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조합장은 아까 전 자신이 건네준 구슬을 스캔해 보라고 부추겼다. 지금 바로 그 구슬이 네마냐의 손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 아티팩트를 ‘탐지’해 보겠나?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은데.”
그 말에 따라 가느다란 마정석 결정체를 손에 쥔 채로 문질렀다. 차갑던 손아귀에서 급격한 무언가의 흐름이 느껴지면서 강렬한 열이 뿜어져 나왔다. 사라타 광산에서 겪었던 마정석 반응과 유사하지만, 그 강도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거셌다.
[알 수 없는 마나 유입 경고]
요란한 알림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주변을 슬쩍 둘러봤지만 다들 빛에 놀라기만 할 뿐, 소리는 듣지 못한 듯했다.
‘나한테만 들린다면 그건 시스템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야만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단 건 아쉬운 부분이지만, 동시에 현실과 가상을 헷갈리지 않을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이점이었다.
[알 수 없는 요인으로 외부 마나가 유입됩니다. 상황과 속성에 따라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마나를 수용하시겠습니까?]
[Y/N]
눈을 감아 보니 시뻘건 경고창이 뜨고 난리가 난 산태였다. 언뜻 보면 의아한 내용이었다.
‘마나를 흡수하는 건 충전하는 거니까 좋은 일인데, 위험할 수 있다고?’
마나의 유입이란 게 신체에 어떤 작용을 미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원래 회사원으로 지내던 세상에선 그런 개념이 없었다. 이쪽 세계에 왔어도, 회귀 전에는 마나 문제를 의학적으로 분석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걸 포괄할 만한 개념이나 연구를 해 볼 능력 자체가 없는 것에 가깝겠지만.’
거의 반세기를 이곳에서 살아온 네마냐다. 여전히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있다면, 의학 기술 수준이랄까. 이런 현상을 속 시원히 해명해 주지 못하다니. 그나마 그런 의심이라도 하는 자신과 달리, 곁에 있던 일행들은 의심은커녕 놀라기에도 바빴다.
“엇!”
“무슨 일이……!”
미하일과 네마냐는 물론, 바누라트도 무심코 탄성을 뱉었다. 생애 처음으로 보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던 까닭이었다. 푸르면서도 회백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찌 됐든, 여기서 나아가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되지.’
네마냐는 경고창을 쿨하게 무시하고, 과감히 ‘Y’를 선택했다. 뇌파와 동기화라도 됐는지 생각만으로 선택이 진행됐다. 시끄럽던 경고창이 사라지고 주먹 안에서 울렁거리던 기운이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쏴아아!
거대한 흐름이 말 그대로 ‘흘러내렸다’. 방안에는 온통 얼어 버릴 듯한 위압감이 내리꽂혔다. 모든 사람을 압도하는 마나의 흐름이 폭풍과도 같이 몰아치고 있었다. 곧이어 느껴지는 차가움, 깨끗함, 정화의 이미지들.
“물 냄새군.”
“확실히 물비린내가 좀……. 아저씨, 그럼 저 수정체 원석을 물가에서 가져온 거야?”
아일라는 비린내가 거슬리는지 소맷자락을 들어 코를 가렸다. 바누라트의 입가에는 그것 보라는 식의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물가에 있다고 다 물 속성이 되지는 않아. 저 수정은 아르사니아 강가의 퇴적층에서 채굴한 결정체로 만들었지. 실수로 만들고 보니 비호환급이더군. 그래도 예쁘긴 하니까.”
그러나 미하일은 물론, 현장의 모든 사람이 진정 관심 있는 것은 네마냐였다. 푸른 불꽃과도 같은 티끌들이 네마냐의 몸 주위에서 발광했다. 점차 침착해지던 발광체들은 서서히 몸 주변을 덮고 있던 백색의 빛무리와 함께 흡수되었다.
[마나 흡수 완료]
[속성: 물]
[특이사항: 마나량 많음]
[해당 물의 수정으로부터 마나를 전량 흡수하였습니다. 완전히 체내로 받아들이겠습니까? Y/N]
“생각보단 정교한데…….”
“응, 뭐라고 했나?”
작게 중얼거린 말을 잡아낸 바누라트가 물어왔다. 생각이 말로 튀어나온 걸 알아차린 네마냐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Y’를 선택했다. 심장 박동도 안정됐다. 어쩐지 힘이 넘치는 것 같고, 무엇보다 마나가 한층 더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노란색의 창이 짧게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2클라시카가 되었습니다.]
[몇 가지의 초보 마법기술들이 개방되었습니다. 확인하시려면…….]
“아, 아닙니다. 마나의 기운이 좀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아서 말이죠.”
“그래…… 예상보다도 더 놀랍군. 정상적인 마나 흡수라니, 그것도 특성이 있는 마나를 말이야.”
그 말과 함께 바누라트는 내 손을 붙들곤, 어느새 탁자에 올려 둔 시험대에 올렸다. 4개의 원이 홈으로 파인 시험대는 마법 학교에서 서클을 파악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마나를 주입해 보게. 의식할 건 없고 그저 편하게, 자네 몸처럼 받아들이면 되네.”
이미 기사 학교를 다녀 봤으니 어떻게 쓰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작은 마정석이 내장되어 있어 신체 내의 마나를 끌어낼 테니까. 잠자코 손을 올린 채 눈을 감아 평정을 유지했다. 기운이 스멀스멀 시험대로 흘러 들어갔다.
“오, 자네 2클라시카로군. 게다가 흐릿하지도 않고 제대로 갖춘, 정(正)서클이야.”
바누라트의 호들갑에 아일라도 그만 휘둘려 버렸다.
“네마냐, 네가 진짜 서클을 형성했다고? 아니, 비호환 등급에 마나가 많긴 해도 사람이 뽑아낼 순 없는데…….”
“내가 왜 이 친구한테 관심을 보였는지 이해하겠지? 드디어 숙원을 해치울 해결사가 나온 것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이 순간, 네마냐는 다른 의미에서 난감한 상태였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일회용이자 영구적으로 마나를 성장시키는 아티팩트를 사용해 버린 셈이었으니까. 엄연히 재산인데.
“저…… 근데 제가 아티팩트를 써 버렸는데 이를 어쩌죠.”
“안에 있던 마나는 다 흡수해 버린 건가?”
바누라트는 네마냐가 들고 있는 수정체를 툭툭 건드렸다. 물리적인 무게가 가벼워졌을 리는 없을 텐데. 경박한 충격이 손끝에 느껴졌다.
“음, 그게…….”
“하하, 괜찮아! 어차피 비호환 등급이라 지금까진 가치가 없었거든. 게다가 그 정도 돌덩이는 얼마든 구할 수 있으니 걱정할 것 없어.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그래, 비호환 등급 마정석이란 건 아예 분류도 제대로 없을 정도로 관심 외 대상이었다. 돈을 준대도 가져갈까 말까 수준이었고, 간혹 예쁜 돌은 치장용으로나 나가는 상황.
“그래도 죄송하네요. 뭔가 갚아 드리고 싶긴 한데, 수중에 달리 있는 것도 없고.”
“정말 돈 받을 거야, 아저씨?”
아일라의 성토에, 바누라트는 음흉하게도 망설이는 척 연기했다.
“흐흠, 어쩐다. 정말 돈을 받아 버릴까. 그럼 10골드는 받아야겠는걸?”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조합장의 웃음으로 침묵이 깨졌다.
“이거 농담을 농담으로 못 받는군, 요즘 젊은이들이란.”
“한창 여유 있는 꼰대들이나 그런 농담을 하지. 그런 걸 유머 있다고 팔자 좋게 생각한다니까.”
“……아일라 씨는 그렇게 막 대해도 괜찮은 거예요?”
나이 차이가 20년은 족히 날법한 바누라트에게도 거침없이 태클을 거는 아일라. 그런 광경이 생소한 미하일은 그저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하하……. 원래 하스페다 가문이 성격이 좋지 않았던 건 알고 있지. 그래도 나랑은 뭐 거의 20년간 알고 지냈네. 허울이 있을 수가 없지.”
바누라트는 다시 네마냐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 아티팩트는 내가 준 선물이라 생각하게. 어차피 지금이야, 팔아 봐도 5실버쯤 하려나 싶은 물건이니까. 나는 오히려 그걸로 서클을 만들어 냈다는 게 더 신기하군. 클라시카를 아는 걸 보면 마법 강독도 받았나?”
‘클라시카(Klassika)’란, 서클을 뜻하는 서방 제국의 단어로, ‘등급’이란 의미를 지녔다. 애초에 마나를 이용하는 마법이란 학문 자체가 서방에서 유래한 만큼 널리 쓰이고 있었다. 다만, 마탑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서클도 널리 사용했다. 마법시험대에서 겹고리에 마나를 채워 능력을 측정한 데서 ‘원’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아무래도 기사 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입장이라 기초적인 것만은 배워 뒀습니다.”
“잘됐군. 기사 생도 2학년들도 간절히 바라는 등급을 한 번에 꿰찬 거야. 축하하네.”
상상할 수 없는 빠른 성장이다. 2서클이 대단하다기보단, 그 획득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과연 앞으로 네마냐가 필요한 방향에 어떤 식으로 기여할 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자, 선물도 받았겠다, 내가 갚아야 할 때군. 무슨 알바를 뛰어야 하나. 정산이 다가오니 불안한데.’
다행히 본론을 재촉하는 포문은 아일라가 열어 주었다.
“그래서, 우리…… 아니지. 네마냐한테 뭘 바라는 건지를 얘기해 봐요. 아직 본론은 아닌 것 같은데.”
“예, 기껏 이렇게 도와주셨으니 직접 선물을 받은 저도 힘닿는 데까지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나까지 거들고 나서자, 오랫동안 빙빙 돌던 조합장도 슬슬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아……. 이것저것 말이 많아서 시간을 잡아먹었군. 저녁도 같이 들고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도 싶지만.”
“아직은 저희도 해야 할 일이 좀 많아서 나중에 부탁을 드리죠. 네마냐를 통해서 앞서 이미 말씀을 들으셨겠지만,”
“음. 광산 채굴 포함해서 ‘사업’을 준비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촉박하겠지. 이해하네. 내가 아쉽다고 계속 붙잡아 놓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이제 다 식어 버린 찻잔인데 조합장은 갓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멋들어지게 원샷을 때렸다.
‘이렇게 진지하게 대화를 하겠다고? 광물에서 마나를 끌어내는 기술이 그만큼 굉장히 중요하단 거겠지. 그렇다면, 아예 판을 더 키워 버려……?’
네마냐가 무슨 생각을 곱씹는지는 모른 채로 바누라트는 오랜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아까 이야기했던 것의 연속일세. 간단히 얘기하지.”
지루해 죽겠는 표정의 아일라나 미하일은 짐짓 내버려 둔 채로 이야기는 속개됐다.
“우리 둘 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줄 수 있지. 우린 초기 자본이나 노하우, 판로 개척을 무상으로 도와줄 수 있다네. 반면에 네마냐 군은 우리가 필요한 무속성 또는 호환성이 높은 마정석 광맥을 아무 제약 없이 찾을 수 있지, 여기까지는 확실하지?”
“사실 그대로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합장의 이야기는 계속 흘러갔다.
“자네가 일행을 모은 걸 보니, 바가반드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마정석 광산들을 개발하겠단 뜻이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좀 더 우호적인 거래 관계를 트는 것도 가능하다 보네.”
‘뭐, 그 정도는 처음부터 노렸던 거지.’
“사업을 시작하면서 판로를 열어 놓는 건 저희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죠. 아주 좋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판을 더 키워 보는 건 어떨까요?”
“판을 키운다……. 들어 봐야겠지만, 무척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한 소리지.”
“원래 큰 손은 거래를 한 번 하더라도 도박사의 본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길마는 호탕한 웃음을 연방 터뜨렸다. 네마냐는 역시 바누라트가 큰 건을 터뜨릴 줄 아는 도박판에 한 수를 던질 만한 인물이란 것을 확신했다.
‘아, 서로 손바닥 위에 있는 긴장감은 오랜만인걸. 어쨌든 도박판으로 끌어들였으니까. 아예 왕실까지도 끌어봐, 한 번? 재밌지 않을까요, 국왕의 동생인 걸 숨기는 바누라트 씨.’
겉으로 그런 내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 70년간 두 번의 삶을 살아낸 경험은 어지간한 왕실 인척 관계마저 꿰뚫고 있었는걸.
“그래도 웬만하면 많이 위험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많이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세부 사안은 천천히 말씀드리죠. 우선, 저는 지금까지 제시된 계약 조건에 찬성합니다. 미하일이나 아일라 씨의 의견은 어때요?”
애초에 바난드 길드라는 유리한 동반자를 거부할 두 사람이 아니었다. 결정은 순식간에 끝났다. 바누라트는 활짝 웃는 낯으로 몸을 일으켰다. 조합장이 손을 내밀자, 네마냐도 재빨리 손을 뻗어 맞잡았다.
“허허허, 아주 좋네. 네마냐 군은 자질도 자질이지만, 좋은 동료를 포섭하는 데도 탁월하군. 좋은 동반자를 두어 기쁘네. 좋은 날이 오면 술이라도 한잔 나누도록 하지.”
“먹지 않아도 뱃속이 절로 뜨뜻합니다.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저도 기왕에 이리된 것,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네마냐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바누라트 조합장의 눈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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