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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장 - 유서 깊은 용서 (3)
6월 24일 오전에, 나는 손바울과 함께 MBC를 찾았다.
긴 기다림의 끝이다.
이미 2화 분량까지 촬영을 마친 상황에서, 드디어 ‘나사없’의 1화 분량이 방송을 앞두고 있었다.
그 상황에 손바울이 나 대신 의기양양해졌다.
“흠. 마중 나와 있네요. 역시 선생님 클래스입니다.”
“건물이 복잡해서 작가 내려보낸다고 한 거잖아.”
“어쨌든 보통 출연진한테는 저렇게 안 하죠. 스타성이 입증된 선생님이라서 촐랑거리며 반길 확률, 100%입니다.”
막내작가 한소진이 촐랑거리며 달려오는 건, 그냥 성격이다.
스스로 한 대사로 그 점이 입증됐다.
“선생님! 헤헤. 바울이! 헤헤. 오늘 날씨 진짜 좋죠? 오시는 동안 드라이브 느낌 나셨죠? 그쵸? 아, 저도 나가고 싶어요.”
“회사에 꽤 오래 매여 계셨던 모양입니다.”
“네! 네, 진짜요! 아, 죽겠어요. 사전촬영이라도 따라가고 싶은데 막내는 안에서 사연 체크나 하라고…… 앗. 물론 그래도 괜찮아요. 언니들이 진짜 잘해주시거든요. 진짜로요.”
“예. 다른 작가들에게 이르지 않겠습니다.”
“헤헤……. 그래도 꼰마님하고 촬영하는 날이 제일 재밌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영식이네는 진짜 흥미진진했죠? 친구들 때리고 다닌다던 문제아가 선생님 앞에서는 완전 순한 양 돼가지고, 죄송해요 안 그럴게요 이러고.”
“소진 씨. 문제아는 없습니다. 문제행동만이 있을 뿐이지요.”
“아, 맞다. 죄송해요. 아무튼…… 바울이! 바울이 너는 계절학기 듣는댔나?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쁘네?”
“애 취급하지 마세요, 아줌마.”
“……선생님! 문제아 여기 있는 것 같은데요?”
“하하. 문제아까지는 아니겠지요.”
“헤헤. 아무튼 빨리 가요. 바울이, 사탕 먹을래? 자.”
“흠. 준다면 받죠.”
“아, 귀여워. 자 자, 많이 먹어.”
첫 촬영 때는 잔뜩 얼어 있었던 20대 중반의 막내작가.
그렇지만 18일의 F-21 케이스에서는 눈을 빛내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덕분에 내 매니저 역할로 동행했던 손바울과도 제법 친해진 듯했다.
반면 총책임자인 유종찬 쪽은……
트립크루 때부터 해서 벌써 세 번째 만나는 자리지만, 아직도 손바울의 존재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야, 넌 좀 나가 있어라. 회의 진행하려고 하잖아.”
“흠. 저는 여기 계신 선생님의-”
“바울아, 내가 얘기하마. 유 PD. 이 친구는 내…… 이렇게 말하면 부끄럽지만, 수제자예요. 기밀 유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동석하고 싶은데, 어려울까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뭐, 진행하죠. 우선은 다음번 케이스 얘긴데, 바로 C로 넘어가볼까 합니다.”
“C라는 건, 회사군요. 반응 보고 결정할 예정이었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마침 좋은 케이스가 나와서요. 당장 모레 촬영 들어갈 일정이지만, 놓치기 아까운 것 같습니다.”
그렇게 추후의 일정에 대해 20분쯤 논의가 오간 뒤.
마침내 조연출 한 명이 맥북을 들고 들어섰다.
“아, 왔네. 야, 넌 빨리 좀 못 오냐? 손님 기다리시게.”
“죄송합니다.”
편집실에서 밤을 새운 것이 다크서클에 드러나는 청년.
그런 이에게 수고했다는 한마디도 하기 어려울까 싶다.
조연출이라는 직급 자체가 연출자를 돕는다는 뜻이긴 하지만, 조력자에게 최소한의 감사인사는 해도 되지 않을까.
그야 외부인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다음 촬영지가 회사라는 점에서 마음이 복잡했다.
사실은 방송국이야말로 상담이 필요한 회사일 텐데.
유종찬 PD 등이 대단한 악인인 까닭은 아니다.
다만, 방송이라는 미디어는 시간과의 싸움.
사소한 실수에도 우려와 짜증이 뒤섞일 법했다.
밤샘편집을 불사한 조연출이 욕먹는 것이 그런 까닭이리라.
“자, 일단 편집본 보시죠. 방송까지 일곱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 지금 보시면서 지적할 거 해주셔도 됩니다. 영상 전반적인 건 무리지만 크리티컬한 오류는 수정할 시간이 있어요. 야, 넌 저기 가서 좀 자고 있어. 두 시간 준다.”
“아, 예…….”
심지어 또 일을 시키려는 모양.
그야 배우는 처지에 하나라도 더 경험해야 좋은 PD가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조연출의 표정 속 처연함이 못내 안타까웠다.
“밤새 일한 친구한테 또 일을 시켜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원래 본방 날은 이래요.”
“조연출이 한 명은 아니지 않습니까?”
“두 명 더 있는데, 하나는 사전촬영 나가 있고, 하나는 조모상입니다. 그럼 뭐 남은 사람들끼리 해나가야죠.”
가족상을 당해야 빠질 수 있는 시스템인가.
최근 유튜브의 급부상으로 방송국이 빠듯해졌다고 하더니, 그 영향이 개인들에게도 괴로움을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라도 짐을 줄여줘야지.
자막의 오류 정도에만 간결한 대안을 첨삭해주는 식으로 모니터링을 진행했다.
그 외에는 크게 지적할 부분이 없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괜찮네요. 저 가족이 네티즌에게 욕먹을 일은 없을 듯합니다. 편집을 잘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히히.”
전전반측하며 잠도 이루지 못하던 조연출은, 사소한 칭찬에 얼굴을 온통 빨갛게 물들였다
그간 이 정도 인사도 듣기 힘들었던 모양이지.
불만스런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유종찬을 잠깐 보다가, 그를 이끌고 흡연구역으로 이동했다.
마침 그도 사적으로 할 말이 있었다고 했다.
“이제 편집도 끝나가는 와중이니 하는 얘기지만…… 진짜 놀랐습니다. 그 가족이 그렇게 변할 수 있을 줄은.”
“하하. 우선 담배 태워요.”
“예…… 후우. 피우지도 않으시면서, 괜찮으십니까? 간접흡연 안 좋다고 말 많잖아요.”
“간접흡연이 위험해봐야 직접흡연만 하겠습니까. 애연가들도 백수를 누리는 세상에, 이 정도 담배 연기는 사실 우습지요.”
“그래도 비흡연자들은 다들 싫어하던데요.”
“인지심리학의 흥미로운 연구 분야 중 하나예요.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 흡연이 자연스러웠고, 공공장소 흡연조차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저 멀리서 담배 피우는 사람만 보여도 인상을 찌푸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흡연충이라는 말까지 대중적으로 유행하고 있지요. 왜일까요? 담배 냄새가 그새 몇 배로 지독해졌을 리는 없는데.”
“그야, 유해하다는 게 많이 알렸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불쾌하게 느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답.
알레르기 유발 항원 같은 것이다.
알레르기 쇼크가 견과류를 싫어하게 만들 수 있듯이, 사회적인 인지도식 역시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들곤 한다.
거의 대부분 혐오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그렇습니다. 실내에서 담배 피우는 어른들에게 큰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던 과거도,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흡연자까지 범죄자 취급하는 현대도, 결국 개인의 자유의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회가 인지를 만들고 그것이 감정을 만들지요. 유 PD도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제가요? 어떤……?”
“사적으로 아는 누군가가 밤새 일을 도와줬다면, 유 PD는 분명 결과물에 상관없이 감사한 마음을 내비쳤겠지요. 그렇지만 조연출에게는 오히려 늦었다고 비난하더군요.”
“아, 그건 저, 상황이 다르죠.”
“압니다. 방송국이라는 사회 속에 있는 조연출은 다르지요. CP는 신속 정확을 강요하고, AD는 PD가 비난만 퍼부어도 감수합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는 젊더라도 꼰대가 됩니다.”
“아니 제가, 꼰대까지는 아닙니다. 안 갈구면 안 돼요.”
“예. 이신웅 씨도 동일한 이야기를 하셨지요.”
“으…….”
바로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보면, 역시 이해가 빠른 친구.
한마디 정도만 보태주면 될 듯했다.
“앞서 말한 흡연 중, 소위 길빵을 생각해보지요. 이쪽은 주변에 피해를 주는 나쁜 행동이 맞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해소되는 것이 좋겠지요. 그래서인지 요즘 젊은 친구들은 흔히 기침을 하고 손사래를 치며 불쾌감을 표시합니다. 건강을 침해받은 피해에 대한 방어기제일 텐데…… 개인적은 위안은 되겠지만, 해당 흡연자에게는 변화가 생길까요?”
“뭐 그냥, 신경도 안 쓰지 않을까요?”
“변화를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말로 한다고 먹힐 것 같지도 않은데. 아니 제가, 매번 저희 집 앞에서 담배 피우는 고딩이 있어서 한번 훈계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침을 칵 뱉고 가더군요. 그런 것들은 뭘 어떻게 해도 답이 없어요.”
“하하. 그렇게 생각하는 채로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F-19 케이스가 저런 후일담을 맞은 이유를요.”
유종찬은 미간에 내천자를 만든 채 한참 고민했다.
그렇지만 내가 떠날 때까지도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해, 전혀 개운하지 못한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MBC를 벗어나 집으로 향하는 길.
손바울이 그답게 퉁명스런 소릴 했다.
“PD들이 문제 많다더니, 저래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거군요. 선생님께서 진리를 알려주시려는데 고집을 부리다니.”
“내가 무슨 진리까지야 알겠니.”
“아십니다. 하여튼 PD들이 문제예요. Personal Disorder 같은 직군이죠. 욕먹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부 PD들이 범법과 차별주의적 표현 등으로 지탄을 받은 사건들은, 사실 그들 개개인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내용보다 숫자에만 집착하는 업계의 생리.
편집권을 오롯이 한 사람에게 귀속시키는 권위주의.
시청률만 잘 내면 윗선에 불려갈 일 없는 그 직책이야말로, 군대만큼이나 무서운 Personal Disorder의 산실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유종찬은 변할 것이다.
NBSC의 상담사인 나와 오래도록 함께할 예정이기에.
우선은, 내일 예능국장에게 칭찬을 듣지 않을까 싶었다.
「유종찬 PD : 후아 벌써 5% 찍었습니다」
「유종찬 PD : 선공개영상 조회수도 급증하고 있어요」
「유종찬 PD : 심상치않네요 오늘」
그런 호들갑 속에서 가족과 쇼파에 앉았다.
딸애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뭔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런 딸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얘, 너 집중 안 해? 아빠 첫 방송 지금 시작하잖아?”
“아니, 첫방이니까 홍보하고 있는 거거든? 하지 마?”
“그래? 음, 흠. 그러면…… 열심히 해.”
그녀답지 않게 딸에게 말리는 건, 안절부절못하는 심리 탓.
긴장하지 말라고 손을 꼭 잡아줬다.
그리고 마침내 화면에 내 얼굴이 나타났다.
교수들의 목소리와 함께.
[꼰마를 아냐고요? 제가 아는 상담사 중 최고였어요. 하하. 물론 아직은 부족하지. 그렇지만 곧 최고가 될 겁니다.]
[꼰마 박대민은 그런 사람입니다. 상담을 미워하던 의사마저 그 의미를 인정하도록 만드는. 좋은 상담사예요.]
[박대민 그 친구는…… 말하자면 상담을 위해 태어난 사람일세.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어. 타이틀부터 보란 말이야. 나쁜 사람은 없다. 이게 말이 되나? 난 이렇게 생각하네. 현대에 성인이 존재한다면, 박대민이야말로 그 부류일 것이라고.]
……내 얼굴에 금칠들을 해주셨네.
그 뒤는 선공개 영상으로 나갔던 연예인들의 후일담.
주민성이 나왔을 때는 딸애가 참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천수연의 미소를 보면서는 아내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참 대단도 하셔. 연예인들도 죽고 못 사네?”
“음. 그 정도는 아닌데. 고맙다고 연락을 해야 되겠어.”
“스톱. 하지 마. 내담자와 다중관계를 만들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웠어?”
“어…… 그것도 영화 대사였지?”
“후후. 다음에 같이 봐. 도박중독 상담하려면 알아둬야지.”
“나도 나도! 나도 타짜 보고 싶어!”
“지수는 더 크면. 넌 어서 폰으로 홍보나 해.”
보편적인 가정 교정 프로그램과는 색깔이 다른 오프닝 시퀀스에 이어서, 마침내 F-19 케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형제가 허구한 날 싸운다는 주민들의 제보.
준영이는 매일 게임 얘기만 한다는 친구들의 제보.
그 뒤에 상황실의 전문가들이 등장한다.
[게임중독 케이스긴 하지만, 가족역동이 궁금하구만.]
[아무래도 그렇겠죠? 과몰입에는 원인이 있을 테니까요.]
[정신병리학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게임이라는 게 흥미진진한 매체기는 해도, 학교에 숨어들 정도면 얘기가 달라요.]
이후 관찰카메라 내용과 집단상담과 개별상담이 송출되는 동안, SNS에는 저 콩가루집안 혼내줘야 마땅하겠다는 정의의 목소리들이 넘쳐났다.
「엄마 갈비뼈를 부러뜨렸다고?? 와 뭔 개새끼냐」
「메이플 존나쳐하네 왜하필내가하는겜이야」
「노트북 비번 부모는 몰랐대 ㅋㅋㅋㅋㅋㅋㅋㅋ」
「하 부모도 노답이다 총체적난국」
「아 장남 미쳤냐고 찐발암이네」
「저런집은 상담이아니라 입원이필요한듯 ㅋㅋㅋ」
그러던 반응이 변화한 것은 20분쯤 뒤.
평상 위에 앉은 가족들이, 관찰카메라를 확인하면서였다.
[숙자 씨? 식사하는 동안 늘 성적 이야기만 하시네요.]
[저렇게 하려던 게 아닌데…… 어쩜 좋아…….]
[신웅 씨. 아들들 방에서 차남을 없는 사람 취급하셨어요.]
[크흠. 좀 보기 안 좋긴 하네요.]
[준일 군. 타임랩스로 빨리 돌렸는데, 어떤 느낌이죠?]
[……얌전히 게임하는 애한테 제가 눈치를 줘요.]
[준영 군은?]
[엄마가…… 저렇게 오래 보고 가는 줄, 몰랐어요.]
조금씩 포근해지는 가정의 분위기.
이후 행동교정을 진행하면서는, 양숙자가 눈물을 흘리고, 이신웅이 이준영의 등을 어루만져주기도 했다.
이준일도 멋쩍은 표정으로나마 동생의 손을 잡았고.
흐뭇한 변화였지만, SNS 반응은 좋지 않았다.
「갑자기 왜저런대? 방금전까지 욕하다가」
「머임 꼰마가 암말도 안했는데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PD가 악편했나」
계기 없는 변화는 의심스러워 보이기 마련이다.
저대로 방송을 마무리한다면, 앞부분의 문제행동들은 악마의 편집 아니었냐는 의문이 확산됐을 법했다.
하지만 유종찬은 시청자의 마음을 잘 아는 PD.
양숙자가 차남의 손을 쥐고 미안하다 말하는 장면 뒤에, 내가 마이크 없이 네 가족과 마주하던 영상을 넣었다.
「가정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비밀상담」
「그들은 이날 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
「열흘 뒤 찾아간 각자의 자리에서 들어봤습니다」
21일 촬영된 후일담 분량이 붙는다.
택시 운전석에 앉은 이신웅이 그 시작.
[글쎄 나는…… 그랬어요. 사실은 쪽팔렸어요, 애들 보기가. 이런 일 하는 것도 그렇고…… 애들이라도 나보다 잘되길 바랐던 거지. 그랬는데 방법이 좀 틀렸었나봐. 내가 애들을 망치고 있었더라고요. 그걸 그 선생님이 알려줬어요.]
식당의 양숙자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냥 애들이, 나쁜 길로 안 빠지길 바랐던 거죠. 근데 그런 생각으로 하는 말들이 오히려 애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는 거는 몰랐어요. 정말, 그 선생님 없었으면 어쨌을지…….]
친구들에 둘러싸인 이준일도.
[박대민 쌤이 뭐라고 했냐고요? 별 얘기 안 했는데. 생각하게 해줬어요 그냥. 제가, 되게 한심한 형이라는 거요. 동생 잘되라고 잔소리한 게 아니라, 제가 그냥 화풀이를 하고 있었더라고요. 준영이가 그걸 받아준 거 같더라고요.]
[어떤 부분을 받아줬어?]
[……제 잘못이요. 전 아무거나 다 지적하고 그랬는데, 준영이는…… 저한테 그렇게 안 했어요. 그거 알려주셨어요.]
운동장에서 큰 눈을 끔뻑거리는 이준영도.
[그냥…… 그런 얘기였어요. 용서하는 얘기요.]
[용서? 가족들을 용서해주라는 그런 얘기였어?]
[예? 아뇨. 걍…… 벌써 용서한 거라고 알려줬어요. 그냥 밉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래서 가족들 다 멀리 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미움보다 사랑이 더 컸대요.]
양가감정은 보편적인 심리.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은, 늘 염려와 불안에 뒤덮인다.
용서라고 해서 순수로 가득한 순백색만은 아니다.
그저 증오보다 호의가 조금 더 클 뿐.
그렇기에 때로 우리는 용서를 굴종으로 오해한다.
미움이 있음에도 표현하지 않는다며, 겁쟁이라 비난한다.
안타까운 착각이지.
어느 누구의 마음에나 두 마리 늑대가 있다.
사회적 인지도식은 미워하는 늑대를 살찌우지만, 우리는 소신의 선택을 통해서 사랑하는 늑대를 살찌울 수 있다.
용서란 마음속 증오의 늑대를 밀어내는 일.
아프고 괴롭고 미운 감정은 여전하나, 그 감정에 휘둘리지는 않은 채, 마음의 초원을 싱그럽게 물들이는 일이다.
그렇기에 용서 역시 양가감정.
때로 가장 미워해야 할 이를 용서하고, 가장 사랑해야 할 이를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
저 가족에게는, 그 이야기를 해줬다.
평상 위의 마지막 시퀀스.
날씨만큼 따뜻해진 가족들과 별을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이건 사담인데, 전 큰 죄를 용서받은 적이 있습니다.]
[……가족들한테요?]
[아뇨. 남한테요. 서로 마주보고 대화 나눠본 적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저 도와줄 수 있었는데 도와주지 못했던…… 그런 친구지요. 그 친구가 자살하기 전에 유서를 남겼어요. 미안하다고. 자기 시체를 발견해서 괴로워질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스스로를 죽일 정도로 끔찍한 미움 속에서…… 그 친구는 사랑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용서를 받아본 저는, 남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준영이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엄마아빠와 형을 사랑했어요. 지속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가족을 미워하지 않았지요. 그러니까 사랑해주세요. 그거 하나면 모든 문제가 해소될 테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제 딸이 준영이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아 뭐야! 내가 왜! 내가 쟤보다 뭐가 못한데!”
“아, 음. 미안하다, 지수야. 말실수였어. 용서해주렴.”
“아니잖아! 진짜잖아! 아빠 미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마음은 사랑뿐이다.
그러니 미워할 수 없는 딸이었다.
20여 년 전으로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용서로, 나는 내 아이의 울분마저도 사랑했다.