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서준이 네마냐로 처음 환생하고부터 40년. 고달픈 인생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만 그 끝이 녹색 형형한 고블린들의 무기에 맞아 죽는 것일 줄이야, 네마냐로선 알 턱이 없었으리라.
이때의 네마냐-이서준은 그저 고달픈 40년 인생을 생각하며 콧물을 훌쩍일 뿐이었다.
“쉬이벌……. 내가 원래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했지, 진짜 그 ‘이세계’를 가고 싶다더냐!”
오랜 세월 속에서 썩어 버린 걸걸한 목소리. 애꿎은 나무 술잔을 테이블에 꽂아 봐야 느껴지는 건 얼굴에 튀는 알코올 방울뿐이었다.
“……인생. 하다못해 이세계물 애니라도 좀 봐 둘 걸 그랬나. 떠날 때만 해도 혼모노에 이시국이긴 했지만.”
쓸데없는 탄식이다. 바닥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며 기계적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순무를 굽고 보릿가루에 뭉쳐 대충 구운 빵이었다.
“오늘은 그래도 빵 맛이 나쁘진 않은걸.”
순무를 잘게 다진 다음 탄내가 날 정도로 익혀 우려낸 순무 커피뿐인 식사에, 입맛마저 썼다. 구운 삼겹살의 풍미와 한 홉 소주의 씁쓸한 맛 같은 건 이제 기억에서도 희미했다.
“날씨는 또 오지게도 춥네. 그 흔한 3만 원짜리 히터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뼈가 시리진 않을 텐데. 보이는 거라곤 고블린뿐이니, 쯧!”
혀를 세게 찼다. 홧김에 누른 링크 덕에 다른 차원으로 넘어온 지도 40년. 그 40년간 이놈의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추워졌다. 한때 가을이면 황금빛 물결이 넘실대던 농촌도 눈에 파묻혔다.
“에취!”
순무 같은 거나 잠깐 길러 먹고 살면 그뿐, 돈을 벌 의욕마저 눈에 파묻힐 지경이다. 이제는 재앙에 생활 리듬마저 적응해 버린 자신이 싫었다.
“고블린 새끼들. 먹을 게 없으면 자기네들끼리 잡아먹을 것이지, 시퍼런 짐승 놈들이.”
거친 발음에서 감정이 묻어났다. 낡아서 다 떨어진 외투를 걸친 뒤 창가 밖의 계곡을 쳐다봤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고블린 군단은 저 바깥에서 온통 활개를 쳤다. 다행히 아직 이곳, 바가반드 영지로 들어온 적은 없었다. 하야스단 고원 지대에서 가장 가난하고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는 동네인 덕분이랄까.
“거지 동네라 고블린도 관심 없는게 다행이지, 쳇.”
30년 넘게 초목과 정착지를 얻으려는 고블린은 인간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네마냐가 서준의 정신으로 병상에서 일어나고 얼마 뒤 일이었다. 그때는 살아남은 기쁨을 즐길 뿐, 복잡한 생각 따윈 접어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지.
“농작물이라도 군대에 팔아서 덕 좀 보나 했더니, 그나마 또 뿌리까지 얼어붙겠어. 쯧. 하긴, 일이 그렇게 잘 풀려 주겠냐만.”
생각이 난 김에 순무밭의 순무나 보러 길을 나섰다. 관절이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기 싫은 문을 열어젖혔다. 골수를 파고드는 냉기가 늙은 몸에 사무쳤다. 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끼이익.
어느 정도 황량한 지세, 불안정한 환경. 그러나 위기 속에서 찾아올 기회들. 그런 이야기를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를 불확실한 정신으로 들었던 것이 40년 전의 일이란다.
“허무하군.”
나름 뼈 빠지게 열심히 했어도 보답을 받지는 못했다. 언제 생각해 봐도 씁쓸한 소리밖에 안 나올 것이다. 순무 이파리를 쓰다듬으며 망상이나 하면 그뿐.
“아쉬운 소릴 해 봐야 허송세월한 건 어쩔 수 없지. 아휴, 기왕 어차피 환생했으니까 내친김에 회귀도 한 번 하면 안 되나? 흐흐.”
생각할수록, 오래전 꿈처럼 찾아와 시들어 버린 시절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쉬웠다. 좀 더 자세한 정보와 알찬 지원 같은 걸 얻을 수만 있었어도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에라, 또 하급이군. 쯧.”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거의 모래나 다름없는 흙에선 원래 두 달이면 수확할 순무도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헛되이 마나를 소모해서 ‘탐지’를 써 봐야 D급이나 C급. 그저 반찬거리나 비료로 쓰고 마는 수준이었다. 허탈감에 자리를 박차고 텃밭 변두리로 걸어갔다.
“영주놈한테 속아서 영지를 뺏기지만 않았어도 지금보단 낫지 않을까. 아으, 그래 봐야 이렇게 지랄 맞게 추워선…….”
계속 온도가 떨어지고 비도 잘 오지 않는 날이 많아져서 동네 농사꾼들은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다. 이젠 네마냐란 이름으로 불리는 데 익숙해진 서준에겐, 자신의 텃밭뿐만 아니라 온 동네를 둘러봐도 내년 작황을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올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내년 농번기에는 영주와 결착을 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용……없겠지. 영지도 사라지고 친구나 동지들도 의문사하거나 대부분 떠나 버렸고. 남은 건 이제 나뿐.’
뼈를 파고드는 찬 바람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불어와 눈앞으로 지나갔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올해 겨울도 무척이나 혹독할 예정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대로 놔뒀다간 그나마 남은 사람들도 떠나거나 해골이 될 테니. 그나마 남은 내가 망해도 순무는 지어야, 으휴!”
연신 혀를 차면서 외투를 더욱 옥죄었다. 나이가 60이 다 되도록 추위도 몇 번 경험했건만. 조금이라도 한기가 돌면 골수를 파고드는 발톱과도 같은 추위가 야속했다.
저 아래 계곡에서부터 높게 솟은 모래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탓인지, 요즘엔 재채기나 기침도 잦아졌다. 불길한 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계곡 아래의 모래폭풍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거리로 보면 마을에서 불과 수백 미터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음들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얼핏 꽹과리 같은 걸 두들기는 금속성 소음도 사방에서 들려왔다.
“죽은 대장장이 양반이 돌아왔나? 웬 쇠판 두들기는 소리가 난대. 죽은 지도 30년은 됐을 텐데.”
구두쇠 백작은 30년이 넘도록 대장장이 하나 보내 주지 않은 채 성에 틀어박혔다. 방치된 영민들은 속만 썩이며 가지고 있던 철제 기구를 천천히 소모했다. 덕분에 이제 남아 있는 쇠스랑이나 가래도 나무를 깎아 대충 갈아낸 다음 돌날을 끼워 만든 게 다였다. 이런 오지 산골에서 금속성 소음이 시끄럽다니. 무언가 일이 잘못된 게 분명했다.
“설마……!”
왁자지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아우성은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무언가 멧돼지와도 같은 산짐승이 달리는 소리마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을 외곽의 경계탑에서 급한 종소리와 함께 비로소 익숙한 고함이 들려왔다.
“고, 고블린! 고블린 군대! 모두 도망쳐!”
“도망치다니? 영주님 병사들이 있는데 왜 도망을 쳐?”
원래대로라면 야트막한 마을 담벼락이나마 방어선을 형성하고 영지 병사들과 주민들이 함께 마을을 방어하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몇 명 정도의 병사는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마을을 순찰하고 다니곤 했다. 그러나 오래전 자신이 들었던 여느 격언과 같이, 누구에게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말이지.
“영주, 이 개자식이 병력을 다 빼돌렸구나! 이 도망갈 수도 없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자신을 너무 아낀 나머지, 영지 따위는 짜 먹는 요구르트쯤으로 보는 개자식 백작. 그런 양아치라면 당연히 병력을 영주성으로 다 빼돌렸을 것이다. 고블린의 대규모 침공이라면, 철제 무기조차 부족한 이곳 병사들로선 손 쓰기 어렵다는 걸 알 테니.
“아무리 그래도 자기 영민들을…….”
이젠 분노를 터뜨릴 힘도 없었다. 깊은 허탈감에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멍하니, 느린 장면으로 흘러가는 지옥도를 지켜봤다. 주민들은 무력하게 도움을 외치며 달려가다가 머리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큰 짐승에 타고서 돌격하는 고블린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크아아!”
“으아, 사람 살려!”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비명으로 요란하던 그때. 어느덧 좌측과 우측을 멀리 돌아온 고블린 무리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이 향하는 곳엔 내가 겨우 일궈낸 텃밭도 있었다.
“내 순무, 감자! 이놈들, 그게 어떤 의미인데! 그것만은 안 된다!”
한겨울의 유일한 생계 수단인 순무와 감자는 이제 그야말로 삶의 의미, 그 자체였다. 저걸 잃는 순간엔 이미 올겨울도 나지 못하게 된다. 비참하게 천천히 죽어 가느냐, 지금 죽느냐 정도의 차이였다. 더군다나 여러 가지 마법 재료들이 부과된 밭이 망가지면 문제는 더 커진다. 그 밭은 마나가 소진될 때까지 마나 역류로 농사조차 지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때문에, 밭이 표적이 되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결심은 했지만 덜덜 떨리는 손은 어쩔 수 없었다. 품속을 뒤적거렸다.
“쓰는 날이 없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되는군, 제길.”
손에 무딘 면도칼을 장착했다. 혹시나 도둑을 상대할 일이 있을까 싶어, 1년 치 수익을 털어 사 놓은 ‘그나마 무기’류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네마냐의 손이 연신 떨리며 생각이 흩어졌다.
“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숨을 애써 들이쉬었다. 다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지금의 경우, 자신에게 그런 게 있다면 밭이었다.
“망할 고블린 놈들아, 밭은 건들지 말라고!”
하지만 그런 용기가 고블린을 제대로 마주해 본 적 없는 사람의 무모함인 건 금세 드러나고 말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게 하는 녹색 덩치의 생명체. 칼을 휘두르며 거침없이 목숨을 거두는 놈들. 몇 발짝 앞의 그것과 시선을 마주하자 용기는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으으……. 오, 오지 마!”
다리의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없어진 저택 대신 새우잠을 청하던 작은 집에도 불이 타올랐다. 사방의 이웃집에서도 화려한 불꽃이 튀었다. 매캐한 재가 눈앞으로 쏟아진다.
스윽.
이름 모를 괴수가 거대한 콧구멍을 들이밀었다. 무엇이 그리 가소로운지, 시끄러운 콧바람을 뱉어내며 냄새를 맡았다. 어찌어찌 정신을 붙들고 노려봤다. 그 뒤에서 모든 광경을 재밌게 보는 것은, 당연히도 고블린.
‘이제 끝이군.’
여기에 이르니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이윽고 재미는 다 봤다는 듯, 고블린 대장의 손에 쥐어진 칼날이 반짝하며 공중을 갈랐다. 한겨울인데도 이상스럽게 따뜻한 기운이 목덜미로부터 아래로 전해졌다. 전신에서 힘이 빠지며 버티고 있던 팔이 무너졌다.
털썩.
“허허.”
입술도 끔뻑하기 어려운 경직이 온몸을 덮쳤다. 간신히 작은 실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함께 시작된 환생, 고민 끝에 현실에 적응하며 시작된 농사꾼 생활, 정보의 한계로 놓친 기회들, 별 반전 없이 흘려보낸 인연, 그리고 한없는 무기력함까지. 끊임없이 흘러가는 주마등.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노력은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우으…….”
이제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노력을 다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이지.’
이제는 눈꺼풀마저 한없이 무겁다. 사방이 밤이라도 된 마냥 흐릿해지고 어두워졌다. 기왕 이렇게라도 즐겁게 지낸 것, 후회스럽다며 구차하게 굴진 않겠다. 그러나 단 하나라도 다른 결정을 내릴 기회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뭐지. 갑자기 머릿속에서 내 것이 아닌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히 모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눈조차 보이지 않았고, 호흡은 가팔라지는 상황.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며, 행동하는 모든 능력을 그곳에만 쏟았다.
[단 하나의 변화가 필요하다면, 간절히 바라봐. 돌이킬 수 없기 전에.]
무슨 생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로지 간절함, 그 하나만이 남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다만 돌이켜…….]
‘시끄러워…….’
[1번의 기회만이 주어진다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어떤 답을 건넸고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전혀 알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 지나갔다. 차갑게 모든 것이 굳어가는 정신 너머로, 메아리와 같은 소리가 전해졌다.
[당신의 바라는 대로. 단 한 번의 소중한 복기가 되길. 지켜보겠다.]
‘졸려…….’
흐려지는 시야의 너머. 완전한 의식의 골짜기로 영혼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칠흑의 세계. 그 끝없는 골짜기의 안개 아래, 맨 밑바닥. 그곳에 미약하게 반짝이는 불빛 하나만이 살아 반짝거렸다.
- 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