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대화는 계속 무르익었다. 나는 자신감을 한껏 다지며 바누라트 조합장에게 내 본 제안을 꺼내 들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내 본론은 지금부터야.’
내가 일부러 침묵을 지키자, 거래가 성사되어 달아오른 바누라트는 어서 말하라며 재촉했다.
“다름이 아니라, 제 신분상의 문제인데……. 수습 기사를 유예받은 상태라 앞으로 6개월 안에 수습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유예라고?”
상속 유예 제도라는 특별 제도를 기억하지 못하는 바누라트였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드디어 알아들었다며 대답했다.
“아, 아! 그래, 그래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겠네. 그러니까, 갑자기 지위 상속을 받았을 때 기사 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상속하는 제도군?”
“예, 맞습니다.”
바누라트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알기론, 갑자기 부모를 여의는 등의 어려운 경우에만 해당할 텐데…… 아.”
조합장의 얼굴이 굳는 것을 바라보며 네마냐는 바로 답을 해 주었다.
“네. 이미 제 신원을 알아보셨다니 상속을 어떻게 했을지는 아실 것 같았습니다만…….”
잠깐 생각에 빠진 그는 맞장구를 쳤다.
“아, 그렇군. 그, 참 안타까운 상황일세. 기본적인 신원 조사는 하지만 구체적인 사생활까지는 잘 하지 않거든. 거, 안타깝게 됐네. 내 말이 위로될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일세.”
“별말씀을, 이미 몇 개월 지나면서 많이 안정됐습니다. 진심으로 위로해 주시니 저 역시 감사드립니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초상과 그로 인해 생겨난 복잡한 일들이 오가는 몇 마디 말로 요약됐다. 서준은 네마냐의 부모를 만나 본 적 없었다. 부모를 잃고 난 뒤에 빙의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회귀까지 하고 나니, 애써 위로하려 드는 사람들의 표정을 가만히 보는 것도 민망했다.
“어쨌거나 학업 문제가 사업 문제와도 겹치게 되겠군. 허, 그것도 좀 복잡한 문제야.”
아직 좀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키곤 있지만 바누라트도 이제 네마냐가 가진 문제가 어떤 성격인지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말씀대로입니다. 다만 제가 작게나마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조합장은 반기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무엇인가? 가능한 일이라면 내 최대한 물심양면으로 힘써 보지.”
바누라트의 확언이 기쁘다는 표정과 함께, 네마냐는 그를 곧장 함정 안으로 잡아끌었다.
“다름이 아닙니다. 길드 차원에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학업을 특별히 이수하게 말입니다.”
네마냐는 이미 바가반드의 백작인 가스파리얀과 불리한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이 체결됐을 때는 기사 학교 입학 시한까지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불리한 걸 알고서도 받아들였지. 그게 내 계획이었으니까.’
그래도 무리한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미하일이나 나중에 사정을 알게 된 아일라 역시 이 부분을 걱정했다.
‘사람들 얘기대로 만약 대책이 없는 상태였다면 내 결심은 멍청한 짓에 불과했겠지.’
사실 네마냐에겐 돌파구가 있었다. 딱 이 무렵, 왕실에서 꼼수를 부린다는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회귀 전 세계에선 왕비의 치맛바람 속에 있던 왕자를 두고 일종의 병역 비리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위법은 아니라지만 의혹을 사기엔 딱 좋은 방식이었다.
‘그 꼼수를 내가 먼저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굳이 그런 얄팍한 수를 쓸 수야 있나. 그것보단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특혜를 얻는 게 효과적이지.’
네마냐의 이야기를 들은 바누라트는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곤란하긴 하겠지. 징병 자원이 이탈하면, 왕국 기사단이나 왕국 관료들이 난리를 칠 게 뻔했으니까.
‘내가 굳이 거기 얽매일 필요는 없지.’
장차 큰 판이 벌어질 판에 일개 부하 기사 1 정도로는 머물 수 없다. 길마 입장에서도 시간 낭비로 생각될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강한 확신대로 장사꾼이자 도박꾼의 뉴런이 내리는 결론은 오직 하나일 뿐이었다.
“음……. 왕실 쪽과 직접 얘기해 보겠네. 내가 직접 꺼낸다고 해도 국왕 전하의 결단이 없는 한 쉽지는 않을 걸세.”
됐다. 일단은 그 정도만 되어도 충분했다. 정책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인 조합의 조합장이자 왕의 동생으로서 말한 것이다. 상대는 여태껏 한 명이 있었을까 말까 할 정도의 마나 친화성을 가진 사람이다. 어떻게 상황이 돌아갈지는 분명했다.
‘꼬장꼬장한 양반들이 시비를 걸겠지. 하지만 고블린이 수도 근처를 자유롭게 휩쓰는 마당에 반대해 봐야……. 아마 이때쯤 왕자 성년 하례식이 있었지? 조만간 상황을 파악해 볼 수 있겠지.’
전후 사정을 아는 네마냐는 시종일관 태평했다. 하지만 보고와 각종 질책만이 눈에 선한 바누라트의 낯빛은 매우 어두웠다. 달래 줘야 할까.
“감사합니다. 이래저래 걱정은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음…….”
바누라트는 여전히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네마냐는 바누라트가 상전에서 건넬 이야기를 같이 고민해 보았다.
“그렇지만 저와 조합이 이미 계약을 맺기로 했고, 이미 입증된 제 자질이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힘이 바난드의 곁에 선다면 왕실이나 기사단의 처지에서도 손해는 아닐 테니까요.”
“그럴까. 그렇다면, 기대할 만한 효과는 무엇이 있을까. 나도 고민을 좀 해 보겠네만.”
‘물에서 건져 주니 밥도 떠먹여 달라는 셈이군. 하지만 까짓거,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손가락을 하나씩 치켜들면서 평소 생각하던 점을 읊었다. 며칠 동안 이곳의 자료를 확인하며 이전 생의 기억을 연결할 시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현대인의 시각이 없으면 아예 논점부터 떠올리지 못할 것들도 있으니.
“먼저, 미개발 광산을 찾을 수 있죠. 제 탐지 능력은 광물의 특성 마나와 서로 반응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분명.”
자신도 직접 보았던 것이니 바누라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탐지법을 이용하면 마나를 분석할 수 없어 지나쳤던 기존 광산들을 다시 발굴할 수 있죠……. 어쩌면 이미 다른 용도로 채굴했지만, 몰랐던 곳도요.”
“확실한 이점이지.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론 자네가 보장하는 만큼 왕실이나 기사단을 설득할 순 없지 않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원하는 대로 잘 낚여 주고 있군요, 조합장.
“물론입니다. 마정석 광산을 대량으로 개발해서 부족한 공급분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한동안은 꽤 유용할 겁니다.”
“호오.”
네마냐는 여기서 한 발짝을 더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론 고블린과 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을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 설마! 하스페다의 비밀을 공개하는 건가, 드디어?”
‘그렇지, 그렇지. 함정까지 잘 따라와 줬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일라는 천천히, 그러나 완강하게 냉정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예전부터 얘기했을 텐데. 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들에겐 절대 알려 주지 않는다고.”
“하, 참. 좋다 말았군! 그래,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가?”
기대감이 사정없이 배신당해 무너진 찰나, 그 순간이 네마냐가 기다리던 한 번의 기회였다.
“대신, 이걸 약속드리죠. 현재 서방 제국의 도시들이 고블린을 어떻게 막고 있는지 저는 잘 압니다. 바난드뿐만 아니라 하야스단 전체를 똑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방안에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다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최대한 이해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큰 카드를 너무 일찍 꺼냈나 싶은 걱정이 들 정도였다.
“아마 이것만 조심해서 전달하시면, 군소리 없이 원하시는 대로 통과될 겁니다.”
“……자네, 그런 막중한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내가 알아듣는 게 정확한지 모를 정도로 무섭군.”
진땀이라도 나는 모양인지, 조합장의 둔중한 손은 장식이 화려한 수건을 잡고 연신 얼굴의 기름기를 닦았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은 무슨 상황인지 아직 영문을 모르는 기색이었다.
‘선뜻 대답을 받기는 쉽지는 않으려나. 제국의 기밀과 관련된 내용이라 지레 겁을 먹겠지.’
중년에 나이에 지켜야 할 것도 많은 양반이니, 도전이나 모험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토록 확실한 ‘카드’를 던져 주면 더 굳게 마음을 먹게 될 터.
“일단, 음, 잘 들었네. 어……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또 마침 좋은 기회가 있군.”
“예?”
“좋은 기회?”
세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였다. 바누라트는 예의 그 여유로움을 되찾아 능청맞게 대화를 이어 갔다.
“자네들, 앞으로 이틀이나 사흘 정도의 여유를 만들 수 있겠나? 내게 한 가지 괜찮은 제안이 있는데.”
‘일단 들어 볼까. 3일 동안 고민해 볼 모양인 것 같은데, 결론을 내리면 뛰어오겠지.’
손 둘 곳을 모르는 조합장과 상반되게 느긋해진 내 태도는 제법 비교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였다. 미하일과 아일라 쪽을 돌아봤다.
“저야 어차피 백수니까요. 하지만 일행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그 정도야, 며칠쯤은 괜찮을 거야. 적어도 아빠가 돈 빼돌린 걸 알고 방망이 들고 올 때까진……?”
“명복은 빌어 주지.”
아일라의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살짝 숙이자, 미하일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네마냐는 웃음을 참으며, 바누라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의미였다.
“그래, 요번 4월 1일부로 둘째 왕손인 아쇼트 왕자님이 성인이 되네. 그 기념으로 왕실이 주최하는 하례회가 열리지. 자네, 사교회는 일전에 참여한 적이 있었던가?”
그럴 리가. 첫 빙의 때는 번듯한 작위도 없는 지방의 하급 기사였다. 정치나 사교회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 미하일 녀석이 대신했다.
“이 녀석도 그렇고, 저희는 이제 막 바가반드의 산골을 벗어난 처지라서요. 하하하. 물론 저는 도시 물을 조금 먹었지만요.”
“거기서 나는 빼 주지 그래? 내가 세련된 건 아니지만, 멋진 난쟁이족 혼혈로 태어나서 촌스럽단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참.”
아일라와 미하일이 또 티격태격하는 걸 놔둔 채, 바누라트는 나를 바라보았다.
“잘됐네. 마침 내 조카가 자네 또래인데, 요번 하례회로 가지 않겠나? 어차피 준비시킬 것, 아예 두 사람 뒤치다꺼리를 한 번에 하는 것도 괜찮겠지.”
“하례회 준비도 도와주시는 겁니까.”
“물론일세. 처음 하는 하례회는 만만치 않으니까.”
일부러 네마냐는 한발 더 물러섰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옷차림 같은 거야, 제가 준비해도 될 것 같긴 합니다만.”
거래 상대에게 아무 의미 없는 호의를 베푸는 경우는 없다. 큰 호의를 베풀수록 뭔가 바라는 게 많다는 뜻이었다. 회사에서 일해 봤던 서준의 기억에 강하게 박혀 있는 세상의 이치였다.
‘지금 한번 도와주고 한바탕 생색을 내겠다, 이런 심산인가 본데. 어라? 그러고 보니 조합장이 왕의 동생이라고 했는데, 그 조카딸이라면…….’
왕실이나 귀족들과 얼굴을 터놓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차후 안정적인 광산 운영과 투자 유치를 위해서라도 있으면 좋기만 하다.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면 바누라트 같은 경험자의 도움을 얻는 것도 나쁘진 않기도 하고.
‘이 정도 의탁이야, 마정석 몇 줌 정도로 그냥 퉁치자고 해도 할 수 있겠지. 그래도 당장은 확실한 미래를 보고 움직이는 게 좋아.’
생각을 마친 네마냐는 제안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바누라트가 먼저 제안해 준 내용 그대로지만, 이로써 윗사람의 체면은 지킨 노릇이었다.
“제가 사교 쪽에 무지해서, 조카분의 준비에 방해나 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이번 도움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누라트는 마음이 완전히 놓인 모양인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다. 은혜를 많이 입힐수록 이 뜻밖의 녀석을 곁에 묶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당연히 도와줘야지! 안 그래도 우리 아이가 내일 의상실로 간다고 하니, 동행하게. 그 아이가 눈썰미는 있어서 의상 준비도 미리 도와줄 게야. 괜찮으면 이야기도 좀 나눠 보고.”
오랫동안 이어졌던 만남이 드디어 끝났다. 육중한 문이 닫히고, 네마냐 일행은 서로의 수확을 확인하며 기쁘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외의 일들이 연속이었지만, 오늘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한창 말씨름 중이던 일행을 잡아끌듯이 데리고 나갔다. 네마냐가 내색하진 않아도,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회귀하면서 새롭게 확인한 스캔의 위력. 뜻하지 않게 얻게 된 2서클의 마력. 하나하나가 위력적인 일보 전진이었다.
‘생각보다 계획이 완벽해지고, 앞당겨지겠지. 그러기 위해선 이 두 사람의 도움도 절실해.’
성큼성큼 활보하는 걸음. 내친김에 이번 생에선 상류층의 파워 넘치는 역할을 맡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그만큼 네마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도 늘어날 것이다.
‘자, 이제 남는 시간을 어떻게 써 볼까나.’
아직도 오후의 해는 창창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남은 일과를 두고, 네마냐는 조금은 즐거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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