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63장 - 미움받을 용기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어느 TV 프로에서 조명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것.
그렇지만 오직 미디어에만 모든 인과를 귀인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고, 거시적으로는 ‘미움받는다’는 행위 자체에 공포를 품은 현대 한국인의 심상세계가 영향을 줬을 터였다.
이를테면 청춘남녀의 고민 중에 그런 것이 많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상대가 멋대로 좋아하고 고백하더니 멀어지고 말았다고.
그 과정에서 내가 죄인이 된 게 싫다고.
난 잘못한 일이 없는데 미움받고 있다고.
여유로운 사람이라면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이성으로 좋아해준 일에 고마워할 것이고, 그 마음에 응답해줄 수 없음에 미안해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대응하지 못한다.
미움받는 것이 싫어,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 충동을 해소하기 위해 읽는다면 이 책은 꽤 적합하다.
심리학자 알프레트 아들러의 목적론을 청년과 멘토 사이의 대화로 재해석한 것이니.
문제행동의 동기를 원인이 아닌 목적에서 찾는 접근법이다.
예를 들면, 양육환경의 문제로 쉽게 화를 낸다는 접근 대신, 자신의 감정을 인정받고자 분노를 표출했다고 보는 식이다.
심리학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개념.
그러나 <미움받을 용기>는 그런 인식 수준에서 유행했다.
내게 큰 문제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을 잘못 택했기에 인간관계가 어그러졌을 뿐이라는.
후자의 인식은 전자보다 기분 좋은 방향이다.
지금껏 살아온 삶을 부정하지 않게 해주기에.
아들러의 목적론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경우, 이제부터라도 수단만 잘 고르면 문제가 사라지겠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아들러 학파가 ‘개인심리학’이라 불리는 것처럼, 목적론도 자신이 주체적인 삶의 주인공이라는 유능감을 심어준다.
그렇기에 2015년의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지만……
그것을 들고 있는 딸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지수야. 그거, 도서실에서 빌렸니?”
“어. 쌤이 읽어보라고 그랬어. 아빠도 읽어봤어?”
“그랬지. 학교 숙제인 거야?”
“그건 아니고, 그냥 여러 개 추천해줬거든. 시험 안 보니까 책이나 읽으려구. 나 어때? 멋있지? 문학소녀지?”
인문학이라기보단 자기계발서 같은 것이다.
좋은 책이지만, 온전하지는 않은.
“비판적으로 읽길 추천할게, 지수야.”
“어? 왜?”
“저자의 개인적 신념을 강요하는 내용이거든.”
“그래? 별로야? 그럼 읽지 말까?”
“아니야. 내용 자체는 괜찮아. 의지력이 강한 지수는 잘 분간하며 읽을 수 있을 거야. 아빠는 우리 지수 믿어.”
“응…… 알았어. 걍 심심할 때 조금씩 볼 거야.”
약간은 섭섭한 표정으로 돌아서더라.
칭찬받길 바랐겠지.
자유학기제의 끝물을 노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새 전공인 심리학 공부에 투자하려는 그 선한 의도를.
이제는 딸의 마음이 너무도 선명히 보인다.
그렇지만 내게 그 책은 혐오서적이었다.
차라리 게임으로 밤을 새우는 것이 더 나아 보일 정도로.
책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분명 여러 가능성을 고민하게 해주는 양서.
다만, 아들러를 맹신하고 그 권위로 주인공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독자들에게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곤 했다.
예를 들면 PTSD와 PTG를 논하는 구절이 있겠다.
정확히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등 목적론 관련 서술이 있다.
저자는 그 인식으로써 우리가 트라우마에 고통받지 않고 오히려 극복하는 PTG를 도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미움받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덕분에 서평에 종종 이런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불운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인생의 패배자가 되리라는 법은 없다. 자신의 과거가 불운했다고 불평하는 것은 실패자들의 어쭙잖은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옳은 평가라며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러나 그 얼마나 오만하고 천박한 인식이란 말인가.
인생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왜곡적 인지도식에 날개를 달아주는 책이라면, 그건 저급한 자기계발서에 불과하다.
가난한 가정에서 서울대 장학생이 나오기도 한다.
학대받던 아이가 위대한 심리학자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일부의 반례가 시사하는 본질은, 원인과 목적과 결과 사이의 모든 타임라인을 뭉뚱그리는 일이 아니다.
PTSD에 원인이 있다면, PTG에도 원인이 있다는 진리다.
나는 가족을 아꼈기에 자랑스러운 장남이 되려 했다.
한효준은 학대받는 와중에도 부친의 사랑을 상기했기에, 그를 치료하기 위해 심리학자가 되는 미래를 꿈꿨다.
그 감정은 개인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람 사이의 따뜻한 관계만이, 호수 깊은 곳에 가라앉은 애정을 끌어올릴 수 있다.
결과를 개인의 목적에 귀인하면 원인이 사라진다.
부적응적 행동을 취하는 모든 이들을 불평불만이나 일삼는 인생 실패자로 폄훼하게 되고 만다.
나는 내 딸이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길 바란다.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자라나건 결코 미워하지 않을 셈이지만, 불행을 경시하는 어른이 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힘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부디 내 딸이, ‘미움받을 용기’라는 달콤한 거짓말에 휘둘려 ‘미워하는 용기’를 발휘하지 않기를.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 에픽퀘스트 7 “이가을을 죽여봐요” 발생! 」
예상치도 못했던 그 메시지는……
내게는 역린이었다.
예상하지 못했을 뿐, 사실은 늘 고민해온 문제였기에.
손바울은 나를 심판하는 신이라고 평했다.
언제고 부적응적 행동을 벌였을 법한 그 내면의 번뇌를 제거해, ‘살인자 손바울’을 죽여줬다면서.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리라.
문제행동을 제거하는 일이야말로 내 직업이니.
하지만 만약.
내가 방치할 수 없는 악의가, 고정된 미래라면.
나는 그때도 왜곡된 인지도식만을 심판할 수 있을까.
NBSC라 해서 절대적인 힘은 아니다.
나는 언제고 고정된 악의에 직면할 것이다.
용서와 사랑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완전무결한 증오에.
그렇기에 다시금 트롤리 딜레마를 생각하게 되었다.
한 테러리스트가 있다.
그를 향한 내 디프로그래밍은 실패했다.
그는 인파가 밀집한 곳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그것을 정지시킬 리모콘을 삼켜버린 뒤, 나와 대치하고 있다.
경찰력과 의료진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갇혀 있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리모콘을 끄집어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를 구하려면 수천 명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
수천 명을 구하려면 그를 죽여 리모콘을 꺼내야 한다.
이때, 나는 반드시 한 명 이상을 심판하게 된다.
사고실험을 위한 극한상황.
하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더 좋은 상담사가 되고자 애써왔다.
어떤 미움으로 어떤 살인을 준비하는 내담자라 해도, 그 범행이 완성되기 전에 멈출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고.
하지만 NBSC는 내게 살해를 강요하고 있다.
이가을이라는 인격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번에도 제2의 루트는 있을 터.
“쓰러뜨려봐요”가 타깃을 굴복시키길 강요한 것이 아니었듯, “죽여봐요” 역시 조금 더 넓게 해석해야 마땅할 것이다.
예를 들면 DID(해리성 정체감 장애)일 수도 있다.
소위 다중인격이라 하여 둘 이상의 자아가 혼재하는 케이스라면, 인격 수의 감소가 마치 ‘죽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문학적 접근.
DID의 치료는 인격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다.
해리된 기억을 되살려 분리된 자아를 통합하는 일.
그런 문제라면, 지금까지처럼 “쓰러뜨려봐요”라고 서술해도 무방했을 터였다.
만약 NBSC가 내 기대만큼 전지전능하다면……
이때의 ‘죽음’은 분명 신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루트는 내가 선택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를 살해할 필요성만큼은 피할 수 없는 미래일지도 모른다.
공격적인 이용덕을 ‘쓰러뜨릴’ 필요성이 생겼던 것처럼.
그때 내 고민은 남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 보통은 타인의 속내를 완전히 알 수 없기에 지레짐작까지가 한계지만.
나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NBSC가 초능력에 가까운 기술들을 자꾸만 안겨줘, 이제는 그 어떤 악의조차 ‘오류 없이’ 읽어낼 수 있는 까닭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그 기술 쪽이었다.
이번에는 제2의 루트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섯 번째 에픽퀘스트의 보상을 받지 못했기에.
「 에픽퀘스트 6 “신지원을 쓰러뜨려봐요” 완료!
‘상담사’님께 가장 적합한 보상을 분석할게요……
[오래된 구원] 할인권을 지급해드렸어요.
300exp 상당의 기술이 지금은 75exp!
준비되셨나요? (3:15 후 자동으로 수행됩니다)
(구매조건 : 전 능력 100 달성과 지도 100 달성)
* 기술 구입을 위해 지도 100을 달성해주세요! 」
당시 내가 갖고 있던 exp는, 20이었다.
69인 특성 ‘지도’를 89로 만들면 동이 나는 수준.
서브퀘스트 달성을 위해 자살위험군의 상담에 애를 썼음에도, 필요한 총량인 115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고작 3분의 유예로는 무엇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300exp의 가치를 가진 기술을 놓치고 말았다.
그것이야말로 열쇠였을 텐데.
정체 모를 이가을을 치유하는 일에, 그 기술이 필요할 텐데.
이제 할인권도 사라져 순전히 300exp가 요구되는 기술이다.
그것을 얻는 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소모될까.
타이밍을 맞출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나는 무방비 상태에서 이가을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생각해봐야 할 일인 것이다.
수천 명을 죽이려는 인물과 마주했을 때……
단 한 사람의 회복을 위해 살인을 머뭇거려야 할지를.
그 의문에, 한효준은 마치 신처럼 대답했다.
“죽여야지. 그래야만 하네.”
“……교수님. 사고실험이긴 해도, 진지하게 답해주십시오.”
“진지하게 답하는 것이야. 박대민이라면 그래야 해.”
“어째서입니까?”
“마음의 지도를 들고 있으니까. 다른 이들이라면, 변명의 퇴로가 있거든. 알 수 없는 일이었다고, 추측만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되는 법이라고, 그렇게 도망칠 수 있지. 허나 자네는 안 되잖나. 한순간의 머뭇거림으로 인해 무수한 생명이 살해되었을 때에, 스스로를 저주할 수밖에 없잖나. 그런 이는 악인을 처단할 각오를 해두는 것이 옳아.”
……신이 아닌 스승으로서의 대답이었나.
내가 나를 저주하게 되리라는 예측에는 동감하지만, 그 결론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것은 살인이다.
아무리 올바르다 해도, 상담사라면 부정해야만 할 일이다.
“교수님. 그러지 마시고 좀 더-”
“박 군. 이제야 이 딜레마에 다다르게 된 자네를, 나는 참 좋아한다네. 그만큼이나 인간을 믿고 있는 까닭일 테니까. 그러니 하는 말이야. 양자택일의 순간은 예방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자네 스스로를 지켜야 해. 자네는 한 명을 죽이지 않으려 수천 명을 학살했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말 사람이야. 변명하지 못하는 이의 딜레마지.”
“저는, 교수님. 그렇지만…… 제2의 루트를 찾고 싶습니다.”
“그게 안 되는 상황을 가정하지 않았나? 악의의 살인마를 상담으로 치료하기에는 촉박하다 했으니. 어느 쪽이 됐건 한쪽을 죽여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수효를 줄이는 것이 분명 옳을 터. 고민하지 말게. 고민할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내담자를 만나. 마음의 지도를 채워나가는 일만이, 누구 하나 죽이고 싶지 않은 이의 유일한 길이니.”
분명 옳은 말씀.
그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다.
NBSC가 예지한 미래가 닥쳐오기 전에, 나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최소 320exp를 벌어야만 한다.
그 방법도 하나 외에 있을 수 없었다.
“……매일? 그건 좀…… 무리 아닐까?”
민원식 팀장은 별 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투로 반문했다.
고정 예능이 둘에 하루 네 시간 인방을 진행하는 내가 매일 VR상담을 진행하겠다는 말이 황당하기도 하겠지.
그러나 나로서는 물러설 수 없다.
이가을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해줘. 스튜디오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그야, 스튜디오 하나쯤은 늘 비지만…… 이유가 뭐야?”
“이유는 없어, 그냥 해.”
“펭수도 아니고 참. 알았다, 알았어. 유저들이야 좋아하겠네. 경쟁률 높아서 토요일마다 대기열이 네 자리 되던데.”
프리VR 상담 파트에서 내 분야는 자살이다.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는 충동인지라, 한 사람이 맡는다면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보이기 어려운 카테고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청자는 나날이 쌓여만 가고 있다.
내담자들이 간판 역할을 수행해주고 있기에.
「 꼰마방 상담후기예요!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대민선생님 감사합니다 저 힘을내볼게요
저희 애가 다시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ㅠㅠ
저도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네요ㅎ
고맙습니다 꼰마님.. 이제는 잊을수 있겠어요..
자살하려는 분들 여기 상담 꼭 받으세요!!! 제발!!! 」
프리TV와 꼰미디어에도 노출되는 VR상담 후기.
그곳의 70%를 내 내담자들이 점유하고 있다.
절박한 상황을 NBSC의 힘으로 극복하고 나면, 권유 한마디 없이도 대부분이 내 상담을 추천해주려 했던 것.
덕분에 뜬금없는 오픈에도 24석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와! 됐어! 와! 접속됐어!]
[진짜 꼰마다!]
[안녕하세요 꼰마님! 저 꼰마님 상담날만 너무너무 기다렸는데, 갑자기 수요일에 상담실 열려서, 개놀랐어요!]
“예, 반갑습니다. 갑자기 찾아오게 됐습니다. 오늘은 조금은 특별한 상담을 할 예정이에요. 예정된 상담은 기존처럼 미리 신청을 받아 순번에 맞춰 진행하겠지만, 오늘만큼은 선착순으로 모시게 됐습니다. 이해해주실 수 있을까요?”
[좋아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개중 일부는 그저 호기심에 들어와본 인물들.
그렇지 않더라도 시급한 위기인 사람은 소수일 터였다.
내게는 그 사실이 너무도 분명히 인식되었다.
「 서브퀘스트 “나트륨을 살려봐요” 발생! 」
NBSC의 서브퀘스트는 자살 고위험군을 선별하는 장치.
그러나 상담사인 나는 그들을 선별해선 안 된다.
괜찮아 보이는 내담자들을 내 기준으로 내보낸다면, 나에게마저 버림받았다는 인식이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기에.
24인 중 한 명이나마 위험군이 존재함에 감사해야 한다.
아무리 급한 상황에서도 서둘러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상담사로서 존중받을 태도를 견지하며……
나는, 경험치 노가다에 임해야 한다.
“이렇게 스물네 분을 모시고 상담을 시작할게요. 우선은, 나트륨님부터 말씀 나눠볼까요? 아바타가 참 독특한데요?”
[헤헤…… 이거, 클레오파트라요.]
“높은 코로 세계를 움직였다는 인물이군요. 얼마 전에 코스튬으로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처음 보네요.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또……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유명인이지요?”
[아, 네. 코브라한테 자기 물라고 해서요.]
“그렇군요. 그 코브라 간수 잘하세요. 3D 그래픽인 건 알지만, 여기서 보기에도 무시무시하네요. 쉭. 쉭.”
[히히. 저희 애는 안 무는데요?]
물지 않는 3D 뱀으로 몸을 감은 아바타.
그 그래픽처럼, 나트륨 역시 마음이 칭칭 감긴 아이였다.
[저, 고1 때요, 아빠엄마가 이혼했어요. 엄마가 바람피워서요. 그래서 좀 힘들었는데, 그래도 남친 있어서 괜찮았거든요. 남친이 제 얘기 많이 들어줬거든요. 그랬는데요, 올해 헤어졌거든요. 근데…… 걔가 제 얘기를 하고 다녀서요.]
“집안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고 다닌 건가요?”
[네. 그니까요…… 제가 남친이랑 헤어진 게요, 제가 너무 의존적? 그래가지고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남사친도 많아서요, 짜증난다고 그만 만나자고 했던 거거든요. 그래가지고, 애들한테 헤어졌다고 말할 때, 그랬대요. 제가 엄마 닮아가지고…… 바람기 있어가지고, 그거 때문에 헤어졌다고요.]
[와, 에바다.]
[완전 나쁜 놈이네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말 미운 친구네요.”
[네. 헤헤. 그냥…… 그래요. 사귈 때 진짜 잘해줬는데. 걔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줬거든요. 저한테는 걔밖에 없었어요. 제가 뭐 때문에 힘든지 말할 사람이요. 근데…… 애들은 다 제가 잘못했대요. 남친이요, 인기가 많았거든요. 그런 애랑 사귀면서 왜 딴 남자랑 노냐고, 화냥년? 막 그렇게 말하고요…….]
[아, 미친년들.]
“죄송한데, 욕설은 하시면 안 됩니다. 하시려면 저처럼, 레와 파 사이를 친 것 같은 녀석들, 이렇게 말씀해주세요.”
[앗. 아재…….]
[히히. 아무튼 그래서 그랬어요. 저 진짜 바람은 안 피웠거든요. 남친이 제일 좋았는데, 걔는 학원 다니느라 많이 바빠가지고, 자주 못 만나서, 다른 애들이랑도 놀았던 거거든요.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로워서요. 근데 애들은 제가…… 엄마처럼 남자 밝힌다고, 나쁜 년이라고 하니까…… 아빠도, 엄마처럼 너가 잘못한 거 아니냐고 하니까…… 힘들었어요. 근데요, 인제 개운해요. 아무한테도 말 못 했는데, 이렇게 VR로라도 얘기를 하니까, 좀 편하네요…….]
편해졌다는 말은, 거짓말.
그녀는 여전히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서브퀘스트가 그것을 증명한다.
나는 그 지점에서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불행 속의 문제행동을……
죽음밖에 답이 없어 보이는 지옥을……
어떻게 이것을 목적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단 말인가.
‘미움받을 용기’ 따위의 조언은 행복한 이들의 사치다.
불행을 도적질해 스스로를 위안하는 협잡.
그런 왜곡된 자기연민은 집어던지고, 우리는 진짜 미움 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문제의 원인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도와야 한다.
신도 뭣도 아닌 우리라도, 꼰대처럼 나서서 도와야 한다.
“이 정도면 인정할 수밖에 없지. 이건 죽을 맛이겠네요.”
[네? 헤헤. 저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아저씨처럼 나이 많은 사람도, 그렇게 세상 전부가 날 미워하는 상황에선 견딜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럴 때 울며불며 슬픈 거 알아달라고 외칠 사람은 엄마밖에 없는데…… 아저씨는, 엄마가 없거든요.”
[아…… 죄송해요.]
“죄송한 거 알면, 엄마 전화번호 쪽지로 보내요.”
[네? 어, 네? 아, 안 돼요!]
“돼요. 아저씨 믿어요. 엄마가 딸 보고 싶어서 달려오게 만들 수 있어요. 세상이 다 남 편 같아도, 뭔지 모를 이유로 가정을 등진 그분이라도, 나트륨님한테 오게 할 수 있어요. 아저씨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믿어요. 아저씨는, 나트륨님을 실망시키지 않아요. 아저씨가 누구죠?”
[꼬, 꼰마 아저씨요…….]
“정답. 꼰대 중의 꼰대예요. 믿어줄 거죠?”
VR상담을 잠시 멈추고 전화를 걸었다.
통화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110의 ‘화술’과 [암시 구조화]와 [환상의 수용]으로 전달된 딸아이의 처지 앞에, 모친은 지체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열된 가정도 막을 수 없는 본능의 사랑을 위해…….
“나트륨님. 곧 엄마가 올 거예요.”
[어, 네? 지, 진짜요? 아빠가 싫어하겠다…….]
“아빠가 싫어하건 말건, 만나요.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근데…… 엄마, 바람피운 거는…… 나빠요…….]
“미움받을 용기가 있는 분이셨던 거죠. 그런 건 하등의 쓸모가 없는데. 그저 나만 불쌍한 사람이 될 뿐인데. 용기 없이도 모든 미움을 헤쳐갈 힘이 여기 있는데, 그걸 놓쳤으니.”
[네……? 아! 아, 저, 전화 왔어요.]
“그래요. 어서 나가봐요. 나도 다음 상담 진행해야 돼.”
[아…… 네! 저기…… 고맙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때로 두려움에 가로막힌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희생양을 만드는 인간인지라, 쉽게도 소중한 사람들을 미움받게 만들고 만다.
그런 실수에 미움받을 용기도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미움을 긍정하며 내가 나를 연민하게 둬서는 안 된다.
그저 사랑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미움처럼 쉬운 감정 따위, 모조리 깨부수고 진격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후진 없는 상담사는, 무엇도 포기하지 않는다.
한 명도, 수천 명도.
어느 하나 잃지 않으리라.
미움받을 용기는 없고, 사랑할 용기만 있으니까.
그들 모두를 구원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