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의식의 깊은 곳 아래에 잠잠히 가라앉아 있던 빛.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의식의 흐름. 어두운 골짜기를 따라 빛줄기가 떠올랐다. 생명의 살아 숨 쉬는 소리가 요란했다.
‘시끄러워…….’
소란 때문에 잠들어 있던 의식이 깨어나고 있었다. 시끄럽다고? 무언가가 중얼거리며 속닥이는 소리긴 했다.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분명히 주마등과 함께 의식을 잃었는데. 순간, 급격하게 돌아오는 기억과 함께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으…….”
무심코 흘리는 소리 속에서 무의식의 안개가 걷혔다. 밀려드는 기억과 감각의 홍수 속에서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그리움의 감각이 마음의 구석구석에서 몰려왔으니, 의미를 알 수 없을 눈물마저 솟아났다. 띵한 머리에서 고통을 호소해 왔다. 누운 채로 손을 들어 머리를 짚었다.
“아오, 머리야. 죽는 줄 알았네.”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익숙한 감촉과 눈에 익은 풍경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 이 모습은 마치…….
“저택? 이 모습은 딱 40년 전 그날…….”
처음 네마냐의 몸에 깃들었을 때의 일이다. 이것마저 주마등의 한 장면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지난 40년의 기억이 생생하지 않은가. 맑은 새소리를 배경으로 곰곰이 기억을 되짚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 기시감 같은 것마저 느껴졌다.
“저건 또 뭐야.”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눈을 비볐다. 하지만 오른쪽 아랫부분에 있던 ‘무엇인가’는 반짝일 뿐, 없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보이는 건, 전혀 얼토당토않은 화면이었다. 그것도 전형적인 게임창 종류였다. 너무나 까마득한 기억 속이지만, 이런 강렬한 인상을 언제나 잊을 수 있을까.
“하, 사람 멘탈 나가게 만드네. 갑자기 무슨 게임창 같은 환각을 보고 있어. 짜증 나게.”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당연하게 게임을 하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롤플레잉도, 전략 시뮬레이션도, 익숙진 않은 AOS류도 플레이했었지. 중요한 건, 아직도 네마냐의 몸에 자신이 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왜 게임창이 보이느냐, 그 말이다. 처음 차원의 흐름을 넘어 이곳에 왔을 때조차도 이런 일은 없었다.
“유리창에 뭘 잘못 붙여 놨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가로 향했다. 하지만 한 발짝 다가서도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그 이질적인 화면. 슬슬 잠마저 달아나기 시작했다. 손을 휘휘 저어봐도 창은 이곳저곳, 마치 손을 피해 허공을 부유하듯 움직일 뿐이었다.
‘요것 봐라. 마치 내 손하고 상호반응한다는 느낌인데.’
고민한 끝에, 눈을 감았다가 뜨면 허상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번 호흡을 크게 한 뒤 눈을 세게 감았다.
‘사라져라.’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안내문이 나왔다. 안내문? 하. 갈수록 저렴한 양산형 세계가 되어 가는군그래.
[첫 명령을 사용했습니다. 앞으로는 플레이어의 생각에 따라 창을 켜고 끌 수 있습니다.]
[보상: 민첩을 1 추가합니다.]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소리였다. 내가 환시라도 보고 있나? 그렇기엔 또 지나치게 현실적이란 말이지. 뭣보다 민첩 1이 올라갔다는 안내가 뜨면서, 어딘가 모르게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진짠가……? 그냥 플라시보 효과 아냐?
“일단 상황을 좀 봐야겠군.”
마음을 가라앉히며 창을 불러오기로 했다. 그냥 부르면 되는 건가? 이미지와 연결해 생각을 떠올렸다. 명령을 내린다고 곧바로 말을 듣지는 않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상태창을 부르거나 끌 때 눈을 감고 해야 한단 걸 알았다.
[상태창]
반투명한 아까 전의 그 창이 다시 떴다. 내용 자체는 평범했다. ‘기초 능력’이란 이름 아래 ‘체력’, ‘근력’, ‘민첩’, ‘행운’이 적혀 있는 건 여느 평범한 캐릭터 게임에서도 흔하게 쓰던 기능이다. 다만 같은 줄에 있는 ‘이해’, ‘판단’은 정확히 어떤 건지 알기 어려웠다. 기초 능력의 아래로는 ‘검술’, ‘궁술’부터 ‘화술’, ‘상술’ 등의 항목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도저히 고루 발전시키긴 어려워 보일 목록이었다. 심지어 그 중엔…….
“방…… 내가 잘못 봤나. 아닌데.”
다시 눈을 비빌 만큼 의심케 하는 항목까지 있었다.
“방중술……! 누가 이딴 걸 여기다 녹여 놨냐!”
어떤 놈의 취향인지 알 바는 아니다. 중요한 건,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상황이었다. 이 상태창이라는 게 갖는 의미가 뭐지? 숨 돌릴 자리를 찾아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찾아갔다.
“후…….”
털썩 앉은 자리에선 창밖의 흐린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떤 과거를 보냈지? 여유나 즐거움은 일할 때만 느꼈다. 한때 섬을 운영하는 게임을 받아 열심히 경제 개발 사업과 토목 건축에 힘쓰던(?) 경력을 살린 거지. 잘 나갈 때는 농사 하나만으로도 패기가 넘쳤다.
“잘 나갈 때는 일꾼만 100여 명에 사병들도 무장시켰던 대영주(?)님이었지만, 농사는 결국 농사라고. 그렇게 한 번에 망할 줄은 몰랐지. 기후 변화를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결국, 마지막엔 고블린의 공격에 휩쓸리며 비참하게 사망했지. 그렇게 찬란한 후반생이 끝나나 싶었다. 오랜 시간이 뱉어낸 삶의 흔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돌아온 거지. 이걸 회귀하고 말다니. 딱 한 번 생각만 해 봤을 뿐이었는데.”
고블린의 칼에 맞아 숨이 끊어지던 마지막 순간. 의문의 소리가 ‘한 번의 기회’ 어쩌고 했던 건 기억이 난다. 그게 자신의 상념이 아닌, 정말 다른 무엇이었나?
“그게 뭐건, 중요한 건 아니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중요한 것은 지난 40년 치의 회한이 담긴 안도감이었다.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후회가 이 문제를 일으킨 걸까.
“다시 선택할 기회를 얻는다면 뭘 해야 할까. 나 자신만을 위해? 부귀영화? 즐거움?”
한동안 멍하니 앉아 새로운 기회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했다.
휘이-
휘파람 소리가 유리창을 두들겼다. 갑작스레 고요함을 깨치는 소리에 놀라 쳐다본 그곳.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오직 감탄의 외마디 대사만이 남을 뿐이었다.
“아.”
아직도 실감이 들지 않는 듯 창가로 다가갔다. 지문이 찍힌 유리 너머로 만년설 덮인 산봉우리가 치솟았다. 산봉우리에 찔려 구겨진 하늘 사이에 누렇게 질린 평원이 저 아래 계곡을 향해 천천히 뻗어가고 있었다. 데자뷔다.
“정말…… 이 몸으로 환생한 첫 순간으로 돌아와…… 회귀를 했다니. 그런 우연이 두 번씩이나 가능한 거였나.”
기대도 하지 못한 채 농담으로나 던지던 얘기다. 몸을 일으킨 네마냐는 천천히 나무로 된 문으로 다가갔다.
“처음 일어났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군. 정말 다른 건 나 혼자뿐인 건가.”
복도로 나가는 방문. 곱게 다듬어진 물결무늬엔 작은 까시라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다.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주인을 기다리는, 그 발자국을 기다리는 40년 전의 풍경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아니, 이제는 익숙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현실 그대로라고 해야 할까.
끼이익.
조용한 저택 안으로, 문 여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렸다. 2층에 다락방까지 작게 딸린 집은 너무나 적막했다. 지금, 이 순간이 과거 그대로라면, 그리운 유모 그리고 친구도 만날 수 있으리라.
—끼익끼익
문득 나무로 된 난간을 짚은 왼손에 눈길이 갔다. 주름진 손이 아니라 막 환생했을 때의 젊은 손이다. 까칠한 나무 난간을 쓸면서 삐거덕대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쪽 부엌 방향에서 두 사람 정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목소리, 그렇지 처음 일어났을 때 나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그 녀석뿐이지.’
미하일. 그 세 글자를 오랜만에 마음속에서 읊조렸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기억이 되살아나는 감정이 참 싱숭생숭했다.
“무슨 발걸음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2층에 누구 있나요, 아주머니?”
덜그럭대는 그릇 소리와 함께 미하일의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잃어버린 어느 평범한 일상이 점점 색깔을 얻으며 재생되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는 생기를 느끼며, 천천히 2층 난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글쎄요. 도련님이 아닌 누가 있을 리는 없죠. 인기척이 있나요?”
“쥐라도 들어왔나? 제가 한번 보고 올게요. 아니면 혹시, 녀석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니까.”
“농담도 참. 차 달여 둘 테니 얼른 다녀오기나 해요.”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 곧이어 난간의 위아래에서 맞닥뜨린 시선. 두 사람의 감정은 조금 달랐다. 미하일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놀라움의 감정보단 아련한 시선을 담아 아래층을 내려다봤다. 처음 깨어났을 때와는 감정도 달랐다. 갖은 고생 끝에 예전 그대로인 친구를 다시 만날 때의 감동이란.
“오랜만이다…… 밀.”
“어……? 네마냐, 일어난 거야? 반년 만에? 세상에 맙소사……!”
녀석이 놀라서 뛰어 올라왔다. 그래, 반년만이었다. 부모와 함께 탔다던 마차가 사고를 당해, 자신만 살아남아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던 것이다. 내가 아는 네마냐는 빙의하면서 깨어난 이후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도 미하일, 밀은 반가웠다. 반년 만에 만난 친구. 두 그림자는 서로에게 달려가, 이내 계단의 중간에서 포개졌다.
“세상에, 어떻게 일어난 거지? 의사 선생님도 일어나기 힘들 거라고 했는데.”
“혼자서 인생을 다 산 줄 알았다니까. 그중에서도 네가 제일 보고 싶더라.”
“짜-식! 역시 너한텐 내가 있어야지. 나도 네가 반년을 꼬박 누워 있느라 얼마나 심심했는지 몰랐어.”
부서질 듯 날 껴안는 녀석을 따뜻하게 바라본 뒤, 곧 아래층 부엌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모도 건강하지?”
“그럼, 그럼! 헬레나 유모도 티를 내진 않았지만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모른다고.”
다시 미하일이 등을 세차게 두드렸다.
“아파, 아파!”
기적적으로 일어난 셈이긴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수레에 치여 반쯤 죽다 살아난 몸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전기가 오르는 듯 뼈가 저릿한 느낌이 살벌했다. 빙의 직후라 특히나 정신적으로도 허약한 느낌이 강했다. 이내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주저앉았다. 미하일도 살짝 놀란 듯 네마냐를 붙들었다.
“아, 미안! 너무 멀쩡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네.”
“괜찮으니까 좀 부축해 줄래? 막 일어났을 땐 몰랐는데, 혼자서 내려가긴 좀 힘이 드네.”
“그럼, 얼마든지 의존하시라고. 자, 자!”
삐거덕대는 계단 소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어가는 두 사람이 층계참에서 모습을 감출 때까지 이어졌다.
* * *
기억에 어렴풋이 존재하는 짤막한 추억에서부터, 헬레나 유모는 언제나 같은 곳에서 네마냐를 조용히 보살펴 왔다. 알 수 없는 미소를 만면에 띤 채 테이블에 올려 둔 찻잔에선 좀처럼 느껴보기 어려운 풍성한 향이 넘쳐났다. 이 세계의 언어로는 다프네(Daphne), 천 리에 걸쳐 향을 낸다는 서향나무의 잎으로 만든 차였다.
“오, 이 차는…….”
“아주머님, 이 향기는 정말 오랜만에 맡네요. 네마냐의 회생 기념인가요?”
뻔질나게 드나들어도 평범하게 콩잎 우린 물이나 마셨던 미하일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나마 한때 작은 귀족 집안이었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이 고급스러운 차 향기뿐이었다.
“괜히 별명이 천리향이겠어요? 너무 비싸서 많이 쓸 순 없고, 이럴 때라도 써야죠. 도련님이 벌어오기 전까진 기둥뿌리 두 개쯤 뽑으면 되지 않을까요?”
유모의 웃음소리 속에는 적잖이 억센 뼈가 숨어 있었다. 표정을 짐작할 엄두도 나지 않는 웃음과 함께 유모는 거실을 떠났다.
“와, 역시. 유모님의 기품은 지금 봐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이 저릿저릿해진다니까.”
미하일은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멋쩍게 웃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첫 번째 삶을 살 때는 호기에 차,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대사였다. 물론 저 대사를 들으면 야단 한마디 듣지 않았는데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지만.
“살짝 무서워해도 되는 부분이지?”
“그러니까 공부 좀 열심히 했어야지. 갑자기 농사를 짓는다고 열을 올리더니, 혼자 알 수 없는 소리나 중얼거리지 않나. 어디 아픈 줄 알았다니까.”
기껏 살아났더니 공부 타령이다. 얼마 있으면 공부로는 밥도 못 벌어먹는 시대라고. 이 순간도 회귀의 기쁨에 책상 위에서 방방 뛰고 싶은 심정이지만, 할 일이 태산이었다. 허튼소리보단 앞으로의 일정에 굉장히 중요할 몇 가지 사항이 궁금했다. 알고 있는 문제라도 확실한 검증이 필요했다.
“에효…… 그건 그렇다 치고. 그것보단 오래 누워 있다 보니 좀 알고 싶은 게 있는데. 조사해 주지 않을래?”
“반쯤 죽다 일어나더니, 네가 궁금해지는 것도 있어? 별일이네.”
“빨리.”
“알겠어, 알겠어. 모처럼 살아났으니까 특별히 해 드리지요. 뭔데 그래?”
찻잔에 띄워져 있던 이파리를 문 채로 턱을 괸 미하일이 마음을 놓은 듯, 편안하게 나를 쳐다봤다.
“일전, 사고당하기 전의 일인데. 머지않아 고갈된다는 광산에 관한 얘길 들은 적 있거든?
“뭐, 광산? 음……. 글쎄, 네가 광산 같은 걸 물어보다니 갑자기 나도 혼란스럽다. 갑자기 광산에 웬 관심이 생겼어?”
“전에 백작령으로 공물을 내러 갔다가, 동부 제국의 총독부에서 발간하는 정보지를 본 적이 있었거든. 우리 동네 일이니까, 궁금하잖아.”
“반 죽었다가 일어나선 뜬금없이 광산 타령이라니. 나도 나지만, 너도 참 엉뚱하다.”
“누워 있으면서도 궁금한 걸 못 참는 건 똑같긴 하지.”
고민에 빠진 미하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확신하진 못한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음, 당장 생각나는 건. 먼 서쪽에서 염료 수요가 늘어서 명반석 채굴이 늘었다는 것 정도인데, 달리 또 소식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명반석?”
물론 전후 사정이나 상식 정도야, 미리 살다 와서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되물은 것도, 의문의 물음이라기보단 확인에 가까운 성격이니까.
‘그래. 그 돈을 쏠쏠하게 벌어주는 명반석 광업은 하야스단 전체의 1/3을 먹여 살릴 산업이지. 나중에야 순위가 밀리겠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풍성하게 꾸미려면 이 정도는 모른 척 능청을 떨어 줘야지. 두 번의 삶을 통해 그런 센스는 갖게 된 네마냐였다. 물론 환생 이전의 자신이 값비싼 외국의 월간지 따위를 가져다 읽을 리는 없었다. 전생 이전에는 쫄보 그 자체였거든. 생각해 보니 우습긴 하네. 입도 무거운 헬레나 유모가 불만이 쌓일 만도 했겠어.
“어쨌든, 도와줄 거지?”
“음, 뭐 너무 어려운 건 아니니까. 한번 알아는 볼게.”
“부탁 좀 한다.”
“이 형님한테 무슨 그런 딱딱한 소릴 하고 앉았냐. 푹 쉬고, 다 나으면 술이나 사라고. 제대로 뜯어먹으러 올 거니까.”
“형 같은 소리는 좀 닥치고. 오는 건 마음대로여도, 나가는 건 네발로 기어나가야 할걸? 각오하라고.”
미하일 녀석은 피식하면서 곧 자리를 일어섰다. 집안의 농사일도 도와야 하니까 당연한 일이겠지. 몸도 몸이니, 마중은 나가지 않고 2층의 방으로 돌아왔다. 몸이 낫지 않아서 그런지 피곤이 극도로 쌓여 있었다.
축 늘어진 나는 침대로 몸을 던지면서도 생각은 계속했다.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다시금 젊은 네마냐로 돌아온 세상. 이곳은 다른 세계가 아니었다. 처음 환생했던 곳. 두려움 속에서 어렵사리 걸음을 뗐던 바로 그곳.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된 지금은, 불안하지 않았다. 상쾌하고 오히려 기대되기까지 했다.
“적어도 내가 한번 살았던 과거의 의미가 없진 않아.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중요한 정보이자 자산이기도 하고. 거기에 더해, 나만 볼 수 있는 상태창까지.”
이제 불과 몇 달만 지나면 백작 영지의 구석에 있는 작은 광산이 이슈의 중심에 선다. 붕괴 사고가 터져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아주 작고 산출되는 명반석 품질도 보잘것없지. 하지만 누가 알까?
“바가반드, 아니, 하야스단의 크고 작은 나라들까지 판세를 뒤집을 엄청난 자원의 창고인걸.”
하물며, 뒤이을 대규모 전쟁으로 금속 자원의 몸값이 미칠 듯 날아오를 텐데.
“어쩌면, 애초에 돌아오게 된 것도 이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았을까? 뭐, 아무래도 좋아. 주어진 기회는 버리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 얻은 삶인데, 이번엔 바보처럼 가만히 앉아서 땅이나 파진 않을 거야.”
아직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을 움직였다. 팔의 근육이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지만, 용케 주먹을 쥐었다. 또다시 실패와 좌절이 잇따르며 폐인이 되었던 전철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자에 고쳐앉으니, 나무토막이 비명을 질렀다.
—끼익
주마등처럼 지난 세월의 고초가 스쳐 지나갔다. 힘이 없어서 방관해야 했던 숱한 죽음과 삶의 경계들. 무력하게 넘어와야 했던 그 많은 안타까움. 더는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시야의 오른쪽 아래, 반짝이는 반투명한 ‘무엇인가’는 그 마음을 더욱 단단히 만들었다.
‘저것까지 나를 도와준다면…….’
찬 날씨 덕인지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 생생한 현실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제 겨울이 완연한 계절이었다.
“……하야스단은 늦가을만 되면 눈으로 뒤덮이는 오지 중의 오지였지. 앞으로는 더 추워질 테고.”
천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창가 쪽으로 돌렸다. 늦가을 바람에 바싹 말라 버린 산봉우리가 눈동자에 무심히 비쳤다. 겨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고블린.”
경멸 어린 조소로 내려다보던 고블린 전사.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진땀이 서렸다. 겨울이 되면 고블린들도 날뛰기 시작하겠지. 앞으로 족히 수십 년. 할 일이 많다.
“좀 더 빨리 힘을 키우고, 내가 직접 맞설 수단을 마련해야겠어. 그러려면, 역시 이 고지대에선 금속 자원 말고는 답이 없겠지.”
이내 누적된 피로에 지친 내 육신은 침대 위로 눕혔다. 차가운 우풍이 소년의 정신을 일깨웠다. 내가 바라는 전환은 곧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환생자가 바라거나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속도와 계기를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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