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66장 - 가을 우체국 앞에서 (3)
계절은 지구의 기울어진 자전축으로 인해 발생한다.
자전축의 북극이 태양 쪽을 향할 때는 북반구가, 그 반대일 때는 남반구가, 입사각으로 인해 더 많은 열을 얻는다.
공전에 의해 1년의 반은 따뜻하고 반은 춥게 되는 것.
그것을 4분할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로 표기한다.
중위도 지방의 특색이다.
자전축 기울기가 23.4도밖에 되지 않기에, 고위도 지방은 언제나 춥고 저위도 지방은 언제나 따뜻하기 마련.
여름이면 얇은 옷을 입고 겨울이면 눈이 쌓이는 지역은 위도상 넓은 범위라고 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은 그 범주에 속한 국가.
그런데다 신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벼농사를 지속해온 나라인지라, 계절의 변화에 큰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특히 가을이 그랬다.
과학기술의 선진국이 된 지금까지도, 수확의 계절이라 말하면 곧바로 그 시기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으니.
가을은 수확의 계절.
봄에 상담을 시작한 내게도 그것은 진리였다.
“9월 중에, 군인 자살 사건이 0건이에요!”
유하늘은 흥분으로 볼을 붉히며 말했다.
마치 역사 속의 위인을 만난 시간여행자처럼.
작년까지 군인 자살자의 수는 연간 60명 내외.
과거 하루 한 명 이상의 비율로 자살자가 나왔던 끔찍한 시대도 있었지만, 복무기간이 18개월까지 줄어든 지금은 상대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이 줄어들었다.
똑같은 지옥이라 해도 3년과 1년 반은 체감이 다르니.
국군의 숫자 자체가 과거에 비해 급감한 탓도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월간 0명이라는 것은 기사(奇事).
60명을 12개월로 나누면 5명이 된다.
그것이 0이 됐다면, 편차가 커도 너무 큰 감축이다.
그렇기에 너무도 행복한 이야기.
동시에, 약간은 민망해지는 이야기였다.
“하늘아. 보도되지 않은 사건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아뇨, 기사만 검색한 거 아니에요. 커뮤니티란 커뮤니티 다 뒤지고 터미널에서 휴가 군인 900명 인터뷰했어요. 통계야 나오려면 좀 걸리겠지만, 9월에는 자해 시도조차 0건인 게 확실해요. 심지어 구타나 부조리 사건조차 없었어요. 저 아시잖아요? 정보수집 하나는 기더기 중에서도 최고였던 거.”
“기더기라니…….”
“아, 기자 구더기라는 뜻이에요.”
“알아. 단지 너무 비하적인 표현이잖니.”
“헤헤. 저야 뭐, 내부자로서 셀프폭행 하는 말인데요?”
“그래도…… 아무튼, 내가 한 일이 아니란다.”
“네? 선생님이 하신 일인데요? 프리VR 보급된 직후에 그렇게 된 거예요. 선생님 아니면 누가 했겠어요?”
그 지점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는데.
겸양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는 한 일이 없다.
위기의 군인들을 구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물론 누구보다 노력했던 것은 사실.
9월 내내 나는 VR상담에 최선을 경주했다.
김 이병을 기리고자 하는 개인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갓 런칭된 VR사업이 각급 부대에 제대로 정착할 수 있도록 분명한 성과를 내겠다는 공적인 목표도 있었다.
그렇게 군대 내부의 고민과 민간인들과의 관계로 인한 고민과 개인의 이상을 그리는 고민 등을 마주했다.
그러나 그중 무엇도 서브퀘스트는 아니었다.
죽음을 막아보라는 그 퀘스트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단 한 명도 구원하지 못했다는 명확한 증거.
나는 그저 무수한 병사들과 수다를 떨었다.
그러니 그들의 구원은 내가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을 구원했다.
“9월 중에 유입된 군인 내담자가 5천 명 정도였지?”
“아, 네.”
“그럼 그중에서 내 내담자는 몇이나 될까?”
“……100명 정도요.”
“98회 얘기라면, 그건 회기고. 현역병 우대권으로 찾아온 내담자의 수는 딱 서른셋이야. 너무 적은 비중이지.”
“그렇지만, 그냥 집단상담만 보는 친구들이면 군인 인증할 필요 없으니까, 사실상 만 명 규모는 될 거예요. 그리고 걔네들이 전부 다 선생님 상담 구경했을걸요?”
“그렇긴 하겠지. 스마트폰이 허용된 부대라면, 개인정비 시간에 송출되는 내 인방을 본 친구들도 꽤 많을 거고. 그렇게 나와 소통하며 고단했던 마음에 행복이 찼을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그게 내 공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있지 않아요?”
“아니지. 그런 식이라면, 무수한 아이돌 그룹들도 자살의 척결자라고 불려 마땅할 거야. 그들 역시 어떤 이들에게는 내일을 살아갈 힘을 줄 테니까.”
“어…… 그건…… 좀 다르지 않아요?”
“다르지 않아. 나는 그저 선한 사람들이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을 뿐이야. 그건,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일이란다. 하늘이 너는 어떠니? 네가 만든 영상 기사 중에 군인의 고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민간의 존중을 당부한 것이 있었지. 그게 120만뷰를 기록하면서 월간 영상에도 오른 것으로 안다. 분명 현역병들에게 큰 힘이 됐을 거야. 세간의 존경을 받는 ‘어글좌’가, 여성이며 미필임에도 불구하고, 군인을 식충이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그들의 봉사에 존경심을 표했으니까. 그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충족감이 더해졌을 거야. 그렇다면 그건, 구원일까?”
민망한지 볼을 붉힌 유하늘은, 잠시 염두를 굴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구원이 아니네요. 그냥,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
“그래. 그저 사람다운 일에 불과해.”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거군요. 예전에 제가 썼던 기사들은 자극적인 워딩으로 나쁜 마음이 들게 유도했지만…… 그러지만 않는다면, 좋은 면을 보고 사람다운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분명히 삶의 활력소가 돼요.”
“그래. 군대라는 집단은, 그렇단다. 고립된 상명하복의 세계지. 20년 내외의 시간 동안 민간에서 형성된 나라는 개인을 지우고, 오직 공적인 목적으로만 병사를 통제해. 개인의 자기통제감을 극단적으로 박탈하는 사회야. 애초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특별한 능력자의 상담이 아니었어. 다만, 존중받는다는 실감. 장교들에게는 부품 취급도 받고 선임에게는 짐짝 취급도 당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마음으로 나를 응원해주고 있다는 확신.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다. 사람이 원래 그렇게나 강한 존재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선생님 이기자부대 연설 클립이 250만뷰를 기록했던 거네요. 이렇게 사회적으로 선망받으시는 분이, 옆에서 연대장도 보고 있는데, 부대의 치부를 대놓고 찌르면서 행복해져달라고 부탁하셨던 영상. 군인들한테 정말 힘이 됐겠어요. 그렇지만…… 그건 구원이 아니에요.”
“그래. 혀의 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죄지만, 그 혀로 사람을 살리는 건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야. 왜일까.”
“왜냐하면…… 나쁜 사람은 없으니까. 사람은 원래 그럴 수 있는 존재니까. 사회적 동물은, 원래 그렇게 사는 거니까요.”
이해가 빠른 제자라고 생각하며 웃으려던 때였다.
예상치 못한 낱알이, 황금색 메시지로 구체화됐다.
「 메인퀘스트 “제자를 성장시켜봐요(5/10)” 」
……뜬금없이 성장이라니.
이미 메인퀘스트의 숫자 하나를 올려줬던 아이라서 기대치도 않고 있었는데, 다시금 성장이 발생했다.
마치 큰 깨달음으로 벽을 하나 더 무너뜨린 듯이.
그 상황에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게 됐던 것이다.
별다른 선문답이 아니었다.
그저 최근 계속 생각하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
자살을 없애고자 한다면, 자살하려는 이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좀먹는 방망이를 막아줘야 마땅하다는 말을, 유하늘의 기준에 맞춰 풀어줬을 뿐이었다.
그런 것이 이 아이에게 뭔가 영감을 줬다면……
그건 아마 100이 된 특성 ‘지도’ 덕분이리라.
내가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나다운 모습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진하게 전달되도록 해줬을 테니까.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속죄하는 방법.”
“그래. 그러면 다행이구나.”
“저, 가볼게요. 오늘은…… 좀 바쁠 것 같아요. 지원아, 언니 갈게. 다음에 또 놀러 와. 그때는 언니가 많이 놀아줄게.”
“네, 아줌마.”
의도적으로 속을 긁으려 한 셋째 제자의 비수에도 그녀는 웃기만 했다.
지금은 할머니라고 불려도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
그 어떤 때보다도 커다랗게 자란 도파민의 행복감이, 사소한 불만 정도는 먼지처럼 가볍게 만들어줄 테니까.
물론 신지원은 나와 생각이 달랐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서는 훨씬 어른스럽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은 어리기만 한 시기인 까닭.
“저 아줌마요, 아저씨한테 있어보이려고 하나봐요.”
“있어보이려고?”
“네. 커리어우먼이요. 그래서 끼 부리는 거예요. 갑자기 막 뭐 깨달은 사람처럼.”
“하하. 하늘이가 내게 끼를 부려서 뭐 하겠니? 그게 아니야.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을 찾아낸 것 같더라.”
“고민하던 문제요? 아까 얘기에서요? 왜요? 뭔데요?”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 그렇지만, 신처럼 아름답다는 사실. 그런 것들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울 이야기이기에, 머리만 쓰다듬어줬다.
언젠가는 이 아이도 알게 되리라.
나라는 상담사가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를.
이 세상이, 점점 더 나은 세상으로 변할 수 있는 이유를.
이후 차를 몰아 딸애의 학교로 가던 길.
그 이유 중 한 명이 내게 전화를 걸었다.
[꼰마님, 보이세요? 저 50kg 넘었어요!]
섭식장애에 시달리던 아이, 김서현.
나는 4월 22일에 그녀를 처음 만났고, 5개월이 흘렀다.
그리고 내 열네 살 딸만큼 가벼웠던 그녀가 마침내 목표했던 체중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건 정말 고맙고 기쁜 일이었는데……
이 화상통화는, 신지원과 함께 보기엔 좀 곤란하다.
“서현 씨. 그냥 체중계 쪽만 보여줘도 돼요.”
[그러면 증거가 안 되잖아요? 이제 속옷만 입어도 50 넘어요. 짜장면 많이 먹어서 그런가봐요. 저 잘했죠?]
“잘했습니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에 말 대신 서현 씨가 쪘네요. 이제 일반통화로 돌리지요. 운전을 해야 돼서요.”
[어? 어, 그러네요? 운전석이네요? 그러면…… 껐어요. 그런데 왜요? 오늘은 바울 오빠가 운전기사 안 하세요?]
“그 친구는 선수과목까지 수강하느라 수업이 꽉 차 있습니다. 이번 학기 동안은 종종 혼자 다녀야 해요.”
[아, 맞다. 대학원 준비한다고 그랬지. 바쁘겠네요. 저도 오랜만에 학교 다니려니까 진짜 정신이 없어요. 1년이나 휴학해서, 누가 어떻게 지냈는지도 몰라서, 어색해요. 쉬더라도 단톡방은 들어가보고 그랬어야 됐는데.]
19년 2학기 도중에 휴학했던 김서현은, 올해 2학기부터 다시 대학에 나가고 있다.
충분히 스스로 섭식을 조절할 수 있음이 확인된 까닭.
다만 나나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평범하게 식사를 할 수 있을지 염려했는데, 몸무게를 보니 비로소 안심이 됐다.
“학우들이 다들 난리겠군요. 서현 씨랑 친해지고 싶어서.”
[네? 왜요? 저, 50 넘은 돼진데요?]
“돼지는 누가 돼집니까, 키가 170 가까이 되면서. 지금도 말랐어요. 어디 가서 모델 하자는 소리 듣겠어.”
[헤헤. 진짜요?]
“진짜요. 무엇보다, 방금 한 말은 외모 얘기가 아닙니다.”
[어, 그럼요?]
“마음이요. 남을 괴롭히지 않고자 스스로를 괴롭힐 정도로 따뜻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환영받기 마련이지요. 방법이 잘못돼서 상담까지 받게 됐을 뿐 그 마음은 틀리지 않았어요. 앞으로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남친도요?]
“남친은…… 아직 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헤헤. 네, 들었어요. 연애처럼 기분 기복 심한 활동을 하면, 안정됐던 정서가 혹시 또 흔들릴지도 모른다고요.]
연애를 기분 기복 심한 활동이라 표현한 건 조명기겠지.
장난스럽되 틀린 말은 아니다.
김서현의 섭식장애야 가정 내의 과잉 통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지만, 연애 역시 비슷하게 기능할 수 있는 관계.
가능하면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터였다.
“그래도…… 금방 될 겁니다. 좋은 남친도 만날 거예요.”
[꼰마님만큼요?]
“저만큼 좋은 남자야 흔하지요.”
[아닌데요? 평생 찾아도 못 찾을 건데요?]
“토 달지 말아요. 내가 흔하다면 흔한 겁니다.”
[못 믿겠어요. 지원이한테 물어볼래요. 애들은 솔직하니까. 지원아, 넌 어떻게 생각해? 꼰마님 같은 남자 흔해?]
“아줌마, 아저씨는 제 거니까 눈독 들이지 마세요.”
[아, 경쟁자네!]
“경쟁자 아닙니다. 지원아, 난 네 거 아니야.”
“저는 아저씨 거예요.”
[우와…… 애들은 진짜 솔직하네요.]
“애들이라서 그렇다기보단…… 아무튼, 수영 수업이랬죠? 이제 슬슬 끊고 수업 들으러 가요. 쥐 안 나게 조심하고요.”
[헤헤. 네! 다녀오겠습니다!]
오래된 내담자가 전화를 끊고 사회 속으로 돌아간다.
더는 상담을 필요로 하지 않는, 행복한 아이가 되어.
그 상황이 가볍고도 무거운 여운으로 다가왔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딸애가 장성해서 결혼하면, 이런 기분 기복이 들려나.
어려서 못 받은 사랑을 다 받아내겠다는 듯 아빠바라기가 된 박지수도, 언젠가는 내 품을 벗어날 것이다.
누군가 낯선 이를 연인이라며 데려오겠지.
그리고 내 가정을 벗어나 새 가정을 향해 가리라.
꼭 결혼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나를 관찰하고 배우는 일을 멈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터였다.
그때의 상실감은 지금보다도 더 진할 것이다.
김서현의 미래를 응원해주는 것처럼은 안 될 터.
어쩌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비애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빠라는 존재의 한계다.
언제까지고 품에 둘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이성으로는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이 양육의 시간이 영원하기를 염원하고 만다.
그러니 딸이 아빠에게 반항하는 일은 정당할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고도 아빠 제일 좋다고 말해주는 딸이라면, 딸바보 아빠들이 결코 놓아주려 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그 모순을 명심해야 한다.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때로는 아이를 망칠 수도 있음을.
김서현 케이스 역시 그랬다.
양친은 그녀를 너무나 사랑해서 독립적 사고를 거세했고, 그로써 인간 본연의 자기통제감을 극단적으로 저해했다.
그것이 섭식장애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그 가정의 상담사였던 내가 실수를 해선 안 될 일.
지수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계획하기 시작한 이 시점에, 내 눈도 조금쯤은 달라져야 하리라.
언젠가는 그 아이를 나와 동등한 개인으로 볼 수 있도록.
눈물까지는 감추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웃는 얼굴로 박지수만의 가정을 응원해줄 수 있도록, 조금씩 변해가야 한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전에 떠나보내야 할 아이가 하나.
조수석에서 말똥말똥 나만을 바라보는 신지원에게, 나는 올해가 가기 전에 사회성의 씨앗을 심어줘야만 할 터였다.
“아저씨, 저 아저씨 거 아니에요?”
“아니지. 지원이는 지원이야. 누구의 소유도 아니야.”
“저 아저씨 거 하고 싶어요.”
“네가 바란다고 다 이뤄질 리 없잖니? 어디까지나 서로 협의를 해야지. 아저씨는 누군가가 아저씨 부속품이 되려 하는 걸 곤란해한단다. 지금이야 지원이가 낯선 세상에 적응해나가야 할 시기라서 함께해주고 있을 뿐이야.”
“그럼, 그럼, 저 보통 되면, 싫어할 거예요?”
“아니. 지금보다 더 좋아할 거란다.”
“……왜요? 뭔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때는 지원이가 내담자가 아니라 상담사가 될 테니까.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알려줄 수 있는 동반자가 될 거야. 동등한 개인과 개인으로서 의견을 나눌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지.”
“아저씨랑요……? 될까요?”
“그럼, 되지. 충분히 되지. 아저씨 믿지?”
신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수긍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지만, 어느 정도 동기를 갖기 시작한 눈치.
향상된 ‘지도’가 만족스러워지는 지점이었다.
“창밖을 보렴. 이제 단풍이 참 예쁘지?”
“웅…… 네. 단풍은 왜 드는 거예요?”
“날이 추워지면서 잎 속의 엽록소가 줄어들기 때문이래. 그러면서 붉은 색소가 만들어진다지. 그 비율에 따라서 어떤 것은 노란색 정도로, 어떤 건 불처럼 빨갛게 되는 거야.”
“글쿠나. 근데 단풍 왜요?”
“인간도 그렇다는 거야. 절기에 따라 변화하는 잎사귀처럼, 우리도 시기가 바뀌면 거기에 맞춰 바뀌어. 지금은 아저씨가 참 커 보이겠지만, 지원이가 어른이 되고 나면 어떨까?”
“아저씨는 아빠보다도 큰데요?”
“그야 내가 작지 않은 키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지원이가 160이 되고 나면 지금처럼 고개를 꺾어서 보지 않게 될 거야. 아저씨는 그날이 참 기다려진단다. 친구들의 마음까지 헤아려주게 된 어른스런 지원이랑 토론을 할 날이.”
“헤헤. 아저씨랑 토론하고 싶어요. 공부 많이 해야지.”
손바울과는 많이 다른 아이다.
나를 우러러보기보다는 반려자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동반자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리라.
호기심이 넘쳐나는 나이인 만큼, 내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아저씨, 근데요, 저 단풍 보면 기분 이상해요. 왜 그래요?”
“그건 아마 색채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구나.”
“색채요? 색깔이요?”
“그래. 태양의 빛을 물질들이 자기만의 스펙트럼으로 반사해서 생겨나는 색깔은, 마음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단다. 예를 들면 강물은 파랗지? 그걸 보면 어떤 느낌이 드니?”
“그냥 그래요.”
“조금 더 생각해볼까?”
“그냥…… 편하다?”
“그래. 그 정도 느낌이구나. 주로 청색광 쪽…… 푸르른 초원까지 포함해서, 차가운 느낌의 색상들은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한단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지? 간단하게 말해서 ‘아 좀 쉬어도 되겠구나’라는 느낌을 몸이 받는다는 거야. 다른 색상들은 어떨까? 예를 들면 피처럼 붉은 저 단풍은.”
“그러면, 부교장신경?”
“하하하. 교감신경이야. 몸에 활력이 생기고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지. 그건 왜 그런 걸까?”
“어…… 피 같으니까?”
“그래. 그게 흔히 알려진 원인이지. 내 피가 됐건 적의 피가 됐건, 새빨간 걸 봤을 때는 신체를 재빠르게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어. 그러니 에너지를 쓰는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거야. 그게 참 다행이지? 빛이 부족해서 마음이 우울해지는 가을에, 따뜻한 색깔들이 우리 몸에 활기를 준다는 게.”
“네. 근데요, 그러면 겨울에는요?”
가을도 초입인 지금은 멀기만 한 겨울.
그렇지만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나목(裸木)이 떠올라, 생각만 해도 우울한 계절이다.
“겨울은 색깔도 빛도 많지 않은 계절이지. 그럴 때는 힘을 내기가 참 힘들어.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왜요? 왜 걱정 안 해도 돼요?”
“겨울은 너무 춥잖니. 추우니까 사람들이 서로 가까이 붙어 서서 팔짱을 끼곤 하지. 그 온기는, 세상에서 제일 빨간 빛보다도 훨씬 더 큰 힘이 된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헤헤. 저도 아저씨랑 팔짱 끼고 다닐 거예요.”
“하하. 그러려면 빨리 키가 커야 되겠구나. 지금은 아저씨 손 잡고 걷는 것도 힘들잖아? 많이 먹고 쑥쑥 커야겠어.”
“응! 저, 많이 먹고 쑥쑥 클 거예요!”
신지원과 팔짱을 끼는 건 또 정말 먼 미래가 되겠지만……
그날을 머릿속에 그리며, 나는 오래 웃었다.
인간은 때로 타인의 통제를 갈망한다.
가족이나 연인 같은 명시적인 관계에서는 특히.
그것이 소속감과 유대감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어, 비인간적인 처우마저 긍정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해다.
사람을 부속물로만 바라보는 사회는, 마치 군대처럼, 김서현의 가정처럼, 인간 본연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도파민을 줄여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세로토닌을 줄여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게 해……
마침내 자해와 섭식장애 같은 슬픔을 만들어낸다.
다른 길은 존재한다.
아주 아늑하고, 아주 따뜻한, 사람의 길이.
그 길에는 신의 힘 따위는 필요치 않으리라.
그렇기에 NBSC의 황금색 메시지가 이제는 더 두렵지 않다.
그간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종종 이 초능력에 기대어 내담자를 구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일 뿐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상담사들로 세상이 가득 찼을 때에, 나는 더 이상 누구 하나 구원하지 못하게 되리라.
그들이 그들을 구원할 테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착해져도 되는 세상일 테니까.
그런 미래를 그리며 용원중학교 앞에 차를 댔다.
단풍나무가 빨갛게 물들어 활력을 샘솟게 하는 하굣길.
그 길에, 단풍 같은 무언가를 들고 달려오는 딸아이가 있다.
“아빠 아빠! 어, 지원이도 있네. 하이?”
“참 반가운, 예쁜 지수.”
“……너 은근 나한테 존대말 안 하려고 그런다? 성격 이상하네. 아무튼 됐고, 아빠! 이거 아빠 팬레터! 짱이지?”
“하하. 팬레터라면 매일 여러 통 받고 있긴 한데.”
“근데 이건 특별하잖아? 아까 민지 점심때 교문 앞에서 받았대. 아빠한테 이거 주려고 우리 학교까지 찾아온 거야!”
“음. 네 학교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 SNS 봤겠지 뭐. 우리 학교 단풍으로 유명하잖아. 아무튼 아빠, 빨리 봐봐. 완전 궁금했는데 아직 안 봤어.”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겠지만, 아직까지는 아빠의 기쁨을 자기 기쁨처럼 느껴주는 고마운 딸이다.
그 아이를 위해 나 역시 얼굴에 기대감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 빠알간 편지의 내용을 눈에 담았다.
「 뭐가 그렇게 행복해요? 기분 더러워지게.
-from fall 」
그것은 팬레터가 아니었다.
피처럼 새빨간……
이가을의 선전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