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67장 - 상담사의 선 (2)
“아, 안녕하세요, 형수님. 안녕, 지수야.”
임시 경호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아내 쪽도 어색한 것은 마찬가지.
딸애만이 언제나처럼 발랄했다.
“삼촌, 그거 뭐야? 선물이야?”
“어? 아, 선물을 깜빡했네. 이건 그냥 삼촌 그림 그릴 거. 너 선물은, 이따 나가서 사올게.”
“그럴 거 없어, 중민아. 너도 바깥에 나가는 일은 최소한으로 줄여주렴.”
“어. 그럼 뭐…….”
어깨를 으쓱인 박중민은, 곧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형,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야? 그러면 경찰에 신고 먼저 해야 되지 않을까? 협박편지 보낸 놈까지 걱정해주는 마음은 알겠는데, 내가 뭐 운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무기를 들고 있다거나 하면 좀 위험하잖아.”
“싸울 필요는 없어. 혹시 찾아와도 추적만 해주면 돼.”
“그러다 들키면?”
“넌 키가 크잖아. 달리기로는 못 따라올 거야.”
“아, 그건 그렇지.”
그런 동생의 소매를 끌어당기는 딸.
쾌활한 한편으로 일말의 불안감이 든 모양이었다.
“삼촌 삼촌, 싸움 잘해?”
“싸움……이라기보다, 지수는 무조건 지켜주지.”
“웅. 그럼 아빠는? 아빠 싸움 잘해?”
“어지간해선 안 질걸? 아빠랑 삼촌 살던 동네에선 거의 전설이었어. 덕분에 삼촌한테도 함부로 대하는 애가 없었지.”
“진짜? 히…… 다행이네.”
어렸을 때라고 제대로 싸움을 해본 적은 없었는데.
아이다운 걱정으로 싸움 얘기를 하는 지수에게, 중민이가 거짓말을 해서 안심시키는 모양새였다.
덕분에 집을 나설 때쯤에는 다시 발랄하게 손을 흔들어준 딸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서며, 나는 간밤의 고민을 구체화했다.
이가을을 붙잡을 방법에 대해서.
싸움 실력이 어쨌건 결코 쉽지 않은 상대다.
바울이나 동생의 추적으로 소재를 파악한다 해도 마찬가지.
미리 고민해둬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그녀는 지금껏 만났던 내담자들과는 다르다.
양가감정 속에서도 나를 통해 회복하기를 염원하는 이들은, 공격적인 말을 하면서나마 소통의 가능성을 열곤 했다.
하지만 이가을은 완전한 불통.
편지 한 장만을 전한 뒤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 동기를 손바울은 겁 때문이라고 봤고, 나 역시 그 가능성을 고려해 아내에게 친정과는 의논하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자칫 검찰이 움직이면 고슴도치를 자극할 수 있으니.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말이 있다.
추운 겨울에 달라붙어 체온을 보존하고자 했던 고슴도치들이, 너무 가까이 가면 서로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게 되는 탓에, 다가서지 못한 채 얼어 죽어버리는 상황.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우화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현실의 고슴도치라면 가시를 눕혀 바짝 붙을 수 있을 테니 올바른 상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심리학도에게는 꽤 의미심장한 논리가 아닐 수 없었다.
사람에게는 고슴도치 같은 선이 있다.
너무 멀어지면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가시로 서로를 괴롭히고 마는 거리.
우리는 각자의 선을 지키며 인간관계를 이어나간다.
가장 흔한 예로는 연인관계가 있을 것이다.
바깥에서 데이트만 하던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궁합이던 두 사람이, 동거나 결혼생활을 하면서는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고개를 젓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각자의 선 안쪽으로 들어가버린 까닭.
예전에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이질감이 생활 속에서 불편함을 야기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관계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칼이 뽑혀,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상처를 입히고 만다.
물론 나는 이가을과 썩 가깝지 않은 존재.
구태여 그녀를 찾으려 하지 않던 지난 두 달 동안, 우리는 서로의 선 밖에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가을이 가시를 세워야만 하는 환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거리감은 다양한 관점을 지닌다.
평범하게 사는 시민들에게는 물리적인 거리뿐이겠지만, 유명인이 되고 나면 심리적 거리감이 남들과는 달라진다.
마치 생활 속에서 호흡하는 지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
그것이 연예인들이 악플에 고통받는 이유일 터였다.
실질적으로는 선 밖의 타인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기사를 찾아다니며 못된 악플을 남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연예인이기에 무수한 뉴스와 프로그램을 통해서 반복해 모습을 보이게 되고, 친한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가 목격담으로 전파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심리적인 장벽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명 연예인들은 쉽사리 가시를 부른다.
이제는 나 역시 그런 존재가 됐고.
<퀸즈랜드> 16화를 통해 재차 이슈를 일으켰다.
5화의 소풍 편으로 휴머니즘의 감동을 일으켰던 ‘나사없’은, 지난 14화에서 마침내 시청률 15%를 돌파했다.
심야에 편성된 <토크꼰서트>도 8% 수준.
꼰미디어는 이미 인터넷 미디어 시장을 장악했고, 육군 사업의 낙찰로 인지도를 높인 프리VR 역시 연일 상승세다.
3/4분기 한국에서 나보다 유명한 이는 전무했다.
그리고 그런 나는 언제나 말해왔다.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우리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진심으로 응원해주면, 어느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보편적으로는 듣기 좋은 이야기일 터였다.
실제로 많은 내담자들이 내 상담 덕분에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증언해주고 있으니, 허언증 같은 느낌도 아니리라.
그렇기에 절대다수의 네티즌은 내게 열광한다.
상담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팬레터도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나를 좋아할 리는 없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 막막한 극빈층에게, 업타운에서 파티를 즐기는 행복한 상류층이 곱게 보일 리 없듯이.
정서가 가난한 이들 역시 정서의 부자를 미워하는 법이다.
그런 부자가 감히 선을 넘어온다면……
그때는 귀를 닫고 칼을 휘두르는 것이 당연하다.
꼭 겁이 많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 한마디 한마디를 듣는 일이 끔찍한 불쾌로 여겨질 터였다.
이가을을 상담하는 일이 어려운 것은 그런 까닭.
그녀는 나를 거부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이미 선 안에 들어온 유명인이기에.
얼굴을 마주하고 NBSC의 기술을 총동원해 상담에 임하더라도, 그녀는 끝끝내 행복을 저주하려 애쓸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게 이유일 수도 있으리라.
에픽퀘스트의 서술이 ‘쓰러뜨려봐요’에서 ‘죽여봐요’로 바뀐 것이, 지나치게 유명해진 꼰마의 입지 탓일지도.
지금의 나는 존재만으로도 누군가를 괴롭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의 행복일 수 있다.
[그거 아세요? 저, 이제 매일매일 댓글 챙겨봐요.]
웹툰 <기획팀장>의 작가 도나쓰이자 내 인터넷방송의 열혈후원자인 도세나는, 한 점 그늘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요. 나도 가끔 살펴보고 있습니다. 90% 이상이 작품을 찬양하고 세나 씨를 응원하는 이야기들이더군요.”
[네. 꼰마님 덕분이에요. 꼰마님 점점 더 유명해지시고, 그러면서 ‘악플은 나한테만 써주세요’ 그렇게 항상 말씀하시니까, 그런 거 보면서 사람들 마음이 많이 편해졌나봐요.]
“그런 효과가 있었을지도 미지수지만, 내 유명세의 지분 상당량이 세나 씨에게 있습니다. 누적조회수 1억을 넘긴 대작 웹툰이 계속해서 꼰마 상담소를 홍보해주고 있으니까요. 감사인사라면 내가 해야겠지요.”
[어머. 그게 아니라 제가 꼰마님 홍보하는 걸로 유명해져서, 팬들도 늘어나고 1억뷰도 찍은 건데요? 제가 감사하죠. 사실은 저뿐만이 아니에요. 꼰마님 활동 시작하시고 점점 악플 줄어가는 거, 다른 작가님들도 많이 느끼신대요. 도발맨 작가님이랑 크리링 작가님이랑, 제가 다음에 소개해드릴게요.]
“예…… 방송도 하시는 분들이시니 뵈면 좋을 것 같네요. 합방 각도 잡을 수 있다면 좋겠고요.”
[후후. 두 분 시청자 분들한테도 좋은 말씀 전해주시게요?]
“그래야지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내담자를 만나려면, 사적인 만남까지도 공적으로 치환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바쁘신 와중에 제 웹툰 댓글까지 확인해주고 계신 거네요? 정말…… 영광이에요. 고마워요, 꼰마님.]
도세나의 호전은 나로 인한 일이 아니다.
그녀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나나 나를 응원해주는 시청자들과의 관계가 그 마음의 약해진 부분을 감싸준 것은 분명한 사실.
우리는 그렇게 가까워짐을 통해서 함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선을 넘어오는 저주스런 괴물로 보일지라도, 멈춤 없이 모든 이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후진 없이, 오아시스를 향해서.
“반갑습니다. 대통령 성영준입니다. 제가 뵙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는데, 이제야 이렇게 모시게 됐네요.”
상춘재 앞에서 만난 대통령은 무척 밝은 얼굴이었다.
건국 이래 최초로 두 달 동안 자살 없는 군대라는 신기원을 이룩한 상황이니, 특전사 출신 대통령이 나를 반가워하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물론 그 일은 나만의 공이 아니다.
그저 좋은 사람들의 힘이 악의를 막아냈을 뿐.
그렇지만 사실관계를 바로잡지는 않았다.
대통령에게 인정받은 상담사라는 프레임이야말로, 이제부터 세상을 바꾸는 일에 촉매로 작용해줄 테니.
“저 역시 반갑습니다. 그간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이 나라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나아질 일만 가득하리라 믿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도자로서 많은 일을 해주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상담사는 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을요.”
“아이쿠. 뵙자마자 이런 말씀을 듣네요. 제가 부족한 대통령인 탓이겠지요. 안으로 가시지요. 시간은 많습니다.”
상담사는 그저 사람을 만나는 직업.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의 관계뿐이다.
그를 넘어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을 고쳐나가기 위해서는, 올곧은 의지와 추진력을 갖춘 지도자가 필요할 터였다.
그런 관점에서 성영준 대통령은 꽤 적합한 인재였다.
작은 약점 정도는 있었지만.
「 내담자 명 : 성영준
평가 결과 : 이상에 좌절한 염세주의자.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꿈은 무너지고, 비탄 속에서 하루하루 버텨나가고 있다. 지지 않겠다는 맹세만이 버팀목일 뿐. 」
보통 형편없이 추상적인 [내담자 평가]가 꽤 자세한 서술을 보여주는 것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사인 까닭.
그간 보아온 대통령의 행적과 인간관계가 준거다.
그렇다 해도 정치인으로서의 PI나 가짜뉴스 등의 영향으로 억측만이 난무한 것이 보통이겠지만, 나는 NBSC의 힘을 통해 오류 없는 인물상을 획득할 수 있었다.
성영준은 지음(知音)이라 할 수 있는 삶의 동반자를 자살로 잃었다.
그 일이야말로 그가 정치에 투신한 동기.
벗이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겠다는 열망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이미 떠나간 이가 그랬던 것처럼, 취임 4년차를 맞이한 그의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절망만이 가득해 보였다.
세상에 지지 않겠다 맹세했기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막상 정점에 올라 마주한 어둠의 무게는, 강한 대통령의 상징처럼 보였던 그에게도 고통스럽기만 한 모양이었다.
그 이유도 모를 일은 아니다.
말이 행정부의 수반이지, 대학생들조차 사실상 권한이 많지 않은 직위인 것을 알 정도니.
워커홀릭인 나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정치공학 따위에는 작은 관심도 없다.
꼰미디어를 통해 서민들의 친구라는 이미지를 굳히고 있는 주영주가 어련히 잘해주리라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만 흔들리는 지도자는 사회 전체를 혼란스럽게 한다.
누구보다 강해야 하는 직위지만, 이 대통령에게도 상담은 필요해 보였다.
“오늘 일정은 비공개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예, 그럼요. 기자 분들도 사진 찍고 금방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끼리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상담을 시작하지요.”
“예……? 상담이요?”
“예, 상담입니다. 우스운 소리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상담사 수련생인 제게는 식사 역시 업무의 일환입니다. 단지 끼니나 때우고자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주변을 물리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시길 희망합니다.”
“아이고…… 주 의원이 상담바보라고 하더니, 정말이었네요. 이런 낯선 곳에 오셔서도 일단 상담부터 하려고 하시니. 하지만 오늘은 저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이…… 박대민 상담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마련한 자리입니다. 국정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부분이 있다면 귀를 열기 위해서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상담사입니다. 정말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저는 태블릿으로 제 일이나 볼까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무례로 느껴질 말.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성영준이 이내 웃음을 터뜨리리라는 것을.
“……하하! 이거야 원. 정말 알려진 그대로의, 그런 분이시네요. 설마 청와대까지 오셔서도 ‘꼰대’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의 본질이 어디 가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사람의 본질은…… 그렇게 변치 않는 기질인 것인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부분도 상담이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듣겠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그러면…… 꽤 내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요.”
“상담사에게 있어서 내담자의 정보를 유포하는 일은 금기 중의 금기입니다. 제가 직무윤리를 내려놓는 경우는, 대통령께서 무시무시한 범죄를 벌이려 하는 그 순간뿐일 겁니다.”
“……하하. 그러면, 여러분은 잠깐 쉬고 계시겠습니까?”
“예, 대통령님.”
대통령이 주변을 물리고 자신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원래 그럴 계획은 조금도 없었을 텐데도.
그 목소리가 퇴직을 강요당한 뒤의 내 모습과 겹쳐졌다.
“나는,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오해와 잘못들을 바로잡고, 사람이 먼저인 나라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요. 그러기 위해서 나름의 노력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는 부족한 사람이에요. 타당한 것은 이상뿐이고, 나라는 사람 자체가 누구보다도 한심합니다. 나는 이상에 걸맞은 존재가 아니에요. 이제는 정말…… 그래요. 부끄럽습니다. 대통령도 아니신…… 이게 선생님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어쨌든 일개 개인인 상담사 선생님께 비해서도 참 부끄러운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례로 오늘 선생님을 모신 이 자살률만 하더라도…… 저는 평생 한 명의 자살자조차 구하지 못한 사람이지요. 그런 주제에 대통령이랍시고 거들먹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죄인으로 느껴지시는 모양이군요.”
“죄인…… 예, 그렇습니다.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이상으로 가득하던 젊은 시절이, 이제는 꿈에도 나타나 꾸짖는 괴물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제게…… 해답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 없습니다.”
“……어이쿠. 이렇게 단호하게 답하실 줄은.”
내가 대통령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상담사는 그저 생각을 정리하도록 도와주는 존재일 뿐.
다만, 야매 상담사에게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제 경우에는, 군인 시절이었습니다. 중대 후임이 자살을 했고, 그 아이의 시신을 제가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아, 들었습니다. 부대에 직접 가서 강연도 해주셨다고요.”
“그랬습니다. 조금은 늦은 나이에 입대했던 저는, 당시에 군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이등병이 병장들과 호형호제를 하는데도 상병들이 나무라지 않았으니, A급 군생활에 적신호가 아예 없었던 셈이지요. 그렇기에…… 할 수 있었습니다. 친한 병장들에게 얘기해 사고로 이어질 괴롭힘을 줄이게끔 유도할 수 있었습니다. 절 아끼는 소대장에게 그 아이를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는 김 이병의 살해자 중 한 명입니다.”
“아…… 그런 죄책감을 갖고 계셨군요. 그래서 이토록 열심히, 내담자들을 위해 살고 계신 것이고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저 저를 위해 살고 있습니다. 상담사로서 자살을 추동하는 괴로움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은, 그저 직무윤리지요. 대통령에게 정치가 그렇듯이요.”
“……예. 그렇군요. 그렇지만 이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사실…… 정치를 하는 자리가 아닌 듯합니다. 제가 아무리 넓게 살피고 현명하게 행동하려 해도, 늘 실수가 나옵니다. 누구나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데도,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제 행동에 피해 입는 이들이 생깁니다. 대통령은…… 정치인이라기보다, 책임지는 자예요. 그저 비난을 받는 대상이 되어주는 것이지요. 세상은 알아서 돌아가고 있고, 그 안에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욕받이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 일을 잘하세요.”
성영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하하! 그 일을…… 잘하라고요.”
“예. 죄인에게는 죄인에 걸맞은 인생이 있습니다. 저도 대통령님도, 자타가 공인한 죄인이지요. 그렇다면 고뇌하고 번민하는 것조차 사치입니다. 우리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신 있게 자신의 길을 걸으세요. 뭐나 되는 사람마냥 머리 싸매고 있지 말고, 행동한 뒤에 욕을 먹으세요.”
“아이고…… 그래서 처음부터 상담만 하겠다고 하신 거군요. 죄인에게는 순수한 식사조차 사치라는 거로군요.”
“예. 우리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런 무수한 사람들의 정직한 고통입니다. 스스로 욕먹는 일이 대통령의 직무라고 하셨습니까? 하세요. 잘하세요. 시민사회를 믿으세요. 대통령님이 정말 악정을 펼친다면, 이미 한 차례 그랬던 것처럼, 시민들이 나서서 심판할 것입니다.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대통령답게, 사람답게요. 말씀하셨다시피 행복한 세상은 대통령님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의 시민이 세상을 바꿀 겁니다. 국민의 일꾼은, 일꾼답게 고민 말고 일이나 하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분명히 선을 넘은 충고.
상담사로서도 해선 안 되는 말이었지만, 상대가 대통령이다.
군부독재 시절이었다면 대공분실로 끌려갔으리라.
하지만 성영준은 다르다.
자기 이야기처럼 부족한 점도 많고, 현재진행형으로 실수도 저지르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에게는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눈이 있다.
“그래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안 따를 수가 없군요. 하하하. 내가 주제넘었어요. 일꾼 주제에 말이에요.”
“그렇지요. 이제라도 아셔서 다행입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기분이 좀 후련하네요. 이제는 더 편하게 욕을 먹을 수 있을 듯합니다. 상담이란…… 좋군요. 이래서 다들 꼰마, 꼰마 하나봅니다. 그럼 이제…… 일꾼이 열심히 차린 식사인데, 좀 드실까요?”
“예. 식사를 합시다.”
대통령과 함께하는 식사는 고즈넉하고 신속했다.
각자의 일이 넘쳐나는 처지이기에.
그렇게 우리는 다시 서로의 선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내 이름이 모든 일간지의 1면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