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진없는 상담사-186화 (186/200)

# 186

67장 - 상담사의 선 (1)

카톨릭과 이슬람 경전에 따르면, 태초의 두 인간은 신이 금지한 선악과를 섭취함으로 인해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다.

이른바 원죄(原罪).

그 하나의 사건이 신과 인간이 단절된 계기라고 한다.

외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자면, 인류가 늘 기아와 갈등에 시달리는 원인을 신학화하려는 종교적 견해라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에 종종 그 선악과에 대해 생각했다.

성경에 대한 호기심은 없었지만, 도무지 황당한 설화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신이 금지한 일을 행한 반항 자체는 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금지된 행위이 선악을 구분하는 지혜의 습득이라면, 논리가 기묘해진다.

그것이 대체 왜 금지되어야 한단 말인가

선과 악도 판단하지 못하고 그저 순종하는 생명체가, 정말 신이 만들고자 한 완성형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건 그저 가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 않나

청소년기의 공상들이다.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선악과가 암시하는 가장 끔찍한 인간성을.

마녀사냥, 십자군 원정, 홀로코스트, 난징 대학살……

폭력적인 살해의 역사가, 선악에서 비롯했다.

내가 선이고 적이 악이라 주장하는 마타도어.

그러한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명분으로 사용해, 인간은 평소라면 결코 하지 못할 악행들을 정당화하곤 했다.

모두가 자신을 선이라 주장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악이라 단정 지을 때.

그때 선악의 구분은 무가치해진다.

어떤 지혜도 발휘되지 못하고, 갈등과 고행 속에서 발전시킨 도덕조차 군화발에 짓밟혀, 선이라는 가치는 그저 승자를 위한 상품이 되어 반짝거릴 뿐이다.

그것이 신이 금지한 선악과의 진짜 의미라면……

그 과실은 선악의 개념을 구분하게 해주는 지혜가 아니다.

악이라는 관념을 타인에게 투사해, 모든 사악하고 폭력적인 행위들을 합리화하고 마는, 악마의 지능.

인간은 그로써 사탄마저 울고 갈 만행들을 벌여왔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선 현대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학살이야 과거보다는 줄어들었겠지.

그러나 칼보다 무서운 혀가 더 거대한 학살을 벌이고 있다.

쟤가 범인이네, 쟤가 나쁜 새끼네, 쟤는 자식 갖고 시체팔이 하네, 쟤는 역대급 관종이네, 쟤는 싸패인 게 분명하네……

현실과 인터넷에서, 오늘도 수억의 재판관이 수억의 피고인을 향해 모욕의 몽둥이찜질을 선고한다.

변론의 기회도 없이.

그중 누구도 그것을 악행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악’은 어디까지나 관념일 뿐이어서, 살인을 선동하던 나치 나팔수들처럼, 어떤 만행도 정의로 포장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정의로운’ 선고는 분명 효력을 갖고 있다.

나치보다도 거대한 강제력을.

한국에서만 하루 37.5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OECD 1위의 편차라고는 하지만, 세계 자살률 평균조차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에는 형성되어 있다.

그렇게 10만 명 중 12명이 매년 자살로 사망한다.

77억쯤이 기준인 올해라면, 924만 명이 되겠지.

그런 대규모의 학살이 해마다 반복된다.

반성도 없이 또, 또, 또, 우리는 혀로 서로를 죽인다.

나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 했다.

김 이병의 죽음을 목격한 날부터 한없이 노력했다.

그럼으로써 직원들에게 3대 성인 따위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이 없듯 좋은 사람도 없다는 논리보다……

단지 내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닌 까닭.

나는 선인이 아니다.

유일한 비밀의 공유자조차 알지 못할 이야기지만.

“이가을이라서 fall인 거군요. 딱 좋네요. 이딴 돼먹지 못한 편지로 선생님의 기분을 잡치다니, 추락사해야 마땅합니다.”

간추린 설명을 듣고, 손바울은 타오르는 눈빛으로 답했다.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처럼도 보였다.

“바울아. 그렇게 말하지 마라. 내게 악감정을 품은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것도 스스로 선택한 마음은 아닐 거야. 환경이 만들어낸 어떤 괴로움에 잠식된 거겠지.”

“선택이든 환경이든 열 받는 건 같습니다.”

“바울이 넌, 처음에 내게 여러 차례 거짓말을 했었지?”

“음.”

“보통 사람들에게는 꽤 불쾌할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흠.”

“사소한 일을 계기로 삼아서 쉽게 미워한다면, 결코 상대의 본질을 알 수 없게 된단다. 상담사로서 주의해야겠지?”

“그야…… 그렇겠네요. 주의하겠습니다.”

‘지도’가 100이 된 뒤로는 첫째 제자도 수긍이 늘었다.

‘화술’은 그대로지만, 말이 아닌 전달력에 차이가 생긴 것.

덕분에 제자가 악의에 얼룩지는 일은 막을 수 있을 듯했다.

내가 그를 막고자 애쓰는 동안에는.

딸의 학교 앞에서 딸의 가장 친한 친구가 건네받았다는 빨간 편지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만약 이가을이 만난 것이 유민지 아닌 박지수였다면.

그럼으로써 편지를 전하겠다는 원래의 의도를 넘어, 내 혈육인 그 아이에게 어떤 직간접적 피해를 끼쳤다면.

나는 그때도 웃는 낯으로 손바울을 말릴 수 있었을까.

생각하기도 싫지만, 생각해야 할 일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것은 그저 일반론일 뿐.

세상의 몽둥이들은 환하게 웃는 사람을 향해서도 칼을 휘두르게끔 사람을 몰아붙이곤 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네다리 정승규가 그런 케이스였다.

가족이 지워준 굴레 속에서 고통받던 공시생.

그런 그에게는 늘 환하게 웃는 유명 상담사가 증오의 대상이었고, 그렇기에 내 방송에 접속해 끔찍한 독설을 퍼부었다.

나와 내 딸을 향한 저주.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내 보물을 괴롭히려는 시도.

상담사 박대민은 그것을 견뎌냈다.

비방에 비방으로 대응하지 않고, 악의를 악의로 맞받아치지 않고, 내 마음속의 객석에 그의 호수까지 담아냈다.

그 결과는 예상대로 긍정적이었다.

정승규는 진심을 담아 딸에게 사죄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률의 필기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해, 이제 10월 하순의 면접만을 남겨둔 상태.

8월의 마지막 만남 때는, 설혹 면접에서 탈락하더라도 끝까지 가족을 포기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이미 한 차례 극복한 바 있는 일이지만……

내가 견뎌낼 수 있는 타격은, 딱 거기까지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성은 연약한 유리.

그 점은 나 역시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에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평정을 지켜내기가 힘들어, 때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칠어지곤 했다.

아내와 결혼하기 얼마 전쯤.

그녀의 뱃속에 생명이 잉태되었음을 알고, 어렵사리 상견례를 마치고서 급히 웨딩드레스를 보러 가던 중이었다.

길을 걷던 아내가 덩치 좋은 사내와 부딪쳤다.

분명 우연한 충돌이었지만, 일정 때문에 굽 있는 구두를 신었던 아내로서는 중심을 잃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아내를 부축하고 상태를 체크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그녀가 괜찮으니 유난 떨지 말라고 핀잔을 줬을 때는, 어렵사리 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 좀 찜찜했는지 되돌아온 남자가, 살짝 부딪힌 거 가지고 유난이라는 식으로 빈정거렸던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릿속 유리가 깨져나갔다.

정신을 차린 뒤에 보인 것은 쌍코피가 터진 남자.

원체 강골인지 눈빛은 멀쩡했지만, 원래대로라면 합의를 끝내 내쳐도 할 말이 없는 일방폭행이었다.

다만 그 남자가 말투만 거친 호인이었다.

경찰을 부르는 대신 차분히 사정을 묻더니, 아내가 사죄하며 사정을 이야기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어유. 그런 상황이면 성인군자도 야마 돌지. 괜찮아요? 내가 미안합니다. 아, 이거요? 그냥 코피만 난 거 같은데. 검사해보고 뭐 잘못됐으면 그때 연락하든가 할게요.”

영문도 모른 채 맞은 일이 억울하지도 않다는 듯.

그저 코를 휑 풀고서 떠나간 그는, 나중에 눈두덩에 멍 정도 들었다며 서로 잊자는 문자를 보냈다.

그 관용 덕분이었다.

나는 안 그래도 기우는 결혼을 준비하다가 경찰서에까지 끌려가는 끔찍한 미래를 피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때로는 미움에 휘둘리고 폭력까지 사용하던 개차반.

악인은 아니지만, 선인도 아니었다.

만인에게 성인군자라 불리는 지금의 모습은 결과 쪽이다.

살면서 스쳐 지난 선인들의 한없는 용서야말로, 3대 성인이라 불리는 사람 좋은 아저씨의 근원.

거대한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용서들 덕분에 유리벽이 몹시 두터워졌으니.

그렇지만 그것이 완전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내 아내와 딸이 겪은 위협일랑 그 하나가 전부다.

그 정도로 탈 없이 살아온 것 역시 커다란 행운이겠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불안해지는 포인트가 되었다.

나는 딸을 해친 이를 용서할 수 있을까.

감정은 상대적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

A를 1만큼 사랑하는 이가 B를 10만큼 사랑한다면, 그는 언제든 A를 미워할 수 있는 셈이다.

A가 B에게 해를 끼치는 순간 -9가 될 테니.

마음에는 수식이 없지만, 셈법은 같다.

지나치게 커다란 사랑은 지나치게 큰 미움을 부른다.

한 대상을 향해서도 양가감정이 형성될 수 있을진대, 어떻게 미움 없이 사랑만으로 살 수 있으랴.

인간은 편애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아이에게도 진심 어린 사랑을 품을 수 있지만, 당연히 남보다는 가족을 더 아낀다.

그 격차는……

어떤 경우에는,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 만큼 큰 편애였다.

그런 문제 때문에 ‘평정’을 올릴까도 생각했었지.

하지만 무슨 소용이랴.

정말 이가을이 가족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 이후에 평정을 유지하든 그러지 못하든, 나는 망가질 게 뻔했다.

물론 그녀가 꼭 폭력적인 수단을 쓰리라는 법은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확률은 낮지 않다.

급선무는 소재지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바울아. 경비실 CCTV도 확인하고 아이들 탐문도 했지만,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많은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다. 키 160 내외의 젊은 여자라는 것밖에.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가능한 빨리 이가을을 찾아주렴.”

“그거야 물론입니다. 이런 자식을 그늘 속에 숨어있게 둘 순 없죠. 그런데 선생님, 이거 신고는 불가능한 겁니까?”

“어려울 거다. 글의 내용에 협박이 없으니까.”

“그렇군요. 그러면, 사모님도 외출 막으실 거죠?”

내가 생각하던 것과 같은 대화의 흐름.

그렇지만 넌지시 반문을 건네봤다.

“이가을이 내 가족을 해칠 거라고 생각하니?”

“예. 아무래도 싸이코패스 같지는 않아서요.”

“싸이코패스가 아니니 해칠 수 있다?”

“예. 가정하는 것만 해도 짜증나지만, 만약 꼬맹이네 부친 같은 놈이었다면, 이런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차라리 팬을 가장해 조종하려 들었겠죠. 새벽마다 전화상담소를 운영하고 계셔서 접근이 어렵지도 않으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이가을은 어떤 성향을 갖고 있을까?”

“우선 편지를 보낸 게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협박편지가 추리소설의 흔한 소재긴 하지만, 사실 드문 사례라고 알고 있습니다. 수감 중이라 인터넷 활용이 어려운 경우에나 이렇게 자필 편지를 쓰죠. 필적만으로도 여러 가지 추론이 가능한 게 현대 프로파일링이니까요. 그럼에도 굳이 편지를 전달했다면, 겁쟁이일 확률이 큽니다.”

“겁쟁이라…… 이유는?”

“대화는 원래 양방향이죠. 어플로 목소리를 변조하고 일방적으로 자기 얘기만 전하는 경우에도, 익명으로 댓글을 주고받는 경우에도, 상호 교류는 분명히 발생합니다. 겁쟁이들에게는 그게 무서운 일입니다. 마주 선 상태에서는 상대에게 평가받고 말 거라는 공포. 답장을 받을 수 없는 편지를 보낸 게 그런 추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편지가 겁 때문은 아니겠지만, 일리는 있다.

고개를 끄덕여주자 손바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내용적으로 추론하면 협박장처럼 보이고, 전달하는 방식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느낌이었지만, 오히려 겁먹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처럼요. 나는 네 딸을 해칠 수 있다, 그러니 조심해라, 이런 느낌을 주려고 애쓰고 있을 뿐…… 사실은 선생님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정답이다.

이가을은, 내게 겁을 먹고 있었다.

「 내담자 명 : 이가을

평가 결과 :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 」

준거가 편지 한 장에 불과해 무척 짧은 평가.

그렇지만 그 내용에는 오류가 존재하지 않는다.

손바울의 예리한 통찰력이 문제의 본질을 짚고 있었다.

“겁이 많다면, 오히려 위험성은 낮지 않을까?”

“절 테스트하시는군요. 반대입니다. 겁먹은 인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입니다. 궁지에 몰린 쥐와 같죠.”

“그래. 그때는 극단적인 일까지도 벌일 수 있지.”

“예. 선생님께는 가장 곤란한 쥐라고 할 수 있겠네요. 분노 쪽이라면 상대하며 조절할 수 있지만, 이건 다르니까요.”

그것 역시 정답.

공포를 품은 상대야말로 내게는 쥐약이다.

NBSC의 기술은 내 얼굴을 보고 내 이야기를 듣는 상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어서, 회피하는 이에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지금으로서는 이가을을 상담할 방법이 없었다.

맹점이었다.

[오래된 구원]을 사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것은 오산.

나는 그 무엇보다도 이가을의 추적을 서둘렀어야 했다.

상대는 나와 직접 대화하는 일을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분노나 증오가 가슴속에 가득하다면……

그 표출의 대상은, 내 주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네 말대로 아내와 딸은 당분간 집에만 머물게 할 거다. 내일부턴 경호원도 올 예정이고. 하지만 그 기간을 일주일 이상으로 늘리긴 어려워. 그 안에 이가을을 찾아야 해.”

“바로 그게 제 역할인 거군요.”

“그래. 수업 때문에 바쁜 네게 짐을 지우게 됐구나.”

“짐이라고요? 그럴 리가요.”

손바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희열에 찬 눈으로 웃었다.

“감사합니다. 오직 저를 믿고 이 중대한 임무를 맡겨주셔서요.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걸 것까진 없어. 너 역시 염려되는 대상 중 하나니까. 절대 위험한 일은 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추적해줘. 만약에 일주일이 걸려도 찾지 못하면…… 검찰 쪽에 부탁하면 해결될 일이야.”

“아, 그랬죠. 사모님 오빠 중에 검사장이 있었죠. 다만 추적이 집단적이 된다면 타깃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우선 저한테 지시하신 거군요. 더 열심히 찾아야 되겠네요.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럼 이만.”

부담감을 덜어주려 한 말이 오히려 불을 붙였다.

잠깐의 틈도 아깝다는 듯 곧바로 달려나가더라.

정말이지, 나와 많이 닮은 녀석이었다.

나를 몹시 경애하기에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 아이.

그렇기에 내 적에게는 한없이 잔인해진다.

최선을 다해 말리지 않는다면, 어쩌면, 살인까지 불사할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그와 나는 닮았다.

제자와 달리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애가 많은 편이지만……

그 이상으로 가족을 사랑하니까.

그날은 인방을 한 시간 정도로 단축했다.

그리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딸을 마주했다.

“뭐야, 당신. 중요한 일 있다고 집에 꼭 붙어 있으라더니, 방송까지 일찍 끝내버리고.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빠 나빠. 나 친구들이랑 약속까지 깼잖아.”

“……미안해. 두 사람. 이제부터 내 얘기 잘 들어줘. 일주일. 딱 일주일만 집 안에서 자가격리를 해줘. 부탁할게.”

“으엑…… 일주일? 일주일을 어떻게 집에만 있어? 무슨 코로나야? 2차 대유행이래? 아빠 그거 걸린 거야?”

“그런 건 아니야, 지수야. 다만…… 아빠 때문인 건 사실이야. 아빠 때문에 지수랑 엄마가 위험해졌어. 누군가가 아빠를 괴롭히려고 두 사람을 해칠지도 몰라.”

“……혹시 그거야? 내가 준 편지야?”

“음…… 왜 그렇게 생각하니?”

“아빠가, 그거 보고 엄청 화냈으니까.”

“아빠는 그냥 조용히 읽었던 것 같은데?”

“아닌데. 얼굴 완전 엄청 무서웠는데.”

평소에 온화하던 사람이 인상을 쓰면 좀 더 무섭다.

그에 더해, 마치 ‘사토라레’처럼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사람이라면, 작은 불쾌감만으로도 주변을 불안하게 만들 터.

조심해야 할 대상은 이가을만이 아닌 듯했다.

“그래. 그래서…… 아빠 때문에 이렇게 돼서 정말 미안해. 다만 대상이 누군지는 알 법도 해서, 최대한 빨리 찾아낼 예정이야. 그때까지만 집 안에 있어줄 수 있을까?”

“……학교 쉬면 나도 좋지 뭐. 행복이랑 맨날 놀아야겠다.”

딸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지만, 아내는 달랐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재단 일이야 팀장들이 잘해주고 있으니까 잠깐 쉬어도 괜찮긴 할 것 같은데…… 당신은?”

“어, 나?”

“당신은, 안 쉴 거야?”

“어, 어. 난 쉬면 안 되지. 그 친구를 찾아내야 하니까.”

“정말? 제일 위험한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 아냐?”

“아냐, 아냐. 누군지 알 것 같다고 했잖아? 그 친구는 나를 무서워하고 있어. 그래서 도망치고 있는 거야. 찾아내기만 한다면 상담을 진행할 수 있어. 그때는, 아무 문제 없어.”

“……정말이지? 그래야 될 거야. 당신 잘못되면, 나도 그때는 이판사판이니까. 언니오빠들 힘이든 아빠 힘이든 빌려서…… 그 인간, 죽여버릴 거야. 알겠어?”

“어우. 엄마, 무서워. 릴랙스 릴랙스.”

세상 그 누구보다 현명한 내 아내.

하지만 그녀 역시 나와 많이 닮았다.

내게 상해를 입힌 대상에 한해서는, 그녀 역시 야차로 변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숨 걸고,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을게.”

“……믿을게. 하여튼 남편 복도 지지리 없어요. 내가 무슨 아이돌 와이프도 아니고, 안티팬 테러를 걱정하게 생겼네.”

“아빠 아이돌 맞는데? 다 아재돌이라고 불러. 세상에서 젤로 멋있는 40대라고. 그래서 꼰서트에 애들도 엄청 많잖아. 나중에 앨범 내도 잘되는 거 아냐? 막 고척돔 서고?”

내가 앨범을 내는 일이야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런 미래조차 죽고 나면 찾을 수 없는 행복.

나는 살아야만 한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선을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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