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60장 - 저 감정 (1)
“흠. 죽여버리고 싶네요.”
손바울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쓰다듬었다.
진심이라는 것이 너무도 명확히 느껴져서, 황급히 말렸다.
“바울아. 내가 만나보기로 했잖아. 쓸데없는 일 하지 마.”
“예. 그렇지만 그놈이 선생님 면전에서도 또 그딴 소리 지껄이면…… 그때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요.”
“야 바오로, 진정 좀 해라.”
“댁이나 좀 닥치시죠.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니까.”
한참 동생한테 들은 욕이지만, 진대수는 화를 내지 않았다.
원래 성격이 느긋한 녀석이다.
그러나 그 대수조차 날 바라보는 표정은 복잡했다.
“형님. 네다리 걔가 어떤 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기본적으로는 바울이 생각에 동의함다. 처벌이 필요해요. 안 그러면 반성하는 척하고 닉변해서 또 올지도 몰라요.”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 처벌은 없어도 돼.”
“으…… 형니임, 평소에 말씀하셨잖어요? 용서랑 처벌은 별개라고. 그 정도로 막말 지껄이고도 인실좆을 경험해보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아예 겁 없이 악플로 스트레스 풀고 다니게 되지 않겠슴까? 살짝 겁을 주기도 해야죠.”
내가 멋대로 입에 담은 네다리의 사연은, 대외적으로는 다른 시청자가 과거에 보낸 사연을 읊은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닉네임과 댓글 몇 개로 남의 가정사를 꿰뚫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테니.
심한 악플을 남긴 시청자를 보고, 내가 그를 용서하는 흐름을 만들기 위해 과거에 본 사연을 언급했다고 생각하면, 돌아가는 상황이 그럭저럭 이해될 법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네다리의 입장은 다르다.
어떤 접점도 없기에 타깃으로 삼았던 유명인.
그런 존재가 마치 용한 무당처럼 자신의 처지를 맞춰버리면, 그때는 공포에 질려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된다.
더 겁을 줄 필요는 없어진 셈이었다.
물론 그렇게는 말해줄 수 없는 노릇인지라, 그저 웃으며 대수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자기가 먼저 죄송하다고 말했잖니. 그걸 보면, 본성은 나쁜 아이가 아닐 거야. 잠깐 만나보는 걸로 충분하다.”
“그야…… 형님 만나보면 아무리 막장이라도 정신 차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휴우. 아무튼 그건 뭐였습니까? 채팅창 얼렸을 때 말씀해주신 거요. 저는 본 적 없는 사연이었는데.”
“그냥 상상이야. 악플러 중에 이런 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음…… 시청자들한테 들려주려고 만드신 얘기였군요. 역시. 자기 욕하는 놈마저도 미움받지 않게 해주시려는 그 마음, 제가 무척 좋아하는데요. 그래도 영…… 마음이 복잡해요!”
“알아, 알아.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자. 다들 고생했다.”
그렇게 정리회의를 마치고 원룸을 나서는 길.
하지만 내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상상 속의 이야기 때문에.
[환상의 수용]은, 참 묘한 기술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타자화된 공상이다.
우리가 한가할 때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어떤 상황에 있을까 상상해보는 것처럼, 논리적으로는 조금도 확신하기 힘든 무수한 인생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환상보다는 망상이라는 말에 어울렸다.
그 시나리오들 중 단 하나, 조금 더 뚜렷한 것이 존재한다.
‘이게 제일 그럴싸한걸?’ 정도의 느낌.
극히 미세한 차이의 그것이 아마 정답일 터였다.
나야 NBSC의 상담사라서 알 수 있었던 부분이다.
기술의 설명에 의거해, 그중 한 시나리오는 네다리의 진짜 삶을 그린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으니.
그렇다고 해봐야 아주 피상적인 공상이었다.
쟤가 이렇게 저렇게 성장했겠구나, 3자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은, 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남긴다.
그 지점이 [환상의 수용]이 가진 진짜 가치였다.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는 불가해한 행동을 혐오한다.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하릴없이 두려워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이해할 법한 저간의 사정이 상상된다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내 마음이 먼저 풀어지고 만다.
대상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 상상은 나 자신의 것.
상대방이 해명하겠다며 털어놓은 이야기가 아니다.
듣거나 읽은 이야기보다 한참은 더 생생하게 느껴져, 과장하자면 감명 깊게 본 영화의 비극 같은 잔향이 남을 터였다.
그렇기에 내 가슴이 답답해진 것이다.
네다리라는 아이의 삶이, 나를 슬픔으로 몰아갔다.
그를 괴롭힌 것은 가난도 질환도 아니었다.
그런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내가 적당히 되는 대로 지어 붙인 말이긴 하지만, 그보다도 불행한 환경에서조차 꿋꿋이 사는 사람이 정말 많으니.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의 의지일 터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동생을 바라보며.
네다리는 좋은 가장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 누구보다 노력하며 살아왔으리라.
그랬던 마음이 무너졌다.
강한 의지와 끔찍한 불행이 만든 양가감정에서 사랑보다 미움이 커졌고, 그 사실이 스스로에게 인식되었다.
꿈꿔왔던 좋은 가장이 아니라 연약하고 저열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알게 돼버렸다.
그 인식이 네다리를 무릎 꿇렸다.
만약 그가 공감하지 못하는 싸이코패스였다면.
그때는 가족들 따위 신경도 안 쓰고 자기 미래에만 열중했겠지만, 역으로 스스로를 저주하는 일은 없었으리라.
가족들 안 챙기냐는 주변의 질문에 짜증 정도나 부렸겠지.
못된 선택을 하고도 마음은 편안했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는 그런 존재가 못 되는 것이다.
네다리가 불가해한 공격성으로 나와 딸을 모욕했던 것은, 정말로 못되고 잔인한 인간이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자기 내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없어 일그러져버린……
누군가 손을 내밀어줬다면 그렇게는 되지 않았을, 선량했던 청년이자, 행복할 수 있었던 아이다.
“아빠! 네다리, 그 싸패, 고소해!”
집에 돌아와 딸애의 외침을 들으며.
나는 애써 환하게 웃어 보였다.
“지수야. 괜찮아. 잠깐의 충동으로 그런 못된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는 반성하고 있대. 그러니까 미워하지 않아도 돼.”
“……왜 그래? 왜 화 안 내? 걔가 잘못한 거잖아?”
“지수야. 잘못한 사람에게는 화를 내야만 할까?”
“화나잖아!”
“화가 나는 건 맞지만, 화를 내는 건 맞을까?”
“아…… 진짜 짜증나. 아, 엄마는 왜 가만있어?”
“너 버릇없는 꼴 좀 더 보려고. 더 해봐.”
“아니…… 아 진짜…… 몰라! 둘 다 미워!”
“사랑한다, 지수야.”
딸이 방문을 거칠게 쾅 닫은 뒤, 아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 죽겠다.”
“어, 당신도 기분 많이 상했지?”
“그래. 지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여보, 나 이번엔 도저히 모르겠어. 정말 그런 사람까지 용서해야 돼?”
“미안해. 이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야, 걔도 무슨 사정이 있었을 수 있지. 당신이 읽은 그 사연처럼 마음이 많이 아팠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중1짜리 애한테 그런 욕을 해? 싸이코패스 아냐?”
“주희야, 싸이코패스가 아니야. 그리고…… 네다리도 마음이 아팠을 테니까 용서해주자는 그런 얘기도 아니야.”
“하…… 알아. 알긴 알아. 고소한다고 해도 반성한 척만 하고 또 돌아가서 다른 사람 욕하고 다닐 거라는 거. 그렇게 놔두느니, 차라리 다른 사람 대신 당신이 욕먹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 그래도 내가 싫단 얘기야. 내가 당신 욕먹는 게 싫단 말이야. 지수는 다를 거 같아? 걔, 자기한테 못된 말 한 건 신경도 안 썼어. 씹선비, 별창, 그것만 계속 욕하더라.”
“……그랬어?”
“그래. 지 아빠가 사람들한테 좋은 얘기 해주면서 사랑받는 게 자랑이었던 애야. 네다리 그 인간 그냥 두면, 지수한테는 그게 또 얼마나 혼란스럽겠어? 그쪽이 제정신이 아니라서 이상한 소릴 한 거다, 아빠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 이렇게 어린 머릿속에서 매듭을 짓게끔 해줘야 되잖아?”
내 아내는, 언제나 맞는 말을 한다.
이번에도 분명 그 이야기는 합당했다.
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으며 네다리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니었다.
“용서해주자. 잠깐의 실수일 뿐이었어.”
“……당신은 진짜, 끝까지.”
“지수도 이해해줄 거야. 강한 아이니까.”
“어휴…… 알았어. 그래도 얘기는 당신이 해.”
아무래도 거기까지는 양보하기 힘든 듯해, 무거운 걸음으로 딸의 방문 앞에 다가갔다.
노크를 하자 아주 천천히 열렸다.
그 틈으로, 잔뜩 심통이 난 딸애의 얼굴이 보인다.
“……왜.”
“지수야. 네다리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 몰라! 미친놈이겠지.”
“그렇지는 않아. 예를 들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지? 어떤 이는 재력을, 어떤 이는 건강을, 어떤 이는 명석함을, 어떤 이는 여러 가지 것들이 섞인 기준을 설정할 거야. 그리고 그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서 노력해. 그렇지만 그것이 주위의 상황과 맞지 않을 때가 있어.”
“뭔 소린지 모르겠어.”
“이해하고 있다는 거 알아. 네다리라는 친구는, 그게 어긋나버린 친구야. 아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그래서 삶을 지탱하고 있던 마음들이 아파진.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어. 아빠도, 엄마도, 지수 너도.”
“난 싸패 아냐!”
“그렇지. 그리고 네다리도 싸이코패스는 아니야.”
“왜 아냐? 아빠한테, 욕했는데.”
“하하하. 아빠한테 욕하면 싸이코패스야?”
“장난 아니야! 내가 바본 줄 알아? 나도 다 알아. 아빠한테 사람들이 성인군자라고 하잖아. 애들도 다 그래. 중학교 1학년 멍청한 애들도 그거 다 안다고. 근데도 아빠보고 그렇게 욕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거야. 그게 맞는 거야!”
정말 고마운 이야기.
아빠로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 말에 웃어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가슴 아팠다.
“지수야. 싸이코패스는, 반사회성 인격장애 중에서도 선천적 저감정자를 뜻하는 관용어야. 뭐가 선한 행동이고 뭐가 악한 행동인지를 본능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그 말을 바꿔서 하면 이런 거야. 그 사람들은, 사람을 칼로 찌르는 게 왜 끔찍하게 무서운 일인지 잘 몰라. 그래서 잘 교육받지 못하면 강력범죄를 저지르기도 해. 자기 이익을 위해 교묘한 사기를 치는 경우도 많고. 그렇지만 절대로 못 하는 일이 있어. 다른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못된 말을 하는 거. 자기한테 이익이 될 때는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괴롭히려고 욕하진 않아. 욕을 먹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못하거든. 그러니 나쁜 채팅을 쳐서 아빠를 괴롭히겠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거야. 아빠 다니는 길에서 칼을 휘둘렀으면 휘둘렀지.”
“그게, 그게 더 무서워!”
“그럴 거라는 게 아냐. 그쪽 가능성이 차라리 높다는 거야. 싸이코패스도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사회에 잘 어울려 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니까. 그리고, 싸이코패스들은 체포되어도 반성하는 척조차 하지 않는다…… 들어봤지? 그런데 악플러들은 고소를 당하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선처를 구해. 그게 어떻게 선천적 저감정자일 수 있겠어? 보통 사람들이야.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들. 단지 한순간 뭔가가 어긋나서…… 슬프게도 옳지 않은 방법으로 마음을 풀게 된 사람들. 그래서 아빠를 괴롭히려고 아빠 앞에서 지수 욕을 하게 된 거야. 싸이코패스들이랑은 달라. 그 사람들은, 아빠한테 그게 칼에 찔리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란 걸 절대 모르니까.”
“……나도, 아빠 욕먹으면 슬퍼.”
“그래. 그래서 미안해. 네다리 그 친구도 그렇게 욕하기 전에 먼저 상담을 받으려고 할 수 있었을 거야. 아빠가 더 확실하고 압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으면. 그게 실패해서, 아빠는 마음이 아픈 거야.”
혀의 칼로 타인을 찌르는 이들은, 그 아픔을 아는 이들이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중의 마음을 아는 이들.
한때 그들처럼 선량하게 살아갔거나, 웹상을 제외하면 여전히 선량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절대다수다.
그들이 진실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싸이코패스처럼 선천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탓이 아니라, 반복된 상처에 딱지가 앉듯 무의식적으로 해리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그 딱지 앉은 자리를 바늘로 찔러봐야 악순환일 뿐.
해소되지 않은 부정적 감정에는 다른 약이 있다.
“……확실하고 압도적인 게 뭔데.”
“이런 거야. 이렇게, 꼭 안아주는 사람.”
“아…… 진짜 짜증나. 아빠는…… 멍청해. 바보야.”
내 품에 안긴 채 꼼지락거리는 작은 온기.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악을 악으로 갚을 수 없다.
그것이 어디서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지 모르니.
그러니 그저 끌어안을 따름이다.
온기에 녹은 딱지가, 슬프고 예쁜 핏물로 씻길 때까지.
*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섰을 때, 거기엔 손바울이 있었다.
“바울아. 오지 말라고 했잖아.”
“걱정돼서 안 되겠습니다. 그놈이 칼 휘두르면 어쩝니까?”
“무슨 그런 말을 하니. 넌 알고 있잖아? 어제 이야기한 사연이, 네다리의 처지야. 그런 애가 내게 왜 칼을 휘두르겠어.”
“그래서 온 겁니다. 그놈도 자기 얘기인 거 알았을 거 아닙니까. 저야 선생님 말씀 듣고 사도……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케바케입니다. 자기 비밀을 순식간에 읽어내는 사람한테 공포를 느꼈을 수 있어요. 칼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야 꼭 저감정자가 아니어도 극도의 공포 상태에서는 누구나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법이지만……
말하며 가슴을 부풀리는 행동에서, 콜드리딩이 발생했다.
“너, 배에 뭘 넣었어?”
“음. 바로 들키는군요. 예, 식칼입니다.”
“너는…… 휴우. 그래, 알았다. 같이 가자. 대신 넌 차 안에만 있어. 네다리한테 칼이 없으면, 절대 나오지 마라.”
“분명히 있습니다. 전 알아요.”
네다리의 집이 있다는 흑석동 인근으로 이동하며, 나는 손바울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학대 속에 감정이 결핍된 후천적 저감정자.
세간에서 말하는 소시오패스에 해당한다.
싸이코패스와는 달리 교육을 통해서도 사회화가 쉽지 않아, 오히려 훨씬 더 강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본인의 말처럼, 사람이란 케바케다.
“바울아. 현서랑은 좀 어떠니?”
“현서요? 걔 참 신기해요. 처음엔 애가 얌전했는데, 요즘은 종달새처럼 막 떠들다가 손 잡거나 팔짱 끼거나 어깨에 기대거나…… 감정변화가 참 천변무쌍합니다. 멀리서 관찰할 때는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아주 가관이더라고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니었는데.”
“예? 아, 반대군요. 좋습니다. 걔랑 있으면 좀…… 무뎌진다고 그래야 되나. 다른 일들은 뭐 어찌 되든 상관없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고- 아. 안 되지. 선생님의 가스라이팅에 당할 뻔했네요. 저는 오늘 칼이 될 겁니다.”
부드러운 감정으로 살심을 깎아내려 질문했다고 분석한 모양이다.
그야 그런 생각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오현서를 말할 때마다 살며시 짓는 미세한 웃음이 좋아서였는데.
손바울은 변하고 있다.
나라면 망가지고 일그러져 남들에게 악의만 퍼뜨리고 말았을 끔찍한 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
어떻게든 버티고 버텨서, 미행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등의 소소한 잘못 외엔 범죄조차 저지르지 않은 채, 마침내 나와 만나 아름다운 은하를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될 수 있다.
네다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흑석동 빌라 앞의 청년을 바라봤다.
“어……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네다리님.”
“저쪽에, 벤치…….”
네다리는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두꺼운 뿔테안경을 썼고, 머리카락은 제대로 감지 않아 여기저기 뻗쳐 있었다.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뭘 말이지요?”
“저, 저희 집 사정요.”
“그쪽 사정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보다 내기 하나 하죠.”
“내기……요? 뭔데요…….”
“이번 시험 말입니다. 만약에 네다리님이 떨어진다면, 내가 책임지고 1년 더 시험 준비하도록 도와줄게요. 거기엔 가족들의 생계비까지 포함됩니다. 마음에 듭니까?”
“……거짓말. 장난치지 마요…… 얼마나 들 줄 알고.”
“돈이 많아서 한강에 부어도 될 정도니까, 그건 신경 끄고. 대신 반대급부는 있어요. 올해 시험에 붙는다면, 가족은 버리지 말아요. 한 번 더 애써봐요. 지금까지 참 오래…… 너무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을 견뎌왔잖아요.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그 고통을 견뎠잖아요. 붙는다면, 다시 한번 도전해봐요.”
“아니…… 근데…… 내가…… 그래봤자 다…… 또…….”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네다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가 다리 다친 거, 나 때문이에요.”
“예. 압니다.”
“아빠가 빨리 도망 못 쳤던 것도, 저 숨기느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꼭 붙었어야 됐는데…….”
“이놈의 공시공화국이 문제지요. 워낙 많이들 보니.”
“……엄마가, 사연 쓴 거죠? 어제…… 내가 방에서 방송 보는 거 봤으니까. 그래서 우리 얘기 썼던 거야. 난 엄마 정신 나갔다고 생각하고, 막 떠들었던 건데…… 그거 다 듣고 있었던 거죠? 진짜…… 난 진짜…… 개자식이야…….”
“시끄럽고,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요? 그냥 대답합시다.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아, 그 전에. 이름은 뭐지요?”
“저, 전…… 정승규요. 저…… 진짜, 해주실 거죠?”
“지금 각서 쓰잖아. 그렇다고 일부러 떨어지진 말아요.”
“누가요……! 그냥…… 하던 대로 할 건데요…….”
네다리는, 에픽퀘스트의 신지원은 아니었다.
그저 초능력에 현실의 조각을 덮어씌운 순박한 아이.
이후 머뭇대던 그는, 막 차에 타려는 내게 외쳐 말했다.
“저기, 저, 아저씨! 잘…… 잘못했습니다!”
“시끄럽고, 오늘 방송 들어와서 거기서 사과해요. 내 딸애가 눈 부릅뜨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알았어요?”
“아, 알았습니다!”
“동네 사람들 다 깨겠네. 다 새벽반인 줄 알아요? 갑니다.”
“아, 네! 저, 죄송…… 죄송합니다……!”
“……쫑알쫑알 시끄러운 피라미네요. 괜히 칼 갈았네. 가시죠, 선생님. 눈 부릅뜬 꼰순이 학교 데려다주러.”
손바울의 투덜대는 소리 속에서, 나는 시트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한강 저 끝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봤다.
빼꼼 고개 내민 빛살이, 정승규의 마음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