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62장 - 수용하는 상담사 (1)
7월의 중순에, 꼰미디어는 다시금 화제의 중심에 섰다.
5만 정기구독자라는 성적표와 함께.
이용덕이 혀를 내두른 것도 당연했다.
“참 대단도 하군요. 고작 열흘 만에 5만 구독자라니. 금액으로 따지면 월 5억 수준인가요?”
“대충 그렇습니다. 하지만 각 채널에 직접후원 형식으로 전달되는 구독료라서, 이쪽에 남는 것은 20%지요.”
“그래도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정기구독보다 일시후원 형태의 댓글이 많을 건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이미 운영비 정도는 건진 셈이니까요. 정말 대단합니다.”
“대단하긴요. 그것도 프리TV 측에서 좋은 조건으로 인프라를 공유해주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애초에 별사탕과 꼰포인트가 연동된다는 점에서 초기 후원자를 빠르게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뭘 한 게 없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겸손하다니까. 애초에 프리월드에서 그렇게 일방적인 계약에 날인해준 것이 전부 프리TV 대통령의 사업인 까닭 아니겠어요? 실제로도 주영주 의원 이슈로 꼰미디어에 유입된 시청자들이 프리TV 쪽으로 또 발을 뻗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결국 그 계약조차 윈윈이 되도록 만든 거지. 하나부터 열까지 박 선생이 해낸 일이요. 자부해도 좋아요.”
이용덕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로서 각종 방송과 SNS에서 활약해온 인물이다.
그가 이렇게까지 단언한다면, 믿어도 좋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자부심이 차오르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반응이 뜨겁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도 적지 않습니다. 예상보다 빠른 유입으로 인해 관리체계에 허점이 드러나고 있어요. 어쩌면 성급한 런칭으로 인해 대안언론으로서의 가치가 훼손될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시기의 문제는 아니지요. 어쨌든 한 번은 겪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성장통. 이제부터 차근차근 대처해나가면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흠. 왜 그러니?”
이용덕의 옷소매를 잡아당긴 것은 신지원.
촬영장 구경에 여념이 없던 아이는, 이용덕을 올려다보며 몹시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정신과 의사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게 왜?”
“그럼요, 이리 잠깐만 와봐요.”
“그래, 그래.”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과장이 일곱 살 소녀에게 끌려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조명기가 키득거렸다.
“하여튼, 꼰마 후배님은 제자까지 꼬마 꼰머네요.”
“……말장난을 하시는 거지요?”
“진담인데? 사람이 원래 유유상종인 법이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심경이 복잡한걸요.”
“아니, 나쁜 의미는 아니에요. 꼰대라는 말의 어감과 무관하게…… 그 정서의 상태와도 무관하게, 사람에게는 제각기 그릇의 크기가 있지. 그런 측면에서 하는 말이에요. 후배님도 꼬마 제자도, 마음이 참 넓은 듯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잖아요? 자기 정신질환을 얼추 알고 있는 녀석이, 정신과 전문의 손을 잡아끌어 호기심을 해결하려 들다니. 마음이 닫혀 있다면 그러기가 힘듭니다. 저기 손바울이도 그렇지요.”
첫째 제자인 손바울은, 자길 짐짝 취급하는 유종찬 PD를 따라다니며 뭔가를 거듭 질문하는 중.
영상 편집에 대한 꿈을 아직 버리지 못한 듯했다.
유종찬의 불편한 기색 따위는 그 필요성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태도.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네요. 제가 제자들을 참 잘 뒀습니다.”
“예…… 그래요, 정말. 유하늘 그 친구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참…… 괜찮은 친구야. 마음이 꽃처럼 예뻐요. 꼰미디어를 꽃미디어로 만들어줄 거야. 내가 기대가 큽니다.”
조명기는, 미디어에 학을 떼었던 임상심리사.
젊고 패기 넘치던 시절의 그는 미디어로 인해 사라졌다.
그 자신의 소견을 악의적으로 편집해 죄 없는 젊은이를 자살로 몰아간 방송 때문에, 조명기는 대중을 등졌다.
이후로는 대외 활동 없이 임상에만 몰두하게 된 것.
그렇지만 사회적인 일에 관심이 많은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나와 처음 만났을 무렵에도, 매일같이 비극의 유족들을 찾아가 무상으로 심리상담을 진행하곤 했으니.
프리VR과 ‘나사없’으로 바빠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VR로 성착취 피해자들의 상담을 받고 계시지요? 무료로.”
“하하. 그거야 뭐, 당연히 무료여야지.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응당 여성 심리사가 마음 편할 거 아니겠어요? 끔찍한 기억도 토로하고 그래야 할 텐데. 그런데도 나 같은 아저씨 심리사를 찾아준다면, 내가 뭐라고 돈을 받겠어요?”
“어차피 계약시간 외에 영리를 추구하셔선 안 되겠지만요.”
“아이고. 그렇게 지적하면 돈 벌려다가 실패한 것 같잖아? 아무튼 그 VR 런칭이 참 여러모로 다행입니다. 시간과 거리의 문제도 극복이 가능하고, 또 내담자 본인이 시선 걱정 없이 편히 찾아올 수 있으니까요.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용기 있는 친구라도 날 택하기는 힘들었겠죠.”
내가 자살이라는 폭넓은 카테고리를 선택한 것과 달리, 조명기는 성범죄 상담에 집중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성착취 피해자들에 한해서는 따로 시간을 내 무료상담을 진행하는 중.
그 마음이 내게는 못내 고마웠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쉬운 선택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불특정다수의 남성들에 대한 공포를 치료하는 일에는 남성 상담사가 더 적합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이성을 피하며 살아가는 것은 진정한 회복이 아닐 테니까요. 성별과 무관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요. 처음에는 여성 상담사가, 이후로는 남성 상담사가 돕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문제는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남성 전체를 기피하는 케이스인데…… 방송에 매주 얼굴을 비추시는 선배님께서 무료로 VR상담을 진행하시는 상황은, 피해자들에게 큰 힘이 돼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건 또 뭐예요? 우리 후배님이 바빠서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했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고맙습니다. 마음이 몰린 이들이 저지른 실수를, 그나마 꼰미디어에서 바로잡아줬으니 말이에요. 유하늘 씨 아니었으면 그 친구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아동 성착취 영상 이슈는 지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최근 화제가 된 것은 지난 3월 술집에서 자신이 동영상 공유자 중 하나라고 외친 남성.
그 본인이야 이미 특정되어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과정에 많은 시일이 소요된 탓에 다시금 문제가 불거졌다.
카드결제 내역을 파악하지도 않고 수사를 종결한 것은 직무범죄 아니냐는 방향으로.
당시 출동했던 파출소 경찰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신고 내용이 ‘네 명의 남성 테이블’이었기에 몸싸움에 대비한 결정이었을 것이나, 그 부분이 도리어 트리거가 됐다.
남성들이기에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 아니냐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남성들이기에 남성 범죄자들을 놓아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그 문제로 관할 파출소가 도마에 올랐다.
당시 출동했던 경찰들이라며 두 남성 경찰관의 신상이 인터넷상에 공개된 것.
그 자체로도 올바른 대처라고 보기 어려웠는데, 결정적으로 그 두 명은 실제 출동했던 당사자도 아니었다.
무수한 커뮤니티에서 십만 건 이상 조회되며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될 뻔했던 경찰들.
사실과 다르니 게시물을 내려달라고 요청해도, 그것보다 더 빠르게 새 게시물이 양산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흐름을 뒤집은 것이 꼰미디어 대표 유하늘의 ‘미이어끌’ 채널이었다.
「n번방 놓아준 경찰들의 충격 사생활!」이라는 타이틀.
그렇지만 내용은 사건 당시 비번이었던 두 경찰이 지역민들을 위해 봉사한 내역 등, 악마화를 뒤집을 진실이었다.
그것이 꼰미디어 메인페이지와 프리TV 배너에 올라 180만뷰를 기록했다.
덕분에 사냥당할 뻔했던 악마들은 오히려 영웅이 되어, 이 시대의 참 경찰로서 유명인이 된 상황.
긴급히 현장에 달려갔던 유하늘 남매의 공로였다.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단순한 바로잡기 기사였다면, 별 효과가 없었을 겁니다. 이미 그들의 얼굴을 악마로 각인한 대중이 구태여 스스로 인지부조화를 만들려 애쓸 리 없으니. 그렇지만 유하늘 씨는, 도리어 문제의식이 큰 대중이 관심 가질 만한 워딩을 헤드라인으로 잡았더군요. 그리고 누군들 실상을 알면 미안해하지 않을 수 없게끔 감성적인 접근을 시도했고요. 그게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미지를 회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타지로 전근을 간다 해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욕하고 계란 던질까 두려움에 떨었을 거예요. 경찰로서의 자부심에도 금이 가 자존감이 땅에 떨어졌겠죠.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파출소에 선물이 쌓인다지요. 미디어가…… 이 무책임한 가짜뉴스와 루머의 세상에서, 미디어가 오히려 사람을 구했습니다. 나는 그게 참……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내가 지켜주지 못한 아이에게…….”
BPD(경계선 인격장애)였다고 했다.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알기에,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면 스스로를 방에 가두고, 애인을 만날 때마다 자기 허벅지를 찌를 바늘을 챙겼다는 청년.
그런 이를 공개수배 프로그램이 흉악한 살인마로 지목했다.
그로써 궁지에 몰린 청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마 조명기는……
NBSC의 힘을 처음 실감했던 나와 비슷한 소회를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시절에도 수백만의 조회수로 억울함을 풀어줄 만한 미디어가 있었다면, 청년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김 이병을 그리는 내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너무 깊이 생각지 마세요, 선배님. 우리는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과거는 반성하고 되풀이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하…… 그렇지요. 맞는 말이에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미이어끌. 정말 미러클한 힘이었어요.”
“……죄송한데, 선배님. 그게…… 미이어끌이라는 채널명은, 미라클을 원어민 발음에 맞춰 쓴 것이 아닙니다.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의 준말입니다.”
“어, 엇. 아니, 그런 비사가 있었을 줄은.”
“발음 덕에 기적적인 힘이 생긴다면 참 다행이겠지만요.”
“하하…… 그러네요. 어흠. 그럴 겁니다. 어흠.”
괜히 멋쩍어진 조명기가 등을 돌린 잠시 후.
마침내 ‘나사없’의 다섯 번째 촬영이 시작됐다.
오늘의 케이스는 F-61.
원래는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이었다고 했다.
다만 하나의 시간이 온 가족을 휘감게 되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고정된 미래가.
[여보, 이것 좀 먹어.]
[뭐…… 무청죽? 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소냐?]
[아니, 그래도 이런 게 위에 더 좋다니까…….]
[뒈질 건데 뭔 상관이냐? 풀떼기를 뜯든 뭘 먹든 어차피 죽는다고. 야. 아직도 모르겠어? 나 죽을 거라고. 어?]
이춘엽은 위암 말기였다.
곳곳으로 전이돼 수술이 불가능한 상황.
전문의의 소견으로는, 이제 남은 시간이 반년도 채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 현실의 스트레스가 마음을 몰아붙이는 듯했다.
반면 아내 박순임은, 순진무구한 인물.
남편이 아직 살아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나뿐인 반려자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여보, 그러지 말고 다시 병원 가보자. 내가 이번에 수현이랑 검색을 해봤는데, 전환수술? 그런 게 있대. 올해 새로 나온 수술이래. 그래서 그걸 받으면-]
[아유, 등신아! 그거 연구한 병원이 어딘지도 모르지? 내가 갔던 병원이 그거 연구하던 데야. 알아? 거기에 나는 해당이 없어요. 암세포가 뼈까지 전이가 돼서, 가망 없다고. 알아?]
[아니…… 그러면 여보, 산에 가서 살아볼까?]
[이런 시부럴! 육갑을 해라. 인터넷에 떠도는 말 다 믿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넌 그게 문제야. 니가 그렇게 정신머리 없이 사니까, 수현이 학교 성적이 그 모양이지!]
[여보, 여보……. 그냥 우리, 항암 다시 받으면-]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좀…… 제발, 어? 순임아. 저거 지금 촬영하는 것도 그래. 뭐 한다고 방송국을 끌어들여? 내가 무슨 기부금 받으면 수술 되고 그런 건 줄 알았냐? 아니라고. 정신 차려, 순임아. 나 죽어. 정해진 일이야. 알아?]
전문의는 그 사실 역시 입증해줬다.
사전촬영된 세브란스병원 인터뷰에 따르면, 이춘엽의 사망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진실.
지금은 중단된 항암치료도 반응이 약했다는 모양이다.
진통제로 버티는 현재 상태가 현실적인 한계였다.
그렇게 이춘엽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부적응적 대처와 함께.
[나 왔어. 아빠, 오늘은 좀 어땠어?]
[뭐가?]
[아니, 몸 좀 어땠냐구.]
[몰라서 묻냐? 니 방 가라.]
[아빠…… 우리 잠깐만 얘기 좀 하면 안 돼?]
[뭔 얘기를? 왜 해? 저 카메라 때문에? 방송에 예쁘게 나갔으면 좋겠어? 그래서 뭐, 사람들이 동정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어떻게 해줘야겠냐? 어? 그래 우리 딸, 아빠가 미안하다, 죽기 전에 잠깐이라도 잘 지내보자, 그래야겠냐?]
[……아빠 진짜 왜 그래? 내가 언제 잘 지내자고 그랬어? 아빠 그렇게 화만 내고 있으면, 병 더 악화된다니까?]
[야 이 미친년아! 내가 왜 화를 내는데? 어? 내가 뭐 때문에 속이 문드러지는데? 니가! 니 엄마가!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고 멍청해빠져서, 죽어도 눈을 못 감겠다, 내가!]
관찰카메라 시청을 마친 상황실은, 오랫동안 적막했다.
이춘엽보다 10년을 더 산 한효준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라고 해서 죽음을 앞둬본 경험은 없는 까닭에.
“……한 교수님. 고양이를 키우고 계시지요?”
“응? 그래, 키우고 있지. 그건 왜 묻나?”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요?”
“요즘……이랄 것도 없네. 매일 똑같이 살아. 종종 캣타워에 오르고, 오래 창밖을 구경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잠들지.”
“그렇군요. 평온한 일상에, 행복하겠네요.”
고양이는 장기적인 계획을 품고 살지는 않는다고 한다.
현재야말로 묘생의 거의 모든 것.
그렇기에 좁은 집안에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도 삶의 낙이 될 수 있기에.
하지만, 같은 조건에서 인간은 필시 미치고 말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지 않으니까.
미래를 계획하고 그 성취를 위해 살아가는 생물이니까.
그렇기에 시한부라는 것은 무서운 고문이다.
더는 미래를 그리지 못하고, 오직 죽기 위해 살게 되기에.
마지막 잎새의 낙하를 기다리는 삶.
그 안에서 이춘엽이 무엇을 느낄지는 모를 일이다.
몸 성히 살아가는 이라면 피상적으로밖에 상상할 수 없다.
NBSC의 상담사인 내가 아니라면.
교수진의 이런저런 전문적 소견을 귀담아듣고, 조심스레 내담자 가정에 올랐다.
문을 열고 반겨준 것은 간절한 표정의 박순임이었다.
“예, 예. 저희 남편이요…… 시한부라고 얘기를 듣고 나서요, 마음이 많이 아파요. 계속 짜증을 내고요, 그러다가 혼자 돌아누워서 울고 그래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암이라는 게, 마음이 즐거워야지 낫는다는데. 그렇죠? 계속 스트레스를 받으면 더 아파질 거잖아요? 그래서 신청하게 됐어요.”
그런 모친과 달리 딸 쪽은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다.
낮에 부친과 다툰 일이 마음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래도 내 질문을 받고는 샐쭉 웃어 보였다.
“나쁜 아빠라고 생각하냐고요? 에이. 원래 저런 아빠 아니었어요. 건강할 때는, 되게 가정적이고요, 엄마한테도 잘했고요, 저한테도 뭐든지 다 해주려고 그랬고요. 건강했을 땐 그런 아빠였어요. 그때도…… 암세포는 자라고 있었겠지만요.”
그런 대화를 나눈 뒤 안방으로 들어섰다.
나를 모른다는 시한부 내담자는 돌아누운 채.
움찔하는 걸 보면 수면 중은 아니고, 방송국에서 보낸 상담사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은 부담스러우니.
“이춘엽 씨. 반갑습니다. 상담 수련생 박대민입니다.”
대답이 없어, 3초쯤 기다리다 말을 이었다.
“듣고 계신다고 믿고 여쭙겠습니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예, 불편하시겠지요. 원치도 않는 촬영으로 인해 진통제를 평소보다 더 드셨을 테니 말입니다.”
그때쯤 어깨가 한 번 더 움찔거렸다.
“부작용 걱정으로 투약을 조절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4기 위암의 통증을 생각해보면, 지금 보여주시는 모습은 있을 수 없는 평온함이지요. 가족 분들 얘기도 오늘따라 몸이 편해 보이신다고 했고요. 의도는 이해가 갑니다. 대체 무슨 방송인지는 몰라도, 아파하는 모습을 찍히고 싶지 않으셨겠지요. 육신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이번에 촬영된 영상만큼은 가족들에게 평생 남을 테니까. 그래서 평소보다 진통제를 배로 복용하셨을 겁니다. 일단 그렇게는 하셨는데, 혹시 내성이 생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짜증도 나셨을 겁니다. 의미도 없는 촬영 때문에, 나중에 가족들이 더 힘들어질까봐…….”
이춘엽은 아주 천천히 돌아봤다.
그리고 나무 그루터기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내가, 성격이 괴팍해서 그런 겁니다.”
“예. 성격이 괴팍하셔서, 걱정도 많으신 듯합니다. 본인이 떠나고 나서 남겨질 가족들…… 남에게 사기당하기 딱 좋은 순진한 아내와, 그 아내를 닮아 날 선 대꾸 한번 안 하는 딸. 그런 가족들이 춘엽 씨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그 생각만 매일 하시겠지요. 그러다보니 두 사람을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셨을 겁니다. 가장의 부재에 대비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모자랄 시기에, 눈시울 붉히며 곧 회복될 수 있다는 소리나 하고 있으니까요.”
“……젊은 친구가 소설을 쓰시는구만.”
“젊긴요. 춘엽 씨하고는 동갑인데요.”
“응? 어?”
“제게도 선한 아내가 있고, 수현 양보다는 한참 어리지만, 사랑스런 외동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에요. 내가 죽음을 앞뒀을 때 할 법한 생각들을…… 상상하면서요.”
“……그래요.”
이춘엽은 내 얼굴을 한참 올려다봤다.
그 뒤에, 산들바람처럼 물었다.
“내가, 보기 추했죠? 아내랑 애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되네. 아시잖아요. 나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진통제를 먹어도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도 여편네는, 무슨 민간요법 같은 거나 조사하고 있는 거야. 딸은 툭하면 나한테 와서 학교에서 겪은 일들을 얘기해요. 나 즐거우라고 해주는 거지. 그런데 그 얘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바보 같은 애가 또 없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어떻게 가시를 세우고 살아야 되는지를 몰라요. 상담사 선생님이랬죠? 나 말고, 쟤들을 좀…… 어떻게 좀 해줘요. 나 이제 죽는다는 걸, 좀…… 예?”
“예. 그 부분은 제게 맡기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와 동갑인 시한부의 남자는, 그제야 마음이 풀린 듯했다.
아무런 보장도 될 수 없는 약속인데도.
그는 슬쩍 웃으며 너스레까지 떨었다.
“그래도 참 착하죠들? 내가 통증도 있고 스트레스도 있어서, 아빠답지 못하게 굴었을 텐데. 그런데도 참…… 고맙죠들?”
“예. 그렇네요. 좋은 가족들을 만나셨네요.”
“그러니까요. 이게 세상이요…… 누구, 시인이 그랬잖아. 소풍이라고. 잠깐 내려와서 살다가…… 소풍이 끝나면 돌아가는 거라잖아요. 그렇게 치면 나는…… 참 좋은 소풍을 했어요.”
“그러신 것 같네요.”
“하하. 거…… 마음이 좀 편하네. 그쪽도, 검진 잘 받아요. 얼굴이 동안이라고 맘 놓고 있지 말고. 아시겠어요?”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죽음의 미래를 수용한 아버지가, 또 웃는다.
더는 아무런 여한도 없다는 듯이.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 역시 힘을 다해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