부분을 주무르며 주위를 대충 훑어보았다. 화려한 장신구로 눈마저 피곤한 대기실. 건너편의 재잘대는 고객들을 제외하면 조용했다. 바가반드에서 입고 온 간단한 옷은 누더기로 보일 정도로 사치가 넘쳐났다. 상주 중인 직원이 이내 다가와 차를 들겠느냐고 물어왔다.

“시원하고 쌉싸름한 것 아무거나.”

‘머리가 지끈거려. 너무 분위기가 달짝지근해서 고삼차라도 원샷하겠다! 으, 느글느글해.’

‘쌉싸름한’ 차를 찾는 유별난 손님에, 직원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러갔다. 아직도 속이 답답하고 느글거려서 단추를 하나 풀었다. 과도한 장식물의 행진을 2시간이나 봤더니 죽을 지경이었다. 멋대로 단추를 푸는 게 예법엔 맞지 않겠지만, 알게 뭐람.

‘그래도 생각보단 괜찮은 옷을 골랐지. 나중에 유행하는 스타일로 다 맞추고. 운이 좋았어.’

회귀 이전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지금 시점에는 평화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서쪽의 제국에선 이 무렵 유행이 가라앉고 평범한 옷을 만드는 유행이 돌았지만, 그 새로운 유행이 하야스단에 아직 전해지진 않았다.

“그 유행이 전해지기 전에 패션이 끝나겠지. 누군가의 피로 칠갑이 된 누더기나 쇠갑옷 같은 것을 입을 테니까.”

혼잣말과 함께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얼음물의 날카로운 시원함을 상상하는 데 몇 분이나 흘렀을까. 새로운 손님이 오기라도 한 모양인지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아…… 반갑지 않은 얼굴을 여기서.’

내 깨진 약혼의 당사자이자, 가스파리얀 백작의 딸.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 1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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