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71장 - 신을 만난 상담사 (3)
창세기에 이르길, 신은 홍수로 땅을 멸했다.
그것은 기록된 첫 번째 심판.
세상이 속속들이 썩어 사람의 하는 일이 냄새를 피웠고, 그로써 하계가 무법천지에 이르러, 신은 그것들을 땅 위에서 쓸어버리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40일 뒤 살아남은 것은 노아의 방주에 탄 생물들뿐이었다.
이후 신은 다시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리라 했다.
물론, 포인트는 물 쪽.
심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집트인은 히브리인의 아이를 학살했기에 모든 장자가 학살당하는 재앙을 겪었다.
성궤는 타락한 이들의 손에 있을 때 전염병을 창궐시켰다.
신은 승전한 뒤 적의 씨앗을 남기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렇듯 야훼는 언제나 심판하는 존재였다.
신약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랑이 넘치는 주님’이 되지만……
그때에도 심판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른바 ‘재림’으로 최후의 심판이 도래할 때까지 ‘공심판’을 유예할 뿐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왕이라 자칭한 이가 심판과 유흥을 논한다.
그것이 어떤 이유일지는, 두말할 것도 없는 일.
그는, 아주 개새끼였다.
“심판이라 했습니까?”
“네.”
“심판 전의 유흥이라 하셨고요?”
“네.”
“……무슨 자격으로.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심판합니까? 무엇을 줬기에? 신으로서 무엇을 했기에?”
“어…… 의외네요. 왜 화를 내는 거죠? 아이가 레고를 만들다 밟고는 화가 나서 그걸 모두 버린다면, 잘못인가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왕이 피조물을 거두는 것도 잘못은 아니죠.”
“잘못입니다.”
“이유가 뭐죠?”
“당신이 신이라면, 인간의 부모인 까닭입니다.”
김민준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박대민은 언제나 부모들에게 매정했지.”
“예.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래요. 불완전합니다. 기대수명의 반을 산 저도 아직까지 때로 방황하고 때로 미워하고 때로 사람에게서 눈길을 떼곤 합니다. 그나마 저는 운이 좋은 경우여서 ‘때로’인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항상 타인을 괴롭힐 생각에만 골몰합니다. 알아요. 압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부모는 무엇을 했습니까?”
“많은 것을 하지 않았을까요?”
“전혀요. 저는 사람이니 사람의 방법으로 말해보겠습니다. 그 부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저거 먹지 마. 먹으면 추방할 거야. 그리고 추방했지요. 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심판할 거야. 그리고 심판했다고 합니다. 너 진짜 끝까지 말을 안 듣는구나? 그래, 그렇게 해. 어디 한번 해봐. 내가 내 손으로 죽여버릴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고 있다네요. 여기까지 전부 사실이라면…… 이게 부모입니까? 그저 재판관이지 않습니까? 발에 밟힌 레고를 버리는 것은 아이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물렸다고 아이를 살해하는 것은, 부모의 자유가 아닙니다. 아이는 멋모르고 물어야 해요. 처음으로 어미의 젖을 물고, 그에 아파하는 어미를 보며, 비로소 죄책감을 배우는 것이 사람입니다. 저희는 레고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받아야 할 아이들입니다.”
“와. 역시 모든 능력치 110. 설득력 미쳐 미쳐.”
김민준은 유튜브를 시청하는 중학생처럼 밝게 웃었다.
그 모습에 더욱 가슴이 아려왔다.
대체 왜.
대체 어떻게 이토록 냉담한 걸까.
대체 무슨 이유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쁜 사람은 있다고.
그러니 그 악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이조차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사람인 까닭이다.
신은 그래서는 안 된다.
신이 실재한다면, 그는 사람을 미워해선 안 된다.
“제발, 들어주세요. 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부모가 제대로 이끌어주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 부모조차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를 수십 명 낳아본 베테랑이 아니어서, 그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알지 못했을 뿐이에요.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저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말합니다. 심판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에요. 아직도 걸음마를 떼고 있는 단계여서, 자기 부모의 얼굴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근시라서, 자기 자신의 행운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인터넷 미디어가 제대로 자리 잡은 지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어요. 그 사이에만도 무수한 악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랬어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제 피부색의 차별을 당당히 나무랄 수 있습니다. 노예제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전쟁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우생학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아, 몇 개나 말하려고 그래요? 거짓말쟁이. 알고 있잖아요? 인간은 이제 피부색의 차별을 몰래몰래 하고, 노예를 몰래몰래 들이고, 전쟁을 몰래몰래 하고, 우생학을 몰래몰래 해요. 그저 서로 감시하고 있을 뿐, 달라진 건 없어요. 박대민이 신봉하는 인터넷 미디어는 핵보다 무서운 살육병기예요. 소통하면 된다고 그랬죠? 따스한 관계 속에서라면 어떤 사람도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우스운 소리예요. 당장 박대민 하나만 죽으면, 지금은 하루 여덟 명 정도로 줄어든 한국의 자살률이 어디까지 오를 것 같아요? 베르테르 효과로 최소한 50명 이상이 매일 목숨을 던질 게 분명해요. 그중 40명 정도는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인지왜곡과 더불어 우울감을 얻은 이들일 거고.”
……하루 여덟 명.
작년까지 매일 37.5명이 자살하던 한국에서, 하루 여덟 명.
전지한 자가 직접 이야기해준 현황을 듣고……
나는 하릴없이 울고 말았다.
“아직도 여덟 명…….”
“아. 논점이 그게 아니잖아요. 미쳐 미쳐. 울지 말아요.”
“죽지 않겠습니다.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그러니……”
“어휴. 박대민이 살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요? 더 잘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요? 고작 한 나라예요. 다른 곳은 어떤 줄 알아요? 이르노니, 이후로 9년 동안 소수민족과 약소국의 9천만 명이 학살당하고, 그 뒤에는 패권국 사이에서 핵전쟁이 발발하리라. 이때는 수치로 말하기 어려운 죄악이 벌어질 것이니, 박대민은 그 죄악을 막을 수 없어요.”
“막을 수 있습니다.”
“막을 수 없어요.”
“……그렇다고 다 죽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은 실수를 통해서 배웁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도 부족했다면, 다음에는 분명 배울 겁니다. 지난 반세기로 미디어를 배우지 못했다면, 다음 반세기에는 그것을 안정시킬 겁니다. 아직 모를 뿐이에요. 아직, 배우고 있을 뿐이에요.”
“이렇게까지 말하기는 싫었는데……”
김민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비로소 이가을과 다른 단발로 치장한 뒤 발그레한 볼로 이쪽을 바라보던 이겨울의 모습이 있었다.
“……이겨울. 저 아이는 곧 언니를 죽일 겁니다. 그녀를 믿기에 상담하지 않았다고 했죠? 실수였어요. 내가 손을 쓰기 전까지 10년 동안 세뇌돼 있던 아이였어요. 구멍은 크고도 큽니다. 와해될 영원교는 저 아이에게 거의 모든 것이고, 그것이 사라진 뒤의 삶은 공허뿐입니다. 조현병은 이미 지척까지 와 있어요. 저 아이는, 적어도 3천 명의 전 영원교도를 학살하고, 과거 언니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가족 자살을 완성할 거예요. 그걸 막을 유일한 방법이 이가을의 의문사였죠. 부분점수도 못 드려요. 빵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
있어서는 안 될 이야기.
나는, 떨리는 눈으로 채점표를 바라봤다.
김민준의 말은 그로써 끝난 것조차 아니었다.
“저 방 안에 있는 정보람도 그래요. 리벤지 포르노로 협박당하고 있어요. 약 탄 술 먹고 환각상태에서 당한 거긴 한데, 어쨌든 영상으로만 보면 광란의 밤이죠. 새신랑 신희찬은 그걸 막으려고 동분서주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정보람은, 영상 때문이 아니라 죄책감 때문에, 과거에 해내지 못했던 자살에 이르게 되죠.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조미숙은 어떨까요. 그 아이는 5년쯤 뒤에 정수영이라는 아이를 입양하게 돼요.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부모에게 사과를 듣고는 결국 다시 합가하죠. 그 뒤에 짐승 같은 친부가 과거의 조미숙보다도 더 어린 조수영을-”
“그만. 거기까지.”
“벌써요? 방송으로 만났던 내담자들까지 해서 아직도 200명은 더 남았는데. 박대민이 일시적으로 살렸을 뿐인 자살자에 대해 더 듣고 싶지 않아요? 이런 피드백은 중요하다던데.”
“내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 겁니다.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죠. 그런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박대민이 방금 생각했던 김서현. 그 아이가 닉네임 ‘꼰마야놀자’예요. 박대민을 이성으로 사랑하고 있죠.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가정에 불화를 만들기 싫어서 외면하고 있고. 최근에 [내담자 평가] 확인해보지 않았죠? 워낙 바빴잖아요? 상태가 안 좋아요. 며칠 전에 억지로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아이가 심각한 외모지상주의자거든요. 조만간 거식증이 되돌아올 겁니다. 부모와의 갈등도 재점화될 텐데, 자기 상태를 박대민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그 아이는 가출을 감행해요. 그리고 남자친구에게마저 버림받은 뒤 떠돌다가 아사. 박대민은 막을 수 없어요. 미리 알려준다면 절반 정도야 구해내겠지만, 어떻게 모두를 구해요. 결국은 트롤리 딜레마…… 또 울어요? 울보.”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김민준은, 과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인간과는 너무도 다른 존재.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대체 어떻게-
“어떻게 무심할 수 있냐고요? 왜 알면서 무엇도 하지 않냐고요? 우습네요. 다르지 않아요. 박대민과 왕은 다르지 않아요. 그저 아는 것의 양이 다를 뿐이에요. 당장 박대민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들만 꼽아서 216인이에요. 그렇다면 전국적으로는? 세계적으로는? 이와 같은 비극이 올해에만 얼마쯤 벌어질까요? 시간을 멈춰도 다 고치기 어려울 만큼은 흔하답니다. 사람은 그런 존재예요. 달라지지 않았어요. 여러분은, 레고예요. 암이에요. 왜, 그 영화는 봤죠? <지구를 지켜라>. 그 대사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이 우주 어디에도 너희들처럼 같은 종을 학대하길 즐기는 생물은 없어. 적확한 진리는 아니지만, 얼추 그래요.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박대민도 견디기 힘들었죠? 겨우 네 명만 언급했는데도. 그렇다면 ‘사람의 방법’으로 이해해줄 수 있지 않아요? 모든 것을 안다면, 감춰지고 지워지는 몰래몰래 범죄들까지 볼 수 있다면, 박대민이라 해도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으리라는 사실을.”
……옳은 말씀이다.
나는 알지 못하기에 행복한 사람.
행운 속에서 멋대로 아이 같은 소리를 떠들고 있을 뿐이다.
잘 알고 있다.
나와 환경이 달라 무수한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김민준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악인은 처벌 외에는 답이 없는 존재라고.
자기 자신은 선하다고만 믿으며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그래도 된다.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신이라면,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하다가, 자기 가슴이 아파서 문드러진 뒤에도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도리이기에.
아이가 세상의 고통에 아파하다가 마침내 못된 마음을 먹기 시작한 모든 역사가, 온전히 부모의 잘못이기에.
부모라면 그저 사랑해야 한다.
“할 수 있으셔야 합니다.”
“……너무해요. 정말 너무하네요. 그렇게 보지 마요. 저라고 마음이 안 아픈 줄 알아요? 어쩔 수 없잖아요. 부모라고 해도 안 될 때는 있는 거잖아요. 박대민은 트라우마를 신봉하죠? 개인은 하나의 트라우마에도 평생을 고통받는다고 생각하죠? 그렇다면 그 모든 개인의 트라우마를 목격한 자는, 태초로부터 종말의 날까지 이뤄질 모든 폭력과 사기와 저주와 증오의 날들을 기억하는 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이죠? 부모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그렇게 고통받아야만 하는 건가요? 박대민은 몰라요. 박대민은 죽은 내 아이와 죽인 내 아이 사이에서 무엇도 할 수 없는 왕의 괴로움을 몰라요. 보라! 박대민의 딸! 저 불쌍한 아이가, 저 예쁘고 가여운 아이가, 스물도 되기 전에 강간당하고 난도질당하고 토막 난 채 어느 깊은 저수지에 묻혀버린대도, 박대민은 사람을 사랑하겠는가? 그런 일을 일흔일곱 번 겪더라도, 사람을 용서하겠는가?”
김민준은 재판관처럼, 또는 주례처럼 물었다.
그리고 나는 죄인처럼, 신랑처럼 고개를 숙였다.
한 번도 못 견딜 그런 일이 일흔일곱 번이나……
아니, 그 회수는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다.
전지의 왕이라면, 그것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테니.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심판이라는 것은……
신의 자살이 아닐까.
잘못된 방법으로 잘못된 생물을 내어놓은 생산자가, 그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레고를 버리지 못했던 아이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집을 불태우는 분신이 아닐까.
“……사람이 없어지면, 왕은 어떻게 됩니까?”
“네? 예? 이 와중에 그걸 물어요?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이게 그건가? 전쟁터에서 칼을 휘두르다가 대장간 노인네 잘 지내는지 염려할 자? 한효준 그 아이가 과연 식견이 있네요.”
너스레를 무시하고 박지수를 돌아본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예쁜 척을 하고 있는, 내 소중한 아이.
내가 골백번 고쳐 죽더라도 지켜야 할 나의 딸…….
박지수가 없다면 나는 아마 미치고 말겠지.
그때의 나는 박대민이라 불릴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끔찍한 광인 한 명이 탄생할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멈춘 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내가 널 잃어도,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있을까?”
근원적인 질문이다.
아직까지 나는 그 답을 내본 적이 없다.
김서현의 가정을 상담했을 때도, 유하늘의 가정을 상담했을 때도, 이가을이 겪은 아브라함의 제사에 대해 들었을 때도.
나는 그 가혹한 가정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상담사 박대민은 답을 내야만 한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의의 사건으로 내 딸아이가 사망한다면.
아내마저 살해당한다면.
나라는 상담사는, 그 이후로 세상을 저버려도 괜찮은가.
남은 수십억의 삶들을 모른 척해도 괜찮은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불태우려는 저 왕처럼……
스스로를 죽여도 괜찮은 것인가.
“……사랑하겠습니다. 세상 다른 모든 것을 다 준대도 안 바꿀 내 딸이, 그 모든 것들이 썩어 문드러진대도 지키고 싶은 내 딸이, 일흔일곱 번이나 비극을 겪는대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신을 증오하겠습니다.”
“그, 그럼, 진주희 저 아이의 뱃속 아이가 유산돼도요?”
뱃속 아이……?
가슴 설레는 천기누설이지만, 그래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내 아이는 그들만이 아니니까.
이아리를 지켜야 한다.
이수아를 지켜야 한다.
유진호를, 정보람을, 김서현을, 조미소를, 정승규를, 육성주를, 이준영을, 양선호를, 천수연을, 도세나를, 김용식을, 박수철을, 주민성을, 주영주를, 김지연을, 송은진을, 진대수를, 유하늘을, 손바울을, 신지원을, 박중민을……
그리고 내 모든 내담자들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신 역시 자살해선 안 된다.
나는 그가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불쌍한 신을 증오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 왜! 아, 왜! 아, 말하지 말지…….”
“……물어보신 분이 왜 그러십니까.”
“트리거라서요. 젠장. 미쳐 미쳐.”
이번 ‘미쳐 미쳐’는 아까와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당혹감과 행복감이 반쯤 섞인 듯한.
그리고 트리거라는 것은……
생각하다가 문득, 나는 묘한 감각을 느꼈다.
입장이 있으니 이야기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했다.
인간의 왕이라 했다.
심판 전의 유흥이라 했다.
박대민과 왕은 다르지 않다 했다.
구약의 신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악마 같지만……
기록된 것을 고스란히 믿는다고 해도 재해석은 가능하다.
‘말씀이 육신을 이루어 우리 곁에 사신’ 예수 이전에도, 분명 용서는 존재했다.
노아가 아직 죽기 전인 아브라함의 시대에, 신은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의 비로 학살했다고 한다.
원인은 그 땅의 죄악.
신은 아브라함에게 의인 50인을 찾으면 용서하겠다 했고, 45인을 찾으면 용서하겠다 했고, 40명, 30명, 20명을 찾으면 용서하겠다 했고, 마침내 10인을 찾으면 용서하겠다 했다.
그러나 그 열 명이 없어 도시를 멸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만이 의인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사위들까지 포함해봐야 6인이었다고.
신이 전지하다 가정하면, 그것은 일견 폭정처럼도 보인다.
그는 그곳에 열 명의 의인이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에게 희망고문을 가한 셈.
다만……
상담사 입장에서는, 그것이 다르게도 해석됐다.
신은 의인을 찾으라 명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의인을 만들어내라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명하노니, 부탁하노니, 간청하노니, 부디 그 끔찍한 악의 구렁텅이에서 고작 열 명이나마 의인이 되게 해달라고……
그는 아브라함이라는 상담사에게 애원했는지도 모른다.
성경에 이르길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 한 것은 누구였던가.
그 말은, 내 앞에 있는 아이가 한 것이어야 할 터였다.
그렇지만 그는……
“설마. 잠시만요. 예수는…… 맙소사. 그렇다면, 심판은?”
“……직관적 추론, 할 줄 아네요? 그래요. 이미 취소됐어요. 이번 목표치는 칠만 칠천 칠백 칠십 칠. 777인의 선지자가 저마다 백 명의 의인을 만드는 것이, 심판 이전의 유흥이었죠.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언제나 불가능했죠. 한 번을 빼곤 늘 실패했으니, 될 일이 아닌 거지. 사람은 그렇게나 강하지 않아요. 그나마 고르고 고른 선지자들조차 금세 타락하고 마는데, 그들이 무슨 재간이 있어서 백의 의인을 만들겠어요. 그래서 기대하지 않았어요. 아니…… 기대했어요. 부디 이번에야말로 영겁의 고통이 끝나고, 비로소 안식할 수 있기를.”
“……당신은, 신이 아니군요.”
“모르죠.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신의 아들인지, 인간의 영적 네트워크가 동종의 지독한 악업을 견뎌낼 단 하나의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인지, 이제는 분간이 잘 안 돼요. 어쨌든 그 비슷한 존재겠죠. 이런 짓들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황금빛 문자열의 두루마리가 떠오른다.
나로서는 읽을 수 없는 문자들.
그렇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지가 아니었군요.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스스로 임명한 선지자들의 행보만큼은 알 수 없었어. 그들이 변수인 거죠. 그래서 애원했던 거예요. 열 명의 의인을 만들어달라고. 칠만의 의인을 만들어달라고. 시기와 규모에 따라 수효는 달랐지만,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부탁해왔던 거예요. 그대로 두면 닥칠 것은 파멸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전능 역시 꾸며진 이야기…….”
“전능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은 저능하지 않죠. 어떤 선지자가 자기 신을 무능하다고 기록하겠어요.”
“그러니…… 당신은…… 심판의 신이로군요.”
“아, 논점이 그게 아니잖아요.”
“……교육부 같네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징계밖에 없었어. 그렇기에 애써 We클래스 또래상담부를 만들고 그들을 통해서 사람을 교화하고자 했지만…… 한계가 있었군요.”
“정답이긴 한데, 기분 나쁜 비유네요. 한국은 자살률 낮추려면 거기부터 빨리 뜯어고쳐야 될 것 같던데.”
“그야 이런저런 방법을 준비하고는 있습니다. 그보다 먼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저를,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어떻게 하긴요. 이렇게 하는 거죠.”
자그마한 김민준은, 내 옆에 서서 문자열을 펼쳤다.
그리고 청아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보라. 이 아이는 일곱 번 울고 일흔 번 다치고 칠백 번 희생하면서도 칠천 번 용서하고 칠만 번 사랑하였으며, 마음의 제단에 생명보다 소중한 딸을 올림으로써, 자기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죽음들을 보살피고자 했노라. 그로써 최후의 심판은 유예되었으니, 이는 사람의 복이요, 이윽고 찾아올 환난의 시기에도 서로를 얼싸안게 하는 방주일지라. 하여 이 제사장의 이름을 큰 사람이라 하리라……. 괜찮죠? 대인, 큰 사람.”
“음. 제가 그간 겨우 일곱 번 울었습니까?”
“아, 논점이 그게 아니라, 아브라함 같은 영광이잖아요?”
“아브라함은 행적이 썩 마음에 안 들던데요.”
“그래서 싫어요? 확, 심판 다시 해? 어?”
“못 하실 것 같습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예요. 저도…… 싫으니까.”
김민준은 정지한 시간 위에서 먼지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낙엽처럼 흔들리며 말했다.
“박대민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원래대로라면 존재할 수 없는 사람. 아까도 얘기했지만, 인방이란 건 편법이 되지 못하거든요. 면대면에서도 내담자를 진심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 어떻게 채팅으로 퀘스트를 달성해. 말도 안 되죠. 그래서 처음에 두 번 연속으로 ‘외모’ 올렸을 땐 이 사람도 별 볼일 없겠구나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네요. 특별한 영혼이겠죠. 정말 이순신의 환생일지도.”
“……가능한 겁니까?”
“모른다니까요. 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무책임한 왕이군요. 그럼 전 뭘 해야 합니까?”
“성전을 세우고 세계만방에 왕의 이름을 드높이세요.”
“싫습니다. 심판의 신 따위.”
김민준은 여전히 흔들리는 중이다.
다만 표정 쪽은, 이제 미소를 되찾고 있었다.
“치사해요. 그러면 전 얻는 게 없잖아요.”
“다시 묻죠. 제사장이 되면, 저는 뭘 할 수 있습니까?”
“볼 수 있죠. 세상 모든 끔찍한 것들을. 그래서 금세 망가질 수도 있고요. 보는 방법은…… 박대민이 알겠죠?”
“예. 게임의 미니맵처럼 보이는군요. 들여다보면……”
“자주 보지 말아요. 망가져요.”
“예. 자주 들여다보겠습니다.”
“……상담사님, 말 안 듣는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면 아이의 말을 들으시면 됩니다, 내담자님.”
“아, 돌팔이. 너무해요.”
처음으로 만난 비인간 내담자.
아마도 이 만남이 마지막일 인간의 왕.
김민준은 로비 여기저기를 떠다니고 있다.
그 상태로 말을 하는데도,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선명했다.
“박대민. 대인. 정말 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정말로, 심판 없이도, 사람의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어요?”
“심판이 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 필요 없습니다.”
“화나요. 왜 그렇게 단호한 거예요.”
“그러는 왕이야말로, 왜 그렇게 불안해합니까?”
“그거야…… 한두 번 당해본 게 아니니까. 십자가만 해도…… 휴. 제가 인간들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어요. 뭐게요?”
“……뒤통수, 이런 종류입니까?”
“정답. 통수. 통수 엄청 쳐요. 인간은 나빠. 미쳐 미쳐.”
“예. 삼다수통제조사.”
“네? 그게 뭐예요?”
“네 다음 신, 이런 뜻입니다. 어쨌든 희소식이군요. 상담사가 개입된 경우에 한해, 왕도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니.”
“그게 왜 희소식이죠?”
“알 수 없는 미래라는 뜻이니까요. 그렇다면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안 될 텐데. 아, 진짜 안 될 텐데. 지금이라도 취소하면 안 돼요? 많이 힘들 거예요. 박대민은, 제가 참 많이 아끼는 아이예요. 그 아이가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류를 다 심판할 셈 아니었습니까?”
“박대민은 살려주려 했어요. 매일 신 새끼 개새끼 속으로 되뇌는 아이지만, 그래도 제 마음 제일 잘 알아주는 아이니까. 제가 제일 사랑하는 아이니까, 방주를 짓게 하려고 했어요. 저처럼 괴롭게는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김민준은 손가락을 잘린 사람처럼 울었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었지만, 지금은 보는 내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서럽게 통곡하고 있다.
그래서 웃어줬다.
내가 아는 가장 행복한 순간의 기억을 담아.
“고맙습니다. 사람을 사랑해줘서.”
“……박대민을 사랑하는 건데요?”
“고맙습니다. 사람을 용서해줘서.”
“아니라니까요. 제멋대로 고집쟁이.”
“하나 묻지요. NBSC가 없었다면, 저는 어떻게 됐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김민준은 수줍은 듯 웃었다.
“그래도…… 제멋대로 고집쟁이였어요.”
“결국 상담사가 된 모양이지요?”
“네. 참 바보 같이 살았어요. 배신당하고, 또 배신당하고, 또 배신당하고…… 그런데도 딸을 안고 희희낙락 웃곤 했어요.”
“저답군요.”
“……이제는 그렇게는 못 살 거예요. 그게, 보이니까.”
“그렇게 살 겁니다.”
“그렇게 못 살아요. 전 알아요. 부모니까요.”
“웃기시네. 아빠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문 쾅.”
“……네?”
“아이는 이렇게 말하는 법이야, 꼰대. 나 이제 독립할 거야. 나중에 구경하러 오든가. 심판 없이 사랑으로 사는 세상을.”
“와. 진심으로 아프네요. 축객령이라니. 내가 꼰대라니.”
김민준은 말과 달리 환하게 웃었다.
나 역시 말과 달리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유구한 세월 동안 홀로 고통받았던 한 부모 때문에……
흔들리는 먼지 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래서 내가, 어. 여보? 울었어? 아, 화장 번졌잖아?”
“아빠 뭐야? 울보 만렙이야?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울어?”
“음. 미안.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황급히 화장실로 이동하며, 나는 생각했다.
심판하는 꼰대의 왕은 이제 없다.
오직 용서하는 꼰대마스터만이 한 명 있을 뿐.
나 하나가 그를 대신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리라.
세계만방에 성전을 지어봐야 종교전쟁이나 일어날 것이고.
그러니 상담사 박대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구를 추상화한 미니맵에 비치는, 776명의 실패한 순례자들을 찾아가는 것 정도다.
누가 그랬더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
2030년 8월.
세계는 전화에 휩싸이지 않았다.
그 대신, 나와 딸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아 왜? 요즘 다 독립한다니까? 왜 안 되는데?”
“그야, 다들 하긴 하지. 그렇지만 지수야. 너 이제 겨우 스물넷이야. 멀리 취직을 한 것도 아니고, 대학원 몇 년은 더 다닐 거잖아. 벌써부터 독립을 할 필요는 없어. 이렇게, 아빠랑 엄마랑 같이 사는 게 얼마나 좋니? 그리고 동생도-”
“아! 지호 걔가 내 옷 몇 벌 찢어먹었는지 말해봐?”
“그거야, 애가 실수로 그런 거잖니? 이럴 때일수록 북풍보다는 햇볕의 따스함으로 감싸줘야-”
“아, 나한테 좀 햇볕 주면 안 돼? 나 독립하고 싶다고!”
“어휴…….”
“뭐라고? 지수 너, 아빠한테 소리 지른 거야?”
“……해, 행복아! 행복이 밥 먹을까?”
아내가 거실로 돌아오자, 박지수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현명한 아내는 쉽게도 저간의 사정을 짐작해냈다.
“또 독립 어쩌고 했구나? 속이 빤해 진짜. 눈치 안 보고 남친이랑 집도 꾸미고 알콩달콩 하고 싶다 이거지. 벌써부터 진호 겁먹은 표정이 선해. 저 여시, 누구 닮아서 저러나 몰라.”
“음…… 일단 날 닮은 건 아닌 것 같지?”
“뭐? 그럼 나 닮았다고? 나야, 그냥 인기가 많았던 거지!”
“하하. 물론 그렇다고 생각했지.”
“아무튼…… 당신은 진짜 웃겨. 국제상담센터 나가면 무슨 홍해 갈라지듯이 직원들이 쭉 줄 서는 분이신데, 어떻게 자기 딸 상담은 그렇게 못하니? 왜 매번 허허 웃는 건데?”
“어, 나도 나름대로 설득을 했던 건데.”
“표정이 전혀 아니잖아? 뭐라고 헛소리를 해도 좋아가지고 계속 실실 웃기만 하니까, 애가 자꾸 막나가는 거 아냐? 당신 정말 답도 없어. 반항아 딸이 그렇게 좋니? 나보다 더 좋아?”
“아니, 당신도 똑같이 좋지.”
“그럼 좀 잘 말려봐라, 응? 쟤 독립해서 우리 몰래 동거하고 그래서 내 속 뒤집어지면, 그때 돼서야 말릴 거야?”
거기까지 생각하면 아무래도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아내가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애초에 지수도 진심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는 점.
성격 닮은 부녀의 딜교환 같은 것이다.
별로 중요치 않은 말다툼으로 자꾸 속상한 딸을 연기하다가, 나중에 꼭 필요한 게 있을 때 한 번에 몰아치려는 수작.
말뿐인 독립 말고 그쪽이 핵심이다.
그게 대체 뭐가 될지 슬슬 두렵기도 했다.
그래도, 보기만 하면 함박웃음이 지어지는 걸 어쩌겠어.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행복인걸.
“엉아 왔다, 햄-뽁-아-!”
“아, 햄뽀기 아니라 행복이라고! 저리 안 가?”
“누나, 나 햄뽁이랑 놀래.”
“넌 니 좋아하는 아빠랑 놀아! 내 행복이 건드리지 마!”
“오, 홀랜드. 치사량이네!”
“뭐? 너 집에서 신조어 쓰지 말랬지? 헐랭, 치사해, 이렇게 제대로 말 못 해?”
“……누나, 헐랭도 신조어 아니묭?”
“아, 그러네.”
“누나 바부부! 아빠 아빠, 나 왔지묭!”
후다닥 거실로 달려온 열 살 꼬마의 이름은 박지호.
이쪽도 누굴 닮았는지가 명확하다.
얼굴은 나를, 하는 짓은 엄마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아내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지만.
“너는, 좀 차분하게 못 다녀? 왔지몽이 뭐니, 왔지몽이.”
“왔지몽 아니라 왔지묭인데. 아리 누나 유행어잖아. 몰라? 엄마 텔 타고 90년대 갔다 옴?”
“……엄마 진짜 화낼까!”
“억! 마녀 ON! 아빠 아빠, 나 좀 구해주묭!”
“음, 가릿. 거인 ON! 엄마몬, 나를 뚫고 가라묭.”
“……어휴. 당신이 자꾸 받아주니까 계속 저러잖아.”
“하하하. 조금만 봐줘. 고학년 올라가면 내가 꼭 버릇 고쳐놓을게.”
“당신이 애들 이기는 걸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 진짜.”
그 부분은 아내의 오해다.
나는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아빠.
이번에도 나는 내 의지로 박지호를 목마 태웠다.
“아빠몬 레쯔고! 이대로 던전까지 가자묭!”
“던전은 무리고, 베란다나 갈까묭?”
“좋다묭!”
베란다에 나가면, 널따란 한강이 보인다.
빨간 햇살이 푸른 물 위로 넘실대는 광경.
그 앞에서야 아들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빠, 저 완전 철없었죠? 엄마 완전 속았죠?”
“그래. 나도 깜빡 속겠더라. 왜 그렇게 연기를 하는 거야?”
“엄마가 좋아하니까요. 생각해봐요. 제가 안 까불면 누가 까불겠어요. 누나는 전에 남친이랑 외박하려다 걸려서 털린 뒤로는 엄마한테 쪽도 못 쓰잖아요. 아빠는, 그냥 성인이고.”
“그래서 열 살 꼬마가 엄마의 미꾸라지가 된다 이거지?”
“네. 엄마 밖에서 맨날 웃기만 해야 되잖아요. 집에서라도 저렇게 막 소리 지르고 그래야죠. 그래야 해소되지 않아요?”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는 이야기.
그렇지만 그 마음만큼은 어느 한구석 잘못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조숙한 아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꼬마 박지호는 거기에 신이 난 듯했다.
“헤헤. 히히. 저 완전 최고의 상담사 되겠죠? 될 거예요. 그래서 아빠처럼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상담해줄 거예요.”
“저런. 우리 아들이 하필 이런 힘든 일을?”
“힘들지만 보람 있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 어떻게 알았니?”
“아빠 보면 알죠? 아빠는, 항상 웃잖아요. 연기로 웃는 게 아니라 계속 막…… 행복해서 웃잖아요.”
“이런. 아빠도 사실 많이 슬플 때는 있단다.”
“진짜요? 언제요? 한 번도 못 봤어요.”
“네가 못 알아보게 숨길 뿐이지. 가끔씩은 아빠도 잘못 볼 때가 있거든. 아무래도 777명씩이나 움직이고 있으니, 그래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건 분명하지만, 나비효과가 너무 심하단 말이지. 종종 막아뒀던 둑이 이상하게 터지는 때가 생겨. 그러면 그때는…… 아빠가 너무 미워진단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몰라도 괜찮아. 아빠만 알면 되는 일이니까.”
“저는, 아빠가 아는 거 다 알고 싶은데요?”
“흠. 그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우리 지호가 성인이 되고, 아빠랑 같이 상담에 대해 의논할 수 있게 됐을 때? 그때는 술 한 잔 하면서 아빠 비밀도 얘기해줄게.”
“오…… 그럼…… 빨리 커야지묭!”
그런 아들의 종아리를 쓸어주다가, 시야 한구석이 점멸했다.
비극의 탄생을 알리는 메시지.
황금색으로 빛나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러자 심연 역시도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봤다.
토막살인 사건.
가해자는 의처증을 앓고 있던 남편.
피해자는 그 의처증을 즐기며 바람을 피우던 아내.
흔하지만 끔찍한 사건이다.
가족이 무엇보다 소중한 내게는, 몸서리쳐지는 순간.
서로를 믿지 못하고 울타리를 세우는 그들이 몹시 밉다.
잔혹한 살해의 순간에는, 욕이 턱밑까지 치밀었다.
……일흔일곱 번이라니, 참 상냥한 거짓말이지.
벌써 10년 동안 악몽 같은 현실이 따라붙고 있다.
보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시야 안에서.
나는 언제고 이 심연에 삼켜지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호야. 아빠가, 혹시 나빠질 수도 있을까?”
“응? 아빠가요? 에이. 불가능해요.”
“하하. 왜 그렇게 생각하니?”
“아빠는 히어로니까요. SKY 교수직도 안 받고요, 맨날 방송하면서 사람들 치료해주잖아요. 방송 켜면 100만 명씩 들어오잖아요. 자동번역 되는데도 외국인들이 한국어 배우려고 막 난리 치고 있고요. 그래서 수아 누나도 거의 톱스타 됐어요. 흰머리 교수님 노후보장 됐지묭? 그리고요, 아빠 오아시스 만들고 나서요, 세계적으로 막 사건 사망률 엄청 낮아졌어요. 올해는 10년 전보다 한 40% 이상 줄어들 거래요. 아, 또 쌤들은요, 아빠 때문에 통일 무드 된 거래요. 아빠 검색하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칭찬글 떠요. 그래서 아빤, 내 영웅이에요.”
영웅.
그래, 나는 이 아이의 영웅이다.
결코 어둠에 물들지 않는 영원불멸의 슈퍼히어로.
그러니 그뿐이다.
저 심연은 지금으로부터 두 달 뒤에나 일어날 사건.
심판밖에 하지 못하는 신이라면 발만 동동 구르며 분통을 터뜨렸겠지만, 상담사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내 오아시스는 단수가 아니니까.
[예, 선생님! 다음 미션입니까?]
“그래, 바울아. 갑자기 의처증 이슈가 좀 염려되는구나. 나 사는 동네 쪽에 이병준이라는 내담자가 있었잖니?”
[마포구의 이병준. 알겠습니다. 금세 찾아내겠습니다. 말을 돌리시는 걸 보면 사모님과 함께 계신 모양이죠?]
“지금은 아들이랑. 여유 있으니 천천히 해도 돼. 자꾸 일로 괴롭혀서 미안하다. 현서랑 얼른 2세도 봐야 할 텐데.”
[관악구의 오현서라. 흠…… 실은, 임신했습니다.]
“그래? 이 녀석, 왜 빨리 말을 안 했어?”
[그게…… 고민이 좀 돼서요. 선생님. 아이 이름에 대민을 붙이면 경외의 표현이 될까요, 아니면 불경이 될까요?]
“손대민이라. 아들인 모양이구나? 글쎄다. 누구 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면 굉장히 기뻐할 것 같은데?”
[아하.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곧 리틀 대민 사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아, 이병준 조사도 착착 해서요.]
“그래. 정말 축하한다, 바울아.”
전화를 끊고, 리틀 박대민을 옆에 내려준다.
말똥말똥한 두 눈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울 아저씨예요? 아들 낳는대요?”
“그래. 우리 지호만큼 멋진 아들일 거야.”
“히히. 아빠. 나도 아빠 같은 상담사 될 수 있겠죠?”
“음. 그건 좀 어려울지도 몰라.”
“으아. 왜요? 치사량…….”
“치사한 게 아니라, 우리 지호는 엄마 닮았다니까? 아빠가 얘기 안 했었나?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아, 엄마요.”
“그럼 만약에. 지금은 아빠 도와주느라 재단 일만 하고 있는 엄마가, 그게 아니라 상담사로 나섰다면 어땠을까?”
“오…… 홀랜드!”
“하하. 힘든 길이지만, 우리 아들은 잘할 수 있을 거야.”
“이히힛! 나 그러면, 수영 누나한테 자랑할래요. 미소 아줌마가 저는 아빠만큼 못 할 거라고 그랬댔거든요. 바부부.”
조미소의 평가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내 아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상담사가 될 것이다.
심연과 마주하는 짐을 후대에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오직 홀로 짊어져야 할 짐.
그리고 내 대에 마무리해야만 할 순례다.
*
“정말로 줄어들고 있는 게 맞나? 20년을 그렇게 했는데도 아직 때때로 새 사건이 생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닌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늙는다는 것이다.
동어반복은 아니다.
두 말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나는 예순일곱이 되었을 뿐 썩 늙지 않았다.
110에 이른 ‘외모’도 있지만, 이후 운동신경 방면의 특성까지 구입하며 신체나이가 노화를 거부하게 된 것.
조만간 딸에게 외모 나이를 따라잡힐 판이었다.
어쩌면 특수분장 팀과 계약을 해야 할지도.
그에 비해 한효준은……
내 스승은, 이제는 염색도 그만뒀다.
일흔일곱.
앉아 있는 것조차 편안하지는 않은 노인이 됐다.
그렇듯 신체활동이 줄어들면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
하지만 외부의 자극은 신선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보통은 지인들을 염려하는 방향으로 사고가 이어진다.
그 결과가 이른바 노파심이라는 것이다.
고마운 마음이지.
가끔은 거기에 장난으로 대응해줄 필요도 있으리라.
“걱정하지 마, 한 형.”
“으, 응?”
“왜?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꼰대처럼 기강 잡게?”
“허, 허허. 그야, 음, 나도, 언제 말 놓으려나 하고 있었지.”
“장난입니다, 교수님.”
“……이 못된 자가 정말로! 에잉, 천벌을 받을 자!”
“하하하. 천벌은 안 받는다니까요. 신께서 절 너무 사랑하셔서요. 어쨌든 계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나비효과로 인해서 예정된 사건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외의 일반 사건은 점차 0으로 수렴하고 있습니다. 뒷수습에 최선을 다하면…… 조만간 옵니다. 학대도 살해도 자살도 없는 세상이.”
“허허……. 처음에는 정말 믿기 힘들었는데 말이야. 갑자기 신을 만났다면서, 무슨 국제상담센터를 만들겠다고 하고, 어디서 수백 미남미녀들을 데려와서 수련을 시키더니…… 결국은 해내고 있는 게로군. 악의 연쇄를 끊는 과업을.”
악의 연쇄.
그것이 핵심이었다.
간단한 질문에서 시작한 이야기.
인간은 분명 선한 감정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살 수 있다.
선별적인 소규모 사회에서라면 짧은 시간 동안은 이상적인 공동체마저 구축할 수 있을 정도.
그런데 왜, 인류는 서로를 증오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해 사회심리학자들은 주로 인구밀집에 따른 영토보존행동이나 개인적공간행동 등의 추동을 이유로 든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더 가까워지고 싶어 애쓰는 존재이기에.
그렇기에 문학가들이 왕왕 존재 자체의 모순이니 불완전한 존재니 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지만……
나는 사람이 완전하다고 믿는다.
어긋난 것은 오직 죄뿐.
사람을 속박하는 것은 본질적인 모순이 아닐 터였다.
그렇기에 원죄를 생각했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어느 내외의 이야기는 아니다.
인류가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악업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쇄되어, 후대에마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곡된 교육을 통해, 감정배설을 통해, 욕설을 통해, 비아냥거림을 통해, 살해를 통해, 경멸을 통해, 혐오를 통해……
그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눈덩이가 굴러온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한 세대의 악을 끊기로 했다…… 말이야 쉽지, 기실 불가능한 일이지. 그 해괴한 기술이 아니라면 말이야.”
“그렇지요. 이것조차 완전하지는 않아서, 인명이 살해되는 정도의 큰 사건이 아니라면 알려주지도 못하고, 해소하는 과정에서 변수를 일으켜 오히려 풍선효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수의 법칙은 적용되더군요. 상담사들의 힘으로 반사되지 않고 해소된 악의는, 분명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신이 말했던 세계대전부터가 없어졌으니까요.”
“그야, 그렇게 되었지. 해서 나는, 혹시 인구 폭발로 식량난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까지 했는데…… 이상하게 그조차 없더군. 편히 아이를 낳을 환경이 됐는데 말이야.”
“그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성교에 집착하는 것이나 자기 후손을 과도하게 배출하려는 욕구나, 악의까지는 아니겠지만, 스트레스에 영향을 받는 행위 아니겠습니까?”
“설마, 벌써 그 수준까지 스트레스 레벨이 떨어졌으려고?”
“하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처음 염두에 두었던 그 한 세대까지, 이제 10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안에 좋은 소식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고요.”
“거, 공수표는. 됐어. 나야 수아가 손주 볼 때까지 멀쩡히 살 테니. 천천히 해. 이제 들어가세나. 다들 기다리겠어.”
“예. 주인공께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셨네요.”
생일자인 스승을 부축해 연회장으로 돌아간다.
들뜬 조명기가 신지원과 시끄럽게 토의를 나누고, 불콰해진 이용덕이 손바울에게 억지로 어깨동무를 하고, 왕년의 아이돌들인 주민성과 이아리가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고, 이제는 아이 엄마가 된 박지수와 이수아가 조카들을 훈계하고……
그러던 모든 것이 한순간 멎었다.
20년 만에 맞는 상황이지만,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더라.
“꼰대, 왔어?”
“와. 다시 만나서 하는 인사가 그거예요? 치사량이네.”
“치사량 드립은 8년 전에 유통기한 끝났습니다.”
“와. 예순일곱 할아버지가 드립을 논하다니. 말세네요.”
김민준은 여전히 아이의 모습이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인지, 내가 못 알아볼까봐 모습을 바꾼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애초에 육신은 중요치 않은 것인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희소식을 가져오셨을 것 같은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뭔데요? 들어보고요.”
“제 스승께서도 들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오늘이 특별한 날이거든요.”
“일흔일곱 번째 생일? 그래서 오늘 온 거예요.”
옆자리의 한효준이 움찔하며 돌아본다.
주름 가득한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더라.
“허. 내가 이제 갈 때가 된 게로군.”
“갈 때는 무슨 갈 땝니까? 한 형, 인사나 하세요.”
“으응? 으음. 흠. 혹시……?”
“반가워요, 한효준. 생일 축하해요. 그리고, 축하해요. 그대들의 터무니없이 유치했던 오아시스로의 길은……”
김민준은 말을 맺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효준은……
“이런, 못된 신! 내 이날만 기다렸다!”
“아, 뭐야, 아, 먹는 걸로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고통받았던 유년기를 소소하게 복수했다.
그 정도는 이해해주리라.
그는, 우리의 신.
사람과 많이 닮은, 호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