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의식불명이던 상태에서 네마냐가 깨어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네마냐는 집을 나서지 않았다. 의사가 몸이 회복될 때까지는 출입을 금지한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이라기보단,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3일 정도의 시간을 빼서, 먼저 수척한 몸을 추스르고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산책도 하고 밥은 빼놓지 않으며 푹 쉰 덕분에 최소한의 체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부턴 시나리오를 어떻게 맞춰 나갈지 정보를 수집해야겠다.”
그 뒤로 네마냐는 여유 시간 대부분을 서재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딱 식사가 준비될 시간에 맞춰 1층 주방을 갔다 오는 것과 산책하는 약간의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의 모든 일정이 서재에서 지나갔다.
“이제는 슬슬 추워지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해가 어스름해지는 초가을의 선선한 날씨가 한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산중이라 해가 비교적 빠르게 지는 바가반드 지역은 오후 4시만 되어도 불을 켜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시간이 되도록 불은커녕 무슨 요일인지도 모를 집념에 불타오르는 사람도 있다.
—사각사각.
네마냐는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휘갈겨 쓰고 있었다. 필체는 모르는 사람이 봐도 심각한 악필이었지만, 오랫동안 누워 있던 탓에 손의 마비가 아직 풀리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똑같은 단어를 몇 번이고 고쳐 가며, 종이를 몇 장이고 까맣게 채운 그 열정만은 무시할 수 없다.
“후.”
책상 위에는 딱 필기할 만한 공간을 제외하면 온통 너저분하게 갖가지 종류의 책들이 널려 있었다. <알만(Alman) 지방의 자연환경에 대하여>, <제6416년도 아라라트 지역 산업백서>, <하야스단 지리학 입문>, <바난드 왕국 연감> 등의 제목들이었다. 눈이 핑핑 돌아갈 갖가지 언어로 된 책들이 속살을 드러낸 채 드러누워 있었다. 책더미 사이에서, 네마냐는 책 내용을 몽땅 외워 버릴 기세로 소리 내 읽고, 계속 요약했다.
“지난 수십 년의 작황 분석을 통해 길드에서 내놓는 해석은 부정적이다. 동방 제국과 현지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론은 나왔다. 갈 곳 없는 펜촉에서 잉크가 새어 나왔지만, 네마냐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끝에 깃펜을 잉크병에 꽂았다.
“틀림없어. 아직 공식적인 연구에서 발견조차 못 했다고 한다면, 격변은 이제부터 시작이란 소리겠지. 북부 산맥의 광산들이 재발견된 게 내 삶의 궤적마저 통째로 바꿔 버릴 줄이야.”
아마 자신의 첫 생애를 비틀어 버린 사건을 꼽으라면, 그 광산 발견 사건이 첫째일 것이다. 어디 내 삶만 그런가. 가난하고 정보도 없던 이 동네 사람들은 꼼짝도 못 하고 자기 땅의 광산 채굴권조차 빼앗겼다. 생존권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헐값에 막대한 자원을 넘겨주곤, 고향에서 쫓겨나거나 대리전에 휘말렸지. 그런 미래가 와서는 안 돼. 온다고 해도 내가 막을 거지만.”
그런 미래가 오도록 놔두진 않을 생각이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네마냐 자신의 또 다른 기억이 남은 이상, 바가반드는 살아남을 것이다.
“내가 힘을 얻는 것은 곧 바가반드가 살아남는 것. 바가반드가 힘을 얻으면, 나 역시 살아남는 길이지.”
뭔가 멋진 말을 꺼내려 해도 쉽게 되지 않았다. 역시 아직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앞으로의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해 놓으니, 오른쪽에 조금 전 낑낑대며 말아 놓은 대형 지도가 보였다.
“하는 김에 먼저 가 볼 후보지에 와드나 찍어 볼까. 지금부터 움직이려면 같이 할 동료들도 물색해 두는 게 좋으니까.”
말을 마치고는 팔을 뻗으며 스트레칭을 했다. 우두둑하는 뼈마디의 깊은 울림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는지가 훤히 느껴졌다. 그때, 가볍게 두 번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둑한 저녁 공기를 뚫고 빛이 서재 안으로 쏟아졌다.
“세상에, 네마냐. 불도 안 켜고 공부를 하고 있어요?”
“어, 헬레나? 잉크병 채워 주려고 왔어요? 돈 아까우니까 잉크나 불같은 건 안 채워도 필요 없다니까.”
“아뇨. 저녁 준비가 됐는데 안 오셔서 알리러 왔어요.”
“아, 진짜요? 요즘 정신이 없어서…….”
“공부도 좋지만 쉬엄쉬엄 해 두세요, 도련님. 조금 있으면 새끼도 꼬아서 내년 농사 준비를 해야 하니까. 아니, 방 더러운 것 좀 봐.”
잔소리를 늘어놓는 목소리와 너저분한 책들을 치우는 소리가 어우러져 환장의 콘서트장이 되었다.
“으, 잔소리 들을까 봐 못 오게 한 거였는데.”
“도련님은 아직 몸도 다 추스르지 못했잖아요. 이렇게 지내면 건강 나빠져요.”
“의사에게 독서는 허락받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방은 저녁 들고 제가 치울게요.”
“가문의 가장, 그러니까 유일한 상속인이니까. 가문 운영도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얼른 내려오시고요.”
“네, 네.”
유모에겐 대충 답을 던지며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가족이랄 게 없어진 지 오래라, 헬레나의 잔소리도 지겹지만은 않았다.
“유모에게도 미리 말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아무래도 알아듣지 못하겠지. 그냥 듣기엔 허무맹랑한 소리일 테니까.”
의자의 삐거덕대는 소리가 유독 귀에 낯설었다. 지금 뭣보다 중요한 건, 배에서마저 밥, 아니 빵을 찾는 요란한 기적 소리가 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럴 땐 김치찌개 하나면 단번에 회복할 텐데, 역시나 언감생심이지. 기지개를 켜자 아직 회복하지 못한 몸이 비명을 질렀고, 뼈마디가 덜그럭거렸다.
* * *
식사를 마친 그림자는 여유로운 콧소리와 함께 층계를 올랐다. 낡은 서재 문을 밀어젖히자 낡은 문의 비명 뒤로 다가오는 약간의 곰팡내와 함께 잔뜩 묵은 종이의 냄새가 느껴졌다.
“이젠 이 냄새도 익숙해져 버렸군. 옛날에 도서관을 다닐 땐 그렇게도 질색이었는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책상의 등불을 켰다. 비싼 밀랍으로 된 초는 마음껏 쓸 수 없었다. 유모가 삯바느질해서 번 돈으로는 2층짜리 낡은 저택을 유지하기도 버겁다.
—착, 차악!
부싯돌 튀기는 소리. 콩기름에 적신 아마포로 만들어진 등불이 작은 불꽃을 피워 냈다. 방 안에 구수한 냄새가 퍼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됐다.”
여전히 침침하긴 하지만, 불빛이 생기니 글을 보기엔 훨씬 좋아졌다. 딱 책상 부분에만 집중할 수 있는 조명이기도 했고.
“그럼 아까 전 작업을 계속해 볼까.”
거의 말라붙은 잉크병에서 펜을 뽑아냈다. 난 계속해서 책과 보고서를 지도와 비교 하며 무언가를 표시해 갔다. 눈에 잘 안 띄긴 하지만 가끔 눈을 감다 보면 어떤 숫자가 계속 뜨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처음엔 뭔지 몰랐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경험치란 느낌이 들었다.
“환시라도 보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어느 순간이 되면, 능력치를 찍을 수 있는 수치가 생겨났다. 특정 행동과 관련된 능력치를 성장시키면 그에 비례해 보너스 수치도 제공하는 모양이다.
“좋아, 이대로라면 생각한 시나리오대로 잘 될 것 같아.”
예전에 살던 세계에선, 처맞기 전까지는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쩌라고. 이미 한 번 완벽한 비극을 찍고 돌아온 나다. 무엇이 문제고 어디서 뒤틀렸는지 정도는 알고 있단 말이다. 단지,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 몇 가지 정보가 필요할 뿐이지.
“휴, 암만 그래도 지친다. 아직 전부 회복하는 건 무리인가.”
펜을 멈추고 잠시 숨을 돌렸다. 오른쪽에 놓여 있는 작은 돌을 만지작거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 돌, 지나가던 길에 투박한 것이 자꾸 눈에 밟혀서 가져왔다. 특이한 것 없는 돌멩이일 뿐인데, 무언가 달랐다. 손에서 작은 빛이 일렁이더니 눈앞에는 익숙한 창이 나타났다.
[분석 완료]
[분류: 마정석]
[속성: 암석]
[등급: C]
“뭔가 이상해서 가져왔는데 C급 마정석이 바닥에 굴러다닐 줄은 몰랐는걸. 원래 마정석 분석이 이렇게 간단했었나?”
마정석은 자신과 같은 일반인은 만지기도 힘들고, 설사 있어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 네마냐 자신은…….
“속성도 잘 모르겠고.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 생도 때 마법이나 배워 둘걸.”
어제 아침에 발견해서 가져온 이 돌의 파급력은 절대 작지 않았다. 나는 예전처럼 간단한 탐지 능력만 개방했을 뿐이었는데, 마정석임을 알아냈다. 이건 단순히 난데없는 칭호와 보너스 능력치까지 받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익숙한 과거와 새로운 시스템의 조화, 그것이 가져올 변화……. 정체 모를 희열이 타올랐다.
“맞아, 분명히 이맘때쯤엔 ‘그 광산’의 발견 소식도 들려올 거란 말이지. 사건이 나기 전에 내가 선수 쳐서 확 사 버려?”
층계참을 오르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알려 주지 않아도 누구의 것인지는 얼마든지 알고도 남았다. 그런 기술이 생겨난 참이었으니까.
[탐지]
[사람 – 헬레나, 유모, 일반인]
[사람 – 미하일, 일반인]
“왔구나.”
물론 이 경우는 오랫동안 함께해 온 친구의 것이니 굳이 탐지를 켜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내 똑똑하는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잘 알고 있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여, 그래도 일찍 왔네.”
“일찍? 일찌익?”
잔뜩 지친 듯한 기색으로, 미하일은 목에 맨 망토 끈을 풀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제집이라는 듯이, 책상 건너편에 있는 팔걸이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야, 피곤해 죽겠다.”
“바가반드 영지로 간 거 아니었어? 시간상으론 딱 백작령만 다녀올 시간인데.”
“그러려고 했지. 네가 필요하다는 정보는 영주성 관리인만 만나면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남쪽에서 들어오는 통신들이 하나같이 터져 나가고 있어. 남부랑 중부 산맥의 금광들이 최근 한 달 사이에 고갈을 선언했다는 거야.”
‘아, 아직 기다리던 소식은 아니군. 하지만 그 직전에 터졌던 전조들이야.’
약간 흥이 식었어도, 갑작스러운 금맥 고갈 사건은 그것대로 흥미로운 얘기였다. 실제로 지금 조사하는 광산 발견 직전에 일어났던 현상이니까.
“남부까지? 거긴 금광만 다섯 곳은 있잖아. 한두 군데 닫는 건 문제도 아닐 텐데.”
“땡입니다, 유감! 겨우 그런 거였으면 내가 바난드까지 가서 이 고생을 했겠냐.”
“뭐야, 바난드까지 간 거였냐?”
미하일은 옷을 가볍게 털며 온몸으로 기지개를 켠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진 대화는 아까 전의 농담조보다는 훨씬 진지한 투였다. 소매를 터는 녀석이 나지막하게 내뱉은 이야기는,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다소 충격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 다섯 군데 중 네 군데가 폐광을 선언했단다.”
“……네 군데라, 충격이 크겠어.”
당시에도 워낙 큰 사건이었으니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일부러 놀란 척하는 게 더 어려웠다. 잠시, 크게 놀란 것처럼 간격을 두고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좀 자연스러웠는지 미하일은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중 한 군데가 어브니시 광산이라는 소문도 자자하더라.”
“어브니시면 콜카신 영지에 있었지? 거긴 저지대 최대 금광이잖아! 콜카신 왕국이 세금을 안 거둬도 돌아갈 정도라고 들었는데.”
“그래. 그러니 고갈 소식에 온통 난리가 난 거겠지.”
눈을 감은 채로 몇 가지 사건을 복기해 보았다. 나중에 밝혀지게 될 테지만, 이미 저지대 금광은 대부분 고갈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경제적 파국을 막기 위해 최대한 연막을 치다가 어쩔 수 없이 백기를 든 상태였다. 아직 고위층 일부를 제외하면 사태의 심각성도 잘 모를 테지만.
‘난리라곤 하지만 아직 얼마나 심각한지는 체감 못 하겠지. 물가 폭등부터 시작해서…….’
길거리에 뼈만 앙상한 채 쓰러진 이들이 즐비하던 기억을 떠올리려니 몸서리가 절로 쳐졌다.
“아무튼,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 많았다.”
피곤함에 구시렁대는 미하일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슬슬 담아 둔 비밀에 관해서, 하나씩 운을 띄워 보며 녀석을 헤아려볼 생각이다.
‘운을 한번 띄워도 괜찮겠지.’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주제를 돌렸다.
“마침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기서 말 타고 한 30분쯤 능선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사라타란 곳이 있어. 혹시 들어 본 적 있어?”
“사라타? 거기 문 닫기 직전 폐광 아니었나? 요즘 광산 사고도 잦고, 경제성도 없는 데라던데.”
지금 순간에도 제국 지리학회 조사원들이 이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단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부와 중부의 광맥이 말라붙자 사람들의 시선이 알게 모르게, 바가반드가 있는 북부 산맥을 향하고 있었다.
‘북부의 고대 난쟁이족이 채광하던 광맥이 있는지 검증하러 올 테니까. 그리고 현재 큰 기술력과 비용 없이 곧바로 채굴 가능한 곳은…… 사라타뿐이지.’
지도에서 ‘사라타’ 세 글자를 찾는 건 몇 초 걸리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묘한 느낌을 받아 가장 주목했던 후보지였다. 운명이란, 참. 사라타 세 글자 밑에는 간단한 설명도 기재되어 있었다. 미하일이 오기 전에 천천히, 또박또박 읊어 보았다. ‘저급’. ‘가정 연료용 석탄 채굴지’. ‘경제성 저평가’. 네 말이 틀렸다, 이 지도놈아. 하나도 맞는 말이 없다고. 다시 심장이 벅찼다.
‘확실해, 저기다. 내 인생과 모든 흐름이 송두리째 뒤틀어 버린 출발점.’
나는 혼잣말처럼 조용히 중얼거렸다.
“……삼십 분, 삼십 분이라.”
“왜 그래, 직접 가 보려고? 하지만 지금 네가 간다고 해도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을 텐데.”
조용히 손을 들어 보여 준다. 미하일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나한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알지?”
“탐지? 그래, 알지. 그런데 그걸로 뭘 할 수 있긴 한가?”
“그럼. 이 며칠 동안 시험해 봤어. 나도 내 탐지 기술이 농작물이나 토양만 읽는 건 줄 알았는데, 사실 접촉만 할 수 있다면 공산품도 얼마든지 판정할 수 있더라고. 특히 광물에 대해선 더 특화되어 있고.”
사실은 반만 맞는 말이었다. 말을 하면서도 나는 눈을 감고, 파랗게 빛나는 알람 창을 유심히 보는 중이었다. 요 며칠간 정보 수집 겸 능력치 성장이 어떤 원리인지 시험해 봤다.
‘있는 게 책뿐이라 책으로만 시험해 봤지만.’
어떤 식으로 능력 성장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으니 그 원리를 시험해 보는 과정이었다. 아직은 초보 능력치라 그런진 몰라도, 책만 읽어도 효과가 좋았다. 특히 독서가 기초적인 지능에 특화된 행동이라 그런지, ‘이해’ 능력치를 올릴 때는 보너스 수치까지 받았었다.
[네마냐]
[기초 능력]
[체력 5(-3: 사고에서 회복 중)]
[근력 6]
[민첩 5]
[이해 11]
[판단 8]
[행운 ??]
덕분에, 초반에만 보너스 수치까지 합해 이해 수치를 5나 올릴 수 있었다. 이해 능력치를 강화한 건 퍽 유효한 선택이었다. 상태창 저 아래 깊숙이 묻혀 있던 ‘탐지’ 능력이 개방된 것이다.
‘탐지가 굳이 독립 스킬로 나와 있을 필요가 있던가.’
네마냐는 자신이 빙의되기 전부터 탐지 능력을 쓸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흙의 등급이나 작물의 가치를 간신히 판별하는 기초적인 수준이었지만.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마나가 부족해 허덕이기도 예사였다. 반면, 새로 생긴 탐지 스킬은 마나 소모도 거의 없고, 탐지 속도도 빨랐다.
“이제는 마나 소모도 거의 없어져서 가뿐하다니까.”
“사고 나기 전까지는 농사 못 짓겠다고 징징대던 녀석한테 무슨 일이 난 거냐. 수레에 치이면서 무슨 기연이라도 만난 거 아니냐?”
“글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렇지 않게 답을 흘렸다. 가만히 이쪽을 지켜보던 미하일은 옷가지를 들곤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출입구를 손으로 가리키며.
“모처럼 살아갈 의욕이 생겼다니, 나야 다행이다만. 그럼 내친김에 지금 바로 가 볼래? 산책도 하고. 아직 머리는 띵하지만.”
“어, 괜찮겠어? 이미 밤이 깊었는데. 내가 혼자 가 볼 테니까 너도 집에 가 봐야…….”
다크서클이 깊게 드리운 채 퀭한 눈으로, 녀석은 잘도 멀쩡한 척 연기했다. 손가락에 걸친 망토는 이미 등 뒤로 걸친 상태였다.
“야, 그렇다고 밤중에 산책하는 데 아직 회복도 안 된 환자를 보낼 내가 아니지. 잘 풀리면 나중에 식사나 한 번 사.”
“이럴 때는 아주 기회주의라니까. 에혀, 어쩔 수 없지. 같이 가면 심심하지는 않겠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기지개와 함께 들숨을 크게 들이켰다. 오랜 시간 방안에 쌓여 버린 퀴퀴한 책 냄새가 폐를 가득 채웠다.
‘며칠 새 종이 곰팡내가 몸속 깊숙이 쌓였나. 관절도 굳어 버린 것 같고.’
바야흐로 이제는 무거워진 엉덩이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닐 시간이었다. 현대와 회귀 이전의 기억. 여기에 새로운 정보들을 조합하는 것은 무척 재미났다. 이제 그 데이터 쪼가리들의 결합이 어디까지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생각이 암만 길어도 무슨 결론이 날 리는 없었다. 오발탄이 될 땐 되더라도, 지금 할 말은 단 한 단어뿐이다.
“가자.”
크게 달라질 운명의 방향은 여기에서부터 갈라져 나갈 것이다.
- 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