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58장 - 상담사의 의무 (3)
“그 사연, 나올 거 알고 계셨습니까?”
이튿날 새벽에 만난 유종찬은, 느긋한 표정으로 물었다.
미리 <멋진 사나이>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사연을 섭외해둔 뒤에 내 방송을 보도록 종용했냐는 의문.
뭘 그런 정성까지 들였냐는 투의 질문이다.
그렇지만 마음 쪽은 그보다 복잡해 보였다.
오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반발심이, 순수한 감정의 변화를 틀어막고 있었다.
“답하자면, 내가 예상한 건 다른 쪽이었어요. 해당 프로그램 촬영 과정에서 성추행을 당했던 부사관의 지인이나, 그 프로그램이 만든 왜곡된 캠프 이미지로 인해 군생활의 고충을 폄훼당한 군필자들의 하소연이 나오겠거니 했지요.”
“……그게 확신할 만한 일이었습니까?”
“어제 9% 시청률 돌파하고 기사가 잔뜩 나갔잖습니까? ‘멋사 PD와 인방계의 대통령이 만나 신개념 예능으로 충격을 던졌다’는 식으로. 내 방송의 20만 애청자 대다수가 청년층이에요. 퀵뷰도 자주 뿌리곤 하니, 군대 얘기로 한정할 경우엔 분명히 ‘멋사’ 얘기가 나올 거라 봤던 거지요.”
“흠…… 그렇습니까? 셜록꼰즈답네요. 뭐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요. 예능이란 게 현실하고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상식입니다. 그것도 모르는 꼬맹이들이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겪었대도, 제 잘못은 아니죠. 이 바닥에선 흔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곤 눈을 돌려 먼 산을 보는 것이다.
막을 새도 없이 손바울이 비웃음을 날렸다.
“말 참 뭣같이 하시네요.”
“뭐? 이 새끼가?”
“바울아, 하지 마라. 유 PD도. 방금 한 말이 욕먹을 만한 이야기라는 건 본인도 잘 알잖아요?”
“아니 뭐…… 예. 저도 욱했네요. 출연자랑 괜한 일로 날 세우게 됐다고 생각하니까, 약간 불쾌했습니다.”
“불쾌고 자시고-”
“바울아.”
손바울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물러섰다.
그리고 나는 유종찬과 함께 건물 사이의 인적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의 골목.
빌딩들 사이의 좁은 통로라, 행인의 통행보다는 주로 인근 직장인들의 흡연구역으로 이용되고 있는 듯했다.
그곳에 유종찬을 앉히고 담배 피우길 권했다.
“후……. 죄송합니다. 제가 저 녀석하고 자꾸 이러네요. 선생님을 무시하고 그런 건 아닙니다. 정말로요.”
“그런 건 괜찮아. 바울이도 네가 싫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아닙니까?”
“그래. 알잖아, 자살하려던 유하늘을 구해낸 친구인 거.”
“그거야…… 아. 음. 지인 중에 자살한 사람이 있는 거군요. 그런 게 아니면 생판 남을 구하러 한강에 뛰어든다는 선택이 절대 쉽지는 않았겠죠. 하…… 이건 제가 실수했네요.”
이렇게 보면 정말로 나쁜 사람은 아닌데.
사적으로 이야기할 때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왜 업무에서는 그게 안 되는 것일까.
“……종찬아. 전에 담배 이야기를 했었지?”
“예? 아, 예. 집 앞에서 담배 피우는 고딩 얘기요?”
“그래. 다시 생각해봤니? 그 녀석을 네 집 앞에서 담배 피우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
“그거야…… 답이 없다니까요? 화 한번 내면 며칠은 안 오지만, 그래놓고 집에 불 꺼져 있으면 거기서 또 담배 피웁니다. 낄낄대고 통화하면서요. 잠복을 하고 있을 수도 없고.”
“그래. 잠복하든 화를 내든, 그런 방법은 일시적이지. 그렇게 반성하지 않는 이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려줄까?”
“방법이 있습니까?”
“굉장히 간단해. 나가서 같이 담배 한 대를 피우는 거야.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거지. 담배가 얼마나 건강에 안 좋은 물건인지에 대해서. 그러면 다시는 오지 않을 거야.”
“……아, 화내는 것보다 설교 듣는 게 더 싫어서요?”
“하하.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마음이 클 거다. 진심을 담는다면. 담배 연기를 내뿜고 집 앞에 꽁초를 버리는 잘못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정말로 그 아이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한다면. 그때는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돼. 겉으로는 뭔 개소리야 하는 표정을 짓겠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 무의식의 목소리가 외치게 되는 거야. 그래도 그 꼰대는 나 걱정해주는 인간인데, 굳이 그 집 앞에서 담배 피울 건 없지 않나…… 그렇게.”
“……너무 이상론인데요. 에이, 될 리 없습니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확률은 높아진다.
미움을 표출하는 행위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갈등을 만들지만, 사랑을 표출하는 행위는 가해자의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키게 되니까.
그때도 변화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노답’인 인물이겠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애초에 미운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것부터 언어도단.
그렇기에 사람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다.
군대의 이미지를 수련회 캠프로 전락시켜 무수한 군필자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준 이 PD를,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상담사니까.
미움 앞에서는 누구도 변하지 않음을 아니까.
“너하고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해도 된다. 죄책감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일단은 오늘 촬영에 집중해야겠지.”
“예. 그러니까…… 후우. 어제도 설명해드렸지만, 가볍게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의뢰인은 스타트업의 개발팀장이에요. 데이팅 앱 개발 회사고, 그 팀장은 원래 배달 앱 스타트업에서부터 경력 쌓아온 베테랑이고요. 그런데 이번 회사로 옮긴 뒤에 부하직원들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갈등이라고 해봐야 소외감을 느끼는 정도죠. 그렇지만 ‘내가 나이 먹고 꼰대가 됐나’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고, 대표와 상의한 끝에 사연을 올리게 됐다고 했습니다. 대표 생각이야 달랐겠지만요.”
“그래. 업무 내용이 은근슬쩍 화면에 나가면, 경쟁 치열한 데이트 앱 시장에서 인지도를 높이는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했겠지. 사연 내용 자체도 심각한 것이 아니니까.”
“예, 십중팔구 그런 복안이겠죠. 어쨌든 우리한테는 잘된 일입니다. 이런 케이스가 아니면 회사랑 조율이 힘들었을 테니까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사내의 문제를 내비치기 싫어한단 말이죠. 그래서 정말 심각한 케이스로는 제보가 안 들어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괜찮은 결과를 내줘야 사연이 늘어날 것 같아서 부탁드리게 됐고요.”
가장 심각하고 까다로운 케이스들을 선정해달라 했던 지시를 기억하며 하는 이야기.
유종찬은 내게 진정성을 보이고자 애쓰고 있다.
자기 자신을 바꾸려는 의지는 없어 보였지만.
그런 그와 달리, 데이팅 앱 ‘썸원’ 개발팀장 이종곤 쪽은 태도부터 변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해 보였다.
“아이고, 선생님. 정말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제 얘기를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예, 예, 그럼요. 전에 일하던 회사에 프리월드 출신 경력직이 몇 명 있었거든요. 정기영이라고, 기억하실지……?”
“아, 정 대리. 물론 기억합니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친구였는데, 따로 꿈이 있다면서 사직했었지요.”
“예, 예. 그 친구랑 멤버들 몇 명이 뭉쳐서 시작한 게 ‘배달꾼’이었죠. 저도 개발 단계에서 스카웃돼서 참여하게 됐고요. 그래서 기영이가 박 부장님 이야기를 종종 했습니다. 그렇게 부하들한테 사랑받는 상사는 평생 다시 못 볼 것 같다고요.”
눈동자만 굴려 보니, 유종찬이 흐뭇하게 웃고 있다.
부가적인 스토리텔링이 나왔기에 기뻐하는 것.
그렇지만 이내 손바울도 비슷한 표정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불쾌하다는 투로 팔짱을 꼈다.
저 태도는 아마 그거겠지.
소위 동족혐오.
자신과 유사성을 지닌 타인을 고깝게 보는 심리다.
심리학적으로 파고들자면, 내재된 자기혐오를 외면화하고 타인에게 투사해 그로써 안정감을 되찾으려는 방어기제다.
손바울과 유종찬은 선민의식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인다.
전자의 경우 나라는 스승을 신성시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 어떤 오기로 인해 촉발된 심리로 보여, 그 기작은 다르지만.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유종찬이 맹신이라는 유사성을 감지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 지점에서 희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선민의식의 손바울을 혐오한다는 것은, 자기 안의 내로남불 역시 혐오하고 있다는 뜻이니.
비록 아직은 무의식적인 기작이겠지만……
잘 접근하면 그것을 의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그런 구상 속에서 듣게 된 이종곤 팀장의 사연은, 내게는 꽤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정기영에게 들은 박대민 부장님처럼 되고 싶었다고.
그래서 팀원들에게 좋은 상사로 보이기 위해 애썼는데, 오히려 노력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느낌만 들었다고.
“요즘 친구들은 회식도 안 좋아한다고 해서 최대한 안 하고 있고요, 말도 곱게 하고, 사적인 일도 안 시킨단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정말 가족 같은 팀을 만들고 싶었는데…… 왜 안 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팀원들끼리 모이면 저를 이종꼰이라고 불러요. 난 정말 꼰대가 안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대체 왜 그런 걸까요? 선생님은 아시겠습니까?”
변화의 의지를 내비치는 30대 후반의 개발자.
그러면서도 말에 가시가 박혀 있다.
나는 노력했는데, 나는 잘하고 있는데, 왜 너희는 제대로 따라주지 않는 거냐는 미움이.
그렇기에 그는 사실 유종찬만큼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
잘잘못을 따지는 채로는 상식이 다른 이와 화합할 수 없다.
물론, 상담사 역시 잘잘못을 따져서는 안 된다.
좋은 상사가 되려 노력한 이종곤도, 그런 그를 몰라주고 꼰대 취급하는 부하직원들도, 잘못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단지 다를 뿐이다.
그 다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 엇갈리고 있을 뿐.
유일하게 다행인 점이라면……
내가 꼰대 중의 꼰대라는 사실이겠지.
이 케이스는 유종찬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상황실에서 관찰카메라를 보고 왔습니다. 어제 하루 분량이긴 했지만, 사무실인 만큼 다양한 인간관계가 엿보이더군요.”
“아, 예. 카메라 의식 안 하고 평소처럼 업무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거기서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잡혔나요?”
“이상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 팀장님은 좋은 상사였고, 팀원들도 좋은 직원이더군요. 나쁜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 그래요? 그러면 왜, 이종꼰이 됐을까요?”
[이종꼰, 참 귀여운 별명이구만.]
[그러게요. 참 좋은 사람 같습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화합을 가로막고 있지만요. 화합은 회합에서 비롯된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죠.]
상황실에서는 이미 정리멘트가 나오고 있다.
관찰카메라를 보는 단계에서 진단이 끝난 이야기.
집단상담 시퀀스가 예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구태여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듯했다.
“팀장님. 혹시 선을 긋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선이요? 제가요? 제가 무슨……?”
“어제 아침, 양명지 인턴이 커피 한 잔 드릴까요 팀장님, 이런 말을 꺼냈지요. 팀장님은 그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어요. 그런 건 하지 말라고 했잖아? 일이나 해. 한 시간쯤이 지나서 성수한 대리가 보고서를 가져왔습니다. 새로 구현한 매칭 이벤트의 참여율이 저조한데 마케팅팀에 한마디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요. 팀장님은 그때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어요. 저쪽 일은 신경 끄고 네 할 일이나 잘해.”
“아니, 제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습니까?”
“그렇게 들렸어요. 오후에 관찰카메라 보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리고 점심때가 돼서 오진규 사원이 아이디어 하나를 제출했지요. 다른 앱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매칭 방식이었는데, 이때도 팀장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야, 우리 개발팀이야. 기획팀 영역까지 건드리면서 이러자 저러자 말하면 회사가 잘 돌아가겠어? 그냥 네 일만 하면 돼. 그게 너네 직급의 진리야. 개발팀한테는 개발팀의 역할이 있어.”
“……그건 맞지 않습니까? 이쪽 일 해보신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전공도 아닌데 나섰다가는, 괜히 뒤집어씁니다.”
맞는 말이다.
회사의 팀과 직급에는 각각의 역할이 있다.
그 선을 넘어서려 한다면, 될 일도 안 된다.
초침과 분침이 서로 시간을 표시하려 다투는 시계처럼.
그렇지만 회사라는 것은 시계가 아니다.
회사(會社)는 사람이 모인 곳.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왜 대화는 안 하십니까?”
“예? 대화요?”
“예, 대화요. 양명지 인턴에게, 웬일로 먼저 커피를 타준다 그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으셨어요. 성수한 대리에게, 네가 열심히 구현한 이벤트가 이용률이 저조해서 좀 기분이 그렇겠다, 마음은 이해하는데 지금 당장은 그쪽에도 일이 많다더라, 이런 설명을 하지 않으셨고요. 오진규 사원에게, 대표님한테 보고를 해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PT 한번 준비해볼래, 그렇게 제안하지도 않으셨어요. 그저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린 뒤에 지시만 하셨습니다.”
“그거야, 제가 이런 걸 한두 번 겪는 게 아니잖아요? 애들이야 모르겠지만 저는 다 경험이 있으니까 해주는 말인데.”
“물론 그렇지요. 맞는 말씀을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화 없이 그어진 선은…… 좋은 의도에서 해주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공감을 부르지 못해요. 그저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명령하는 보스로만 보여요. 아무리 잘해주려고 노력해도, 꼰대 소리를 듣게 돼요.”
“아니…… 왜…… 저는 진짜 이해가 안 되네요.”
취업 매칭 앱에서 직장 내 정서를 조사한 적이 있다.
업무와 인간관계 중 어떤 것이 스트레스를 주는지에 대해.
그 결과 71.8%의 직장인이 인간관계를 스트레스 요인으로 꼽았으며, 개중 79.1%가 상사와의 갈등에 표를 던졌다.
원인은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다.
비합리적인 결정, 업무 분장의 편향, 사적인 심부름 등의 갑질, 인격모독 발언, 업무 성과의 스틸 등……
대부분은 이종곤에게 해당하지 않는 요소들이었다.
단 하나, 자기 경험만을 내세우는 권위적 태도를 제외하면.
“부품이 아니잖습니까. 풍운의 꿈을 품었는지 단지 커리어만 쌓으려고 왔는지는 몰라도, 그 개개인이 각자 스타트업에 대해, 데이팅 앱에 대해 나름의 상식이 있을 거예요. 팀장님보다 경력도 짧고 발상도 얄팍해서 들으나 마나 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그 마음 쪽은 다릅니다. 먼저 나서서 무언가를 해보려 하는 직원들에게는, 팀장님만큼 열정적인 의지가 있을 겁니다. 그걸 단지 결과가 뻔하다는 단정으로 모두 배제한다면, 누가 팀장님을 리더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자기들을 그저 명령에 따르는 기계로만 본다고 느낄 텐데. 회사 내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게 될 텐데.”
“……제가 잘못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잘못은 아닙니다. 이미 좋은 상사세요. 다만 사랑받는 리더가 되고 싶으시다면, 달라지실 필요는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사랑받는 리더가 되려면, 첫째는 능력이 있어야 하지요. 팀장님은 이미 그쪽은 충분하실 겁니다. 남은 조건은 하나예요. 들어주시면 됩니다. 아무리 멍청한 소리라도, 아무리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라도, 듣고 또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러다가, 업무에 지장이 생기면요? 시간낭비 아니에요?”
“아닙니다. 소비된 시간만큼이나 커다란 마음들이 생길 테니까요. 사랑하는 상사에게 누가 폐를 끼치겠습니까?”
이종곤은 확신하지 못한 채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이후 집단상담을 진행하고, 또 한 데 모여서 관찰카메라를 시청하며, 그의 선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아, 이종꼰 또 저래.]
[대리님 대리님, 카메라 있잖아요.]
[아. 어. 아 어떡하지? 아, 깜빡했네. 아…… 망했다.]
[왜 그러는데요? 팀장님한테 깨졌어요?]
[아니…… 좀 답답해가지고. 대표님 딸 다음 달에 결혼하잖아. 근데 우리는 버그리포팅 때문에 몇 명은 자리 지켜야 될 거고. 그래서 팀끼리 모아서 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여쭤봤다? 그랬더니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하신다는 거야.]
[와, 개에바다. 또 혼자 내시려고 그러나?]
[그렇겠지. 왜 저러시냐 진짜.]
[근데 웃기긴 웃기네요. 이거 고마워해야 될 일 아닌가?]
[……그렇긴 한데, 왜 말을 안 하시냐는 거지 내 말은. 이거 멍때리고 있었다가 당일에 따로 축의금 냈으면 분위기 곱창났을 거 아니냐고. 대표님은 얼마나 황당하겠어. 팀장이 팀 거 모아서 냈는데 대리가 혼자 따로 내고 있으면 말이야.]
[하하. 그랬으면 대리님 사회생활 ON 소리 들었겠네요.]
[완전. 감사한 일이긴 한데, 좀…… 그래.]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선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선의로 행동하고도 욕을 얻어먹을 수 있다.
마음이 이어지지 않는 한, 사랑조차 부조리가 된다.
그렇기에 유종찬은 내내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말미에 짬을 내 다시 흡연구역을 찾았을 때는, 내게 그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참 황당하죠? 사람이 잘해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 되는데, 미친놈들이 잘해주는 사람을 까고 있어. 그러니까 잘해주면 안 되는 겁니다. 어중간하게 대하면 바로 기어올라요. 어디까지나 공과 사를 구분하고, 잘못한 건 지적하고 잘한 것만 칭찬하고, 그렇게 선을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넌 잘한 것도 칭찬 안 하잖아?”
“예? 아니 칭찬…… 자주는 안 하죠. 잘하는 애가 없으니까.”
잘하는 애가 없기야 할까.
선을 그어둔 채로는 보이지 않을 뿐이겠지.
공과 사를 구분한다는 것은, 그렇기에 공허한 울림.
이른바 ‘감정소비’를 예방하고자 조심하는 것이겠지만……
감정은 결코 소비재가 아니다.
1+1이 0도 되고 2도 되고 100도 되는 것이 인간이기에.
“애초에 그게 문제였던 거야. 그 선이 이 팀장을 괴롭혔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 부하직원들이 멍청해서죠.”
“……남은 촬영은 회식 하나지? 여유가 있으니까 좀 물어보자. 넌 왜 그렇게 소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거니? 이 팀장 얘기도 그렇지만…… 멋진 사나이 때도 그렇고, 트립크루 때도 그렇고, 분명 제작진 안에서도 이러면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을 텐데. 왜 그 얘기들에 관심을 주지 않았던 거야?”
“하하. 그런 얘기들 신경 쓰면 프로 못 만듭니다. 예전에 무도 못 보셨어요? 네티즌 말에 휘둘리면 프로 망해요.”
“그런 의견도 있긴 했지. 그렇지만 꼭 무시해야 할까? 프로그램 잘되자고 누군가를 상처 입힐 필요는 없지 않을까?”
“에이, 상처가 아니라 과민반응이죠. 그냥 예능일 뿐인데. 공과 사 구분 못하는 애들이나 그렇게 반응하는 겁니다.”
“네게 있어서 예능은…… 공과 사란 무엇일까?”
유종찬이 이종곤처럼 눈살을 찌푸린 순간.
나는 그 답을 미리 들었다.
「 [정문의 일침]을 사용합니다 > 유종찬
주제 ‘공과 사’에 대응하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배신’ 」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구나.”
“……셜록꼰즈 그겁니까? 에이. 선 넘으시네요.”
“누구였니? 누가 그렇게 마음을 닫게 만들었던 거야?”
유종찬은 입을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게는 그 마음이 들린다.
[완전한 공감]은, 듣지 못할 이야기까지 듣게 해준다.
왜 이래 진짜. 그런 얘기 하기 싫다고. 좋은 분대장 되려고 노력했던 건 생각만 해도 웃기단 말이야. 시발, 내가 그렇게 될 줄 알았나. 애들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시발놈의 고문관 새끼가 멍청하게 수류탄 놓쳐서 하사 병신 만든 게 어떻게 내 탓이 되는데. 그게 왜 내 잘못인데. 군기 못 잡은 분대장 때문이라는 개소리 돈다는 걸 왜 소대장 입 통해서 들어야 되는데……? 그래, 내가 머저리 같았지. 그러면 안 돼. 아랫놈들한텐 선 딱 긋고 받아주지 말아야 돼. 이제와서 박 선생님한테 이런 소릴 떠들 필요가 없어……
‘에르메스’도 ‘주작 사나이’도, 악마의 소행은 아니다.
나쁜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한 방어기제일 뿐.
그렇기에 선민의식의 시작은 우월감이 아니다.
그저, 믿었던 만큼이나 커다랗게 자라난 상처일 것이다.
“종찬아. 유종찬. 고생했다.”
“……뭐 말입니까?”
“군대가 원인이었겠지? 그래서 멋진 사나이를 만들었겠지.”
“엇…… 뭡니까 진짜? 대체 뭔……?”
“이제는 괜찮아. 고립과 억압 속에서 다들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그런 곳이 아니잖아. 거기엔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아는 녀석들이 많았겠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해. 네 희생으로 구원받은 아이들이 훨씬 많을 거야. 그들은 행복해졌을 거고. 이제부터는, 선을 지워도 누구 하나 네 선을 넘지 않을 거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내 의무야. 날 믿어. 이제는 마음을 이야기해도 돼. 넌, 이제 그래도 돼.”
“아니…… 선생님, 진짜 뭡니까? 진짜 독심술입니까?”
“말했잖아? 나쁜 사람은 없다고. 너도 그렇다고 믿는 거야.”
“말도 안 돼……. 하, 진짜 말도 안 되네요.”
말처럼 황당하다는 투의 표정.
그렇지만 마음 쪽은 달랐다.
황량한 칼날 위에, 변화의 씨앗이 내려앉았다.
비가 내리면 그것이 자라 싹을 틔우리라.
나쁜 사람은 없다는 진실이 숫돌이 된다면.
유종찬이 붙잡으려 애썼던 사람 사이의 선은, 더는 선민의식의 예리함으로 상처를 헤집지 않을 것이다.
---
<후기>
죄송하게도 내일은 하루 휴재가 되겠습니다.
문고리가 망가져서 고양이방에 한참 갇힌 사건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58장도 28000자 정도 되네요.
7천으로 나눠도 4화 분량이라서 그렇게 연재할까 했는데, 편집점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모쪼록 2화 같은 1화로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월요일에 퀄리티 높은 분량으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