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69장 - 가정과 감정 (2)
“저는, 착해요.”
신지원은 그렇게 말했다.
한참 생각한 뒤에야 그 속내를 알 수 있었다.
“그래. 지원이는 아주 착하지.”
“진짜예요. 저는, 살인마 같은 거 안 돼요.”
“그럼. 알고 있단다. 그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진짜죠? 아저씨, 믿는 거죠? 의심 안 하는 거죠?”
“당연하지. 아저씨를 보렴. 이게 의심하는 사람 얼굴이야?”
“헤헤. 아니에요. 아저씨, 사랑해요.”
어제의 상담 때문에 저러는 것이다.
깝냥이란 닉네임의 경찰은 ‘살인마가 될 수 있는 싸이코패스들은 미리 색출해서 격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 즉시 반박하긴 했지만, 내게 사랑받고 싶은 꼬마숙녀로서는 무척이나 충격적이었을 터였다.
그러니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지.
깝냥이란 사람은 결코 악인이 아니다.
진대수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성실한 경찰이자 자랑스러운 가장이었으며, 그로 인해 부인을 잃은 피해자였다.
그렇지만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신지원에게 나라는 버팀목이 없었다면.
가족에게 경원시되며 소외감에 시달리던 와중에, 사이코패스는 다 치워버려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깝냥을 보았다면.
그때도 이 소녀는 사랑의 감정을 배울 수 있었을까.
마음이란 무른 점토와 같다.
날붙이로는 아무리 찔러대도 금세 회복할 수 있지만, 온도 변화에는 좀체 견뎌내지 못한다.
가벼운 냉각만으로도 던져 부술 수 있는 점판이 된다.
사회 속에서 소외되었다는 감각은, 제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저주하는 악의에 물들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 한마디조차 주의해야 한다.
세상의 구멍을 악으로 메우지 않기 위해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려면, 악인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물론 거기서 친한 이들 사이의 조언은 예외.
손바울의 코웃음까지 막을 필요는 없었다.
“꼬맹이. 좀 한심하단 생각 안 드냐?”
“바울아, 뭐가요?”
“아직까지도 선생님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테스트하는 행동 말이야. 나 같으면 벌써 여러 번 짜증 냈다. 그냥 좀 믿어.”
“왜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궁금해하지 말라고. 불경하니까.”
“바울이가 더 불경해요. 아저씨는 괜찮댔어요.”
“아니 그러니까…… 가끔은 그냥 좀 믿기도 하라고. 선생님께서도 가슴 아프실 거 아니냐. 니가 그렇게 자조적으로 떠들 때마다 표정 안 좋아지시는 거, 진짜 모르겠어?”
“……진짜요? 진짜 그래요? 저 때매, 아저씨 아팠어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달라붙는 제자를 쓰다듬어준다.
두 아이의 심정을 어찌 모를까.
곁에 있기만 해도 포근해지는 고마운 마음들인데.
“괜찮아, 지원아. 아저씨는 지원이가 말없이 믿어줘도 좋고, 지금처럼 하나하나 물어봐도 좋아. 그러니까 바울아,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아직 일곱 살이잖니.”
“흠. 예. 크면서 나아질 거라고는 생각합니다.”
신지원은 평범해지길 바랐다.
사랑하는 엄마가 무척이나 평범했기에.
그렇지만 아무리 보고 배우려 해도 엄마처럼 민감하게 신경전달물질에 반응할 수는 없었고, 절망감만이 점차 커져갔다.
그러던 와중에 나를 만났다.
그리고 NBSC의 초능력으로 사랑을 느꼈다.
아마도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낳고서 느꼈을.
그리고 그녀가, 평범하기만 했다면 부모를 보며 매일같이 표현할 수 있었을, 그런 감정을.
그것은 특별한 아이에게 있어서 정말 특별한 일이다.
한없이 내 인정을 갈구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한동안은 이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줘야지.
조금 더 나이를 먹는다면, 어쩔 수 없이 헤어나야 할 테니.
“아저씨…… 미안해요. 저 빨리 클게요. 빨리 커서요, 아저씨 행복하게 해줄 거예요. 엄마처럼 섹시해져서요.”
“그렇게는 안 된다니까. 아저씨는 재혼 안 한다.”
“삼처사첩! 하면 돼요. 아줌마랑 사이좋게 지낼게요.”
“야 이, 꼬맹아. 넌 좀…… 하아.”
뭐라고 지적도 못 한 채 고개를 젓는 첫 번째 제자.
신지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깔끔하게 빗어넘긴 청년의 옆머리를 바라봤다.
손바울은 신이 되길 바랐다.
남겨진 유일한 가족이 신을 모시는 무당이었기에.
하지만 그 바람은 오직 왜곡된 인지만을 돌려주었고, 아이는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채 우주 속으로 침잠했다.
그러던 와중에 나를 만났다.
그리고 NBSC의 초능력으로 마음을 싹틔웠다.
양친이 살아계셨다면 매일같이 누려왔을……
살아계시기만 했다면, 그들에게 매일같이 달라붙어 표현했을, 그런 따뜻한 감정들을.
유하늘은 자랑스러운 딸이 되길 바랐다.
부모가 그녀의 성적에 행복해했기에.
그 사랑이 지나친 속박이 되어 스스로를 해치게 되었을 때에, 나를 만나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조미숙은 좋은 엄마가 되고자 했다.
그녀의 양친이 그야말로 끔찍한 이들이었기에.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아이를 잃고 말았고, 나를 만난 뒤에야 비로소 인간 조미소로 살 수 있게 되었다.
한효준은 아버지가 되지 못하리라 믿었다.
그의 아버지가 트라우마를 대물림했기에.
이용덕은 상담사들을 증오했다.
죽은 아들이 찾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치료자이기에.
이수아는 자기 마음을 꾹꾹 누르기만 했다.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는, 소소한 사랑조차 부담이었기에.
……가정이란 그토록 무거운 멍에.
마치 낙인처럼 평생 따라붙는다.
행복하지 않은 가정이란 것은, 그렇기에 양육자의 죄다.
부모 된 자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아이를 지켜내야 한다.
그런데 이가을은……
그 작은 아이는……
그녀는 말했다.
아파.
엄마, 나 안 할래.
아빠, 나 살려줘.
아파.
구해줘.
왜 보고만 있는 건데.
왜 안 구해주는데.
왜 안 도와주는데.
왜 그렇게, 왜 그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는 건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환상의 수용]은 어디까지나 내 상상.
그것이 오류 없는 진실일지라도, 피상적일 뿐이다.
그런데 그 피상적인 이야기가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다.
본인은 다 지나간 일이라 신경도 안 쓴다고 말할 과거.
그 고통이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12년 전의 그날이 눈앞에서 되풀이될 것만 같다.
차라리 그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로써 울부짖는 아이를 구해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이가을은 이미 그 과거를 통해 변화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저승사자.
이후의 12년이 형성한 마녀의 교단을 파괴해야 한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죽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행복했던 12년과, 파멸의 12년.
개중 절반을 지워내고 난 이가을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과 자신을 이룬 모든 것을 잃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NBSC가 죽임을 명시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두 번 해내야 한다.
도합 24년의 디프로그래밍을.
*
“……내가 제자를 참 잘못 둔 게지.”
말과 함께 한효준이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에 내 제자들이 울컥했다.
“왜요? 왜 아저씨가 잘못 둔 제자예요? 할아버지가 완전 바보 스승님 아니에요?”
“꼬맹이 말이 맞습니다. 정말 선생님 탓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잘못 없으십니다. 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죄송스럽게도 그 마녀를 찾아내는 일이 늦어져서 그래요.”
“……얘기 다 들었으니까 새삼스레 설명할 필요는 없어. 기껏 손에 넣은 정보를 안 썼던 점도 답답하긴 하지만, 그거야 원칙주의자들 특유의 바보짓이니 지적할 것 없겠지. 아니, 이미 엎질러진 물 갖고 더 떠들 필요도 없겠고…….”
다시금 한숨이 흘러나오지만, 그뿐이었다.
한효준은 진중한 태도로 고쳐 앉아 설명을 시작했다.
“기본부터 짚고 넘어가지. 디프로그래밍이란 탈 세뇌를 뜻하는 말이네. 한번 일어난 정신조작을 되돌리는 작업이지. 그리고 그 과정은 세뇌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것은, 인간이 결코 쉽게 바뀌지 않는 까닭이라 보면 되고.”
인간은 학습하는 동물.
그러나 순응하며 배우는 과정은 성장기에 국한된다.
딱 10대 초반까지만, 자기 주변과의 소통으로 도출한 답들을 종합해 스키마(환경에 대처하는 반응체계)를 형성한다.
10년의 성장기가 이후 100년의 삶을 좌우하는 셈이다.
“예를 들면, 많은 딸들이 모친에게서 ‘남자들은 다들 철이 없어’라는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듣고 자라난다네. 그리고 평생 남자를 동등하게 보지 못하게 되지. 무의식에서부터 남성들을 경멸하여, 혹 유전자의 명령에 의해 연애를 하게 되더라도, 깔보는 심리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게야. 너는 어떠냐?”
“저요? 저는 그런 말 처음 들어봤어요.”
“그거 참 다행이구나. 하기야, 너한테는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들이 전부 철없어 보이겠지만.”
“아닌데요? 아저씨는 완전 완전 어른인데요?”
“그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답답한 어른이지만.”
“답답한 건 맞아요. 삼처사첩 안 한대요.”
“……그래. 아무튼, 설명 이어가겠네.”
그러한 스키마는 끊임없이 문제를 발생시킨다.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의 경제권을 박탈하고 용돈으로 모은 비상금까지도 갈취하는 경우가 있다.
스키마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착취관계가 강요된다.
상대가 무척 어른스러운 사람이라 해도 무관한 일.
이미 머릿속 답이 정해진 상태인지라,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그것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이 가족역동이 상담심리학의 근간인 이유.
모든 인간은 일차가족에게서 배운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함으로써 사회 속에 녹아든다.
외동아들의 교우관계가 좋지 않다는 말이나, 둘째 딸의 연애가 순탄치 않다는 말 등은, 이러한 가족역동의 영향을 일반화한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절대적인 영향은 아니다.
소년기를 다 보내고 나서도 자기 스키마를 교정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 과정은 실로 지난해, 잘 적응했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갑자기 문제행동이 도출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끊임없이 다잡지 않으면 익숙한 길로 돌아오고 만다.
사람의 무의식이 순응보다 저항에 익숙한 까닭이다.
학습에 순응하는 것은 10대 초반까지만.
그 뒤로는 뭐가 됐든 계속해서 저항하길 강요한다.
성격에 따라 잘 맞춰 사는 케이스도 있고 한없이 갈등을 빚는 케이스도 있겠지만, 내적으로는 누구나가 자기 인지를 맹신하는 고집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인지부조화일세. 방어기제가 인간을 새 정보로부터 보호하는 기작이지. 자기 스키마를 무너뜨리는 정보를 마주하면, 무의식이 방어기제라는 이름의 방패를 세우는 게야. 그럼으로써 먼저 형성된 인지도식을 지키네. 외부와의 갈등을 완충하는 중재자라고 해도 되겠지.”
“왜요? 그냥 배우면 안 돼요?”
“그래서야 팔랑귀가 되잖겠니? 여기 말 들어보면 여기가 옳고, 저기 말 들어보면 저기가 옳은 것처럼 느껴지고 말아. 그래서야 너무 줏대가 없는 꼴이지.”
“아저씨가, 기준을 세우고 판단하면 된다고 그랬어요.”
“바로 그 기준까지가 스키마의 범위라는 얘기야. 이를테면 신지원 너는, 내가 박 선생을 비난하면 듣고 싶지도 않지? 그런 것이 방어기제야. 내 기존의 논리를 지키는 방패.”
“아, 그런 방패 인정. 아주 튼튼해야 돼요.”
하지만 방패가 언제나 튼튼하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야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터.
해서 때로는 무의식이 방어기제를 거둘 때가 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순수의 꼬마처럼,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진실로 믿어버리게 되는 순간이.
“어떤 강압에도 자기 지론을 지키던 사람이, 때로는 사소한 계기로 큰 변화를 겪는 경우를 보곤 하지? 만약 그것을 이용한다면 어떨까? 그 변화를 강제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때는, 마치 소프트를 업데이트하듯이 인간의 사고방식을 뒤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 발상이 바로 마인드컨트롤의 시발점이었네.”
“시발? 왜 욕해요?”
“……손바울, 이런 건 네가 좀 설명해라.”
“싫습니다. 꼬맹이 무시하고 하던 얘기나 마저 하시죠.”
“왜 무시해요? 바울이, 혼날래요? 시발!”
우리가 의식하는 사고는 사실 빙산의 일각.
사람의 인지도식을 바꾸는 것은 논리가 아니다.
지구가 둥근 증거를 아무리 들이대도 끝끝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그 진리를 잘 알 수 있다.
인간은 오직 무의식의 허가가 있어야만 변화한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어떤 경우에 자신을 바꾸는가? 그 방향은 두 가지일세. 첫째는 너무도 불편한 환경이 강제될 때. 둘째는 너무도 편안한 환경이 유지될 때.”
전자는 고문과 감금을 통한 정신개조다.
이러다 죽겠다 싶은 상황이 되면 무의식은 변절을 명한다.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투사들이 180도 선회해 적폐가 되는 놀라운 변화가, 대부분 이러한 과정이었으리라.
그리고 후자가, 이른바 세뇌라 불리는 과정.
화목한 가정에서 양육된 청소년이 부모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듯, 무의식은 만족스러운 환경에서도 방패를 치운다.
그것이 설혹 거짓으로 점철된 가짜라 할지라도.
“세뇌란…… 사실은 상담 역시 세뇌의 조건을 이용하지. 상대의 말을 무시하거나 재단하지 않고 느긋하게 경청함으로써, 내담자의 무의식이 평온을 느끼도록 돕는 것. 그럼으로써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왜곡된 인지를 극복하도록 이끄는 것이야. 하지만 우리는 딱 거기까지지. 한정된 시간 동안 마주하는 관계에서 세뇌는 불가능하네. 상담소를 떠나는 순간, 사회의 무수한 관계들이 몰려들어, 기존의 인지도식을 몇 번이고 상기시킬 테니까. 직업윤리를 지키는 한, 내담자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껍질이 깨지지 않아. 그렇기에 강제적인 세뇌에는 몇 가지 조건이 추가되네.”
첫 번째 조건은 선민의식.
우리가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들이며, 사회에서 만나는 타인은 구원받지 못할 열등한 부류라는 차별주의다.
그러니 가능한 하등인류와 친해지지 말라 권장한다.
두 번째 조건은 정보와 생각과 행동의 통제.
이를테면 사이비 종교의 경우, 긴 시간 진행되는 성경공부나 예배 중에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특징적인 어휘와 교리를 반복해서 입에 담도록 만든 뒤, 사회에 돌아가서도 은근히 모임의 행동양식을 따르도록 강제한다.
그렇게 오직 새 정보에만 집중하도록 만든다.
‘기존의 나’와 ‘새로운 나’ 사이에 벽을 쌓는 작업이다.
그로써 혼자가 되었을 때의 자정작용을 막는다.
그것들이 모두 성사되면 비로소 감정의 통제가 발생한다.
열등한 바깥세상과 멀어지길 바라고, 교단 안에서 더 인정받길 갈망해, 주인의식을 갖고 조직에 매진하게 된다.
“그때부터는 그저 자발적인 변화지. 세뇌 집단은 더는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아. 그저 잘한 일에 칭찬이나 몇 번 해줄 뿐인데, 그 스스로가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새 신도를 끌어들이려 애쓰게 된다는 말이야. 우스운 일이지. 허나 웃을 수만은 없는 일…… 아. 벌써 이렇게 됐군. 오늘은 이쯤 하지. 하나만 기억해두게. 그들은 이미 도구일세. 논리적 소통은 포기해.”
수십 차례나 종교 상담을 맡아봤다는 한효준의 총평.
그 말은, 과연 틀림없었다.
“아, 정말요? 신이 존재하심을 믿으시는 거군요?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유명한 상담사님이 되셔서, 대중들한테 좋은 말씀 나눠주고 계신 거겠죠? 정말 존경해요. 너무 멋지세요. 늘 뵙고 싶었어요, 선생님.”
2020년 10월 4일.
나는 마침내 이겨울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