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70장 - 구원받는 상담사 (1)
이겨울과의 소통은 아주 느리게 진행됐다.
의심받지 않을 템포로 아이패드를 주고받아야 했던 탓.
그로써 조금씩 그 집의 감시체계를 알아갔다.
내 예상대로 집안은 CCTV로 가득했고, 고해상도 카메라와 고감도 마이크에 걸리지 않으려면 귓속말 외에는 불가능했다.
다만 단 한 곳만은 괜찮다고 했다.
유일하게 프라이버시가 보호되는 장소.
바로 욕실이었다.
「 집밖에나가면감시가따라붙어서 집안보다더위험해요 부탁해요 저랑욕실들어가주세요 제가유혹할테니까넘어오는것처럼해주시면 언니도의심안할거예요 제발부탁드려요ㅠㅠ 」
과년한 처녀와 한 욕실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
그렇지만 카메라 앞에서 대놓고 귓속말을 주고받는다면, 이가을이 의심하지 않을 리 없는 일이다.
그때는 약속을 깨고 내 가족에게 위해를 끼칠지도 몰랐다.
욕실이라면 도청기가 달린 옷을 벗는 것조차 자연스러워, 이겨울과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원래 내 성격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디프로그래밍 내기를 위해 찾아온 입장이 신의 한 수.
지금이라면 풋내 나는 유혹에 응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가을 입장에서도, 일주일이라는 기간 동안 정신조작을 해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 생각할 테니까.
“저…… 선생님. 너무 덥지 않으세요? 좀…… 그쵸?”
“에어컨을 좀 틀까요?”
“아이…… 그게 아니라…… 네? 좀, 씻고 싶은데.”
“아. 네. 저, 예.”
그렇게 낯부끄러운 대화로 스킨십을 받아들인다.
이후 탈피하듯 외투를 거실에 남기고 욕실로 접어든 뒤에야, 마침내 한시름 놓고 변기에 앉을 수 있었다.
이겨울도 그때는 진짜 표정을 보여주게 되었다.
“물을…… 틀고. 이제 얘기해도 돼요. 이따…… 나갈 때 머리에 살짝 물만 묻히면 될 거예요.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괜찮습니다. 어느 정도 상황은 알겠어요.”
“아, 정말요? 짐작하셨구나. 제가 너무…… 억지스럽게 초대를 했죠? 이게 그러니까…… 제가……”
“알고 있습니다. 쌍둥이 언니인 이가을에게 감시받고 있으시겠지요. 세뇌된 광신도를 연기하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으셨을 거고요. 사정은 다 알고 왔습니다.”
눈이 동그랗게 된 이겨울을 바라본다.
원래대로라면 내기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말해줄 일 없었을 비밀이지만, 이제는 무관해졌다.
이미 오랜 시간 언니의 눈을 피해온 동생이기에.
지금 새로운 정보 하나를 더한다 해서, 갑자기 연기에 구멍이 생기지는 않을 터였다.
“실은, 이가을 씨와 한 차례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의도된 상담이라기보다는…… 납치되기 직전인 상황이었지요.”
“아, 지, 진짜요? 가을이가…… 그럼, 저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난 그 아이에게 당하지 않았어요. 아직은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이니까요. 같은 이유로 나도 그 아이를 치유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내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상담사인 내가 오랫동안 세뇌된 이겨울 씨를 회복시키는 것이 빠를지, 영원교 교육장인 이가을 씨가 내 아내를 세뇌하는 것이 빠를지.”
“마, 말도 안 돼……! 위험해요!”
“괜찮습니다.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내 아내니까요.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여러분을 도와줄 거예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겨울이, 뒷걸음질 친다.
그녀는 욕조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 진짜…… 진짜, 맞죠……? 저, 구해주러 오신 거죠? 저 이제…… 이제…… 더, 안 힘들어도 되는 거죠……? 1년이에요. 1년 동안…… 저, 진짜로…… 계속…… 죽고 싶었어요…….”
고작 상담사 한 명을 만나 안심할 처지는 아니다.
영원교라는 거대 교단과 비교하면 미력하기 그지없으니.
이가을에게 들켰을 때의 위험부담까지 생각해보면, 지금은 안도하며 눈물 흘리기보다는 냉정히 전략을 짜야 했다.
욕실에서 시간을 오래 끌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지만 나는 이겨울을 말릴 수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몰려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1년, 365일, 8760시간, 525600분……
이겨울은 그 시간을 어둠 속에서 버텨왔다.
언니의 열성적인 아바타를 연기하면서.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사이비 종교의 갖가지 지저분한 행사에 참여하면서.
들키지 않기 위해 작은 한숨조차 주의해야 했으리라.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으리라.
그 1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세뇌된 채였다면 편했으리라 싶을 만큼.
그렇게 터널 같던 감옥 속에 마침내 빛이 든 것이다.
비록 내가 형사나 이단심판관은 아니라 해도, 안도감에 마음이 녹아내리지 않을 수 있으랴.
흐느끼는 아이를 다그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1년이라는 말에서 짐작되는 부분이 있다.
다른 한 명의 동거인인 김민준.
중학교 1학년인 그 아이가 작년 가을에 이 집에 입주했다.
그는, 이가을이 교단에서 구출해낸 단 한 명.
부모로부터 학대받던 열세 살 남자아이였다.
사람의 마음을 잃어버린 마녀에게도 그 묘한 동질감은 강한 감정으로 다가왔고, 그렇기에 여러 이유를 들어 납치하듯이 동생의 집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거기까지가 기술을 통해 알아낸 개략적인 정보였다.
욕실이 감시의 사각지대인 것조차 이겨울의 힘은 아닐 터.
[환상의 수용]으로도 세부적인 사정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세뇌된 쌍둥이 동생 입장에서 설득이 됐을 리 없다.
아마도 김민준이 이가을과 몇 차례고 다툰 끝에 쟁취해내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겨울이 정신을 차린 것도 아마 그 무렵이겠지.
과연, 5분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여인의 첫 이야기가 그 남자아이로부터 시작했다.
“민준이라고, 있어요. 저랑 같이 사는 아이요. 걔가 저한테 알려줬어요. 가을이가…… 이대로라면 위험하다는 거요.”
“위험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러니까…… 영원교는, 제사장님의 힘이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열두 명의 교육장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각자 자기 지역을 총괄하고 있죠. 지금 가을이는 그중에 세 명을 포섭한 상태예요. 새로운 제사장을 세워서 패권을 잡자는 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자기가 차기 제사장 되려는 다른 교육장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는, 경각심도 가지고 있을 거예요. 가을이가 너무 갑자기…… 커졌으니까요.”
“그랬겠군요. 신앙심으로 움직이는 일반 신도들과 달리, 그들은 가을 씨를 처음부터 의심의 눈초리로 봤을 법합니다.”
“맞아요. 각자의 욕심…… 탐욕에 의해 움직이는 분들이에요. 잘못 부딪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수도 있는…… 무서운 분들이요. 저는 가을이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해요.”
꽤나 확신하는 말투였다.
아마 실제로 그런 사례를 지켜본 적이 있었던 거겠지.
그렇기에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물론 이가을 쪽의 상황이 그리 불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복수를 위해 10여 년을 철저하게 준비한 그 아이가, 꼬마인 김민준도 아는 헤게모니를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다.
미리 어떤 대비를 해뒀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교단 내에서 상잔이 벌어진다면……
상담사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중세 같은 살육전이야 없겠지만, 많은 이들이 다칠 터.
일부 신도들은 어리석고 순수한 신앙으로 인해 피를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막아야 하겠군요. 다행히도, 저는 상담사입니다. 이가을 씨를 바꿀 수 있어요. 아직은 요원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선은 이번 내기에서 승리하는 것이 먼저겠지요. 그를 통해서 가을 씨에게 정기적인 행복 상담을 강제할 겁니다.”
“아…… 진짜요? 그걸…… 언니가 들을까요?”
“들을 겁니다. 제가 아는 가을 씨라면,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을 결코 철회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그렇긴 해요. 가을이는…… 그런 애예요.”
[환상의 수용]이 알려준 인간상은 쌍둥이 동생에게도 공감할 만한 내용인 듯했다.
이가을은 약속만큼은 강박적으로 지키는 인물.
그러지 않는다면, 저주스럽고 경멸스러운 자기 부모와 똑같아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기의 결과에 저항할 리는 없었다.
“저, 그러면,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하면 가을이를 구할 수 있어요? 알려주세요.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할게요.”
“일단은 일주일간 가을 씨를 철저하게 속여야지요. 이렇게 서로 속내를 털어놓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만 그에 앞서서 몇 가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우선…… 겨울 씨는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언니에 대해서요.”
“가을이요? 가을이는…… 착한 언니였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다 알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라는 건……?”
“쌍둥이 동생을 세뇌한 주범이라는 것.”
“아…… 네. 맞아요. 저도 알고 있어요. 그 외에는요?”
“내가 먼저 물어봤습니다. 솔직히 대답해주세요.”
이겨울은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욕실이 서늘한 김으로 가득 찼을 때, 대답했다.
“가을이는, 부모님을…… 죽였어요.”
다시 흐느끼기 시작한 이겨울은, 오랫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날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
방송을 진행하며, 나는 종종 김민준을 생각했다.
버려지고 버려지다 간신히 구원받은 아이를.
소년을 구한 것은 신이 아닌 마녀였다.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는 ‘성녀’ 이가을이 그에게 동아줄을 내밀었고, 그는 고민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던 모양.
그렇기에 이가을의 마지막 인간성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어쩌면 그녀의 상담 과정에 무척 중요할지도 모를.
끔찍한 상처로 인해 마귀의 길을 걷게 된 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니게 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삼단논법으로 따져보자면, 그녀라고 해도 진심으로 참회하고 가족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으리라.
퀄리티월드의 그림들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무의식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만한 모든 것들의 집합, 퀄리티 월드.
이가을에게는 몹시도 황량해졌을 사진첩이다.
가족조차 이용하는 그녀에게는 그 자신조차 역겨울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민준을 구해낸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던 주제에.
아쉽게도 학원에 가 있어 직접 만나볼 수는 없었지만……
그 중학교 1학년생이야말로 다음 상담의 키포인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하릴없이 머릿속을 잠식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탐방 간 방송국이 마침 인왕킹의 것이었다.
두 번째 초대석 게스트였던 발랄한 중1 학생.
별다른 고민도 없으면서 뜨고 싶어서 출연했던 아이인지라, 이렇다 할 상담 없이 대충 돌려보냈던 인연이다.
이후 날 벤치마킹해 고민상담 방송을 진행했던 것까지가 내가 아는 그의 근황이었다.
이후 4개월이 지나 많은 것이 변했지만, 성격은 여전했다.
1000명쯤 되는 시청자들 앞에서 끼를 부리는 중.
그러다가 내 입장 메시지를 보고는 눈을 까뒤집었다.
[으앙! 진짜루? 아 진짜루, 꼰마님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텐션보소」
「왕킹이 하이~」
「올만인데 변함이 없네 ㅋㅋㅋㅋㅋ」
“……반가워요, 왕킹님. 무슨 컨텐츠를 하고 있었지요?”
[우왕! 형님 나 죽어! 미쳐 미쳐! 리액션 들어갑니다!]
“저기, 잠시만…… 안 듣네.”
「ㅋㅋㅋㅋㅋㅋㅋㅋ왕킹이 텐션은 알아줘야함」
「전생에 무당이었다고 소문났어요 ㅋㅋㅋ」
「나왔다! 가짜 작두 리액션!」
[아수라발발타아! 내가 만따리가 될 상인가! 오 예스!]
얼굴을 드러내고 BJ 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대체로 그렇다.
넘치는 끼를 주체할 줄 모르는 부류.
그러다가 관종이니 뭐니 욕을 먹으며 자괴감에 빠지는 경우도 많지만, 인왕킹은 개중에서도 강한 성격인 듯했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열망이 지금도 가득한 것을 보면.
그렇게 순진무구한 중1 학생을 바라보고 있자니……
김민준이라는 아이가 못내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될지가.
재산을 모조리 영원교에 바친 것으로 모자라 아들까지 섬노예로 팔아버리려 했던 부모와, 언젠가는 재회할 수 있을까.
인왕킹처럼 순수하게 끼를 부리는 중1이 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면……
평생 세상을 저주하며 복수를 위해 사는 이가을이 될까.
막아내야 할 일이다.
나는 상담사.
일어나지 않은 비극들을 구원하는 사람.
영원교를 이 땅에서 지워내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원룸을 나서던 길.
어느 차량의 본넷에 기댄 이가을이, 손을 흔들었다.
“지각 안 하셨네요?”
“내가 지각을 왜 합니까?”
“할 수도 있지 뭐. 겨울이랑 좋으셨잖아요? 위해 안 가한다는 조건 아니었으면, 했을 거죠? 그런 기회가 또 없잖아. 여자가 먼저 집으로 초대해서 샤워까지 했는데, 그걸 놓치면 남자가 아니죠.”
“내기만 아니었으면 욕실조차 같이 안 들어갔어요.”
“지랄하네. 거짓말쟁이.”
철저한 인간불신은, 이가을에겐 어쩔 수 없는 일.
그녀는 평생 배신만 당했다.
인왕킹보다 어린 나이에 모든 순수함을 잃어버렸다.
힘든 사람들의 구원자라 불리는 나를 만나면서도, 작은 기대조차 품을 수 없을 터였다.
그렇지만 어제보다 오늘 말투가 더 거친 것은……
아마도, 모든 일이 예상대로인 까닭.
“아내와의 대화가 잘 안 풀린 모양이군요.”
“……뭔 짓 했어요? 조사했던 거랑 전혀 다르던데.”
“약속되지 않은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뭘 어디까지 조사했던 겁니까?”
“진주희. 과보호 집안에서 공부 말고는 뭐 경험해보질 못한 철부지. 대학원 때 남자 잘못 만나서 경력 단절된 전업주부. 그러다가 그 남편 후광으로 재단 이사장 된 풋내기 사회인.”
“다 틀렸네요. 그 사람은…… 누구나가 부러워할 집안에서 관용과 애정을 몸에 익혔고, 모두가 반대하던 한심한 남자에게서 가능성을 찾아줬으며, 그 남편의 부탁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자기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내 여신입니다.”
“개소리. 그래봤자 멍청한 여편네죠.”
“말조심해주길 부탁해요. 나도 화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흥…… 지랄.”
오해할 법도 한 일이지.
사회적으로 활동한 이력이 적은 탓이다.
오래 곁에서 지켜본 내가 아닌 바에야, 그 사람이 얼마나 존경스러운 인물인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영원교 신도들의 뒷조사 따위는 무의미했던 것.
그렇지만 이가을은 끝내 내기를 철회하지 않았다.
신조 때문이다.
입에 담은 말을 번복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기에, 그녀는 실패를 직감하면서도 끝끝내 전진하려 했다.
“그래봤자 이미 약속 다 잡았어요. 재단 출연자 입장으로 접근해서, 앞으로 매일 세 시간씩 미팅하기로 했죠. 사실상 끝난 게임이에요. 이겨울은 절대 회복되지 않을 테니까.”
“동생을 꽤나 믿고 있군요. 아니, 믿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거나 그거나. 내기는 내가 무조건 이겨요. 그리고…… 할 거면 해요. 이겨울, 어차피 걸레니까. 그리고 이럴 때 섹스까지 하면 설득 더 쉬워지잖아? 유리해질걸요?”
“안 합니다. 샤워도 따로 했습니다. 유리해지든 불리해지든, 마음이 약해진 아이에게 부당한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든가요. 어차피 내가 이길 거야. 약속 지켜요. 여편네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는 순간, 다 조져버릴 거니까.”
“가을 씨야말로 주의하세요. 아내가 조금이라도 위해를 입었음이 확인된다면, 그 순간 행정부와 사법부가 전력을 다해서 영원교를 공격할 겁니다.”
“끝까지 개소리.”
“그나저나 집안에…… 남자아이의 신발이 있더군요. 겨울 씨한테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는데-”
“걔한테는! 신경 꺼요. 걔 건드리면…… 죽여버릴 거니까.”
그녀는 이를 갈며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스마트폰의 검색창을 열었다.
아르마딜로란 피갑목 포유류의 총칭.
등껍질을 동그랗게 말아 공격을 막아낸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등껍질을 마는 행위에 띠가 필요하다고.
애초에 몸 전체를 완전히 말 수 있는 것은 세띠아르마딜로뿐이라는 설명이었다.
[내담자 평가]의 이겨울은 띠 없는 아르마딜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더는 외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는 피식자였다.
세뇌의 본질은, 방어기제를 무너뜨리는 창.
인간을 인간으로 유지하는 방어기제를 아르마딜로의 등껍질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띠가 없이는 배 쪽의 공격에 취약해진다.
친언니에게 정신을 조작당했던 이겨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속 세뇌된 채였다면 모를까, 현실을 깨닫고 마음에 구멍이 뚫린 그녀는 사소한 한마디에도 크게 변화할 터였다.
그런 그녀가 언니를 용서하게 된 것은……
김민준 때문이겠지.
그 아이가 아르마딜로의 배에 온기를 전해줬을 것이다.
그리고 김민준은, 부모에게 배신당한 이들끼리의 동질감으로 인해, 마녀 이가을에게 구원받은 존재.
친동생보다도 훨씬 더 이가을의 퀄리티월드에 가깝다.
그렇기에 키포인트다.
NBSC의 [오래된 구원]을 살 수 없는 지금, 위기가 닥치기 전에 그녀를 구하려면, 김민준의 조력이 필수.
그는 벼랑으로 치닫는 이가을을 구원할 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